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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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3세는 165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오라녜 공이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었다. 그는 1672년 네덜란드 총독으로 선출되었고, 1688년 명예 혁명을 통해 제임스 2세를 몰아낸 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윌리엄 3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팽창을 막고, 잉글랜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대동맹 전쟁을 이끌었고, 잉글랜드 은행 설립을 지원하는 등 경제 발전에 힘썼다. 1702년 낙마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앤 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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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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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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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윌리엄 3세, 윌리엄 2세, 빌럼 3세 |
원어 이름 | 네덜란드어: Willem Hendrik, 영어: William III |
직책 |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
추가 직책 | 오라녜 공, 네덜란드 총독 |
재위 | 오라녜 공: 1650년 11월 4일 - 1702년 3월 8일 |
대관식 | 1689년 4월 11일 |
출생일 | 1650년 11월 4일 (신식: 11월 14일) |
출생지 |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 비넨호프 |
사망일 | 1702년 3월 8일 (향년 51세, 신식: 3월 19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켄징턴궁 |
매장일 | 1702년 4월 12일 |
매장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
배우자 | 메리 2세 (1677년 결혼, 1694년 사망) |
종교 | 개신교 |
가문 | 오라녜나사우가 |
아버지 | 빌럼 2세 판 오라녜 |
어머니 | 메리, 프린세스 로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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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 즉위 | 1689년 2월 13일 (잉글랜드 의회)/1689년 4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 |
전임자 | 제임스 2세 |
후임자 | 앤 |
공동 통치자 | 메리 2세 (1689-1694) |
오라녜 공 전임자 | 빌럼 2세 판 오라녜 |
오라녜 공 후임자 | 요한 빌럼 프리소 (논쟁 중) |
네덜란드 총독 전임자 | 제1차 스타트허우더 부재 시대 |
네덜란드 총독 후임자 | 제2차 스타트허우더 부재 시대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나르덴 공성전 본 공성전 세네프 전투 그라베 공성전 마스트리흐트 공성전 카셀 전투 생드니 전투 9년 전쟁 잉글랜드 침공 보인 전투 리머릭 공성전 스텐케르케 전투 란덴 전투 나뮈르 공성전 |
2. 유년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제거)
2. 1. 출생과 가족
빌럼 3세는 1650년 11월 4일(그레고리력 14일)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에서 태어났다.[2] 그는 빌럼 2세 판 오라녜와 프린세스 로열 메리 사이의 외아들이었으며, Willem Hendrik|빌럼 헨드릭nl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메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찰스 1세의 장녀이자, 훗날 왕위에 오르는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누이였다.
빌럼이 태어나기 8일 전, 아버지 빌럼 2세는 천연두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빌럼은 태어나자마자 오라녜 공 작위를 계승했다.[3] 출생 직후, 빌럼의 이름을 짓는 문제를 두고 어머니 메리와 친할머니 아말리아 졸름스브라운펠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메리는 자신의 오빠 이름을 따 '찰스'로 짓기를 원했지만, 아말리아는 아기가 장차 총독(Stadhouder)이 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가문의 전통적인 이름인 '빌럼'을 강력히 주장했다.[4] 결국 아기는 빌럼 헨드릭으로 명명되었다.
아버지 빌럼 2세는 유언장에 아내 메리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사망 전까지 서명하지 못해 법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5] 이에 1651년 8월 13일, 호헤 라드 판 홀란트 엔 질란트(대법원)는 빌럼의 후견 권리를 어머니 메리, 친할머니 아말리아, 그리고 고모 루이제 앙리에타의 남편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공동으로 갖도록 판결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두 여성 사이에서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라녜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후견인으로 선택되었다.
빌럼의 외증조부인 빌럼 1세(침묵공)를 시작으로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남프랑스의 오랑주, 네덜란드, 독일 중서부의 나사우에 영지를 둔 네덜란드 최고 명문가였다. 빌럼 1세 이후 가문은 대대로 공화국의 여러 주에서 총독직을 맡아왔다. 그러나 빌럼 3세의 아버지 사후, 오라녜 가문의 총독직 세습에 반대하는 홀란트 주의 요한 드 위트를 비롯한 공화파 세력은 빌럼 3세의 총독직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무총독 시대로 접어들었다.
어머니 메리는 아들 빌럼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때로는 몇 년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으며 네덜란드 사회와 거리를 두었다.[6] 1660년, 잉글랜드 왕정복고를 축하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던 어머니 메리는 그곳 화이트홀 궁전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17] 메리는 유언으로 오빠인 찰스 2세에게 아들 빌럼의 후견을 부탁했고, 이는 향후 빌럼의 지위를 둘러싼 네덜란드 공화파와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19] 어머니 사후, 빌럼의 교육과 후견 문제는 오라녜 가문 지지파와 공화파 사이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22]

2. 2. 어린 시절과 교육
빌럼 3세는 1650년 11월 4일 네덜란드 공화국의 헤이그에서 태어났다.[2] 그는 네덜란드식 이름인 Willem Hendriknl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오라녜 공 빌헬름 2세와 메리 공주의 외아들이었다. 어머니 메리는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장녀이자, 훗날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되는 두 왕의 누이였다.
