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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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학은 중국, 중국 문화, 역사, 언어 등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지칭한다. '중국학'이라는 용어는 1838년경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국학이 포괄적인 연구를 의미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중국학 연구의 하위 분야로 간주된다. 중국학은 16세기 선교사들의 중국어 연구에서 시작되어 서양에 중국 철학, 윤리, 미학 등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중국학이 발전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미국에서 지역 연구의 일환으로 중국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아랍과 일본에서도 중국학이 발전해왔으며, 현재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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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학 - 중국소설사략
루쉰이 집필한 중국소설사략은 중국 소설의 기원부터 청나라 말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중국 소설 통사로, 출간 후 세계적으로 소개되어 중국 소설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자료의 한계 등으로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중국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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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중국어 간체 | 汉学 |
중국어 병음 | hànxué |
광둥어 예일 | hon3 hok6 |
민난어 페-오-지 | hàn-ha̍k |
일본어 한자 | 漢学 |
일본어 로마자 | kangaku |
한국어 한자 | 漢學 |
한국어 발음 | 한학 |
베트남어 | Hán học |
중국어 발음 (IPA) | /xân.ɕɥɛ̌/ |
광둥어 발음 (IPA) | /hɔːn˧ hɔːk˨/ |
중국어 통용병음 | hàn-syué |
중국어 웨이드-자일스 | han4-hsüeh2 |
중국어 주음부호 | ㄏㄢˋ ㄒㄩㄝˊ |
일본어 히라가나 | かんがく |
일본어 가타카나 | カナガク |
설명 | |
설명 | 중국 연구에 초점을 맞춘 지역학 |
영어 | Sinology, Chinese studies |
2. 용어
'중국학'(sinology)과 '중국학자'(sinologist)라는 용어는 1838년경에 만들어졌으며, 후기 라틴어 시나이/Sinaela에서 유래했고, 이는 다시 그리스어 시나/Σίναgrc에서, 그리고 아랍어 신/صينar에서 유래하는데, 궁극적으로는 진(秦)에서 유래한다.[2]
지역 연구의 맥락에서 유럽과 미국의 용례는 다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국학을 일반적으로 "중국학 연구"라고 부르는 반면, 미국에서는 중국학이 중국학 연구의 하위 분야이다. 중국 전문가는 중국의 현재 사건과 권력 투쟁을 감시하는 사람이다.
일본에서 중국학은 강학(講学)으로 알려졌다. 이는 일본 연구(국학)와 서양 연구(처음에는 난학, 그 후에는 더 광범위하게 양학)와 대비되었다.
현대 중국에서 중국 관련 학문은 '국학'(國學, guóxué)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국에서의 중국학(sinology)은 '한학'(漢學, Hànxué)으로 번역된다.
3. 역사
3. 1. 서양의 중국학
16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의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예수회 또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중국인들에게 가톨릭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마닐라의 스페인 도미니크 선교부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1593년부터 1607년 사이에 중국 이민자 공동체를 위해 가톨릭 교리에 관한 저서 4권을 출판했는데, 이 중 3권은 문어 중국어로, 1권은 문어 중국어와 방언인 호키엔어를 혼합하여 쓰였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중국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이룬 업적은 마테오 리치가 이끈 예수회가 중국 본토에서 거둔 성공에 비하면 미미하다. 1583년 광저우에 도착한 리치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대부분의 선배나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중국인들을 이교도나 우상 숭배자로 보지 않고 "학문의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진 문인"으로 여겼다. 그는 중국 문인들처럼 유교 경전을 연구하여 중국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여 가톨릭 교리와 유럽의 학문을 제시했다.
