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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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형은 전한 시대의 관리로, 학문에 정진하여 승상에까지 올랐으나 부정부패로 인해 몰락한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학문에 힘써 명성을 얻었고, 원제의 신임을 받아 낭중, 박사, 급사중을 거쳐 광록대부, 태자소부로 승진했다. 건소 3년에는 승상이 되었으나, 봉토를 부당하게 넓힌 사실이 발각되어 관직을 잃고 사망했다. 그의 아들 광함 역시 경서에 밝아 구경에 이르렀다.
선제가 붕어하고, 유석이 황제로 즉위하였다(원제). 대사마가 된 외척 사고는 태자태부 소망지와 사이가 나빴는데, 소망지는 원제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중히 쓰였다. 장안령(長安令) 양흥은 사고에게 광형을 임용하여 세간의 환심을 사라고 조언하였고, 곧 광형은 사고의 의조사(議曹史)로 임용되고 그의 천거를 받았다. 원제는 광형을 낭중(郞中)에 임명하였고, 박사·급사중으로 전임시켰다.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에 원제에게 올린 자문이 원제의 마음에 들었고, 광록대부·태자소부로 임명되었다.
광형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으며 부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형은 학문을 좋아하여 소작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시경을 말하지 마라, 광형이 올 것이다. 광형이 시경을 말하면 턱이 빠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1][2]
광형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권력에 영합하고 아들의 비리를 덮으려 한 점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2. 생애
원제는 광형이 재상에 알맞은 인재라고 생각하였고, 광형은 광록훈·어사대부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건소 3년(기원전 36년)에는 위현성의 뒤를 이어 승상에 올랐고, 악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였다. 원제 생전에 광형과 어사대부 장담은 당시 세도를 부리던 중서령 석현에게 아첨하기 바빴는데, 원제가 붕어하니 둘이서 석현의 예전 잘못을 성제에게 일러바쳤다. 사례교위 왕존은 광형과 장담이 이제야 석현을 고발하는 것 자체가 불충이라고 탄핵하였고, 광형은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성제는 사건을 덮어두고 도리어 왕존을 고릉령(高陵令)으로 좌천시켰다.
아들 광창(匡昌)은 월기교위를 지내고 있었는데, 술김에 살인을 저질러 옥에 갇히고 말았다. 월기교위의 속관과 광창의 동생이 공모하여 그를 탈옥시키려다가 발각되었고, 광형은 관을 벗고 사죄하였으나 성제는 또 사건을 덮었다.
광형의 봉토 악안향은 민맥(閩佰)을 남쪽 경계로 하였는데, 초원 원년(기원전 48년)에 군에서 지도를 그릴 때 민맥을 평릉맥(平陵佰)이라고 잘못 적었다. 10년 후 광형은 이곳에 봉해졌고, 이때 잘못된 기록을 토대로 진짜 평릉맥을 경계로 삼아 4백 경을 더 차지하였다.[4] 건시 원년(기원전 32년)에 군에서 경계를 다시 조정할 때 상계리가 지도를 바로잡아 승상부에 올렸는데, 광형은 관리 조은(趙殷)에게 주부 육사(陸賜)가 지리를 훤히 아니 그에게 일을 맡기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경계를 측량하게 되었고, 조은은 군에서 실제 경계를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조정에 보고하자고 하였으나, 광형은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육사와 관속 명(明)은 광형에게 예전 지도를 보면 악안향은 평릉맥을 경계로 하였는데, 지금은 민맥이 경계로 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군에서는 지도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광형에게 4백 경을 붙여주었고, 광형은 여기에서 곡식 천여 석을 거두어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이 일로 사례교위 왕준·소부 겸 행정위사(行廷尉事) 장충의 탄핵을 받았고, 문초는 면하였으나 관작이 박탈되고 집에서 죽었다.
아들 광함 또한 경서에 밝아 구경에 이르렀다.