빌럼이 태어나기 8일 전, 아버지 빌럼 2세가 천연두로 사망했기 때문에, 빌럼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라녜 공의 지위를 계승했다.[3] 그의 이름을 두고 어머니 메리와 할머니 솔름스-브라운펠스의 아말리아 사이에 즉각적인 갈등이 생겼다. 메리는 자신의 오빠 이름을 따 '찰스'라고 짓고 싶어했지만, 할머니 아말리아는 손자가 장차 총독이 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빌럼'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4] 빌럼 2세는 유언장에 아내 메리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서명하지 못한 채 사망하여 법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5] 결국 1651년 8월 13일, ''Hoge Raad van Holland en Zeeland'' (고등법원)은 빌럼의 어머니 메리, 할머니 아말리아, 그리고 고모부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공동 후견인이 되도록 판결했다.
어머니 메리는 아들 빌럼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때로는 몇 년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으며, 의도적으로 네덜란드 사회와 거리를 두었다.[6] 빌럼의 초기 교육은 몇몇 네덜란드 가정교사와 영국 출신의 월버그 하워드[8], 스코틀랜드 귀족 여성인 안나 맥켄지 여사[7] 등이 담당했다. 1656년 4월부터는 칼뱅주의 설교자이자 콘트라-레몬스트란트 신학자 히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의 추종자인 코르넬리스 트리글란트에게서 매일 개혁 교회 교리를 배웠다.[8]
빌럼을 위한 이상적인 교육 방식은 그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이었던 콘스탄틴 휘헨즈가 쓴 짧은 논문 "오라녜 공 전하의 양육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a nourriture de S. H. Monseigneur le Prince d'Orange'')에 제시되었다.[9] 이러한 교육을 통해 빌럼은 자신이 오라녜나사우가의 역사적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된 도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10]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랑예파의 지도자이자 여러 주의 총독직과 군 통수권자의 잠재적 계승자로 여겨졌다. 이는 그의 증조부 침묵공 빌럼, 종조부 마우리츠, 조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그리고 아버지 오라녜 공 빌헬름 2세로 이어지는 오라녜 공작 가문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다.[11][12][13][14][15]
1659년 초부터 빌럼은 레이던 대학교에서 윤리학 교수 헨드리크 보르니우스의 지도 아래 7년간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았지만, 공식적으로 학생으로 등록하지는 않았다.[16] 델프트의 프린센호프(''Prinsenhof'')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한스 빌럼 벤팅크를 포함한 소규모 개인 수행원과 새로운 가정교사인 삼촌 프레데릭 나사우 드 주일렌스타인(오라녜 공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사생아)을 곁에 두었다.
한편, 오라녜 가문의 총독직 세습에 반대했던 홀란트 주의 대총독 요한 드 윗과 그의 삼촌 코르넬리스 드 그라프는 주 정부가 빌럼의 교육을 맡아 미래의 국가 직무 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홀란드 주는 1660년 9월 25일 빌럼의 교육을 담당하기로 결정했다.[17]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오래가지 못했다. 1660년 12월 23일, 빌럼이 열 살 때, 어머니 메리는 잉글랜드 왕정 복고로 왕위에 오른 오빠 찰스 2세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의 화이트홀 궁전에 머물던 중 천연두로 사망했다.[17] 메리는 유언으로 찰스 2세에게 아들 빌럼의 후견을 부탁했고, 찰스 2세는 홀란드 주에 빌럼의 교육에 대한 간섭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19] 홀란드 주는 찰스 2세를 달래기 위해 1661년 9월 30일 이 요구를 수용했다.[20] 이 시기에 빌럼의 가정교사였던 주일렌스타인은 찰스 2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으며, 빌럼에게 편지를 써서 찰스 2세에게 총독직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21] 어머니의 사망 이후, 빌럼의 교육과 후견 문제는 왕당파 지지자들과 공화정 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다.[22]
네덜란드 공화 정부는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려 했으나,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 찰스 2세가 평화 조건 중 하나로 조카 빌럼의 지위 향상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21] 이에 홀란드 주는 1666년, 빌럼이 16세가 되자 그를 공식적으로 정부의 피후견인이자 "국가의 자녀"로 선포하는 대응책을 내놓았다.[21] 주일렌스타인을 포함한 모든 친(親)영국 성향의 궁정 인사들은 빌럼의 주변에서 축출되었다.[21] 빌럼은 드 윗에게 주일렌스타인을 남겨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23] 공화국의 최고 실권자였던 요한 드 윗은 직접 빌럼의 교육을 맡아 매주 국가 현안에 대해 가르쳤고, 정기적으로 함께 레알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23]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가문의 영광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성장한 빌럼 3세는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157]
3. 네덜란드 총독 및 잉글랜드 왕 즉위
윌리엄 3세는 아버지 빌럼 2세 사후 시작된 총독 공백기 동안 오라녜 가문의 복권을 노리는 세력과 공화정을 유지하려는 세력 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성장했다. 요한 드 비트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 세력은 영구 칙령 등을 통해 윌리엄의 총독직 및 군 통수권 장악을 견제했으나,[26] 1672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주도한 네덜란드 침공 전쟁(재앙의 해)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홀란트, 젤란트 등 주요 주의 총독으로 추대되었으며, 정적인 드 비트 형제는 민중 봉기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이로써 그는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끌게 된다.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프랑스의 팽창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윌리엄 3세는 유럽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1677년 그의 사촌이자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왕위 계승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158] 1685년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가 즉위하고 친가톨릭 정책을 추진하자 잉글랜드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1688년 제임스 2세에게 아들이 태어나 가톨릭 왕조 계승 가능성이 높아지자,[71] 잉글랜드의 주요 휘그당 및 토리당 인사들은 윌리엄 3세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했다.[70]
