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형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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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사(劉賜)는 전한 시대의 제후왕으로, 회남여왕 유장의 아들이자 여강왕, 형산왕을 역임했다. 기원전 172년 아버지 유장이 자결한 후 양주후에 봉해졌으며, 기원전 164년 여강왕으로 봉해졌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나라의 제안을 거절하고 월나라와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어 형산왕으로 옮겨졌다. 이후 가정 불화와 모반 혐의로 인해 기원전 122년 자결했으며, 형산국은 폐지되었다.

유사 (형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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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적

유사는 기원전 172년 아버지 회남여왕 유장이 반란을 일으켰다 자결한 후, 문제에 의해 양주후(陽周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64년, 회남나라가 셋으로 나뉠 때 유량을 제외하고 모두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때 유사는 여강왕으로 봉해졌다.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했을 때 유사는 이웃 오나라유비의 사신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양쯔강 이남의 여강나라와 국경을 접한 월나라와 사신을 왕래했다. 기원전 153년, 형 유발이 오초칠국의 난에서 조정에 충성하여 포상으로 형산에서 제북으로 봉해졌고, 유사는 월나라와 여러 차례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여강국을 회수당하고 유발의 옛 제후국인 형산국을 받아 양쯔강 이북으로 옮겨졌다.

유사는 형 유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유안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것을 듣고는 유안에게 병탄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에 호응했다. 유사는 중앙 정부로부터 자신의 권한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특히 질이백석 관리 임명권을 빼앗긴 사건은 그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다. 원광 6년(기원전 129년), 남의 밭을 빼앗고 무덤을 허물어 자기 밭을 넓힌 일로 고발당했으나 체포는 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왕에게 있던 질이백석 관리 임명권이 황제에게 넘어갔다.

결국 유사는 모반을 계획했으나, 형 회남왕 유안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발각되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11월, 유사는 자결했다.

2.1. 여강왕 시기

유사는 기원전 172년 아버지 회남여왕 유장이 반란을 일으켰다 자결한 후, 문제에 의해 양주후(陽周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64년, 회남나라가 셋으로 나뉠 때 유량을 제외하고 모두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때 유사는 여강왕으로 봉해졌다.

2.2. 형산왕 시기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했을 때 유사는 이웃 오나라유비의 사신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양쯔강 이남의 여강나라와 국경을 접한 월나라와 사신을 왕래했다. 기원전 153년, 형 유발이 오초칠국의 난에서 조정에 충성하여 포상으로 형산에서 제북으로 봉해졌고, 유사는 월나라와 여러 차례 교류한 것이 문제가 되어 여강국을 회수당하고 유발의 옛 제후국인 형산국을 받아 양쯔강 이북으로 옮겨졌다.

2.3. 가정 불화와 갈등

유사는 형 유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안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것을 듣고, 유사는 유안에게 병탄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에 호응했다.

유사는 왕후 승서, 희 서래, 미인 궐희를 처첩으로 두었는데, 승서가 죽자 서래를 왕후로 세웠다. 승서와 궐희는 서로 총애를 다투며 질투했다. 궐희는 태자 유상에게 서래가 무고(巫蠱)로 승서를 죽이려 했다고 모함했다. 또한 유상은 술자리에서 서래의 오빠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이로 인해 서래와 유상은 서로 반목했다. 유상의 누이동생 유무채는 시집에서 버림받고 돌아와 빈객과 간통했는데, 유상이 이를 꾸짖자 유상과 유무채의 사이도 멀어졌다. 유무채와 유효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서래에게 의지했기 때문에, 서래와 유무채는 결탁하여 유상을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유효를 태자로 세우려 하며 유사에게 유상을 자주 헐뜯었다. 유사는 이 말을 듣고 유상을 매질했다. 원삭 4년(기원전 125년), 서래의 계모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유사는 유상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유상을 매질했다. 이후 유사가 병에 걸리자 유상은 병을 핑계로 문병하지 않았고, 서래·유무채·유효는 함께 유상을 헐뜯었다. 이에 유사는 마침내 태자를 폐위할 마음을 품었다.