계몽주의 시대 동안 중국학자들은 중국 철학, 윤리, 법 체계 및 미학을 서구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비록 종종 비과학적이고 불완전했지만, 그들의 연구는 '시누아즈리'의 발전과 중국과 서구 문화를 비교하는 일련의 논쟁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 중국학자들은 종종 중국을 계몽된 왕국으로 묘사하며, 암흑시대(Dark Ages)에서 막 벗어난 유럽과 비교했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유럽 문인들 중에는 볼테르(Voltaire)가 있었는데, 그는 『조씨 고아(The Orphan of Zhao)]』에서 영감을 받아 희곡 『중국 고아(L'orphelin de la Chine)』를 집필했고,
3. 1. 1. 초기 근대
16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의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예수회 또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중국인들에게 가톨릭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마닐라의 스페인 도미니크 선교부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1593년부터 1607년 사이에 중국 이민자 공동체를 위해 가톨릭 교리에 관한 저서 4권을 출판했는데, 이 중 3권은 문어 중국어로, 1권은 문어 중국어와 방언인 호키엔어를 혼합하여 쓰였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중국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이룬 업적은 마테오 리치가 이끈 예수회가 중국 본토에서 거둔 성공에 비하면 미미하다. 1583년 광저우에 도착한 리치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대부분의 선배나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중국인들을 이교도나 우상 숭배자로 보지 않고 "학문의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진 문인"으로 여겼다. 그는 중국 문인들처럼 유교 경전을 연구하여 중국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여 가톨릭 교리와 유럽의 학문을 제시했다.
3. 1. 2.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 중국학자들은 중국 철학, 윤리, 법 체계 및 미학을 서구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비록 종종 비과학적이고 불완전했지만, 그들의 연구는 '시누아즈리'의 발전과 중국과 서구 문화를 비교하는 일련의 논쟁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 중국학자들은 종종 중국을 계몽된 왕국으로 묘사하며, 암흑시대(Dark Ages)에서 막 벗어난 유럽과 비교했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유럽 문인들 중에는 볼테르(Voltaire)가 있었는데, 그는 『조씨 고아(The Orphan of Zhao)]』에서 영감을 받아 희곡 『중국 고아(L'orphelin de la Chine)』를 집필했고,
3. 1. 3. 19세기
1814년, 프랑스의 콜레주 드 프랑스에 중국어와 만주어 교수직이 신설되었다. 스스로 중국어를 독학한 장-피에르 아벨-르뮈자가 이 자리를 채우면서 유럽 최초의 중국어 교수가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최초 한자학자 니키타 비추린은 이미 10년 동안 베이징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영국과 독일의 아벨-르뮈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각각 새뮤얼 키드(1797~1843)와 빌헬름 쇼트(1807~1889)였지만, 이 두 나라에서 중요한 세속 한자학자는 제임스 레그와 한스 게오르크 코논 폰 데어 가벨렌츠였다. 1878년, 독일어권에서 최초로 극동어학 교수직이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신설되었고, 폰 데어 가벨렌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레그와 같은 학자들은 종종 왕타오와 같은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존했다.
스타니슬라스 쥘리앙은 40년 이상 콜레주 드 프랑스의 중국어 교수직을 역임했는데, 르뮈자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833년 그 뒤를 이었다. 그는 고전 문헌뿐 아니라 구어 문학 작품의 번역과 만주어 지식으로도 유명했다. 에두아르 샤반은 1893년 에르베-생드니 백작 사후 그 자리를 계승했다. 샤반은 언어뿐 아니라 역사에도 폭넓은 관심을 가졌다.