이에 윌리엄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며, 제임스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유혈 사태 없이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명예혁명으로 불린다. 이후 1689년 임시 의회는 권리선언을 통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공동 군주로 추대했다.[82][86] 이는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윌리엄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이 되는 극적인 변화였으며,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1. 네덜란드 총독


빌럼 3세의 아버지 빌럼 2세가 사망한 후, 네덜란드 공화국의 대부분 주에서는 총독(Stadtholder) 자리를 비워두었다. 이는 제1차 총독 공백기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올리버 크롬웰이 이끌던 잉글랜드 연방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끝낸 웨스트민스터 조약에서 오라녜 가문 인물의 총독 임명을 금지하는 비밀 조항(배제법)을 요구하기도 했다.[24] 잉글랜드 왕정 복고 이후 이 조항은 무효화되었지만,[25] 1660년 빌럼 3세의 어머니 메리와 할머니 아말리아가 그를 미래의 총독으로 지명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25]
1667년, 빌럼 3세가 18세가 되자 오라녜당은 그를 총독과 총사령관 자리에 앉히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공화정을 이끌던 국가당의 지도자 요한 드 비트는 이를 막기 위해 하를렘의 카스파르 파겔 등과 협력하여 홀란트 주 의회가 영구 칙령을 통과시키도록 했다. 이 칙령은 한 사람이 총사령관과 총독직을 겸임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26] 그럼에도 빌럼 3세 지지자들은 그의 위상을 높이려 노력했고, 1668년 9월 젤란트 주는 그를 '제1귀족'으로 임명했다.[28] 1670년에는 홀란트 주가 총독직 자체를 폐지했고 다른 4개 주도 이를 따랐다.[26] 하지만 드 비트는 빌럼 3세가 국방 예산을 관리하는 국무원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는 타협안을 내놓았고, 빌럼 3세는 1670년 5월 31일 완전한 투표권을 가진 의원으로 국무원에 합류했다.[31][32]
1670년 11월, 빌럼 3세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스튜어트 왕가가 오라녜 가문에 진 빚의 일부라도 받아내려 했지만, 찰스 2세는 지불 능력이 없었다.[33] 이때 찰스 2세는 프랑스와 비밀리에 맺은 도버 밀약을 통해 네덜란드를 공격하고 빌럼 3세를 꼭두각시 군주로 세우려 했으나, 독실한 칼뱅주의자이자 네덜란드 애국자인 조카의 모습을 보고 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33] 빌럼 3세는 또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외삼촌 찰스 2세와 요크 공 제임스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34]
1672년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Rampjaar'(재앙의 해)로 기록되었다. 프랑스와 동맹국인 잉글랜드, 뮌스터, 쾰른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이는 네덜란드 침공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시작이었다. 솔베이 전투에서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함대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 육군은 헬데를란트와 위트레흐트를 빠르게 점령하며 암스테르담까지 위협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중의 불만은 폭발하여 빌럼 3세의 총독 취임을 요구하는 봉기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요한 드 비트와 그의 형 코르넬리스 드 위트는 1672년 8월 헤이그에서 성난 군중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제1차 총독 공백기는 막을 내리고 빌럼 3세는 홀란트, 젤란트 등 주요 주의 총독으로 추대되었다.

총독이 된 빌럼 3세는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이끌었다. 1673년, 그는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그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와 같은 동맹군 장군과 협력하여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본을 점령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군을 네덜란드 영토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전쟁의 주 무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일대)로 옮겨갔다. 빌럼 3세는 콩데 공, 룩셈부르크 공과 같은 프랑스의 명장들과 맞서 싸웠다. 스네프 전투(1674), 카셀 전투(1677), 생드니 전투(1678) 등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며 프랑스의 완전한 승리를 저지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미힐 데 레이터 제독의 활약으로 잉글랜드의 네덜란드 상륙 시도가 좌절되었고, 1674년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와 별도의 평화 조약을 맺어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중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빌럼 3세는 1677년 11월 4일 런던에서 자신의 사촌인 메리와 결혼했다. 메리는 당시 요크 공이었던 제임스의 장녀였다. 이 결혼은 찰스 2세의 중재로 성사되었으며,[55] 빌럼 3세는 이를 통해 장차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을 높이고, 찰스 2세의 친프랑스 정책을 견제하고자 했다.[54] 메리는 결혼 후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이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58] 빌럼 3세는 엘리자베스 빌리어스라는 정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정부를 둔 외삼촌들과는 달리 비교적 절제된 사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59]

결국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쟁 지속에 부담을 느끼고 1678년 나이메헌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은 침략 이전의 영토를 모두 회복했으며, 빌럼 3세는 네덜란드를 지켜낸 영웅이자 유럽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수호자로 떠올랐다.[60]
