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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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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화국궁은 동독 시기 베를린에 건설된 건물로, 본래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 성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1973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완공되었으며, 동독의 단원제 입법부인 Volkskammer를 수용하고 문화 궁전 및 인민의 집 역할을 했다. 공화국궁은 1976년, 1981년, 1986년에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전당대회가 열렸으며, 동베를린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나, 독일 통일 이후 석면 문제와 베를린 성 복원 계획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에는 베를린 궁전의 외관을 재현한 훔볼트 포럼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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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궁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共和国宮殿 (공화국 궁전)
원어 이름Palast der Republik (팔라스트 데어 레푸블리크)
위치미테, 베를린, 독일
용도문화 시설, 의회 건물
건축 스타일근대 건축
상태철거됨
역사
착공1973년
완공1976년
개관1976년 4월 23일
철거 시작2006년 2월 6일
철거 완료2008년
건축
건축가하인츠 그라프룬더 및 독일 민주 공화국 건축 아카데미
건설 비용4억 8500만 ~ 10억 마르크
기타 정보

2. 역사

공화국궁은 본래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정궁인 베를린 성이 있던 자리에 위치했다. 베를린 성은 1918년 독일 제국이 해체되면서 박물관과 국가행사에 이용되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종전 후 소련군 점령지구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세워진 뒤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성을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1950년 철거했다.[4]

이후 성터는 1951년부터 1990년대까지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으로 불렸다. 1950년대 중반 동독 당국은 이곳에 초고층 정부청사를 건설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1960년대에 정부청사 건축이 다시 계획되었다. 1973년 착공하여 1976년 '공화국궁'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었다.

공화국궁전 건설 현장, 1974년


공화국궁은 동독 인민의회 의사당, 콘서트홀, 미술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전당대회,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초청한 동독 수립 40주년 기념행사 등 주요 정치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16] 동베를린 시민들에게는 "에리히의 램프 가게"(Erichs Lampenladende)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7]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공화국궁은 건물에 사용된 석면 문제로 인해 폐쇄되었다. 2003년까지 석면 제거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후 행위예술 전시관 등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를린 성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졌다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독일 정부와 베를린 시 당국은 공화국궁을 철거하고 베를린 성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진 구 동베를린 시민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2006년부터 2년간 철거 작업이 진행되어 공화국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9]

2006년 독일 연방 하원은 베를린 궁전 재건을 결정했고, 2020년에는 건설 공사가 완료되어 베를린 궁전의 외관을 재현한 박물관 "훔볼트 포럼"이 개관했다.

2. 1. 베를린 성 철거와 공화국 궁전 건설

공화국궁 자리는 본래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정궁인 베를린 성이 있던 곳이었다. 베를린 성은 1918년 독일 제국 해체 후 박물관과 국가행사에 이용되다가, 1945년 2월 3일2월 24일 공습으로 일부와 지붕이 파괴되었다. 독일 항복 후 소련군 점령지구에 편입되었고, 일부 파괴된 부분은 보수되어 전시장으로 계속 이용되었다. 그러나 1949년 독일 민주 공화국 수립 후 동독 공산정권은 베를린 성을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1950년 9월부터 12월에 걸쳐 철거했다.[4]

이후 성터는 1951년부터 1990년대까지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으로 불렸다. 1950년대 중반 동독 당국은 성터 일부에 초고층 정부청사를 짓는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 정부청사 건축이 계획되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착공되어 1976년에 '공화국궁'이라는 명칭으로 완공되었다. 하인츠 그라푼더와 GDR 건축 아카데미가 설계한 공화국궁은 현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청동 거울 창문이 특징적이었다. 건물은 길이 180m, 너비 85m, 높이 32m의 육면체 형태였다.[2] 건설에는 볼프강 융커 건설부 장관의 내부 목록에 따르면 4억 8,500만 동독 마르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공화국궁은 인민의회(Volkskammerde) 의사당, 콘서트홀, 미술관, 볼링장, 디스코, 13개의 레스토랑·카페·바 등을 갖춘 다목적 복합 건물이었다. 문화 궁전과 사회주의 운동에 인기 있는 인민의 집 개념에 영향을 받아 설계되었다. 슈프레 강을 따라 운하 옆 테라스로 접근할 수 있는 대형 볼링장도 있었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공간에는 슈타지 관계자들이 직원과 방문객을 감시하기 위한 수많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5] 이 건물은 GDR 최초로 자체 지지 강철 골격을 갖춘 건물이었으며, 화재 방지를 위해 5,000톤의 석면이 사용되었다.