19세기 이후, 산업혁명과 산업화에 성공한 서구 열강은 그동안 통상·외교 관계에서 열세였던 중국에 전면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즉 아편전쟁 이후,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우위에 선 서구 열강은 자유무역을 통해 중국을 국제적인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편입시키고, 시장과 영토 지배에 나섰다. 이로써 중국학에는 기존의 선교 활동 외에 식민지적 진출이라는 새로운 목적이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학자들 중에서도 선교사 출신보다 세속적인 학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 시기, 서구에서 중국학의 중심이 된 곳은 17세기 이래의 전통과 축적을 가진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 이후 1795년에 동양어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어 1814년에는 최고 학부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 중국어와 만주어 강좌가 개설되어 유럽 대학 최초의 중국학 강좌가 되었다. 그리고 독학으로 중국어를 배운 레뮤즈가 유럽 최초의 중국어 교수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중국학에서의 문헌 비판 방법을 확립한 샤반느가 나타났고, 그의 지도 아래 돈황학의 페리오, 도교 연구의 마스페로, 『시경』 연구의 그라네가 등장함에 따라 프랑스의 고전 중국학은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 되었다. 프랑스에 이어 영국·독일 등에서도 중국학이 발전하였는데, 영국에서는 사뮤엘 키드(1797년 - 1843년), 독일에서는 빌헬름 쇼트(1807년 - 1889년)가 각각 프랑스의 레뮤즈가 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레그(영국)와 가벨렌츠(독일)가 양국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와 관계없는 저명한 중국학자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중국학은 그 지식을 더욱 확장하게 된다. 아로우 전쟁 이후 외국인에게 중국 내지의 자유 여행이 허용되고 서구 열강과 중국의 비대칭적 관계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욱 심화됨에 따라, 그동안 정보원을 한문 고전이나 중국 연안에 산재한 유럽인 거류지에서의 경험에 의존했던 중국학자들은 더욱 넓고 깊이 중국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페리오, 독일의 르 코크가 실시한 서역 지역의 고고학적 탐사 조사는 각국의 중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중국학의 연구 대상 분야도 확대되었다. 즉, 기존의 고전 연구와 어학 외에도,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병요 지지도 작성, 경제 진출을 위한 시장·물산 조사,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습 조사(19세기 말 이후의 "중국 분할"의 결과 열강 각국은 중국 영토의 일부를 직접 지배하게 되어 행정상 이러한 조사도 필요하게 되었다)도 중국학의 명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이 당대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고전학으로서의 중국학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현황 분석으로서의 중국학은 오히려 지역 연구의 한 분야로서의 "중국 연구"(Chinese Studies)로 간주되고, 점차 고전 문화를 연구하는 기존의 중국학과는 다른 분야로 간주되게 되었다(하지만 현재에도 "중국학"이라고 하면 양쪽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다).
3. 1. 4. 20세기와 21세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프랑스 학파의 중국학이 지배적이었다. 폴 펠리오(Paul Pelliot),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 등이 활동했다. 러시아 학파의 중국학은 고전 중국어 텍스트 학습에 중점을 두었다. 줄리안 슈추츠키(Julian Shchutsky)의 《주역(I Ching)》 번역이 대표적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지역 연구(Area studies)의 부상, 중국 전문가(China watcher)의 역할, 그리고 대학원 과정의 성장은 중국학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등은 "한 분야 내에서의 중국 연구"를 장려했는데, 이는 문헌 중국학의 역할을 축소하고 역사 및 사회과학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접근 방식이었다.
냉전 시대, 중국 전문가들은 홍콩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상호 불신과 국가 간 여행 금지는 그들이 언론 브리핑이나 인터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공식 발표에서 숨겨진 의미를 면밀히 분석하고, 신문에 보도된 관리들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공개석상 모습 사진을 분석하는 것과 같은 크렘리놀로지(Kremlinology)의 기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중국 개방 이후 몇 년 동안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에 거주하면서 일반적인 정보 출처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기 말 무렵, 호주 학자인 제러미 바르메(Geremie Barmé)는 "새로운 중국학"을 제안했는데, 이는 "고전 및 현대 중국어와 연구에 대한 강력한 학문적 기반을 강조하는 동시에 경험적이거나 이론적으로 기울어진 풍부한 다양한 접근 방식과 학문에 대한 절충적인 태도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10]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학 강좌는 유럽 대학에서 점차 증가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동안 중국학에 대한 기여가 크게 뒤처져 있던 미국에서는 한국 전쟁 이후 냉전의 핵심이 된 중국을 연구하는 국제 전략적 필요에 따라,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와 라티모어(Owen Lattimore)를 대표로 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활용한 지역 연구로서의 중국학(중국 연구)이 크게 발전했다. 이러한 지역 연구로서의 중국학은 현대에는 싱크탱크의 활약을 통해 정치적·정책적 영향력을 증대하고 있다.