2. 1. 어린 시절과 학문
대대로 농사를 짓던 집안으로, 유복하지는 않았으나 학문을 즐겼다. 소작을 해서 학비를 충당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여 주목받았다.[3]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시경을 말하지 마라, 광형이 올 것이다. 광형이 시경을 말하면 턱이 빠진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태학에서 배우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재능이 부족했기에 졸업 시험을 쉽게 통과할 수 없었고, 9년 만에 겨우 사책의 병과에 합격했다. 시험에 계속 떨어진 것으로 인해 광형은 경학에 정통하게 되었고, 태상의 속관인 문학장고가 되어 평원군에 문학졸사로 파견되었다.[1][2] 학문을 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광형이 경서에 밝고, 후진들은 광형을 따라가게 되니 멀리 두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다. 그 건은 태자태부 소망지, 소부 양구하에게 내려졌고, 광형에게 사정을 묻자, 광형의 학문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선제는 그렇게 유학자를 등용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평원에 파견했다. 그러나 황태자 유석(후의 원제)은 그에게 감탄했다.
2. 2. 관직 생활과 원제의 신임
원제는 선제가 붕어하고 황제로 즉위한 후, 사고의 추천으로 광형을 낭중(郞中)에 임명하였다. 이후 박사·급사중으로 전임되었다.[1][2] 광형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원제에게 자문을 올렸는데, 원제는 그의 답변에 만족하여 광록대부·태자소부로 임명하였다.
원제는 광형을 재상에 적합한 인물로 평가하여 광록훈·어사대부로 승진시켰다. 건소 3년(기원전 36년)에는 위현성의 뒤를 이어 승상에 임명하고 악안후(樂安侯)에 봉하였다.
2. 3. 성제 즉위와 몰락
성제 즉위 원년(기원전 33년), 광형은 장담과 함께 중서령 석현의 과거 잘못을 성제에게 고발하였다. 그러나 사례교위 왕존은 광형과 장담이 이제야 석현을 고발하는 것은 불충이라며 탄핵하였다. 광형은 사직하려 하였으나, 성제는 사건을 덮고 왕존을 좌천시켰다.[4]
광형의 아들 광창(匡昌)은 월기교위였는데, 술김에 살인을 저질러 옥에 갇혔다. 광창의 동생 등이 그를 탈옥시키려다 발각되었고, 광형은 사죄하였으나 성제는 이 사건도 덮었다.
광형의 봉토 악안향(樂安鄕)의 경계가 잘못 기록된 것을 이용하여 광형이 부당하게 4백 경을 더 차지하고 곡식 천여 석을 챙긴 일이 발각되었다. 사례교위 왕준 등의 탄핵을 받았고, 관작이 박탈되어 집에서 죽었다.[4]
3. 가계
광형의 아들 광함도 경서에 밝았고, 구경의 지위에 올랐다. 광형의 집안에서는 박사가 되는 자가 많았다.
4. 평가
광형은 원제와 성제 치세에 걸쳐 중용되었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원제 시절에는 석현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의 뜻에 따랐으나, 성제 즉위 후에는 석현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모습은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비춰질 수 있다.
또한, 아들 광창이 살인을 저지르고 탈옥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광형이 보여준 태도는 공직자로서 부적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록 성제가 사건을 무마하려 했지만, 광형의 영지 확장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파면되고 서인으로 전락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광형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소작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시경을 논하지 말라, 광형이 오면 턱이 빠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1][2] 이는 광형의 경학 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광형은 태학에서 공부했지만 재능이 부족하여 9년 만에 겨우 병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시험에 계속 떨어진 경험은 역설적으로 그를 경학에 정통하게 만들었다. 태상의 속관인 문학장고를 거쳐 평원군의 문학졸사로 파견되었는데,[1][2] 학자들은 광형의 경서 지식이 뛰어나 후학들이 그를 따를 것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태자태부소망지와 소부양구하도 광형의 학문에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선제는 유학자를 중용하지 않았지만, 황태자 유석(후의 원제)은 광형에게 감탄했다. 원제 즉위 후, 광형은 낭중, 박사, 급사중을 거쳐 광록대부, 태자소부로 승진했다. 원제는 광형의 답변에 기뻐하며 그를 광록훈으로 삼았고, 어사대부정홍이 파면되자 후임 어사대부가 되었다. 건소 3년(기원전 36년)에는 승상위현성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낙안후에 봉해졌다.