그러나 프랑스와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빌럼 3세는 루이 14세가 유럽의 만국왕(Universal Monarch)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고, 루이 14세 역시 빌럼 3세를 성가신 호전적인 인물로 여겼다. 루이 14세는 나이메헌 조약 이후에도 Réunion 정책을 통해 영토 확장을 계속했고, 1685년에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프랑스 내 위그노(프로테스탄트)들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많은 위그노 난민들이 네덜란드로 피신해 왔다.[61] 이러한 루이 14세의 팽창주의와 종교적 불관용 정책에 맞서, 빌럼 3세는 1686년 신성 로마 제국, 스웨덴, 스페인, 독일 제후국들과 함께 반프랑스 동맹인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결성을 주도했다.[62]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찰스 2세 사후 1685년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빌럼 3세는 처음에는 장인이자 외삼촌인 제임스 2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65] 제임스 2세가 친가톨릭 정책을 강화하고 관용 선언 등을 통해 가톨릭 신자의 권리를 신장시키려 하자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66] 빌럼 3세는 제임스 2세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참여하기를 바랐지만, 제임스 2세는 그럴 의사가 없었다.[65] 1687년 11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부인인 모데나의 메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잉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빌럼 3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가톨릭 왕자가 태어날 경우, 프로테스탄트인 메리 대신 왕위를 계승하여 가톨릭 왕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67] 같은 달, 빌럼 3세는 잉글랜드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제임스 2세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며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68]

1688년 6월, 모데나의 메리가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낳자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71] 같은 달, 제임스 2세의 관용 선언에 반대한 7명의 성공회 주교들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국왕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72] 이 사건 직후, 훗날 '불멸의 7인'으로 불리는 잉글랜드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빌럼 3세에게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70] 빌럼 3세는 프랑스가 다른 전선에 묶여 네덜란드를 공격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69] 1688년 가을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했다. 그의 네덜란드 총독으로서의 역할은 이제 잉글랜드의 왕위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3. 2. 잉글랜드 왕 즉위

1677년 빌럼 3세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의 조카이자 자신의 사촌인 메리 2세와 결혼했다. 메리는 찰스 2세의 동생이자 훗날 제임스 2세가 되는 요크 공 제임스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정략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이후 빌럼 3세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158]
1685년 장인이자 숙부인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후, 그의 노골적인 친가톨릭 정책과 전제 정치 강화 시도는 잉글랜드 내 성공회 신자들과 의회의 큰 반발을 샀다. 빌럼 3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임스 2세에 반대하는 영국의 주요 프로테스탄트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관계를 맺었다.
1688년 6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부인인 모데나의 메리가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낳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 아들의 탄생은 가톨릭 왕조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을 높였고,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잉글랜드 지배층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다.[71] 같은 시기, 제임스 2세의 관용 선언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7명의 성공회 주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국왕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72]
결국 1688년 6월 30일, 7명의 주교가 무죄 판결을 받은 날, 휘그당과 토리당의 주요 인사 7명(이른바 "불멸의 7인")은 빌럼 3세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자유와 종교를 수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70] 빌럼 3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대동맹 전쟁으로 독일 문제에 묶여 네덜란드를 즉시 공격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잉글랜드 침공을 결심하고 준비에 착수했다.[69]
1688년 11월 5일, 빌럼 3세는 약 463척의 함선과 4만 명의 병력(네덜란드 정규군, 위그노 자원병, 영국 망명자 등 포함)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서부 브릭섬에 상륙했다.[74][75][76] 그는 "영국의 자유와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수호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의 상륙 소식에 제임스 2세의 지지 기반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존 처칠과 같은 주요 군 지휘관들과 귀족들이 빌럼 3세에게 합류했고,[77] 제임스 2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12월 11일 프랑스로 망명하려다 붙잡혔으나,[78] 빌럼 3세의 묵인 하에 12월 23일 최종적으로 프랑스로 떠났다.[78][79] 이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명예혁명이라 불린다. 빌럼 3세는 무력으로 잉글랜드를 성공적으로 침공한 마지막 인물이다.[80]
1689년 1월, 빌럼 3세는 임시 의회(Convention Parliament)를 소집하여 제임스 2세의 망명 이후 국정 운영 방안을 논의하게 했다.[81] 빌럼 3세는 왕위 계승 서열상 아내 메리가 자신보다 앞섰지만, 단순히 왕배로서가 아니라 직접 왕으로서 통치하기를 원했다.[82] 토리당 일부에서는 메리를 단독 군주로 추대하려 했으나, 빌럼 3세는 이를 거부하며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압박했고, 메리 역시 남편과 공동으로 통치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85]
휘그당이 다수를 차지한 하원은 왕위가 공석이며 프로테스탄트 군주가 필요하다는 데 빠르게 합의했다. 토리당이 다수였던 상원과의 협상 끝에, 1689년 2월 13일 의회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기초가 된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을 통과시켰다. 이 선언은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고 규정하고,[86] 제임스 2세의 어린 아들이 아닌 빌럼 3세와 메리 2세를 공동 군주로 추대했다.[82] 다만, 국왕의 실권 행사는 빌럼 3세가 단독으로 행사하도록 명시했다.[82]
윌리엄 3세(빌럼 3세)와 메리 2세는 1689년 4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런던 주교 헨리 콤프턴의 주관 하에 공동으로 대관식을 올렸다.[87]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샌크로프트는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인정하지 않아 대관식 집전을 거부했다.[87]