서래는 유효까지 내쫓고 자신의 아들 유광을 태자로 세우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시녀를 시켜 유효를 유혹하여 행실을 어지럽히려 했다. 유상은 이를 알고 서래와 간음하여 서래의 입을 막고자 술자리에서 서래를 유혹했다. 서래는 분노하여 유사에게 알렸고, 유사는 유상을 잡아 매질했다. 유상은 황제에게 고변하겠다며 궁을 나갔고, 유사는 유상을 추격해 잡아 궁에 감금했다.

2.4. 모반 혐의와 최후

유사(劉賜)는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모반을 계획했으나, 형 회남왕 유안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발각되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11월, 진희가 유효의 집에 있다가 연루되어 잡혀들어갔다. 유효는 모반의 중심 인물인 진희가 잡히자 일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했고, 자수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매혁·진희 등과의 모의를 자수했다. 정위 장탕이 심문하여 증거를 확보하자 조정에서는 유사를 잡아들이도록 청했다.

무제는 체포하지는 말라고 명하고 중위 사마안대행 이식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유사는 사실대로 말했고, 사마안과 이식은 관리들에게 왕궁을 에워싸게 하고 돌아와 전말을 보고했다. 공경들은 종정, 대행, 패군의 관리들을 보내 형산왕을 징치하자 했고, 유사는 이를 듣고 자결했다.

유효는 자수했기 때문에 모반죄는 면했으나, 아버지의 시녀와 간통한 죄로 기시되었다. 서래는 승서를 무고한 죄로, 유상은 아버지를 고발한 죄로 기시되었다. 그 외에 관련된 자도 다 죽었고, 형산국은 폐지되어 군이 되었다.

2.4.1. 유사의 모반 배경

劉賜중국어는 중앙 정부로부터 자신의 권한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질이백석 관리 임명권을 빼앗긴 사건은 그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다. 원광 6년(기원전 129년), 남의 밭을 빼앗고 무덤을 허물어 자기 밭을 넓힌 일로 고발당했으나 체포는 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왕에게 있던 질이백석 관리 임명권이 황제에게 넘어갔다.

이를 원망한 유사는 해자, 장광창과 모의하고 병법과 천문에 능한 자들을 모아 모반을 도모했다. 유사는 강도 사람 매혁과 진희에게 맡겨 무기를 준비하고 옥새와 장군, 관리의 인수를 만들었다. 그는 황제를 노리기보다는, 형 회남왕 유안이 모반하여 회남을 비우면 그 틈에 강회 지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2.4.2. 회남왕과의 관계

유사는 형 회남왕 유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함께 모반을 모의하기도 했다. 유사는 강도 사람 매혁과 진희에게 무기 준비와 옥새 및 장군과 관리의 인수를 만들도록 맡겼다. 그러나 유안처럼 황제를 노리지는 않고, 유안이 모반하여 회남을 비우면 그 틈에 강회 지역을 석권할 생각을 했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회남왕은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유사에게 함께 모반을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유사는 이를 받아들여 황제에게 병을 핑계로 입조할 수 없다고 글을 올리고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11월, 회남왕의 모반 사건이 수사 중에 진희가 유효의 집에 있다가 연루되어 잡혀들어갔고, 결국 유사는 자결했다.

3. 가계

형산왕 유사는 왕후 승서(乘舒), 서래(徐來), 궐희(厥姬)를 비롯한 여러 부인을 두었다. 승서와의 사이에서는 유상(劉爽), 유무채(劉無采), 유효(劉孝)를 낳았다. 서래는 유광(劉廣)과 세 명의 자녀를, 궐희는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유광치(劉廣治)라는 아들도 있었으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다.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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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비고
태자 유상(劉爽)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고발하려다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유무채(劉無采)유상과 사이가 나빴으며, 서래와 결탁하여 유상을 태자 자리에서 내쫓으려 했다.
유효(劉孝)아버지의 시녀와 간통한 죄로 처형되었다.
서래(徐來) 소생
유광(劉廣)서래는 유광을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타)3명의 자녀
궐희(厥姬) 소생
(불명)2명의 자녀
(미상) 소생
종익후 유광치원삭 6년(기원전 123년) 3월에 봉해졌으나, 11년 후 원정 5년(기원전 112년)에 주금률을 어겨 작위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