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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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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중서(董仲舒)는 기원전 179년에 태어난 전한 시대의 유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허베이성 헝수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춘추공양전》을 배웠으며, 무제에게 유학을 국교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받아들여졌다. 동중서는 천인감응론, 오행사상, 역사순환론 등의 사상을 전개했으며, 저서로는 《춘추번로》가 전해진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캉유웨이와 같은 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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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기본 정보
역대성현반신상 冊 동중서 (Dong Zhongshu)
동중서의 초상화 (국립고궁박물관)
인물 정보
이름동중서 (董仲舒)
출생기원전 179년
사망기원전 104년
국적중국
시대전한
학문
분야유학
사상
주요 사상천인감응설, 동양철학

2. 생애

젊어서 《춘추공양전》을 배우고 경제박사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성인은 천명(天命)을 받아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로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로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는 유학만을 정통 학문으로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 정부는 법가종횡가의 말을 물리치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6]

무제 건원(建元) 원년(기원전 140년) 음력 겨울 10월, 무제가 조서를 내려 현량하고 방정하며 직언하고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제가 옛날과 오늘날의 잘 다스리는 도리(治道)에 관한 대책을 묻자, 100여 명이 대답하였다. 그중 동중서는 도(道)는 다스리는 길로 좇아가는 것이고 인, 의, 예, 악이 모두 그 도구이므로 성스러운 왕은 이미 죽었어도 자손들이 오래가고 안녕함이 수백 세를 가는데, 이것은 모두 예악으로 교화한 공로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군(人君)은 편안하게 있으려 하지만,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책임을 맡은 사람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고, 종사하는 것이 그 도에 적합하지 않으니, 정치가 날로 기울어져 멸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기에 치란(治亂)과 폐흥(廢興)은 자기에게 있고, 하늘이 운명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지만 위반할 수도 없는데, 그가 갖고서 조정하는 것이 그릇되면 통치권을 잃을 것이라고 하였다.[7]

인군(人君)된 사람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올바르게 하고, 조정을 올바르게 하여 백관을 올바르게 하고, 백관을 올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올바르게 하며, 만백성이 올바르고 나서야 사방이 올바르게 된다고 하였다.[8]

공자는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河, 황하)에서 그림[龍圖]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그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물건을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자신은 비천하여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폐하께서는 귀하기로는 천자이고, 부유하기로는 사해를 가졌고, 오게 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시고, 조정할 수 있는 세력을 가졌고, 또 오게 할 만한 자질을 가지셨는데, 행하는 일은 높고 은덕은 두터우며, 지혜는 밝고 뜻은 아름다우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니 이른바 의(誼)로운 군주라고 하였다.[9]

그러나 천지가 아직 감응하지 않고, 아름답고 상서로움이 아직 이르지 않는 것은 교화가 확립되지 않아 만백성이 옳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또한 만민들이 이로움을 좇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교화로써 막지 않으면 중지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옛날 제왕은 이것에 밝았으니, 남쪽을 향해 앉아 천하를 다스리면서, 교화를 커다란 임무로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태학을 세워 나라에서 가르치고 상서(庠序)를 설치하여 읍에서 교화하여, 점차 인(仁)으로 백성을 물들게 하며 마땅함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예로써 백성들을 절도 있게 하였으니, 형벌은 아주 가벼이 하였지만 법금을 범하지 않는 것은 교화가 시행되어 습속이 아름다워져서라고 하였다.[10]

진나라는 성인들의 도를 없애고, 몹시 구차한 정치를 하였으니 14년 만에 망하였으며, 남겨 놓은 독소의 매서움은 오늘날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어서 습속을 경박하고 악하게 하였고, 인민들을 시끄럽고 완고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동중서는 거문고와 비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풀어서 다시 고쳐야 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정치가 시행되지 않아 심하면 반드시 변화시켜 다시 만들어야 마침내 가지런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나라는 천하를 얻은 이후로 항상 잘 다스리려 하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마땅히 다시 교화해야 하나 다시 교화하지 않은 데서 잃었다고 하였다.