스코틀랜드에서도 1689년 3월 스코틀랜드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제임스 2세의 강압적인 태도와 달리 윌리엄 3세가 보낸 화해적인 편지가 여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4월 11일 삼부회는 제임스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상실했다고 선언했다.[88]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제안받았고, 5월 11일에 이를 수락했다.[89]
윌리엄 3세는 비국교도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부여하는 1689년 관용법의 통과를 지지했으나,[81] 이 법은 그의 기대와 달리 가톨릭 신자나 반삼위일체론자 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87] 1689년 12월에는 영국 헌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인 권리장전이 정식 법률로 통과되었다.[90] 이 법은 의회의 동의 없는 법률 정지 및 폐지 금지, 의회 승인 없는 과세 금지, 청원권 보장, 평화 시 의회 동의 없는 상비군 유지 금지, 프로테스탄트 신민의 무기 소지권 보장, 의회 선거 및 토론의 자유 보장, 과도한 보석금 및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 금지 등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와 신민의 권리를 명시했다.[81] 윌리엄 3세는 이러한 제약에 불만이 있었지만 의회와의 충돌을 피하고 법을 준수하기로 했다.[91] 권리장전은 또한 왕위 계승 순서를 명확히 하여, 윌리엄과 메리 사후에는 메리의 동생인 앤 공주와 그 자녀들에게, 그 이후에는 윌리엄 3세가 재혼하여 얻을 수 있는 자녀들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규정했으며, 가톨릭 신자 및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 자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했다.[90]
4. 통치 기간 주요 사건
1672년은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람프야르"(재앙의 해)로 알려진 해였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영국, 뮌스터, 쾰른의 침공을 받았다. 영국-프랑스 함대가 솔베이 해전에서 저지되었음에도, 프랑스군은 6월에 겔더란트와 위트레흐트 지방을 빠르게 점령했다. 6월 14일, 빌헬름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로 후퇴했으며, 홀란트 주는 네덜란드 수계의 범람을 명령했다.[40]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전쟁이 끝났다고 여기고 네덜란드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41] 공화국 중심부까지 진격한 프랑스 대군은 네덜란드 전역에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민심은 당시 실권자였던 요한 드 윗과 그의 지지자들에게 등을 돌렸다.[41]
7월 4일, 홀란트 주는 빌헬름을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는 5일 뒤 취임 선서를 했다.[42] 다음 날, 영국 찰스 2세의 특사인 얼링턴 경은 빌헬름에게 항복을 종용하며, 그 대가로 단순한 공무원인 총독이 아닌 홀란드의 주권 공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43] 빌헬름이 이를 거절하자, 얼링턴은 공화국의 멸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43] 빌헬름은 "이것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마지막 참호에서 그것을 지키다 죽는 것입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7월 7일, 수계 범람이 완료되어 프랑스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았고, 7월 16일에는 제일란트 주도 빌헬름에게 총독직을 제안했다.[42]
요한 드 윗은 6월 21일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어 직무 수행이 어려워졌다.[44] 8월 15일, 빌헬름은 찰스 2세의 편지를 공개했는데, 이 편지는 드 윗 파벌의 공격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5] 이에 격분한 민중은 8월 20일 헤이그에서 드 윗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 드 윗을 오라녜파 민병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했다.[45] 이후 빌헬름은 많은 네덜란드 관리들을 자신의 추종자들로 교체했다.[46] 빌헬름이 드 윗 형제 살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는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 시도를 막았고, 헨드릭크 페르호프 등 일부에게는 금전적 보상을, 요한 반 반쳄과 요한 키비트 등 다른 이들에게는 고위직을 주었다.[47] 이는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빌헬름은 영국과 프랑스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며 스페인, 브란덴부르크,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672년 11월, 그는 프랑스 보급선을 위협하기 위해 마스트리흐트로 군대를 이끌었다.[48] 1673년 네덜란드의 상황은 개선되었다. 북부에서는 나사우-지겐의 요한 모리스와 한스 빌럼 판 아일바의 방어로 뮌스터와 쾰른 군대가 철수했고, 빌헬름은 수계를 넘어 나르덴을 탈환했다. 11월에는 네덜란드-스페인 연합군이 뮌스터와 쾰른 영토로 진격하여 프랑스의 주요 보급 기지였던 본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 해방된 위트레흐트, 겔더란트, 오퍼라이셀 주에 대해 강경파는 이들을 정복지로 취급하자고 주장했으나 빌헬름은 거절했다. 대신 그는 이들 주의 의회 대표를 새로 임명할 특별 권한을 얻었다.[49] 1674년 4월 위트레흐트 주는 그를 세습 총독으로 임명했고,[50] 1675년 1월 겔더란트 주는 겔더른 공작과 쥐트펜 백작 칭호를 제안했다.[51] 그러나 다른 주들의 반발로 빌헬름은 이 제안들을 거절하고 대신 겔더란트와 오퍼라이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51] 이러한 권력 집중 현상에 대한 우려는 바뤼크 스피노자가 1677년 그의 정치론에서 군주에 대한 시민 통제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52]
전쟁의 주 무대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옮겨갔다. 1674년 세네프 전투에서 빌헬름이 이끄는 연합군은 콩데의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만 입고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빌헬름은 제국군 사령관 드 수슈의 비협조를 비난했고, 이후 오데나르데 점령 시도가 실패하자 드 수슈는 해임되었다. 빌헬름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의 작전을 포기하고 그라브를 공격하여 10월 27일 함락시켰다. 당시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전쟁 지속 여부를 두고 강력한 상업 중심지인 암스테르담과 빌헬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암스테르담은 상업적 이익이 확보되면 전쟁을 끝내길 원했지만, 빌헬름은 프랑스를 장기적인 위협으로 보고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말기, 양측 모두 소모전에 지쳐갔다. 1677년 프랑스는 발랑시엔, 캉브레, 생토메르를 점령하는 공세를 성공시켰고, 연합군은 카셀 전투에서 패배했다. 프랑스는 영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수세로 전환했다.
