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 (장조)
1. 개요
경빈 박씨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나인으로,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비행을 지적하다가 의대병으로 인해 맞아 죽었다. 이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종1품 귀인으로 진봉되었고, 정1품 빈으로 추증되어 경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녀는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과 청근옹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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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사망 -
새뮤얼 리처드슨
새뮤얼 리처드슨은 18세기 영국의 소설가이자 인쇄업자로, 서간체 소설의 선구자이며, 『파멜라, 또는 미덕의 보상』, 『클라리사』, 『찰스 그랜디슨 경의 역사』 등의 작품으로 18세기 영국 소설 발전에 기여했고, 도덕적 가치와 여성의 지위에 대한 통찰, 섬세한 심리묘사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
1761년 사망 -
신후담
신후담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성리학자로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서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했고,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서학변》을 저술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인 공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조선 후기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
살해된 사람 -
정인보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학자, 시조 작가, 교육자로, 민족주의 역사관과 ‘얼’ 사상을 형성하고, 연세대학교 강사, 동아일보 논설위원, 국학대학교 학장,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사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살해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
18세기 한국 사람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세기 한국 사람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2. 생애
경빈 박씨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나인 출신으로,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이름은 빙애였다.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했으나, 당시 윗사람의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시되었기에 영조는 이에 분개하였다.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 은전군과 청근현주를 낳았다.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던 박씨는 그의 비행을 자주 지적하다가, 사도세자의 의대병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사도세자의 비행은 나경언의 고변으로 영조에게 알려졌고, 결국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이했다. 노론 벽파는 은전군이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은전군은 역모로 몰려 사사된다.
2.1.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다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 빙애는 인원왕후전의 침방 나인이었고, 사도세자는 그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겼으나, 결국 영조가 알게 되었다.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과 청근현주(淸瑾縣主, 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 그의 이름인 빙애(氷愛) 혹은 빙애(彬愛)는 한중록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2. 사도세자와의 갈등과 죽음
경빈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 빙애는 인원왕후전의 침방 나인이었고, 사도세자는 그를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겼으나, 결국 영조가 알게 되었다.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과 청근현주(淸瑾縣主, 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 그의 이름인 빙애(氷愛) 혹은 빙애(彬愛)는 《한중록》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던 박씨는 사도세자의 비행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사도세자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고 한다.
박씨는 사도세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사도세자의 옷을 시중드는 도중에 사도세자의 의대병이 발병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우물에 빠질 듯 사랑하더니 왜 죽였냐고 다그치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비롯한 사도세자의 수많은 비행은 1년 뒤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5월 22일 나경언에 의해 낱낱이 영조에게 보고되었고, 결국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도세자에게 빙애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은전군은 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 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된다.
2.3. 노론 벽파의 주목과 은전군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이름은 빙애였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
이후 박씨는 종6품 수칙(守則)에 봉해졌고(수칙은 후궁이 아니라, 궁녀의 품계 중 하나이다),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전군과 청근현주(훗날의 청근옹주)를 낳았다.
빙애가 사도세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노론 벽파에서는 그의 아들 은전군 찬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은전군은 노론에 의해 택군의 대상이 되었지만, 1777년 7월과 8월 노론 벽파 측에서 매수한 자객이 체포되면서 적발당하고, 은전군 역시 역모의 수괴로 몰려 1778년 사사된다.
2.4. 사후
영조는 사도세자가 박씨를 타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도세자를 불러, 눈에 넣을 듯이 사랑하더니 왜 갑자기 때려 죽였느냐며 그 사람이 강직하여 너의 비행에 대해 간언하다 이로 인해 죽었을 것이라고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억울하다고 울며 항변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에게 광증이 있어 그렇게 했다고 답하였다.
1774년(영조 50) 7월 9일, 1774년판 선원속록(璿譜續錄)에 실리게 된다.
훗날 대한제국이 개창되고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종(莊宗)의 묘호를 받음에 따라, 궁녀 신분이었던 박씨도 9월 12일 종1품 귀인으로 진봉되었다. 2년 뒤인 1901년(고종 38년, 광무 5년) 10월 17일 정1품 빈으로 추증되어 경빈(景嬪)의 작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
경빈 박씨는 남편 장조(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은전군은 1777년(정조 원년) 음력 8월 11일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일당이 붙잡히자 이 해 음력 9월 24일 사사되었다. 은전군은 평양 조씨 조성의 딸과 혼인하였다. 딸은 청근옹주이며, 당은첨위에 책봉된 홍익돈과 혼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