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옹주
1. 개요
공신옹주는 조선 성종과 귀인 엄씨의 딸로, 한경침과 혼인했으나 자녀 없이 남편과 사별한 후 수절했다. 연산군 때 어머니 엄귀인이 사사당하고 자신은 폐서인되어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어 표창을 받고 삼목도를 하사받았다. 1549년에 사망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굴된 무덤에서 백자묘지명이 출토되어 생애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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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년 출생 -
아시카가 요시즈미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호리고에 구보의 아들로 태어나 덴류지 가겐인의 후계자였으나 메이오 정변으로 쇼군이 되었고, 실권은 호소카와 마사모토에게 있었으며, 폐위 후 쇼군 복위에 실패하고 사망했다. -
1481년 출생 -
회산군
회산군은 조선 성종의 서자이며, 숙의 홍씨의 아들로 봉사 안방언의 딸과 혼인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중종 재위 기간에 김안로의 간언을 물리쳤으며, 후사가 없어 계산군 이수계가 대를 잇고 시호는 정간이다. -
1549년 사망 -
마르그리트 당굴렘
마르그리트 당굴렘은 프랑스 왕족이자 작가, 예술 후원가로서, 나바라 왕비가 되어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종교 개혁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1549년 사망 -
윤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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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생애
1481년(성종 12년) 성종과 숙의 엄씨의 딸로 태어난 공신옹주는 1494년(성종 25년) 한명회의 손자 한경침과 혼인하였으나, 1498년(연산군 4년) 남편이 사망하자 수절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어머니 엄귀인이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공신옹주 또한 폐서인되어 아산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고, 중종은 옹주의 절개를 표창하고 삼강행실속록에 싣도록 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공신옹주는 인천 삼목도를 하사받았는데, 이 섬은 1503년에 연산군에게서 하사받은 것이었으나, 갑자사화로 소유권을 잃었다가 중종이 다시 돌려준 것이다. 말년에는 외가인 영월 엄씨 가문과 남편 한경침의 제사를 위해 후사를 세웠다.
1549년(명종 4년) 2월 7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양주 줄동(楊州 茁洞)에 매장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혼인
1481년(성종 12년) 3월 11일, 성종과 숙의 엄씨의 딸로 태어났다. 엄씨에게는 외동딸이었다.
1494년(성종 25년), 한명회의 손자인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과 혼인하였다. 청녕위와 공신옹주의 저택을 수리하는 데 드는 건축 자재와, 이에 소요되는 백성들의 노역에 대해 사간원에서 성종에게 불가함을 아뢰고, 경연에서도 공신옹주 저택 공사에 대한 부당함을 건의하였으나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년), 남편 한경침이 사망하였으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이후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수절하였다.
2.2. 남편과의 사별 및 유배
1498년(연산군 4년), 남편 한경침이 사망하였으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이후 공신옹주는 사망할 때까지 수절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가 궁에서 폐출되어 사사당한 일의 배후를 공신옹주의 어머니인 엄귀인으로 보아, 엄귀인을 죽이고 공신옹주 또한 폐서인하여 아산현에 위리안치시켰다. 옹주는 남편의 신위를 유배지에 가져가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며 무엇이든 신위에 먼저 천신한 뒤에 입에 대었다. 이에 아산현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으며, 유배지에서의 옹주의 행적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또한 옹주의 절행을 《삼강행실속록》에 추가하여 싣도록 하였다.
2.3. 중종반정 이후 복권과 표창
중종반정으로 공신옹주는 사면되었다. 유배지에서 옹주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또한 옹주의 절개를 《삼강행실록》에 추가하여 싣도록 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공신옹주는 인천 삼목도를 하사받았다. 이 섬은 1503년에 옹주가 연산군에게서 하사받은 것이었으나, 공신옹주 모녀가 갑자사화에 연루되면서 소유권을 잃었다가 중종이 다시 돌려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