3. 2. 아랍의 중국학
3. 2. 1. 1900년 이전
중국 역사 자료들은 이슬람 이전 수 세기 전부터 중국인들이 아랍인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두 문명 간의 관계사는 이슬람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기원전 206년)의 정책은 오늘날 중앙아시아, 인도, 서아시아로 불리는 서역과의 무역로 개방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까지 확장되었다.[11] 역사 연구에 따르면 이슬람 초기, 무함마드의 동료인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자파르 이븐 아비 탈리브, 자흐시 이븐 리야브 등 네 명이 616/17년에 중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다.[12] 영락제 시대에 정화가 이끄는 첫 번째 중국 함대가 1412년 그의 네 번째 항해에서 아라비아 반도 연안에 도착했다.
7세기 초부터 8세기까지 아랍의 힘은 이슬람의 확장과 세계 전파로 인해 증가했고, 그들의 지배력은 동서로 확장되었다. 광대한 영토, 발달된 우편 시스템, 메카 순례, 그리고 번성하는 육상 및 해상 무역이 그들의 힘을 강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지리학 연구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중국에 대한 지식이 아랍 세계로 유입되었다. 12세기까지 아랍인들은 동양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서방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 기여하여 이슬람 문명의 발전과 세계 문화에 대한 영향력에 기여했다.
아라비아 반도의 저명한 역사적 인물인 아부 알-하산 알리 알-마수디와 같은 아랍인들은 중국학(Sinology)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알-마수디는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를 여행하며 먼 곳을 방문했다. 915년에는 인도, 실론, 참파, 중국 연안 지역을 방문한 후 중앙아시아의 자바그(Zabagh)와 투르키스탄을 방문했다. 그는 956년에 사망했으며, 역사, 지리 등을 다룬 "금광의 초원(Meadows of Gold)"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그는 중국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들은 동양학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아부 자이드의 저서 "중국과 인도에 관하여(On China and India)"는 잘 알려지고 높이 평가받는 아랍 역사 자료였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익명의 저자가 쓴 "인도와 중국의 사건들에 대한 역사(History of Indian and Chinese Affairs)"이고, 두 번째 부분은 아부 자이드가 쓴 "인도와 중국의 소문 모음(A Collection of Rumors of India and China)"이다. 첫 번째 부분은 솔로몬의 "중국 경험(Chinese experiences)"과 다른 익명의 자료들에서 발췌한 것으로, 인도에서의 경험과 함께 851년에 기록되었다.[13]
3. 2. 2. 20세기 이후
20세기 이후 중국과 아랍 국가 간의 협력 사업은 교육 분야에서의 중국-아랍 협력 범위 확장 이후, 협력 수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랍 국가들에서 한학(漢學, Sinology)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56년 중국과 이집트 간의 수교 이후, 이집트는 이집트 대학에서 중국어 전문 과정을 개설하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규모가 작았다. 아인 샴스 대학교(Ain Shams University)는 1958년 중국어 전문 과정을 개설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1958년부터 1963년 사이에 이집트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학생은 33명이었다. 1977년 아인 샴스 대학교는 한학 전문 과정을 다시 개설했다. 이집트 외에도 쿠웨이트에서도 중국어 교육 활동이 있었지만 짧은 기간 후 중단되었다.[14]
중국어를 배우는 아랍인의 수는 증가했다. 아인 샴스 대학교의 중국어 학과는 이집트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주요 중심지이자 학생 수, 교육 수준, 교수진 수준 측면에서 아랍 세계와 아프리카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주목할 만한 중심지 중 하나이다. 튀니지에는 부르기바 현대어 연구소(Bourguiba Institute for Modern Languages)도 1977년에 개설되어 중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고 있다. 카이로 대학교 또한 2004년 9월 중국어 학과를 설립하여 북아프리카(North Africa)의 주요 한학 연구 중심지가 되었다.
