게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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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마리는 고대 중국의 축국에서 유래된 일본의 전통 구기 종목으로, 헤이안 시대에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며 발전했다. 규칙은 모든 선수가 협력하여 공을 공중에 유지하는 것이며, 팔과 손을 제외한 머리, 발, 무릎, 등을 사용하여 공을 찰 수 있다. 게마리는 경쟁보다는 우아함과 기술을 중시하며, 특정 신사에서 계절 행사로 공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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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마리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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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구기 |
| 특징 | 비경쟁 |
| 개요 | |
| 목적 |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 |
| 플레이어 수 | 일반적으로 8명 |
| 복장 | 아스카 시대의 복장 |
| 역사 | |
| 기원 | 나라 시대 (7세기) |
| 유래 | 중국의 축구, 추쥐 |
| 발전 | 일본에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 |
| 영향 | 가마쿠라 시대의 사무라이들에게 인기 있는 활동 |
| 현재 | 신사에서 의례적인 활동으로 행해짐 |
| 경기장 | |
| 이름 | 가쿠리 |
| 형태 | 정사각형 |
| 크기 | 약 15m x 15m |
| 특징 | 네 모서리에 각각 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소나무)가 심어져 있음 |
| 공 | |
| 이름 | 마리 |
| 재료 | 사슴 가죽 |
| 관련 용어 | |
| 아리 | 공을 차는 기술 |
| 가리 | 공을 받는 기술 |
| 쓰마사키 | 발끝으로 공을 차는 것 |
| 미기 | 오른발 |
| 히다리 | 왼발 |
| 우시로 | 뒤 |
| 메 | 앞 |
2. 역사
게마리(蹴鞠)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축국(蹴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축국은 기원전 300년 전 전국 시대 제나라에서 군사 훈련의 일종으로 시작되었다.[10] 한나라 시대에는 12명의 팀이 공을 쟁탈하여 "구문"에 넣은 수를 겨루는 유희로 확립되어 궁정 내에서 대규모 경기가 행해졌다. 당나라 시대에는 규칙이 다양해져 구문이 양 팀 사이의 그물 위에 설치되거나 경기장 한가운데에 하나 설치되기도 했다. 이 시기 공은 깃털을 채운 것에서 동물의 방광에 공기를 넣은 잘 튀는 것으로 바뀌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팀 대항 경기로서의 측면이 엷어져 한 명 또는 집단으로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공을 차는 기술을 선보이는 놀이가 되었다. 『수호전』의 가오추는 축구의 재능으로 출세했다.[10] 몽골 제국의 원정에 따라 동유럽에도 전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명나라 초기에는 귀족이나 관료가 축구에 열중하여 일을 소홀히 하거나, 창기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익혀 손님을 끄는 구실로 삼는 것이 눈에 띄자 축구 금지령이 내려져 여성들의 유희가 되었다. 청나라에서의 금지령으로 중국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는 산둥성 즈보시 린쯔구에 있는 축구 박물관에서 학예원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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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는 644년에 덴지 천황과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공놀이를 하며 친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2] 이는 게마리가 아닌 지팡이를 사용하는 하키와 유사한 공놀이였을 수 있다. 게마리라는 단어에 대한 가장 초기의 확실한 기록 증거는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여진 연례 행사 기록인 ''혼초 게츠료''에서 발견된다. 기록에 따르면 게마리 경기는 701년 5월에 행해졌다.[3]
11세기 헤이안 시대 말기에 귀족들의 게임으로 인기를 얻었으며,[3] 12세기에 후지와라노 나리미치와 난바 요리스케는 게마리의 달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후지와라노 나리미치는 자신의 게마리 실력이 향상되기를 바라며 구마노 혼구 대사에 50번 이상 방문했으며, 스사노오가 모셔진 신사 앞에서 '우시로 마리'(뒤로 공 차기)라는 게마리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은 발 뒤꿈치로 수행하는 keepie uppie이다.[3]

12세기 말과 13세기 초 가마쿠라 시대에 정점에 달했으며, 미나모토노 요리이예의 통치 기간 동안 게마리 경기가 자주 열렸다. 이로 인해 다양한 새로운 규칙, 장비 및 기술이 확립되었고, '게마리도'(蹴鞠道)라는 구조화된 예술 형태가 완성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게마리는 무사 계급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게마리가 와카(일본 시) 및 다도와 같은 다양한 다른 공연 예술과 함께 무사 계급이 숙달하도록 권장되는 예술 형식 중 하나로 여겨졌다.[3][4]
센고쿠 시대에는 스모가 인기를 얻고 게마리는 쇠퇴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킨나이(간사이 지방)의 초닌 계급에 의해 행해지는 게임으로 다시 인기를 얻었다.[3]