또한 성스러운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젊으면 이를 익혀 배우게 하고, 자라면 그 재주로 자리를 주는데 작위와 녹봉을 받아 그 덕을 함양하게 하며, 형벌을 주어 그 악한 것에 위엄을 보이니, 백성들은 예(禮)와 의(誼)에 밝게 되고,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진나라신불해상앙의 법을 스승으로 삼고 한비자의 설(說)을 시행하며, 제왕의 도를 싫어하고 이리 같은 탐욕으로 습속을 만들어 명목에 책임지고 실제를 돌아보지 않으니,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면하지 않고 악을 범한 자도 반드시 형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증자는 ‘들은 바를 존중하면 고명(高明)해지고, 아는 바를 실행하면 광대(光大)해진다. 고명하고 광대해지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에 뜻을 더하여 주는데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기에 동중서는 폐하께서는 들은 바를 쓰시어, 속에서 정성을 가지고 실행하기에 이른다면 삼왕(三王)이라 하여 무엇이 다르겠냐고 하였다.[11]

선비를 기르는 방법 가운데 큰 것은 태학(太學)보다 큰 것은 없는데, 태학이란 똑똑한 선비들이 말미암는 곳이며 교화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한 군(郡)과 국(國)의 많은 대책으로 이에 응답하는 서신이 없다면 이는 왕도가 왕왕 끊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폐하께서는 태학을 일으키시고, 밝은 스승을 두시어 천하의 선비를 기르며, 자주 시험을 보고 물어서, 그들의 재주를 다 발휘하게 하면 뛰어난 사람들을 마땅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군수와 현령은 백성들의 사수(師帥, 스승의 우두머리)이어서, 흐름을 이어받아 펼치고 교화되게 하는 바이니, 사솔이 똑똑하지 못하면 주상의 덕이 전파되지 못하고, 은택도 흘러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리는 대부분 낭중, 중랑과 이(吏)이천석의 자제에서 나오는데, 낭리(郎吏)를 선발하는 데는 부유함으로써 하니, 반드시 똑똑하지만은 않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도 관리로 임명되면 직책에 맞게 하였는가를 가지고 차이를 두었지, 날짜를 쌓아 오래되었는가를 말하지 않았으니, 재주가 적은 사람은 비록 날짜를 쌓았다 해도 낮은 관직을 떠나지 못하였고, 똑똑한 인재는 비록 오래되지 않았어도 보필하고 돕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13]

지금은 날짜만 쌓으면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래되면 관직에 이르니, 염치는 혼란으로 바뀌고, 똑똑한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섞여서 그 진짜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동중서는 여러 열후와 군수, 이천석으로 하여금 각기 관할하는 곳의 관리나 백성 가운데 똑똑한 사람을 골라 1년에 각각 두 명씩 뽑아 올려 숙위하도록 하고, 대신의 능력을 보는데, 올린 것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상을 내리고, 올린 것이 불초한 사람이라면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여러 이(吏)이천석은 모두 마음을 다하여 똑똑한 사람을 찾을 것이며, 천하의 선비들을 얻어서 관리로 부릴 수 있다고 하였다. 널리 천하의 똑똑한 사람을 얻는다면 삼왕의 번성함도 쉽게 되며, 의 명성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세월을 가지고 공로로 삼지 말고, 실제로 현명함과 능력을 시험하는 것을 제일로 삼고, 재주를 헤아려 관직을 주며 덕행을 기록하여 자리를 정한다면, 청렴함과 수치스러움이 구별되며, 현명한 사람과 불초함이 다른 곳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는 제후들 속에서 발탁되었으며, 은 깊은 산속에서 일어났는데 하루 만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말은 자기에게서 나왔지만 막을 수 없고, 행동은 몸에서 나오지만 가릴 수 없으니, 말과 행동은 다스리는 것 중에 큰 것이어서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작은 것을 다하여 크게 되고, 미미한 것을 신중히 하여 드러나는 것이고, 선(善)을 자기 몸에 쌓는 것은 해가 길어지는 것이 더해지지만 사람은 모르는 것과 같고, 악을 자기 몸에 쌓아가는 것은 불이 기름을 녹이는데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당(唐)우(虞)가 아름다운 명예를 얻었고, 걸과 주가 슬퍼하며 두려워지게 된 까닭이라고 하였다.