1676년부터 나이메헌에서 평화 회담이 진행되었고, 1677년 11월 빌헬름이 영국 찰스 2세의 조카이자 사촌인 메리와 결혼하면서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1678년 3월 영국-네덜란드 방어 동맹이 체결되었으나 영국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늦어졌다. 루이 14세는 이 틈을 타 이프르와 겐트를 점령한 후, 8월 10일 네덜란드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53] 조약 체결 3일 후인 8월 13일, 빌헬름은 생드니 전투에서 룩셈부르크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몽을 지켜냈다. 9월 17일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평화 조약도 체결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훈련된 군대 중 하나로 거듭났지만,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덜란드는 동맹국 스페인의 군사력이 더 강하기를 기대했었다.
4. 1. 대동맹 전쟁 (9년 전쟁)
1686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다시 유럽 침략 야욕을 보이자,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 등과 함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한 대항 자세를 강화했다. 1688년 루이 14세가 독일의 팔츠 선제후령을 침공하면서 대동맹 전쟁(9년 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해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1689년 잉글랜드를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이후 대동맹으로 불림)에 참여시켰다.[109] 이로써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강력한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다.윌리엄 3세는 전쟁 기간 동안 영국에 오래 머물지 않고, 매년 봄 네덜란드로 건너가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가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108]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아내인 메리 2세가 잉글랜드를 통치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윌리엄 3세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졌다. 메리 2세는 윌리엄 3세가 돌아오면 언제나 그에게 통치권을 넘겼으며, 이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110]

전쟁 초기, 루이 14세는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를 지원하여 아일랜드에 원정군을 파견했다(윌리엄 왕조 전쟁). 이에 윌리엄 3세는 1690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건너가 보인 강 전투에서 제임스 2세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후 아일랜드는 긴켈 장군에 의해 1691년 리머릭 조약으로 평정되었다.[111] 그러나 같은 해 대륙 전선에서는 발덱이 이끄는 연합군이 플뢰뤼스 전투에서 룩셈부르크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692년 라오그 해전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면서 연합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은 사라졌다.[111] 하지만 육지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 윌리엄 3세는 1692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스텐케르케 전투에서 패배했고, 낭시를 프랑스군에게 빼앗겼다.[112] 1693년에는 란덴 전투(넬르빈덴 전투)에서도 룩셈부르크 공작에게 패배했다. 그럼에도 윌리엄 3세는 이 전투들에서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혀 프랑스의 추가적인 대규모 공세를 어렵게 만들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휘그당이 의회에서 점차 우위를 차지하며 정부 운영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윌리엄 3세는 샌더랜드 백작의 조언을 받아들여 1694년 휘그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했는데(준토), 이는 영국 최초의 내각 형태로 평가받기도 한다. 의회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윌리엄 3세는 다시 대륙에서의 전쟁 수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1696년, 네덜란드의 드렌테주는 윌리엄 3세를 총독으로 인정했다. 같은 해, 자코바이트들이 제임스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윌리엄 3세를 암살하려는 음모(1696년 자코바이트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윌리엄 3세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다.[122] 의회는 음모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존 펜윅 경에 대해 단죄법을 통과시켰고, 그는 1697년 처형되었다.[123]
낭시 함락과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담으로 프랑스는 결국 평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697년 9월 20일, 레이스베이크 조약(리스위크 조약)이 체결되어 9년간의 대동맹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루이 14세는 윌리엄 3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고, 제임스 2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124] 또한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주요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허용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잃은 자코바이트는 이로써 윌리엄 3세 통치 기간 동안 더 이상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이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영국령과 프랑스령 식민지 간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이는 윌리엄 왕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 3세의 일생은 네덜란드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과 싸우는 데 바쳐졌다.[160]
4. 2. 스코틀랜드 문제
명예혁명의 영향은 스코틀랜드에도 미쳤다. 1689년 3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의회를 소집하였고, 4월에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자코바이트 세력의 반발도 있었다. 던디 백작 존 그레이엄이 하이랜드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같은 해 7월 진압되었다.1692년, 윌리엄 3세는 하이랜드 지방의 씨족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국무장관인 스테어 백작 존 달린플이 윌리엄 3세의 명령을 기한에 맞춰 전달하지 못한 맥도널드 씨족을 학살하는 글렌코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윌리엄 3세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경제 재건을 위해 1695년부터 파나마 지협을 거점으로 무역을 확장하려는 다리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결국 1700년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는 윌리엄 3세의 명성을 더욱 실추시켰으며, 스코틀랜드인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키워 이후 자코바이트 반란이 계속되는 배경이 되었다.[159]
4. 3. 경제 및 사회

윌리엄 3세는 통치 초기 휘그당과 토리당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정책을 선호했다.[98] 할리팩스 후작과 같은 온건파 인사가 초기에 신임을 얻었으나,[99] 의회 다수당이었던 휘그당은 정부 장악을 기대했지만, 윌리엄이 그 기회를 주지 않자 실망했다.[100] 이러한 균형 정책은 상반된 당파 간의 대립으로 정부가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지면서 1690년 이후 지속되기 어려웠고, 윌리엄은 그 해 초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다.[101]
1690년 선거 이후, 윌리엄은 댄비와 노팅엄이 이끄는 토리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02] 토리당은 왕의 권한 유지를 선호했지만, 윌리엄이 프랑스와의 전쟁 지속을 위해 의회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103] 결과적으로 윌리엄은 준토로 알려진 휘그당 파벌을 선호하게 되었다.[104]
