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분 (군사)
1. 개요
호분은 황제를 호위하는 군사 조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전한 무제가 기문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원시 원년에 호분랑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후한 시기에도 황제의 숙위와 시종을 담당했다. 이후에도 황제의 위사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당나라 때에는 피휘로 인해 무분으로 개칭되었다.
2. 역사
호분은 중국 황제의 친위대 중 하나로, 그 역사는 전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한 무제가 건원 3년(기원전 138년)에 광록훈 아래에 설치한 기문(期門)이 그 시초이다. 기문은 황제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원시 원년(1년)에는 '호랑이처럼 용맹하다'는 뜻을 담아 호분랑(虎賁郎)으로 명칭이 바뀌고 중랑장이 지휘하게 되었다.
후한 시대에도 호분은 광록훈에 소속되어 황제의 숙위와 시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는 호분중랑장을 중심으로 조직이 체계화되었고, 호분랑 직책이 아들에게 세습되기도 했다. 호분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왕망이나 조조와 같이 강력한 권력을 가진 신하가 구석을 받을 때 특별히 호분을 하사받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이후 왕조 교체기에 신하에게 주어지는 특권의 하나로 자리 잡기도 했다.
호분이라는 명칭은 이후 왕조에서도 황제의 위사(衛士)를 가리키는 말로 계속 사용되었으나, 당나라 시대에는 황실 조상인 이호의 이름 '호(虎)'를 피하기 위한 피휘 조치로 잠시 무분(武賁)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2.1. 전한
전한 무제가 건원 3년(기원전 138년)에 광록훈의 부하로 기문(期門)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기문은 낭(郎)과 같이 정해진 인원수는 없었으며, 많을 때는 천 명에 이르렀고 복야(비 천석)가 설치되었다. 황제의 문 아래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은밀히 황제를 수행했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한서』 백관공경표상 안사고 주 인용 복건 설)
평제 원시 원년(1년)에 기문의 명칭을 호분랑(虎賁郎)으로 고치고 중랑장(비 이천석)을 두었다. '호분(虎賁)'은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과감하다는 의미이다.
왕망이 원시 5년(5년)에 구석을 받았을 때, 여러 은전 중 하나로 호분 300명을 자신의 문을 지키는 위사로 받았다.(『한서』왕망전상)
2.2. 후한
후한 시대에도 호분은 광록훈에 소속되어 황제의 숙위와 시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호분 조직은 호분중랑장이 총괄했으며, 그 아래에 여러 직책들이 있었다.
| 직책 | 봉록 | 주요 임무 |
|---|---|---|
| 호분중랑장 | 이천석 | 호분 조직 총괄, 숙위 및 시종 |
| 호분중랑 | 육백석 | 숙위 및 시종 |
| 호분시랑 | 사백석 | 숙위 및 시종 |
| 호분낭중 | 삼백석 | 숙위 및 시종 |
| 절종호분 | 이백석 | 숙위 및 시종 |
| 좌·우 복야 | 육백석 | 호분랑 궁술 교육 |
| 좌·우 폐장 | 육백석 | 당직 관리 |
호분랑의 직책은 세습되는 특징이 있어,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또한 조직 내에는 좌·우 복야와 좌·우 폐장이 각 1명씩 배치되었는데, 복야는 호분랑에게 활쏘기 등 무예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고, 폐장은 당직 근무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호분은 황제의 친위대로서 높은 위상을 가졌기 때문에, 조조가 건안 18년(213년)에 위공(魏公)에 오르며 구석을 받을 때에도 특별히 호분 300명을 하사받아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데 활용했다. 이러한 사례는 이후 선양을 통해 왕조가 교체되기 전 단계에서 신하에게 구석을 내릴 때 호분을 함께 하사하는 관례로 이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