삼왕의 도는 근원하는 곳은 다르나 상반된 것은 아니고, 모두 넘치는 것을 구하고 쇠약한 것을 부축하려는 것이지만 만난 것이 변하여 그리 되었다고 하였다. 공자는 ‘하지 않고서 다스린 사람, 그분이 순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삭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어 천명을 좇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의 도를 따랐으니, 무엇을 바꾸었겠는가! 그러므로 제왕 된 사람은 제도의 이름을 고쳐도 도의 알맹이를 변경시키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夏)가 충(忠)을 존중하였고, 은(殷)이 경(敬)을 숭상하였으며, 주나라가 문(文)을 숭상한 것은 계승한 것[폐단]을 구하기 위해 마땅히 써야 하였다고 하였다.[14]

공자는 ‘은은 하의 예를 이어서 덧붙이거나 뺐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는 은의 예를 이어서 덧붙이거나 뺐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니 혹 주를 계승하는 사람도 비록 백세(百世)라 하여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100명의 왕이 쓴 것도 이 세 사람의 것으로 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는 우(虞)를 이었으나 다만 덜고 늘린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도는 하나이며 위와 같아서라고 하였다.[15]

도의 커다란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며, 하늘은 변하지 않고 도도 역시 변하지 않으니, 을 잇고 순은 요를 이어서, 세 성인은 서로 받아 하나의 도를 지켰으며, 폐단을 담을 일이 없는 정치를 하였으니, 덜어내고 덧붙일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부터 살펴보건대, 잘 다스린 시대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 도를 같이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이어받으면 그 도를 바꾼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 한은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시대의 뒤를 이었으므로 만약 주나라의 문치(文治)를 조금 덜어낸다면 하의 충을 채용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의 천하도 오늘날의 천하이니, 다 같은 천하여서, 옛것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삼으면 하나인데 어찌하여 서로의 차이가 머냐고 하였다.

하늘도 역시 나누어 준 것이 있어서 이빨을 준 것에게는 뿔을 주지 않았고, 날개를 붙여준 것에게는 그 발을 두 개로 하였으니, 이는 큰 것을 받은 자는 적은 것을 빼앗을 수 없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에 준 녹(祿)은 힘을 써서 밥을 먹지 않게 하는 것으로 말업(末業, 상업)에서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니, 이는 큰 것을 받은 사람은 작은 것을 얻을 수 없게 한 것으로 하늘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 큰 것을 받고도 또 작은 것을 빼앗는 것은 하늘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이 백성들이 시끄러운 까닭은 부족한 것을 고생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몸은 총애를 받고 높은 자리에 올라 있고, 집안은 따뜻하며 후한 녹봉을 받아먹는데, 부귀한 밑천과 힘을 이용하여 백성과 더불어 아래에서 이익을 다툰다면, 백성이 어떻게 그와 같을 수 있겠냐고 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깎이고 달로 움츠러들어 크게 궁색한 데에 빠진다고 하였다. 부자는 사치가 넘쳐흐르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궁색하고 급하며 근심하고 고달프니 백성들은 살기를 즐기지 않는데 어찌 죄짓는 일을 피할 수 있겠냐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형벌이 많아지는 까닭이며, 간사한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주역에서는 ‘지고서 수레를 타면 도적이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수레를 타는 사람은 군자의 지위이고 짐을 짊어지는 사람은 소인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이것은 군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서민의 행동을 하는 자에게는 환란과 화가 반드시 이를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군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자의 행동을 감당한다면 공의휴노나라의 재상이 되어 한 일을 버리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16]

춘추의 대일통(大一統)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통관하는 이치라고 하였다. 지금의 스승들은 도를 달리하고, 사람들은 논의를 달리하고, 백가(百家)들은 방향을 달리하여 지향하는 뜻이 다르니, 위에서 일통(一統)을 유지할 수 없어서 법률과 제도가 자주 바뀌고, 아래에서는 지켜야 할 것을 모른다고 하였다.[17]

동중서는 어리석으나 여러 육예의 과목과 공자의 학술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 그 도를 끊어서 나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여야 치우치거나 옳지 않은 학설이 없어지며 그런 후에야 통치 기강이 하나가 될 수 있고, 법률과 제도가 밝아지며, 백성들은 좇을 바를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무제는 그 대책을 훌륭하다 하여 동중서를 강도(江都, 치소는 광릉, 장쑤성 양저우시)의 재상으로 삼았다. 젊어서 춘추를 공부하여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는데, 나아가고 물러가며 받아들이고 그만두는 것에서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삼고 존경하였다. 강도국(江都國)의 재상이 되자 역왕(易王)을 섬기게 되었다. 역왕은 황제의 형이라 평소 교만하고 혈기 있으며 용감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동중서가 예를 가지고 바르게 고쳐주니, 왕도 그를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의 재이(災異)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高祖廟)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으로 용서되고 이후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 공손홍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난 교서유단의 상(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 장탕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해 행해졌던 것이다.