과거에는 교토에 거주하는 귀족들이 1월 4일 신년 행사의 연례 행사로 게마리를 하곤 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가 다양한 전통 일본 문화를 잃게 할까 두려워하여, 1903년에 황실 보조금을 기부하여 게마리를 보존하기 위한 협회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게마리는 시모가모 신사, 시라미네 진구, 후지모리 신사, 탄잔 신사, 히라노 신사 및 고토히라궁과 같은 간사이 지방 주변의 신사에서 계절 행사로 공연된다. 시라미네 신사의 셋샤(보조 신사) 중 하나로 모셔진 세이다이묘진(精大明神)은 ''마리''(게마리 공)의 가미이며, 따라서 주로 축구를 포함한 다양한 구기 경기의 선수들에게 존경받는다.[3]
조지 H. W. 부시는 일본 방문 중 이 경기를 했다.[5][6]
2. 1. 한국의 축국
2. 2. 일본의 게마리
게마리는 아스카 시대 말기부터 나라 시대 초기에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12] 644년(고교쿠 천황 3년), 나카노오에 황자가 호코지에서 공을 찬 것을 계기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친분을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11][12] 다만, 이 '공을 차다'라는 행위가 게마리였는지, 아니면 하키나 폴로와 같은 다른 경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2][13] 701년 6월 15일(몬무 천황의 다이호 원년 5월 5일)에 게마리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4][12]헤이안 시대에는 궁정 경기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엔기 연간 이후 게마리에 대한 기록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에 마리바(鞠場)라는 전용 연습장을 설치하고 매일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세이 쇼나곤은 저서 《마쿠라노소시》에서 "게마리는 품위는 없지만 재미있다"고 언급했다.[15]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차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신체 훈련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16]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 계급에게도 확산되었으며, 다양한 새로운 규칙, 장비 및 기술이 확립되었고, ''게마리도''(蹴鞠道)라는 구조화된 예술 형태가 완성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통치 기간 동안 ''게마리'' 경기가 자주 열렸다.[3] 무로마치 시대에는 예능으로 완성되었고, 와카 및 다도와 함께 무사 계급이 익혀야 할 예술 형식 중 하나로 여겨졌다.[3][4]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게마리를 즐겼다.
센고쿠 시대에는 스모가 인기를 얻으면서 ''게마리''는 쇠퇴했지만,[3] 에도 시대에는 킨나이(간사이 지방)의 ''초닌'' 계급에 의해 다시 인기를 얻었다.[3] 이하라 사이카쿠는 『사이카쿠 오리도메』에서 상인들의 게마리 열기를 풍자하기도 했다. 에도 후기에는 곡예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쇠퇴했으나, 메이지 천황의 지원으로 1903년에 게마리 보존회가 설립되어 명맥을 유지했다.[8] 오늘날 ''게마리''는 시모가모 신사, 시라미네 진구, 후지모리 신사(:ja:藤森神社), 탄잔 신사, 히라노 신사 및 고토히라궁과 같은 간사이 지방 주변의 신사에서 계절 행사로 공연된다.[3] 조지 H. W. 부시는 일본 방문 중 이 경기를 했다.[5][6]
3. 규칙 및 진행 방식
게마리는 경쟁이 없는 스포츠로, 모든 선수가 협력하여 하나의 공을 공중에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7] 참가자들은 '마리아시'라고 불리며,[21] 팔과 손을 제외한 머리, 발, 무릎, 등, 팔꿈치(규칙에 따라)를 사용하여 공을 찰 수 있다. '마리'라고 불리는 공은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지며, 안쪽에 털이 있고 바깥쪽에 가죽이 위치한다. 공은 보리알로 채워 모양을 잡고, 가죽이 굳으면 곡물을 제거하고 말 가죽으로 꿰맨다.
''게마리''는 약 6~7제곱미터의 평평한 땅에서 진행된다.[2] 경기장은 '카카리'(懸) 또는 '마리츠보'(鞠壺)라고 불리며, 네 모퉁이에 벚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소나무를 심는다.[21] 이 나무들은 '모토키'(원목) 또는 '시키노키'(식목)라고 불리며, 격구를 차 올리는 높이의 기준이 된다.[21] 뿌리가 없는 나무는 '키리타테'라고 한다.[21]
한 팀은 4명, 6명, 8명 등으로 구성되며, 지름 7~8치의 격구를 여러 번 "구두(쿠츠)"를 신은 발로 계속 차는 것을 겨룬다. 단체전과 개인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얼마나 오래 차는지가 중요하다.
시작할 때는 '오키마리'라고 하여, 하인이 네 번째 나무 아래에서 비스듬히 나아가 중앙에서 3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릎을 꿇고 격구를 중앙에 놓는다. 선수들은 신분에 따라 자리에 앉고, '켄'이라고 하는 첫 번째 상석은 사범가에게 양보한다. 8번째 선수가 격구를 중앙에서 3보 정도 떨어진 곳에 놓고, 7번째 선수에게 차 넘겨준다. 7번째 선수부터 1번째 선수까지 순서대로 공을 돌리고, 다시 8번째 선수에서 1번째 선수('켄')에게 넘겨준다. '켄'은 '아게마리'라고 하여 공을 높이 찬다.[22] 아게마리를 하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다.[22]
경기는 "서의 격구", "파의 격구", "급의 격구" 순서로 진행된다. "서의 격구"는 워밍업, "파의 격구"는 자유롭게 차기, "급의 격구"는 작은 원에서 공을 차는 횟수를 늘리는 단계이다. 선수들은 '채우고 열기'라는 움직임을 통해 공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협력하며, 각자 두세 발로 차는 '일단 삼족' 작법을 따른다.