1976년, 1981년, 1986년에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전당대회가 공화국궁에서 열렸으며, 1989년에는 동독 당국이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초대해 동독 수립 4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2. 2. 동독 시절의 활용

공화국궁은 1973년에 준공되어 1976년에 '공화국궁'이라는 명칭으로 완공되었다. 1976년 4월 23일에 공식적으로 개관되었으며, 이틀 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16] 이곳에서 1976년, 1981년, 1986년에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전당대회가 열렸다.[16] 1989년에는 동독 당국이 소련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초대해 동독 수립 4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16]

궁전이 문을 연 이후, 동독에서는 수많은 중요한 문화, 정치, 학술, 사회 행사가 열렸다. 특히 너비 67m, 높이 18m의 대형 육각형 방인 대강당은 다목적성으로 유명했는데, 바닥 아래에 있는 승강 장치를 통해 무대의 높이와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무대 표면적은 170m2에서 1000m2 범위 내에서 조정될 수 있었고, 강당에는 1,000명에서 4,500명의 참석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동독 텔레비전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인 ''Ein Kessel Buntes''의 많은 에피소드가 대강당에서 녹화되었다.

쿠르트 마주어 지휘 아래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와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메시아'와 같은 고전 음악의 현대적 해석, 불라트 오쿠자바 (1976년 11월 29일), 해리 벨라폰테 (1983년 10월 25일), 카렐 고트[6], 록 밴드 퍼플 슐츠 (1989년 1월 21일) 등의 공연도 있었다.

에리히 밀케, 슈타지의 수장이자 1983년 3월 25일 공화국 궁전에서 정기적으로 행사를 열었던 SV 디나모의 클럽 회장으로서 연설하는 모습


1986년의 공화국 궁전 정면, 운터 덴 린덴에서 바라본 모습


1980년 1월 31일에는 탠저린 드림이 궁전에서 라이브로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는 요하네스 슈멜링이 밴드와 함께 한 첫 번째 라이브 공연이었다. 에리히 호네커, 빌리 슈토프 및 기타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이 참석한 이 콘서트는 탠저린 드림이 동독 정부로부터 동베를린에서 공연을 허락받은 최초의 서방 그룹이었기 때문에 "철의 장막 뒤의 공연"으로 불렸다. 이 콘서트의 녹음 앨범은 동독 음반 레이블 Amiga에서 ''Quichotte''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6년 후 Virgin Records를 통해 전 세계에 발매되면서 ''Pergamon''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83년 10월, 서독 록 스타 우도 린덴베르크는 궁전에서 콘서트를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그러나 린덴베르크는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를 풍자한 자신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Sonderzug nach Pankow" ("판코로 가는 특별 열차")를 슈타지의 체포 및 투옥 위협 때문에 연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1987년 4월에는 미국의 라틴 록 밴드 산타나가 이곳에서 두 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1990년 8월 22일에서 23일 밤, ''인민 의회''(Volkskammer)는 궁전에서 10월 3일부터 동독을 독일 연방 공화국에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공화국 궁전은 서베를린의 슈프링어 출판 언론과 동독 시민들 사이에서 "팔라초 프로초" (palazzo prozzo, 'protzen'은 '과시하다'는 의미의 언어 유희), "에리히의 램프 가게"[7], "공화국의 짐"(Ballast der Republik) 등과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2. 3. 통일 이후의 논란과 철거

1990년 동독이 서독흡수통일되면서 공화국궁은 비게 되었다.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석면이 대량으로 사용된 것이 밝혀져 1990년대부터 2003년까지 석면 제거 공사를 해 한동안 건물 출입이 제한되었다. 이후 공화국궁은 한동안 존치되었고, 행위예술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베를린 성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진 탓에 독일연방공화국 정부와 베를린 시 당국은 공화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베를린 성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침에 대해 과거 동독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구 동베를린 시민들이 거세게 반발,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철거는 예정대로 강행되었다.[8][9]

1990년 9월 19일, 인민의회의 법령에 따라 궁전은 석면으로 오염된 사실이 밝혀져 통일 2주 전에 일반에게 폐쇄되었다. 2003년까지 석면이 제거되었고, 내부 및 외부 설비도 제거되어 안전한 재건축 또는 해체가 가능해졌으며, 2003년 중반에 건물 껍데기가 방문객에게 개방되었다. 2003년 11월, 연방의회는 궁전을 철거하고 베를린 궁전을 재건하기로 결정했으며, 자금 확보 전까지 해당 지역을 공원 부지로 남겨두었다.