기원전 179년 현재의 허베이성 헝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원청 향(溫城鄉|vertical-align=sup중국어, 현재 징 현)과 관련이 있어, 《춘추번로》에서 원청의 동 군(溫城董君중국어)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한 경제 재위 기간에 조정에 들어가 한 무제 때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황제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한때 반역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처형될 뻔했는데, 아마도 한나라가 전복되고 유교적 현인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후에 왕망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주제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황제의 수석 고문인 공손홍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동중서의 사상은 음양 우주론을 유교적 윤리 체계에 통합했다. 그는 정치적, 형이상학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서 《춘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텍스트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공양전》의 전통을 따랐다. 그는 또한 군주의 정당성을 결정하고 통치 군주에 대한 일련의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는 천인감응 교리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춘추학의 한 파인 공양학을 익혔으며, 경제 시대에 박사가 되었다. 무제의 건원 원년에 행해진 현량대책에서, 유가 외의 제자백가를 배척하고 유학을 국가 교육으로 삼도록 헌책하여 가납되었다. 이후,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유학적 교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 되었다. 또한, 군국에 태학을 설치할 것을 상주하여, 오경박사가 설치되었고, 박사가 각자의 전문으로 하는 경학을 교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다만, 오경 전체의 전문가가 갖춰지는 것은 무제 이후의 시대라고 여겨진다).

춘추의 내면을 탐구하고, 음양오행설과 융합하여 재이 사상을 전개했다. 그러나 건원 6년(기원전 136년), 요동 고묘인 고원 변전에 일어난 재이의 원인을 추측한 미정의 상주문 초고가 주부언의 손에 의해 유출되어, 무제의 눈에 띄었다. 무제가 유자를 불러 의견을 구했을 때, 동중서의 제자인 여보서가 스승의 글인 줄 모르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로 인해 동중서는 후에 용서받았지만 간신히 사형에 처해질 뻔했고, 이후 재이는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같은 춘추학자인 공손홍의 참언으로 교서국으로 좌천되는 등, 그의 평생은 불우했다. "사불우부"라는 부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만년에는 관직을 사임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살았다.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덕이 높았으며, 오직 학문의 궁리에만 인생을 바쳤다. 박사 시절에는 방에 휘장을 내리고 강의를 했으며, 3년 동안 뜰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의 수도 매우 많았으며, 새로 들어온 제자는 맏형 제자에게 강의를 듣고, 스승인 동중서의 얼굴을 모르는 자까지 있었다. 사마천 또한 동중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3. 사상

동중서는 젊어서 《춘추공양전》을 공부하고 경제박사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모아 정책을 논했는데, 동중서도 현량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성인(聖人)은 하늘의 명을 받아 정치를 하는 자로, 교화로 백성의 본성을 회복하고 제도로 백성의 정욕을 절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학만을 정통 학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 정부는 법가종횡가의 말을 물리치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 정신을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6][7][8][9][10]

무제 건원(建元) 원년(기원전 140년) 음력 10월, 무제가 조서를 내려 현량하고 방정하며 직언하고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무제가 직접 옛날과 오늘날의 잘 다스리는 도리(治道)에 관한 대책을 물었더니, 대답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그중 동중서는 춘추학의 한 파인 공양학을 익혔으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유학적 교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군국에 태학을 설치할 것을 상주하여, 오경박사가 설치되었고, 박사가 각자의 전문으로 하는 경학을 교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다만, 오경 전체의 전문가가 갖춰지는 것은 무제 이후의 시대라고 여겨진다).

춘추의 내면을 탐구하고, 음양오행설과 융합하여 재이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춘추》의 재이(災異) 기사를 응용하여 정치적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연 현상을 인간사의 징조로 해석하여 왕에게 경고를 전달하고 정책 변화를 유도했다.

