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펠릭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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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펠릭스 3세는 483년부터 492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다. 그는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펠릭스 3세는 동방 교회와의 단성론 논쟁에서 헤노티콘을 거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카키우스 총대주교를 파문하여 동서 교회의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을 일으켰다. 또한, 반달족 치하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아리우스주의에서 가톨릭으로 재입교하는 조건들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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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펠릭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성 |
직함 | 교황 |
교회 | 로마 교회 |
이름 | 펠릭스 3세 |
다른 호칭 | 펠릭스 |
재임 기간 | |
시작 | 483년 3월 13일 |
종료 | 492년 3월 1일 |
이전 교황 | 심플리치오 |
다음 교황 | 젤라시오 1세 |
개인 정보 | |
출생지 | 서로마 제국, 로마 |
사망일 | 492년 3월 1일 |
사망지 | 오도아케르 왕국, 로마 |
공경 | |
공경 대상 | 가톨릭 교회 정교회 |
2. 가문과 초기 생애
펠릭스는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아마도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결혼하여 과부가 되었으며,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사제)를 통해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증조부였으며, 교황 아가피토 1세와도 친족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2]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수도원장으로, 네스토리우스파에 반대하면서 극단적인 견해를 취했다. 482년 제노 황제는 헤노티콘을 발표하여 이 논란을 잠재우려 하였으나, 펠릭스 3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펠릭스는 그의 증손녀 트라실라(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고모)에게 환영으로 나타나 그녀에게 천국에 들어가라고 요청했으며, "크리스마스 전날 밤 트라실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손짓하는 것을 보고 죽었다"고 전해진다.[3]
3. 동방 교회와의 갈등: 단성론 논쟁
펠릭스 3세는 아카키우스 총대주교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으나, 아카키우스가 이를 무시하자 그를 파문하였다. 또한, 제노 황제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을 주교좌에서 쫓아내자, 펠릭스 3세는 페트루스 풀러와 페트루스 몽구스를 파문하였다. 이로 인해 동서 교회는 분열되었고, 이 분열은 519년까지 이어졌다.[5]
3. 1. 헤노티콘과 아카키우스 파문
482년, 동로마 제국의 제노 황제는 단성론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카키우스 총대주교의 제안에 따라 헤노티콘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가톨릭과 유티케스파 사이의 화해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더 큰 갈등을 일으켰고, 동방 교회를 여러 갈래로 분열시켰다.[5] 헤노티콘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유티케스와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 것을 지지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의 열두 가지 저주를 명시적으로 승인했지만, 논쟁의 양측을 모두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을 가졌는지 두 개의 본성을 가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피했다.
펠릭스 3세는 헤노티콘을 거부하고 아카키우스에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아카키우스가 듣지 않자 그를 파문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제노의 칙령을 거부하자, 황제는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들을 그들의 주교좌에서 내쫓았다. 페트루스 풀러는 안티오키아의 마르티리우스를 폐위시키고 470년에 안티오키아 주교좌를 차지했다. 페트루스 몽구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좌를 차지했다. 펠릭스 3세는 첫 번째 시노드에서 페트루스 풀러를 파문했다. 484년, 펠릭스 3세는 페트루스 몽구스도 파문했는데, 이로 인해 동서 교회의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이 일어났고, 519년까지 화해되지 않았다.[5]
4. 반달족 치하 북아프리카 교회의 재건
북아프리카는 열렬한 아리우스주의 신봉자인 반달족에게 정복당했고, 겐세릭 왕과 그의 아들 겸 후계자 후네릭의 박해로 인해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망명했다.[4] 후네릭이 사망하자 박해가 완화되었고, 아리우스 신자로 재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 다수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에 가톨릭 신자들은 펠릭스에게 호소했고, 펠릭스는 487년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5]
4. 1. 아리우스주의에서 가톨릭으로의 재입교 조건 제시
펠릭스 3세는 아리우스주의 신봉자인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가 정복당하고, 겐세릭 왕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후네릭의 박해로 인해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망명하였다.[4] 후네릭이 사망하자 박해가 완화되었고, 두려움 때문에 아리우스 신자로 재세례를 받은 사람들 중 다수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반달족은 단호하게 아리우스 신앙을 유지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펠릭스에게 호소했고, 펠릭스는 487년에 시노드를 소집하여 원치 않게 배교한 자들을 받아들이는 조건들을 설명하는 서한을 아프리카의 주교들에게 보냈다.[5]5. 평가
펠릭스 3세의 단호한 이단 배격과 교회 권위 수호 노력은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지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동서 교회 분열을 초래한 그의 강경한 대응은 외교적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펠릭스 3세의 이러한 행적은 종교적 권위를 앞세워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킨 부정적인 사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Pope St. Felix III
https://www.newadven[...]
2024-01-04
[2]
서적
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Sts. Trasilla and Emiliana
[4]
서적
History of the Vandal Persecution
Liverpool University Press
[5]
Catholic Encyclopedia
Pope St. Felix III
[6]
웹사이트
Pope St. Felix II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3-04-06
[7]
서적
Gregory the Great and his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Sts. Trasilla and Emiliana
https://en.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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