아랍 학자들은 아랍과 중국 국민 간의 소통의 다리를 구축하기 위해 학문적, 정치적, 문화적, 외교적 목적으로 한학을 더 깊이 연구하고자 노력했다. 중국 역사에 대한 관심도 크게 증가했다. 중국 문화와 국민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책들이 아랍어로 출판되었다. 2020년, 광저우(Guangzhou)에서 약 6년간 영사로 근무한 후, 한학 분야에서 독창적인 아랍어 학술 저술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카타르 외교관 알리 빈 가넴 알 하즈리(Ali bin Ghanem Al-Hajri)는 "정화, 바다의 중국 황제(Zheng He, Chinese Emperor of the Seas)"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1415년부터 1432년까지 7차례에 걸쳐 알려진 전 세계를 항해한 중국 함대 사령관 정화(鄭和)의 역사와 모험을 다루고 있다. 그는 그 전에 중국 사령관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태양의 함대(The Fleet of the Sun)"라는 소설도 집필했다. 이 소설은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아랍 소설로 여겨지며, 최근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세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또한 여행가와 탐험가들의 발견을 통해 고대 중국 역사를 깊이 있게 파고든 "여행자의 눈으로 본 중국(China in the Eyes of Traveler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알 하즈리는 또한 명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과 중국 문화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명나라의 예술(Arts in the Ming Dynasty)"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 4권은 중국어로 번역되었다.[15]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많은 책들이 중국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2011년 설립된 중국 북서부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한 (지혜의 집, House of Wisdom) 회사는 중국 국민, 문화, 경제, 문학, 철학에 관한 700권 이상의 책을 아랍어로 번역했다.[16]
3. 3. 일본의 중국학
일본에서 중국학은 으로 알려졌다. 이는 일본 연구()와 서양 연구(처음에는 , 그 후에는 더 광범위하게 )와 대비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분야는 현대 중국학과 구분된다.
right가 수호전의 호걸을 그린 우키요에 판화 / 에도 시대에 있어서 수호전 유행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right 등 후세의 학자를 육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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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px / “조사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며, 린시 타이완 규관 조사회·만철 조사부를 설치하여 현황 분석적 중국 연구의 기초를 만들었다]]
thumb으로 인해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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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1. 근대 이전의 한학
일본과 중국의 교류 역사는 길며,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중국의 선진 문명과 문화를 배우고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일찍이 아스카 시대 무렵(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한자, 한문 문화와 율령 등의 국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유교(유학)·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학문은 고대의 귀족 정치 시대, 중세, 근세의 무가 정치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적·사회적 엘리트에게 필수적인 교양으로 남았다. 이처럼 중국 문화를 연구하고 습득하려는 전통 지식인들의 활동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한학”으로서 일정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이 한학이야말로 일본에서 근대적 중국학의 직접적인 원류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한학은 일본 고유의 문화·사상을 배우는 국학,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학문을 배우는 란학(양학)과 함께 당시 학문의 3대 분야를 구성했다. 