격구에 사용되는 공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속은 비어 있다. 사슴 가죽 2장을 이어 붙여 만들고, 겹치는 부분은 "허리 가죽" 또는 "쿠쿠리"라고 한다. 20세기 말에는 격구 입수가 어려워져 격구 보존회 회원이 제법을 연구하여 생산하게 되었고,[8] 2018년에는 생가죽으로부터의 "반유"라는 구전 제법을 복원하여 제작하고 있다.
연습 방법으로는 공을 사용하지 않는 "공중 훈련", 문설주 높이에서 공을 매달아 차는 "매달아 차기", 작은 공을 사용하는 "구석 소형 공", 통을 머리 위에 매달고 공을 차 넣는 "통 차기" 등이 있었다.[16]
4. 복장 및 도구
게마리는 경쟁이 없는 스포츠로, 모든 선수가 협력하여 하나의 공을 공중에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 선수들은 팔과 손을 제외한 머리, 발, 무릎, 등, 그리고 규칙에 따라 팔꿈치를 사용하여 공을 공중에 유지할 수 있다.[1] '마리'라고 불리는 공은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지며, 털은 안쪽으로, 가죽은 바깥쪽으로 향하게 한다. 공 안에는 보리알을 채워 모양을 잡고, 가죽이 굳으면 곡물을 제거하고 말 가죽으로 꿰매어 완성한다.[1] 공을 차는 사람을 '마리아시'라고 부르며, 좋은 마리아시는 받는 사람이 마리를 쉽게 제어하여 공중에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넘겨준다.
게마리는 약 6~7제곱미터의 평평한 땅에서 진행된다.[2] 현대의 게마리 복장은 헤이안 시대의 의상을 연상시키는 카리기누(ja:狩衣)라는 전통 의상을 착용하며, 에보시라는 모자를 쓴다.[7]
5. 주요 인물
헤이안 시대 후기의 후지와라노 나리미치는 게마리의 명인으로, '게마리의 성인'으로 불릴 정도였다.[23] 나리미치는 족구 실력 향상을 위해 천일 동안 매일 족구 연습을 한다는 맹세를 했고, 이를 이룬 날 밤 꿈에 나타난 세 원숭이 모습의 족구 정령에게서 족구의 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23] 순덕 천황의 『금비초』에는 나리미치의 기예에 대해 "말세 사람들은 믿기 어려운 기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요미즈데라 난간 위에서 공을 차며 왕복했다거나, 종자들의 머리나 어깨 위에서 리프팅을 했지만 종자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등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24]
헤이안 시대 후기의 난바 요리스케는 난바류 게마리의 시조인 난바 소초의 할아버지이다. 가마쿠라 시대의 아스카이 마사쓰네는 아스카이류 게마리의 시조이다.
6. 현대의 게마리
메이지 천황의 노력으로 명맥이 유지되어 21세기에도 애호가들에 의해 게마리가 이어지고 있다.[13] 주류의 작법은 8명 또는 6명이 행하며, 오른 다리의 무릎을 펴고 "아리", "야", "오"라고 구령을 외치면서 엄지발가락의 뿌리를 공에 맞춘다.[13] 승패는 겨루지 않고, 상대가 차기 쉽도록 공을 보낸다.[13] "싸움의 공"은 그날의 목표 횟수를 정해 도전하는 차기 방식이다.[13] 시간 제한은 없지만, 해가 지거나 피곤해지면 처마의 신호로 그만둔다.[13] 공을 차 올리는 높이는 약 4.5미터가 이상적이며, 찰 때의 소리(음)나 공의 회전(색)의 좋음도 추구한다.[13] 공 터를 등지고 뒤로 차는 것은 불작법으로 여겨지지만, 현대의 매달린 나무가 없는 넓은 공 터에서는 어쩔 수 없는 작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3] 복장은 갓, 마리미즈히키, 마리하카마, 가모구쓰를 착용한다.[13] 게마리의 공은 직경 19센티미터 전후, 무게 100~110그램으로 축구공보다 한 바퀴 작다.
귀족들에 의한 우아한 유희가 되기 전의 게마리는, 원래는 승패를 다투는 구기였다고 해석하여 상대 진지에 공을 떨어뜨리는 것을 겨루는 "만엽 게마리"가 NPO 법인 나라 21세기 포럼에 의해 복원되었다.[13]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 시라미네 신궁, 단잔 신사, 곤피라 궁, 후지모리 신사, 히라노 신사, 아위 신사, 미나세 신궁 등 일본 각지의 신사에서 게마리를 행사로 진행한다.[13]
7. 한국 축구와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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