휘그당 정부는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모델 삼아 잉글랜드 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1694년, 윌리엄은 은행가들이 소유한 민간 기관인 잉글랜드 은행에 왕실 헌장을 부여했는데,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유산으로 평가받는다.[105] 이는 18세기 영국이 네덜란드 공화국과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대신하여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105] 1695년 의회 해산 후 새로 소집된 의회 역시 휘그당이 이끌었으며, 다음 해에는 식민지 무역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106][107]
그러나 윌리엄 3세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이는 1693년부터 광범위한 기근으로 이어졌다.[113] 9년 전쟁은 영국의 해상 무역에 타격을 주었으며, 세금은 두 배로 증가했다.[113]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미흡한 대처가 결합되어 1695년에서 1697년 사이의 통화 위기를 초래했고, 이는 새로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113]
4. 4.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윌리엄은 생애의 끝자락에 이르러 당시 많은 유럽 통치자들처럼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스페인 왕위에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및 신대륙의 광대한 영토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후사를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 컸고,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였다. 이들 중 한 명이 스페인의 모든 영토를 상속받는 것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었으므로, 윌리엄은 이를 막고자 했다. 그는 루이 14세와 협상하여 제1차 분할 조약(1698년)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스페인을 상속하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갖도록 규정했다.[125] 카를로스 2세 역시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데 동의하여 전쟁의 위기는 일단 해소되는 듯 보였다.[126]
그러나 1699년 2월,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복잡해졌다. 1700년, 윌리엄과 루이 14세는 제2차 분할 조약(런던 조약)을 통해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 국왕의 아들에게, 나머지 스페인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127] 하지만 이 합의는 스페인 영토의 분할을 원치 않았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영토를 중요하게 여겼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양측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127]
결정적으로 1700년 말, 임종을 앞둔 카를로스 2세는 이전의 모든 논의를 뒤엎고 자신의 모든 영토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128] 루이 14세는 제2차 분할 조약을 무시하고 손자의 스페인 전체 상속을 받아들였다.[128] 더욱이 루이 14세는 1701년 9월 사망한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의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하며 윌리엄 3세를 도발했다.[129]
프랑스의 이러한 팽창주의적 태도는 윌리엄 3세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는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승인한 후 네덜란드로 건너가 헤이그에서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과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루이 14세가 제임스 2세의 아들을 지지한 것은 영국 내 여론을 자극하여, 이전까지 전쟁에 소극적이던 토리당 중심의 의회마저 전쟁 준비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결국 프랑스의 야심과 이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반발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의 발발로 이어졌다.
5. 죽음과 유산
1702년, 윌리엄 3세는 햄프턴 코트 궁전에서 승마를 즐기던 중 말이 두더지가 파 놓은 굴에 발을 헛디뎌 낙마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합병증으로 폐렴이 발병하여 켄싱턴 궁전에서 5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132] 그의 말이 발을 걸었던 두더지 굴 때문에, 그에게 반대했던 자코바이트들은 "검은 벨벳 조끼를 입은 작은 신사"(두더지를 의미)에게 건배하며 그의 죽음을 조롱하기도 했다.[133] 윌리엄 3세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리 2세 곁에 묻혔다.[135]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는 처제이자 사촌인 앤이 계승했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그의 의지는 앤 여왕 시대에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말보로 공작 존 처칠에게 이어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윌리엄 3세의 죽음으로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직계 남성 후계자는 단절되었다. 그는 빌럼 1세 이후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헬데를란트, 오버레이설 5개 주에서 총독직을 역임한 마지막 직계 후손이었으며, 그의 사후 이 5개 주는 총독직을 폐지하고 제2차 총독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윌리엄 3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가장 가까운 남계 친척이자 이모 앙리에트 카트린의 손자인 요한 빌럼 프리소에게 오라녜 공 지위와 네덜란드의 여러 영지를 상속하도록 했다.[136]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 역시 윌리엄 3세의 또 다른 이모 루이즈 앙리에트의 아들로서 상속권을 주장하며 분쟁이 발생했다.[137] 이 문제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년)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정리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라녜 공국의 영토에 대한 권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양보하는 대신 칭호에 대한 권리만 유지했다. 요한 빌럼 프리소의 사후에 태어난 아들 빌럼 4세가 1711년 작위를 계승했으며, 1732년 분할 조약을 통해 빌럼 4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라녜 공' 칭호를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했다.[138][161]
윌리엄 3세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 점이다. 그의 일생은 루이 14세의 프랑스와의 대립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그의 사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의 치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제임스 1세 이래 계속되어 온 왕권과 의회 간의 격렬한 갈등은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최고조에 달했는데, 윌리엄 3세 시대에 이르러 권리장전(1689), 삼년 의회법(1694), 왕위 계승법(1701) 등이 제정되면서 의회의 우위가 확립되고 갈등이 종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140]
군사령관으로서 윌리엄 3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동시대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적들조차 그의 통찰력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캥시 후작은 세네프 전투에서 연합군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의 덕분이라고 평했으며, 스테인케르크 전투와 란덴 전투에서 군대를 안전하게 후퇴시킨 점을 칭찬했다. 하지만 성급하고 무모하며 병사들의 생명을 경솔히 다룬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영국의 역사가 존 차일즈는 윌리엄이 직접 전투에 뛰어드는 경향 때문에 전체적인 지휘에 소홀해지는 단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네프 전투(1674), 카셀 전투(1677), 생드니 전투(1678), 보인 전투(1690), 스테인케르크 전투(1692), 란덴 전투(1693) 등 많은 전투를 직접 지휘했지만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다. 그러나 이는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해야 했고, 다양한 국가로 구성된 연합군의 숙련도 문제와 통합의 어려움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윌리엄은 전통적인 승패보다는 소모전을 통해 프랑스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저지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훈련된 군대 중 하나로 발전했다.
