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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 (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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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빈 박씨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나인으로,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비행을 지적하다가 의대병으로 인해 맞아 죽었다. 이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종1품 귀인으로 진봉되었고, 정1품 빈으로 추증되어 경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녀는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과 청근옹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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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 (장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경빈 박씨
작위귀인, 빈
별칭귀인 박씨(貴人 朴氏)
배우자조선 장조
자녀은전군, 청근옹주
빙애(氷愛)
왕조조선
아버지미상
어머니미상
친척사위 홍익돈, 양 손자 풍계군
출생일미상
출생지조선
사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761년 음력 1월
사망 원인살해
국적조선
종교미상

2. 생애

경빈 박씨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나인 출신으로,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이름은 빙애였다.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했으나, 당시 윗사람의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시되었기에 영조는 이에 분개하였다.[1]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 은전군청근현주를 낳았다.[3]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던 박씨는 그의 비행을 자주 지적하다가, 사도세자의 의대병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사도세자의 비행은 나경언의 고변으로 영조에게 알려졌고, 결국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이했다.[5] 노론 벽파은전군이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은전군은 역모로 몰려 사사된다.

2. 1.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다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1] 빙애는 인원왕후전의 침방 나인이었고, 사도세자는 그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겼으나, 결국 영조가 알게 되었다.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청근현주(淸瑾縣主, 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3] 그의 이름인 빙애(氷愛) 혹은 빙애(彬愛)는 한중록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 2. 사도세자와의 갈등과 죽음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1] 빙애는 인원왕후전의 침방 나인이었고, 사도세자는 그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겼으나, 결국 영조가 알게 되었다.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청근현주(淸瑾縣主, 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3] 그의 이름인 빙애(氷愛) 혹은 빙애(彬愛)는 《한중록》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던 박씨는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사도세자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고 한다.

박씨는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사도세자의 옷을 시중드는 도중에 사도세자의 의대병이 발병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우물에 빠질 듯 사랑하더니 왜 죽였냐고 다그치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비롯한 사도세자의 수많은 비행은 1년 뒤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5월 22일 나경언에 의해 낱낱이 영조에게 보고되었고[4], 결국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5] 사도세자에게 빙애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은전군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 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된다.

2. 3. 노론 벽파의 주목과 은전군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1]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청근현주(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3]

빙애가 사도세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은전군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 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된다.

2. 4. 사후

영조는 사도세자가 박씨를 타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도세자를 불러, 눈에 넣을 듯이 사랑하더니 왜 갑자기 때려 죽였느냐며 그 사람이 강직하여 너의 비행에 대해 간언하다 이로 인해 죽었을 것이라고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억울하다고 울며 항변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에게 광증이 있어 그렇게 했다고 답하였다.

1774년(영조 50) 7월 9일, 1774년판 선원속록(璿譜續錄)에 실리게 된다.

훗날 대한제국이 개창되고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종(莊宗)의 묘호를 받음에 따라,[6] 궁녀 신분이었던 박씨도 9월 12일 종1품 귀인으로 진봉되었다.[7] 2년 뒤인 1901년(고종 38년, 광무 5년) 10월 17일 정1품 으로 추증되어 '''경빈'''(景嬪)의 작호를 받았다.[8]

3. 가족 관계

경빈 박씨는 남편 장조(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은전군은 1777년(정조 원년) 음력 8월 11일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일당이 붙잡히자[9] 이 해 음력 9월 24일 사사되었다.[10] 은전군평양 조씨 조성의 딸과 혼인하였다.[9] 딸은 청근옹주이며, 당은첨위에 책봉된 홍익돈과 혼인하였다.

구분이름비고
남편장조 (사도세자)1735년 ~ 1762년
아들은전군1759년 ~ 1777년, 조성의 딸과 혼인
청근옹주1758년 ~ 1835년, 홍익돈과 혼인


4. 대중 매체에서의 경빈 박씨

MBC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 한중록 (1989년, 최진실)과 SBS 드라마 비밀의 문 : 의궤 살인사건 (2014년, 김유정, 윤소희)에서 경빈 박씨를 다루었다.

4. 1. 드라마

참조

[1] 뉴스 세종과 소이의 러브라인, 사실상 '패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7-21
[2] 문헌 《조선왕조실록》영조 90권,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11월 11일(기해) 4번째 기사
[3] 웹인용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경빈박씨〉 https://web.archive.[...] 2012-07-21
[4] 문헌 《조선왕조실록》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
[5] 뉴스 한중록 http://www.anyangilb[...] 안양일보 2012-07-21
[6] 문헌 《조선왕조실록》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9월 1일(양력) 3번째 기사
[7] 문헌 《조선왕조실록》고종 39권, 36년(1899 기해 / 대한 광무(光武) 3년) 9월 12일(양력) 1번째 기사
[8] 문헌 《조선왕조실록》고종 41권, 38년(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10월 17일(양력) 1번째 기사
[9] 문헌 《조선왕조실록》정조 4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8월 11일(갑진) 1번째 기사
[10] 문헌 《조선왕조실록》정조 4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9월 24일(병술)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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