동중서의 '원기(元氣)' 이론, 오행, 그리고 역사의 발전에 대한 이론은 훗날 청나라 말 개혁가인 캉유웨이에 의해 채택되어 정치 개혁을 통한 진보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3. 1. 천인감응론

동중서는 한 무제에게 유교를 국교로 삼을 것을 제안하면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을 주장했다.[6] 그는 성인(聖人)은 하늘의 뜻을 받아 정치를 하는 존재이며, 교화를 통해 백성의 본성을 회복하고 제도를 통해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보았다.[7]

동중서는 《춘추》의 재이(災異) 기사를 활용하여 정치적 조언을 하기도 했다.[8] 그는 자연 현상을 인간사의 징조로 해석하여 왕에게 경고를 전달하고 정책 변화를 유도했다.[9] 이러한 그의 사상은 한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그는 군주의 정당성을 결정하고 통치 군주에 대한 일련의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는 천인감응 교리의 창시자로 여겨진다.[11]

3. 2. 오행사상

동중서는 음양 우주론을 유교적 윤리 체계에 통합했다. 그는 정치적, 형이상학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서 《춘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텍스트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공양전》의 전통을 따랐다.[3] 그는 또한 군주의 정당성을 결정하고 통치 군주에 대한 일련의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는 천인감응 교리의 창시자로 여겨진다.[3]

3. 3. 역사순환론

동중서는 음양 우주론을 유교적 윤리 체계에 통합했다. 그는 정치적, 형이상학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서 《춘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텍스트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공양전》의 전통을 따랐다.[3] 또한 군주의 정당성을 결정하고 통치 군주에 대한 일련의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는 천인감응 교리의 창시자로 여겨진다.[3]

4. 저서

기록에 의하면 동중서는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 등 여러 저서와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등을 저술하였다.[3] 이 책들은 현재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으며, 춘추번로만이 동중서의 저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중서의 주요 저작으로는 한서에 수록된 세 편의 ''거현량대책(Ju Xianliang Duice)''과 유교 경전인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번로가 있다.

동중서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다른 중요한 자료로는 ''''인 ''사생부(士生賦)'', 한서에 수록된 그의 전기, 한서 '오행지(五行志)'에 언급된 그의 음양 및 자극-반응 이론, 그리고 그의 법률 관련 논의 단편들이 있다.

4. 1. 《춘추번로》(春秋繁露)

동중서의 저작으로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 등 여러 저서와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동중서백이십삼편은 동중서가 상소 등 여러 문서를 모은 것이며, 한서 동중서전에 수록된 현량대책(賢良對策)은 이 책의 일부로 추정된다. 문거, 옥배, 번로, 청명, 죽림 등은 주로 춘추의 득실을 논한 것이다.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춘추공양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현실 사건을 판결한 재판 기록 모음집이다.[3]

현재 유일하게 전해지는 춘추번로는 동중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춘추번로는 한나라 시대에 흩어졌던 동중서의 저술을 남북조 시대에 누군가가 재편집했다는 설이 있다.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춘추번로에 수록되지 않고 다른 학자들의 책에 인용 및 주석 형태로 전해지고 있어 이러한 설이 제기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동중서는 유교 사상을 음양오행설과 결합하여 체계화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춘추》를 정치적, 형이상학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중시했으며, 천인감응 사상을 통해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동중서


자오창 현에 위치한 동중서의 석상


양저우의 동중서 사당


동중서는 젊은 시절 《춘추공양전》을 공부하고 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한 무제는 즉위 후 전국의 현량과 문학 선비를 불러 정치에 대한 의견을 구했는데, 동중서는 유학을 중심으로 정치 교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법가종횡가를 배제하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다.[6]

그의 사상은 음양 우주론을 유교 윤리 체계에 통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춘추》와 《공양전》의 숨겨진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으며, 천인감응 교리를 통해 군주에게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려 했다.

동중서의 저작으로는 ''한서''에 수록된 ''거현량대책(Ju Xianliang Duice)''과 ''춘추번로''가 있다. ''사생부(士生賦)''라는 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5. 1. 비판

동중서의 저작으로 알려진 ''춘추번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쓴 흔적이 많다. 주희 등 여러 학자들은 이 책이 동중서가 직접 쓴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3] 현재 학자들은 오행 이론을 다루는 부분을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동중서의 '원기(元氣)' 이론, 오행, 역사 발전에 대한 이론은 훗날 청나라 말 개혁가 캉유웨이가 정치 개혁을 통한 진보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동중서의 사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

6. 일화

동중서는 젊어서 《춘추공양전》을 배우고 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무제 때에는 현량(賢良) 대책으로 유학을 관학으로 삼는 데 공헌하였다.[6]