윌리엄 3세의 이름은 여러 지명과 기관에 남아있다. 그는 1693년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에 윌리엄 앤드 메리 칼리지 설립을 인가했으며,[141] 뉴욕주의 나소 카운티는 그의 가문 이름을 딴 것이다.[142]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교의 첫 건물인 나소 홀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143] 뉴욕시는 1673년 네덜란드에 의해 잠시 '뉴 오렌지'로 불렸고, 도시의 요새는 빌럼 헨드릭 요새(1673)와 윌리엄 요새(1691)로 명명되기도 했다.[144] 바하마의 수도 나소 역시 그의 이름을 딴 나소 요새(1695년 건설)에서 유래했다.[145]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희망봉 요새에 있는 5개의 성채(오렌지, 나소, 카첸엘렌보겐, 부렌, 레르담)도 그의 작위를 따서 명명되었다.[146]
6. 역사적 평가
윌리엄 3세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유럽 대부분을 장악하려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세력을 억제한 것이다. 그의 평생 목표는 프랑스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은 그의 사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윌리엄 3세를 "위대한 인물이었고, 프랑스의 적으로 프랑스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우리는 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윌리엄 3세의 통치는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제임스 1세 이후 지속되어 온 왕실과 의회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갈등은 잉글랜드 내전과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이어졌는데[140], 윌리엄 3세 치세에 통과된 1689년 권리장전, 삼년 의회법 1694, 1701년 왕위 계승법 등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함으로써 갈등을 의회에 유리하게 해결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140] 이는 입헌군주제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군 사령관으로서 윌리엄 3세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많은 동시대 사람들과 심지어 적들조차 그의 통찰력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어 캥시 후작은 윌리엄의 덕분에 연합군이 세네프 전투에서 버틸 수 있었다고 평가했으며, 스테인케르크 전투와 란덴 전투에서 군대를 안전하게 후퇴시킨 점을 칭찬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성급함과 무모함, 병사들의 생명을 경시하는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의 역사가 존 차일즈는 윌리엄이 뛰어난 자질을 가졌지만, 전투에 직접 뛰어드는 경향 때문에 전체적인 지휘 감독에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세네프 전투 (1674), 카셀 전투 (1677), 생드니 전투 (1678), 보인 전투 (1690), 스테인케르크 전투 (1692), 란덴 전투 (1693) 등 여러 전투를 지휘했는데, 대부분 패배했지만 이를 전적으로 그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당시 프랑스군은 강력했고, 연합군은 네덜란드군만큼 숙련되지 않아 통합에 시간이 필요했다. 윌리엄은 전통적인 승리보다는 프랑스의 공격 계획을 좌절시킬 정도의 손실을 입히는 소모전을 선호했으며, 네덜란드와 영국군은 이러한 전략에 맞춰 조직되었다.
윌리엄 3세의 즉위는 잉글랜드 역사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시대에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잉글랜드는 윌리엄 3세의 주도로 반(反)프랑스 노선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제2차 백년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랜 경쟁에서 영국이 우위를 점하고, 대영 제국의 패권을 확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명예혁명 자체가 프랑스의 팽창을 막기 위해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한 군사적 개입이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네덜란드에게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왕 즉위는 장기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잉글랜드와의 조약으로 네덜란드 해군은 규모와 작전 지휘권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되었고, 무역과 해운에서도 제약을 받게 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문화적으로 윌리엄 3세는 1693년 미국 버지니아주에 윌리엄 앤 메리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141] 뉴욕주의 나소 카운티[142], 프린스턴 대학교의 나소 홀[143], 바하마의 수도 나소[145] 등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건물이 여럿 남아 있다. 뉴욕시는 1673년 네덜란드가 잠시 탈환했을 때 '뉴 오렌지'로 불렸으며, 도시의 요새는 '빌렘 헨드릭 요새'(1673)와 '윌리엄 요새'(1691)로 명명되기도 했다.[144]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의 희망의 성에 있는 다섯 개의 보루(오렌지, 나소, 카첸엘렌보겐, 부렌, 레르담) 역시 그의 작위를 따서 명명되었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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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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