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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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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드 마스는 프랑스 출신의 군인으로, 골웨이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1670년 도버 밀약 체결을 위해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연락 역할을 수행했으며, 튀렌 원수 휘하에서 네덜란드 침공 전쟁에 참전했다. 위그노였던 그는 낭트 칙령 폐지 이후 잉글랜드로 망명하여 윌리엄 3세의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아일랜드 최고사령관을 역임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동맹국을 위해 싸웠으나 알만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임하고 귀국했다. 그는 아일랜드 사법 경을 지냈으며, 172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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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앙리 드 마쉬, 루비니 후작, 초대 골웨이 백작, 미카엘 달(1659-1743) 작품
앙리 드 마쉬, 루비니 후작, 초대 골웨이 백작, 미카엘 달(1659-1743) 작품
출생일1648년 4월 9일
출생지프랑스, 파리
사망일1720년 9월 3일
사망지햄프셔 스트래턴 파크
소속프랑스 군대
잉글랜드 군대
영국 군대
복무 기간알 수 없음
최종 계급중장
서훈골웨이 자작 (1692년)
포탈링턴 남작 (1692년)
골웨이 백작 (1697년)
기타 이력그레이트브리튼의 추밀원 일원
아일랜드 사법경
군사 경력
참전 전투프랑스-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
오흐림 전투 (1690년)
란덴 전투 (169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바다호스 포위전 (1705년)
알칸타라 포위전 (1706년)
알만사 전투 (1707년)
라 구디나 전투 (1709년)
1715년 재커바이트 반란

2. 생애

앙리 드 마스는 파리에서 태어나 튀렌 휘하의 프랑스 군에서 복무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678년 루이 14세찰스 2세에게 보낸 비밀 협상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영국과의 연락을 담당했고, 낭트 칙령 폐지 이후 1690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 휘하로 망명하여 프랑스 재산을 몰수당했다. 1691년 어흐림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1692년 아일랜드 최고사령관이 되었으며, 골웨이 자작과 포탈링턴 남작 작위를 받고 아일랜드 영지를 받았다. 1693년 네르빈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1694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사보이 공국을 지원하고 왈도파를 구원했다. 1695년 사보이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자 이탈리아 반도는 중립화되었고, 골웨이의 군대는 네덜란드로 철수했다. 1697년 골웨이 백작으로 승진한 후, 1701년까지 아일랜드 사법 경으로서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이후, 1704년 포르투갈 주둔 동맹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스페인을 공격했지만, 1707년 알만사 전투에서 베릭 공작에게 대패했다. 이후 새로운 군대를 모아 다시 전투에 참여했으나, 라 구디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은퇴했다.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 동안 아일랜드 치안 판사로 파견되었고, 의회는 그에게 연간 1500GBP의 연금을 지급했다. 1718년 프랑스 병원의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프랑스에서의 경력

앙리 드 마스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비니 후작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외교관이었고, 토머스 라이어스슬리 경의 아내 레이첼(Rachel)과 친척 관계였다.[1] 그는 군인이 되어 튀렌 휘하의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며 튀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 1678년 루이 14세찰스 2세에게 보낸 비밀 협상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영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1]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그노의 부사령관이 되었고, 낭트 칙령 폐지 때 루이가 그 직책을 유지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1] 1690년, 많은 동료 위그노들과 함께 망명하면서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의 군대에 소장으로 입대하여 프랑스 영지를 몰수당했다.[1]

1691년 7월 어흐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692년 아일랜드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1] 그해 11월 그는 '''골웨이 자작'''(Viscount Galway)과 '''포탈링턴 남작'''(Baron Portarlington) 작위를 수여받고, 아일랜드에서 몰수된 영지를 대부분 인정받았다.[1] 1693년 네르빈덴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 1694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사보이 공국을 돕기 위해 영국이 보낸 군대의 지휘관으로 보내졌으며, 왈도파를 구원하기도 했다.[1] 1695년 사보이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자 이탈리아 반도는 중립화되었고, 골웨이의 군대는 네덜란드로 철수했다.[1]