한학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봉건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 사상인 유학을, 특히 정통파 교학인 주자학에 기반하여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당시 중국에서 성행했던 “청나라 고증학”과 마찬가지로, 오기 소라이(荻生徂徠)·이토 진사이(伊藤仁斎) 등의 고학에서 보이는 것처럼, 유학 사상의 역사적 배경인 고대 중국의 사회·문화 실정을 한문으로 된 고전 텍스트 분석을 통해 해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당시 유일하게 중국과의 무역이 허락되었던 나가사키에서 통역관이었던 당통사를 중심으로, “당화”라고 불린 당시의 중국어(문언=전통적인 서면 언어인 한문과 다른 백화=구어체 서면 언어로서의 중국어)의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소라이 등 일부를 제외하면, 훈독법으로 한문 텍스트를 해독하던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중에서 문어 문학(한문학)뿐만 아니라 백화 문학의 『수호전』·『금고기관』 등이 번역 소개되어 당시 문예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3. 2. 한학에서 중국학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교육·연구 체계는 근대 국가에 걸맞게 서양 학문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에도 막부의 한학(유학) 교육·연구 기관이었던 쇼헤이자쿠가쿠몬조(昌平坂学問所) 등을 전신으로 하여 1877년 일본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된 도쿄 대학(이후 제국대학 ⇒ 도쿄 제국대학으로 개칭)에서는 문과의 “제2과”로 “화한문학(和漢文学)”이 설치(후에 1889년 “한학과(漢学科)”가 분리)되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갑신정변 당시 조선 주재 공사) 등 한학자들이 교수로 채용되었다. 이에 반해 1897년 제2의 대학으로 설립된 교토 제국대학에서는 문과에 동양사학·중국철학·중국문학의 3개 강좌를 설치하였고, 그 후 도쿄 제국대학도 이 구성을 따르게 되면서, 학계에서 근대적인 중국학이 제도화되었다. 그 결과, 종래 중국의 사상·역사·문학을 혼연일체로 학습해 온 “한학(漢学)”이라는 학문은 유럽식 학문 체계에 따라 문학부(文科) 안에서 철학·역사·문학의 3개 분야로 분리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새로운 중국학 안에도 한학적 전통의 영향이 계속 남았다. 도쿄대학에서는 특히 한학의 영향이 강했고, 한학자들의 공헌으로는 하야시 타이스케(林泰輔)의 갑골문 연구, 간노 미치아키(簡野道明)·모로하시 테츠지(諸橋轍次)의 한한사전(漢和辞典) 편찬, 대규모 총서 『한문대계(漢文大系)』((冨山房)판) 편집에 대한 협력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대학에서 육성된 시라토리 구라키치·하토리 우지키치·가리노 나오키 등 신세대 중국학자들이 독일·프랑스 등에 유학하여 당시 최첨단의 문헌학적 시놀로지(sinology) 방법을 흡수하고 귀국하자, 한학자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연구의 주류가 되었다. 특히 신설된 교토 제국대학에서는 유학 중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와 교류를 가진 가리노 나오키가 교수로 영입된 것도 있어, 프랑스 시놀로지의 강한 영향을 받은 학풍을 형성했다. 이 가리노에,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독자적인 문화사관을 전개한 나이토 후쿠난(内藤湖南), 중국 유학을 통해 청나라 고증학의 방법을 흡수한 구와하라 슈조(桑原隲蔵)가 가담하여 “교토 학파(京大支那(シナ)学)”라고 불리는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교토 제국대학의 철학·역사·문학의 중국학자들은 전술한 가리노·나이토·쿠와하라 등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서양의 시놀로지를 강하게 의식하고 자기 학문을 “중국학(支那学)”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연구 단체로서 “중국학회(支那學會)”를 결성하고, 1920년에는 학회의 사실상 기관지로서 『중국학(支那學)』을 창간하여 1947년까지 간행을 계속했다.
1924년에는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이 구입한 중국 관련 영문 서적 컬렉션 “모리슨 문고(モリソン文庫)”를 기반으로, 한문 문헌을 더하여 동양 문고(東洋文庫)가 설립되어, 연구 기능을 겸비한 일본 최초의 중국학·동양학 전문 도서관이 되었다. 쇼와 시대(昭和時代)에 들어서면서, 일중 공동의 동방 문화 사업(의화단 사건 배상금을 기금으로 운영)의 일환으로 동방 문화 학원(東方文化学院)이 1929년에 도쿄·교토에 설립되어, 고전적인 중국학 연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동방 문화 학원은 그 후 폐지되었지만, 그 도쿄 연구소는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 흡수되고, 교토 연구소는 교토대학으로 이관되어 현재의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및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부속 한자 정보 연구 센터(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附属漢字情報研究センター)의 전신이 되고 있다.
3. 3. 3. 식민지 지배와 중국 연구
일본에서 현황 분석적인 중국 연구의 조직화·제도화는 일본의 동아시아 영토 진출이 시작된 일청 전쟁·러일 전쟁 간기 이후에 나타났다.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위해 다수의 중국어 통역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고, 중국 현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인 대만에서는 1901년 「임시 대만 구관 조사회」가 설치되어 현지의 관습법과 행정 제도를 포괄적으로 조사했다. 그 성과는 『대만 사법』(1910-11년 간행)·『청국 행정법』(1905-13년 간행)으로 간행되었다.