2004년 초부터 궁전은 병마용 전시, 베를린을 기반으로 한 유명 밴드 아인슈튀르첸데 노이바텐의 특별 콘서트 등 행사에 사용되었다. 이후 궁전은 사용되지 않고 낡아졌다. 2006년 2월 6일에 철거가 시작되었으며, 약 15개월이 소요될 예정이었고 비용은 1200만유로였으나, 다양한 장소에서 더 많은 석면이 발견되면서 철거가 지연되었고, 예상 완료일은 2008년 말로 연기되었다. 한때 건물을 지탱했던 약 35,000톤의 강철은 아랍에미리트로 운송되어 부르즈 할리파 건설에 사용되었다.[10]

2003년, 아스베스토스와 내부 장식이 제거되어 일반에 공개된 건물 내부


공화국궁전은 동독의 부정적인 역사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동독 생활의 기억과 결합된 상징적인 건물이라며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도 있었다. 그러나 2003년 11월, 독일 연방 의회는 공화국궁전의 철거와 베를린 궁전의 재건 자금이 모일 때까지 부지를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결했다. 해체는 2006년 2월 6일부터 15개월의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해체 작업은 주변의 역사적 건축물, 예를 들어 베를린 대성당 등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신중하고 천천히 진행되었으며, 해체 비용은 1200만유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추가로 석면이 발견되는 등 작업이 지연되어 해체 완료는 2008년 말로 연기되었다. 해체 후, 공화국궁전 부지는 땅이 구멍처럼 크게 드러난 상태였고, 부지의 일부에는 다채로운 컨테이너 형태의 임시 미술관이 세워져 있었다. 2020년에는 건설 공사가 완료되어, 베를린 궁전의 외관을 재현한 박물관 "훔볼트 포럼"이 개관했다.

2. 4. 베를린 성 재건 (훔볼트 포럼)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후, 공화국궁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석면이 대량으로 사용된 것이 밝혀졌다. 1990년대부터 2003년까지 석면 제거 공사가 진행되어 한동안 건물 출입이 제한되었다. 이후 공화국궁은 행위예술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베를린 성을 철거한 자리에 세워진 탓에 독일연방공화국 정부와 베를린 시 당국은 공화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베를린 성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과거 동독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구 동베를린 시민들이 이에 거세게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철거는 예정대로 강행되었다. 공화국궁 철거는 2006년부터 2년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32년간 존재했던 공화국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6년 1월, 독일 연방 하원은 베를린 궁전 재건을 결정했고, 약 2년 후 두 번째 최종 투표에서 계획이 재승인되었다. 베를린 성의 세 면은 원래 모습과 똑같이 복제하고, 네 번째 면과 내부는 현대적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재건된 궁전은 훔볼트 포럼으로 명명되었으며, 훔볼트 대학교의 소장품과 비유럽 미술관을 수용하고 있다. 2008년 11월,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체스코 스텔라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선정되었다.[11] 재건은 2015년에 시작되어[12] 2020년에 완료되었다.[13] 건물은 2021년에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공화국 궁전의 일부 품목(예: 샹들리에, 원래 표지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14]

3. 건축적 특징

공화국궁(Palast der Republikde)은 하인츠 그라푼더와 GDR 건축 아카데미(Bauakademie der DDR)가 설계한 현대 건축 양식의 건물로, 청동색 거울 창문이 특징이다.[2] 180m 길이, 85m 너비, 32m 높이의 육면체 형태로, 두 개의 거대한 외부 블록과 그 사이에 삽입된 중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인접 건물들의 높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새 건물은 부지의 동쪽 절반을 차지했고, 서쪽 절반은 군사 퍼레이드 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중장비 차량의 진동이 박물관 섬의 불안정한 지반에 있는 유리 외관을 위협하는 것으로 밝혀져 카를-마르크스-알레로 옮겨졌다.

궁전은 문화 궁전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인기 있었던 인민의 집 개념의 영향을 받은 다목적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문화 건물은 동구권뿐만 아니라 벨기에, 프랑스(조르주 퐁피두 센터), 네덜란드, 스웨덴(스톡홀름 문화의 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궁전 하부에는 슈프레 강 운하 옆 테라스로 접근할 수 있는 대형 볼링장이 있었으며, 브런즈윅 레인 장비와 바가 갖춰져 있었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궁전 부분에는 슈타지 관계자들이 직원과 방문객을 감시하기 위한 수많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5] 이 건물은 GDR 최초로 자체 지지 강철 골격을 갖춘 건물이었으며, 화재 방지를 위해 5,000톤의 석면이 사용되었다.

4. 예술 작품

공화국 궁전은 1976년 4월 23일에 공식적으로 개관되었으며, 이틀 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궁전이 문을 연 이후,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 수많은 중요한 문화, 정치, 학술, 사회 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너비 67m, 높이 18m의 대형 육각형 방인 대강당에서 열렸다. 대강당은 바닥 아래에 있는 승강 장치를 통해 무대의 높이와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고, 무대 표면적은 170sqm에서 1000sqm 범위 내에서 조정될 수 있었으며, 1,000명에서 4,500명의 참석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동독 텔레비전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인 ''Ein Kessel Buntes''의 많은 에피소드가 대강당에서 녹화되었다. 쿠르트 마주어 지휘 아래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와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메시아'와 같은 고전 음악의 현대적 해석, 불라트 오쿠자바 (1976년 11월 29일), 해리 벨라폰테 (1983년 10월 25일), 카렐 고트 (1983년[6], 1986년에는 다라 롤린스 및 하이디 얀쿠와 함께, 1987년) 또는 록 밴드 퍼플 슐츠 (1989년 1월 21일)의 공연이 있었다.