2. 2. 잉글랜드에서의 활약: 아일랜드와 대륙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대 루비니 후작의 아들이자 프랑스 외교관이었고, 토머스 라이어스슬리 경의 아내 레이첼(Rachel)과는 친척 관계에 있었다. 그는 군인이 되어 튀렌 휘하의 프랑스 군대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튀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마 그가 영국과의 연락에 선택된 것은 1678년 루이 14세찰스 2세에게 보낸 비밀 협상에서 업무를 꼼꼼하게 챙겨 까다로운 임무를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해낸 것 때문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위그노 출신의 장군이었지만, 낭트 칙령의 폐지(Revocation of the Edict of Nantes)로 인해 루이에게 관직 사퇴를 제출했지만 그는 관직을 계속 유지했다. 1690년에 그와 위그노 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국외로 망명을 시도했고, 그는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 휘하에 들어가 그를 섬기면서 소장이 되었고, 그에 따른 처벌로 프랑스에 있던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1]

1691년 7월 어흐림 전투(battle of Aughrim,)에서 특출한 활약을 보여 1692년 그는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1월 그는 '''골웨이 자작'''(Viscount Galway)과 '''포탈링턴 남작'''(Baron Portarlington) 작위를 수여받고, 아일랜드에서 빼앗은 영지를 대부분 인정받았다.[1] 1693년 네르빈덴(Neerwinden)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 1694년 그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당시 프랑스에 반대한 사보이 공국을 돕기 위해 영국이 보낸 군대의 지휘관으로 보내졌다. 또한 이 시기 왈도파(Vaudois)의 고통을 구제해 주었다. 1695년 사보이가 편을 바꾸자, 이탈리아 반도는 중립이 되었고, 골웨이의 군대는 네덜란드에서 철수했다. 1697~1701년까지 아일랜드 역사에서 위기의 시대 때 '''골웨이 백작'''(1697년 그는 이 계급으로 승진하였다)은 실제 아일랜드의 정무를 지배할 수 있어 아일랜드의 사법 경(Lord Justice of Ireland)이 되었다.

2.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691년 윌리엄 전쟁 중 오흐림 전투에서 공을 세워 1692년 아일랜드 영지를 받고 골웨이 자작 및 포터링턴 남작에 서임되었다(뤼비니 후작위는 프랑스에 의해 몰수).[1] 대동맹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 겸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를 따라 대륙으로 건너가 프랑스군과 교전, 1693년 네르빈덴 전투에서 철수를 지원했다. 1697년 골웨이 백작에 서작되었고, 같은 해부터 1701년까지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1704년 쇨렌베르크 공작 메이나드 쇨렌베르크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아 포르투갈에 상륙, 스페인 공격을 시도했지만,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에게 저지당했다. 1706년 알칸타라를 점령하고 스페인으로 진출하자 카탈루냐카를 6세발렌시아의 피터버러 백작 찰스 모돈트도 호응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와 베릭에게 마드리드를 탈환당하고, 피터버러의 이탈과 병력 분산으로 열세에 놓였다.

1707년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베릭에게 대패하여 스페인 대부분을 빼앗기고 동맹군이 불리해졌다.[1] 1708년 잉글랜드군 지휘권은 제임스 스탠호프에게 넘어갔고, 1709년 사임 후 귀국했다.

2. 4. 은퇴 이후

1707년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베릭 공작에게 대패한 후, 골웨이는 새로운 군대를 간신히 모았고 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 정부에 의해 지휘권을 다시 임명받았다.[1] 그는 다시 한번 전투에 참여했고, 전투에서 개인적인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알렉상드르 메트르, 베이 후작은 라 구디나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이후 그는 활동적인 삶에서 은퇴했다.[1]

그의 마지막 봉사는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 동안 아일랜드의 치안 판사 중 한 명으로 파견되었을 때였다. 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재산 대부분이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되었고, 모든 프랑스 영지는 오래전에 몰수되었기 때문에, 의회는 그에게 연간 1500GBP에 달하는 연금을 투표했다. 그는 미혼으로 사망했다. 아일랜드 귀족 작위는 그와 함께 사라졌지만, 프랑스 후작 작위는 그렇지 않았다.[1]

세인트 메리 교회, 미첼데버의 기념관


북런던의 프랑스 병원은 1718년에 골웨이를 초대 총재로 하여 설립되었다.

3. 유산



골웨이는 미혼으로 사망하면서 아일랜드 귀족 작위는 소멸되었지만, 프랑스 후작 작위는 유지되었다.[1] 골웨이의 재산 대부분은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되었고, 프랑스 영지는 오래전에 몰수되었기 때문에 영국 의회는 그에게 연간 1500GBP의 연금을 지급했다.[1]

1718년, 북런던의 프랑스 병원이 대인주로 설립되었으며, 골웨이는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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