성제 즉위 후에도 광형은 후비 선택과 경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사 제도 정비와 음사 배제를 제안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4. 2. 부정적 평가
광형은 학문에 대한 열정은 높았으나, 재능이 부족하여 오랜 기간 시험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학에 정통하여 학자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2] 그러나 선제는 유학자를 중용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다. 원제 즉위 후 석현을 두려워하여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나, 성제 즉위 후 석현의 죄를 탄핵했다. 그러나 사례교위 왕준은 광형이 석현의 죄를 알고도 탄핵하지 않은 것은 아첨이며, 자신의 불충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부도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아들 광창의 범죄와 영지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결국 파면되고 서인이 되었다.
4. 3. 종합적 평가
광형의 집안은 대대로 농부였고 가난했지만, 광형은 학문을 좋아하여 소작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시경』을 말하지 마라, 광형이 올 것이다. 광형이 시경을 말하면 턱이 빠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1][2]
광형은 태학에서 공부했지만 재능이 부족하여 9년 만에 겨우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계속된 낙방으로 경학에 정통하게 되었고, 태상의 속관인 문학장고가 되어 평원군에 파견되었다.[1][2] 학자들은 광형이 경서에 밝으니 후진 양성을 위해 멀리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태자태부소망지와 소부양구하도 광형의 학문에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선제는 유학자를 중용하지 않아 광형을 평원에 그대로 두었지만, 황태자 유석(후의 원제)은 광형에게 감탄했다.
원제가 즉위하고 외척 사고가 권력을 잡자, 장안령 양흥은 광형을 등용하여 민심을 얻도록 사고에게 조언했다. 광형은 낭중, 박사, 급사중을 거쳐 일식과 지진이 발생하자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려 광록대부, 태자소부로 승진했다.
광형은 황태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제는 광형을 재상으로 쓸 만하다고 여겨 광록훈을 거쳐 어사대부로 삼았다. 기원전 36년에는 승상위현성이 죽자 승상이 되었고, 낙안후에 봉해졌다.
성제 즉위 후, 광형은 후궁 선택과 경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사 제도 정비와 음사 배제를 제안했다.
광형은 위현성과 함께 석현을 두려워하여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나, 성제 즉위 후 석현의 죄를 탄핵했다. 사례교위왕준은 광형이 석현의 죄를 알고도 탄핵하지 않은 것은 아첨이며, 자신의 불충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부도하다고 비판했다. 광형은 사직을 청했으나 성제는 위로했다.
그러나 광형의 아들 광창이 살인을 저질러 투옥되고, 광창의 동생 등이 탈옥을 시도하다 발각되었다. 광형은 사죄했지만 성제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광형의 영지 확장 의혹이 드러나 왕준 등에게 탄핵당했고, 성제의 조칙으로 조사는 중지되었지만 결국 파면되고 서인이 되었다. 기원전 29년의 일이었다.
광형의 아들 광함도 경서에 밝아 구경에 이르렀고, 광형의 집안에서는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참조
[1]
Wikisource
『史記』「匡衡伝」
[2]
Wikisource
『漢書』「匡衡伝」
[3]
문서
관리 임용시험의 하나. 갑과·을과로 나누어 시행하였다. 경서 또는 정책에 대한 문제를 적은 죽간을 내용이 보이지 않게 늘어놓고, 한 가닥씩 뽑아 답을 작성하였다.
[4]
문서
민맥·평릉맥은 밭의 경계 이름이다. 평릉맥이 민맥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봉토가 더 넓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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