1907년 만철 조사부가 설치되어 철도 경영과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사를 수행했다. 만철 조사부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최대의 중국 연구 싱크탱크로 발전했다.
1901년 상하이에 설립된 동아 동문서원은 졸업 시 중국 현지 조사 여행과 보고서 제출을 통해 중국 전역의 사회·경제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축적했다. 1968년 『중일 대사전』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이후, 마르크스 사회 과학이 일본에 도입되어 아시아적 생산 양식론에 기초한 중국의 역사 연구·현황 분석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들어 일중 간의 전쟁이 전면화되면서, 중국 사회·경제 연구는 대륙 진출의 국책에 따른 연구로서 중시되었다. 1938년에는 동아 연구소가 신설되었고, 1939년에는 만철 조사부의 조직이 대폭 확충되었다.
1940년부터 1944년에 걸쳐 만철 조사부·동아 연구소의 공동으로 「화북 농촌 관행 조사(중국 농촌 관행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전시기의 현황 분석적 중국학에 있어서 최대의 성과가 되었다.
3. 3. 4. 전후 일본의 중국학, 중국 연구
패전 후, 식민지 지배·전쟁 체제에 협력했던 일본의 근대 중국학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국책 연구로서 지원을 받아온 현황 분석적인 중국 연구는 패전 후 자료를 몰수당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류 단절로 사회적 관심이 저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시기에 만철조사부나 동아연구소 등에 속해 있던 좌파적·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을 가진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했다. 평노 기타로(平野義太郎), 나카니시 이사오(中西功), 이와무라 미치오(岩村三千夫) 등은 1946년, 중국연구소(中研)를 설립하여 현대 중국 연구를 수행했다. 고전학 분야에서도 1947년에 동방학회, 1948년에 일본중국학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학회들은 주로 중국의 사상·문학 연구자들이 모였고, 중국사 연구자들은 전전 이래의 동양사연구회·역사학연구회 등 역사계 학회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1950년대 이후, 일본과 아시아 여러 국가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아시아 지역 현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현대 중국 연구 단체·기관으로는 중국연구소 외에, 1951년에 현대중국학회(현, 일본현대중국학회), 1953년에는 아시아정경학회가 발족했다. 기시 내각의 아시아 중시 외교를 배경으로, 1958년에 아시아경제연구소가 발족하여 중국 연구에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전후 일본 중국학의 특징은 근현대 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고전학과 현황 분석의 두 영역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양자가 협력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한 영향으로 마르크스 사회과학의 영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특정 정치적 가치관에 근거한 연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 평가를 둘러싸고 중국학자·중국 연구자들이 대립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4. 중국학자
주요 중국학자 목록은 중국학자 목록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5. 중국학 전문 잡지
프랑스 극동학회 회보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중국 유산 분기별지 (Chinese Heritage Quarterly)'',[17] 유로 시니카 (Euro-Sinica), 하버드 아시아 연구지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아시아 연구지 (Journal of Asian Studies), ''유럽 중국학회지 (Journal of the European Association for Chinese Studies)'', ''(캠브리지) 중국 분기별지 (The (Cambridge) China Quarterly)'', 아시아 학보 (Journal Asiatique), 후기 제국 중국 (journal)), 몬우멘타 세리카 (Monumenta Serica), 시노-플라토닉 논문 (Sino-Platonic Papers), 퉁파오 (T'oung Pao), 현대 중국 (Modern China (journal)), ''도호 가쿠호 (Toho Gakuho)'',[18] ''토요시 켄큐 (Toyoshi Kenkyu)'',[19] 일본중국학회『일본중국학회보』, 중국문화학회『중국문화』, 사문회『사문』, 무궁회『동양문화』, 일본현대중국학회『현대중국』, 중국연구소『중국연구월보』 등 다양한 중국학 전문 잡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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