어느 날 동중서가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손님이 찾아왔다. 동중서는 그 손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챘다. 손님이 "비가 올 것 같다"라고 말하자, 동중서는 "'소거(巢居)는 바람을 예측하고, 혈거(穴居)는 비를 예측한다'라고 하는데, 설마 그대는 여우나 너구리, 아니면 생쥐인가?"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그 손님은 늙은 너구리로 변했다.[4]

참조

[1] 서적 Dong Zhongshu, a ‘Confucian’ Heritage and the Chunqiu Fanlu https://books.google[...] BRILL 2011-04-11
[2] 서적 From Chronicle to Canon: The Hermeneutics of the Spring and Autumn According to Tung Chung-shu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08-28
[3] 서적 One and All: The Logic of Chinese Sovereignt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24
[4] 서적 捜神記 平凡社 1992-01
[5] 뉴스 동중서(董仲舒)의 인의(仁義)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1-03-06
[6] 문서 논어 위령공편에 있는 말이다. 원문은 ‘人能弘道 非道弘人’이다.
[7] 문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방이란 말로 천하를 뜻한다.
[8] 문서 봉황과 용마는 모두 상서로운 것을 상징하며 군왕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순임금 시절에 봉황이 조정에 날아왔고, 문왕 시절에는 봉황이 기산(岐山)에서 크게 울었다. 역시 복희씨 시절에는 황하에서 용마가 도서(圖書)를 짊어지고 출현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논어 자한편에 있다. 원문은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이다. 이는 공자가 자기는 덕을 갖고 있지만 이를 실천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지위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공자 자신은 그럴 만한 지위와 힘을 가진 제왕이 아니어서 이를 실행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한 것이다.
[9] 문서 학기(學記)에 보면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집[家]에는 숙(塾)이란 교육기관이 있었고, 당(黨, 500가 정도의 마을)에는 상(庠)이란 교육기관이 있었으며, 수(遂, 5개의 현)에는 서(序)가 있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었다고 한다.
[10] 문서 입으로는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덕의(德義)라는 기준을 본받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11] 문서 이 말은 상서전해(尙書全解) 권20에 실려 있는 ‘曾子曰 尊其所聞 則高明矣 行其所知 則光大矣 高明光大 不在乎他 在乎加之意而已’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삼왕은 하우, 상탕, 무왕 등 역사상 훌륭한 임금으로 불리는 사람을 말한다.
[12] 문서 장리는 장급(長級) 관리들을 말한다. 장급 관리는 한 부서의 장으로, 주의 자사, 군의 태수, 현의 현령 같은 관직이다.
[13] 문서 중랑과 낭중은 모두 궁정의 금위관(禁衛官)인데, 중랑은 녹질이 600석으로 중급 정도이고 낭중은 녹질이 300석으로 하급이라 할 수 있다. 녹질이 2천 석은 관리의 직급인데 군의 태수 등 고급 관원이다. 똑똑하지 않다는 것은 관리의 선발기준이 고관의 자제이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오는 제도 아래에서는 뽑히는 사람이 반드시 똑똑하지는 않게 된다는 말이다.
[14] 문서 논어전해(論語全解) 권8에 나오는 말이다.
[15] 문서 이 말은 논어집해의소(論語集解義疏) 권1에 실려 있다.
[16] 문서 주역의 해괘(解卦) 육삼(六三)에 나오는 효사(爻辭)이다. 해괘는 감괘가 밑에 있고 진괘가 위에 있는 괘이고, 육삼이란 밑에서부터 세 번째 효가 음효인데, 효사에서 설명하기를 지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고, 타는 것은 대인이 하는 일인데, 소인이 하는 일을 하며 또 대인이 하는 일을 하니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공의휴는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의 집에 가 보니 처가 비단을 짜고 있어서 노하여 나왔다. 역시 그 처가 정원에 있는 채소로 밥을 먹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 채소를 다 뽑아 버렸다. 그리고 말하였다. ”나는 이미 녹을 받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정원에서 일할 사람의 일거리를 빼앗고 길쌈하는 여자의 이익을 빼앗다니!“
[17] 문서 대일통이란 봉건국들이 모두 중앙정부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는 춘추공양전에서 주장한 것이다. 동중서는 춘추공양전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그 학설을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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