탠저린 드림은 1980년 1월 31일 궁전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공연은 요하네스 슈멜링이 밴드와 함께 한 첫 번째 라이브 공연이었다. 에리히 호네커, 빌리 슈토프 및 기타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이 콘서트는 탠저린 드림이 당시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에서 공연을 허락한 최초의 서방 그룹이었고 "철의 장막 뒤의 공연"으로 불렸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녹음된 콘서트 앨범은 동독 음반 레이블 Amiga에서 ''Quichotte''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6년 후 Virgin Records를 통해 전 세계에 발매되면서 ''Pergamon''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83년 10월, 서독 록 스타 우도 린덴베르크는 궁전에서 콘서트를 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콘서트에서 린덴베르크는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를 풍자한 "Sonderzug nach Pankow" ("판코로 가는 특별 열차")를 연주하지 못했는데, 슈타지로부터 체포 및 투옥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1987년 4월에는 미국의 라틴 록 밴드 산타나가 이곳에서 두 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 예술가들(발터 보마카, 빌리 시테, 볼프강 마테오이어, 베르너 튑케, 베른하르트 하이시히)의 16점의 기념비적인 그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꿈''을 선보였다. 이 그림들은 20년 뒤 포츠담에서 전시되었다.[15]

5. 비판적 시각

공화국궁은 원래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정궁이었던 베를린 성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베를린 성은 1918년 독일 제국이 해체된 후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45년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이후 동독 공산 정권은 베를린 성을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로 규정하고 1950년 철거했다.[4]

공화국궁은 동독 정권의 상징적인 건물로 사용되었지만,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건물에 사용된 다량의 석면이 문제가 되었다.[5] 2003년까지 석면 제거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독일 정부와 베를린 시 당국은 베를린 성 복원을 위해 공화국궁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구 동독 주민들은 동독 시대에 대한 향수를 이유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나, 결국 철거는 2006년부터 2년간 진행되어 공화국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9]

공화국궁 건설에는 볼프강 융커의 목록에 따르면 4억 8,500만 동독 마르크가 소요되었지만, 다른 추정으로는 8억에서 10억 마르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2]

동독 시민들 사이에서는 "팔라초 프로초"(palazzo prozzo, '과시하다'는 의미) 또는 "에리히의 램프 가게"(에리히 호네커의 램프 가게, 내부의 많은 샹들리에에 대한 말장난)와 같은 비판적인 별명으로 불렸다.[7] "공화국의 짐"(Ballast der Republik)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참조

[1] 문서 Stasi Museum, East Berlin
[2] 웹사이트 Palace of the Republic Berlin https://architectuul[...]
[3] 웹사이트 Palace of the Republic Berlin https://architectuul[...]
[4] 웹사이트 Berlin 'resurrects' its Palace of the Republic https://www.dw.com/e[...]
[5] 웹사이트 Palast der Republik im Humboldt Forum https://www.bauen-ak[...] 2020-12-02
[6] 웹사이트 Stars im Konzert: Karel Gott https://programm.ard[...] 2022-04-22
[7] 웹사이트 Negotiating the past in Berlin: the Palast der Republik https://smarthistory[...]
[8] 웹사이트 Berlin's Palace of the Republic Faces Wrecking Ball http://www.dw-world.[...] 2011-09-10
[9] 웹사이트 The Palace of the Republic in Berlin https://web.archive.[...] 2011-01-03
[10] 웹사이트 Berlin's Demolished Socialist Palace is Revived in Dubai http://www.dw-world.[...] Deutsche Welle 2008-08-13
[11] 뉴스 Architect Chosen for Berlin Palace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8-10-28
[12] 웹사이트 Negotiating the past in Berlin: the Palast der Republik https://smarthistory[...]
[13] 웹사이트 Eröffnung des Humboldt Forum: Der dritte Palast {{!}} Weltkunst https://www.weltkuns[...] 2021-10-10
[14] 웹사이트 Berlin's bizarre new museum: a Prussian palace rebuilt for €680m https://www.theguard[...]
[15] 뉴스 DDR-Staatskunst aus dem Palast https://www.pnn.de/p[...] 2021-10-09
[16] 간행물 「共和国宮殿から民衆宮殿へ」 http://www.goethe.de[...] ゲーテ・インスティテュート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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