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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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기독론적 입장으로, 그리스도 안에 단 하나의 본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5세기에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반박과 에페소스 강도회의, 칼케돈 공의회를 거치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다는 양성론을 정립하고, 유티케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단성론은 여러 분파로 나뉘며, 현재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지만, 이들은 유티케스주의만을 단성론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입장을 미아피시스주의로 표명하며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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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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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개요 | |
명칭 | 단성론 |
다른 명칭 | 단성설, 유티케스주의 |
로마자 표기 | Danseongnon |
영어 명칭 | Monophysitism |
그리스어 명칭 | Μονοφυσιτισμός (Monophysisimos) |
어원 | 그리스어 "μόνος" (monos, "단일한") 그리스어 "φύσις" (physis, "본성") |
정의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단일한 본성(μία φύσις, mia physis)을 지닌다는 기독론 교리 |
역사적 맥락 | |
기원 | 4세기 후반 ~ 5세기 초 |
주요 인물 | 유티케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 |
관련된 공의회 | 에페소스 공의회 (449년, 강도 공의회로 간주됨) 칼케돈 공의회 (451년, 단성론 반대) |
칼케돈 공의회 이후 | 단성론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성설로 정죄받았으나, 일부 동방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받음 |
교리적 내용 | |
핵심 주장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하나의 본성만을 가진다. |
반대 입장 | 양성론: 그리스도는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지 않은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을 가진다.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
단성론의 분파 | |
미아피지스주의 | 그리스도는 '하나의 복합적인 본성'(μία φύσις σύνθετος, mia physis synthétos)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단성론과는 구별된다. |
단의론 | 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을 가지지만, 하나의 의지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
현대적 관점 | |
현재의 위치 | 오늘날 단성론은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한 일부 교회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오리엔트 정교회 |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말란카라 정교회 |
2. 역사적 배경
단성론은 원래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하는 형태로 이집트를 중심으로 활발히 퍼져나갔다. 4세기에 나타난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역시 단성론적인 경향을 보였거나 그 일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38] 하지만 명확한 단성론 주장은 5세기 에우티케스(Eutyches, 378년경~453년경)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37][39] 에우티케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이후 신성에 흡수되어 단일한 본성만이 남는다고 주장했으며(에우티케스주의), 이는 이후 비칼케돈파 교회가 주장하는 일성론(Miaphysitism, 합성론)과는 구별된다.[37][40]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449년 에페소스에서 열린 공의회로 이어졌으나, 이 회의는 교황 레오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를 배척하는 결과를 낳아 후에 '에페소스 강도회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451년 동로마 제국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의 주장은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배척되었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가 확립되었다.
이후 단성론과 칼케돈파의 입장을 중재하기 위해 단의설(Monothelitism)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단의설은 그리스도에게 단일한 의지만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몇몇 동로마 황제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 교회들은 비칼케돈파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2. 1. 초기 논쟁과 발전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그리스도가 신성(호모우시우스,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자 인간(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심)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5세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교구 및 신학 학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4]단성론은 본래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하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키릴로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네스토리우스를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키릴로스는 "성육신한 말씀의 한 피시스(본성)"라는 표현을 고수하며, 두 개의 피시스를 주장하는 것은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같다고 보았다.
4세기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역시 단성론적 경향을 보이거나 단성론의 일종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38], 명확한 단성론 주장은 주로 에우티케스(Eutyches, 378년경–453년경)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37][39] 단성론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 에우티케스주의(Eutychianism|유티키아니즘영어): 그리스도는 본래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을 지녔으나, 성육신 이후에는 인성이 마치 포도주가 바다에 섞이듯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신성만이 남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7]
- 일성론(Miaphysitism|미아피시티즘영어, 또는 합성론): 비칼케돈파 교회의 주장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합쳐져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본성(피시스)을 이룬다고 본다.[40] 이들은 에우티케스주의와는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레오 1세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서신(레오의 톤)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냈다. 이 서신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위격(인격)을 가진다.
- 그러나 이 유일한 위격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하며, 이 둘은 서로 섞이거나 합쳐지지 않는다.
- 두 본성은 각각 고유한 능력과 작용을 가지면서도, 유일한 위격 안에서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
- 위격의 단일성으로 인해, 두 본성의 속성들이 이 하나의 위격에 귀속된다. 이를 '속성의 교환'(이디오마툼 코뮤니카티오, communicatio idiomatum)이라고 한다.
449년 에페소스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디오스코루스의 주재로 공의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로마 교황 특사도 참석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는 레오 1세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오히려 레오 1세와 플라비아누스를 단죄하고 퇴진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플라비아누스는 학대를 받아 사흘 만에 사망했고, 교황 특사였던 부제 힐라리우스는 간신히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 공의회는 후대에 에페소 강도회의라는 비판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인 451년, 동로마 황제 마르치아누스가 소집한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에페소 강도회의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교황 레오 1세의 서신(레오의 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위격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칼케돈 신조를 확립했다.[5] 이로써 에우티케스주의는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단성론은 배척되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정은 지지한다고 명시했다.[41]
칼케돈 공의회의 "두 본성" 정의를 받아들인 이들은 '양성론자'(Dyophysites)로 불렸고, 키릴로스의 "하나의 피시스" 공식을 고수하며 칼케돈 신조를 거부한 이들은 '단성론자'(Monophysites)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은 역사적으로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이들 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은 에우티케스주의와 다르며 '일성론'(Miaphysitism) 또는 '합성론'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단성론 교회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며,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칼케돈파 교회라고 불린다.
한편, 단성론과 칼케돈파의 입장을 절충하려는 시도로 단의설(Monothelitism)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단의설은 그리스도에게는 단일한 의지(意志)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몇몇 동로마 황제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이 역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681)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2. 2. 에페소스 강도회의와 칼케돈 공의회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에우티케스의 생각을 부정하는 서신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냈다. 서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만을 가진다.
- 그러나 이 유일한 위격 안에는 서로 융합되거나 혼합되지 않는 두 가지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
- 이 두 본성은 각각 고유한 능력을 가지며 다른 작용을 하지만, 유일한 위격 안에서 영원히 연계를 이루고 있다.
- 위격의 유일성은 결과적으로 이 위격에 두 본성의 상태와 행동을 부여하는데, 이를 "이디오마의 교류"(신인共通呼稱, Communicatio idiomatum|콤무니카티오 이디오마툼la), 즉 두 본성이 가진 속성의 교류라고 한다.
449년 에페소스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공의회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디오스코루스를 의장으로 하여 열렸다. 이 공의회에는 로마 교황의 특사가 참석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는 로마 교황 측 입장에서 참여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로마 교황과 플라비아누스 등을 배척하는 결정을 내렸다. 플라비아누스는 이 과정에서 심한 학대를 받고 3일 후에 사망했으며, 교황 특사였던 부제 힐라리아누스는 고난 끝에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교황 레오 1세는 즉시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이 에페소스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다. 이 공의회는 후대에 에페소스 강도회의라는 비판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 황제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에우티케스의 사상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는 "사후에 거룩함으로 명성이 높았던 로마의 첼레스티노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의 주도 아래 에페소에서 소집되었던 거룩한 시노드(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경과 관련한 결정과 모든 기준을 지지한다"고 명시하며[41]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449년 에페소스 회의와는 선을 그었다.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일부 교회들은 역사적으로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교회는 에우티케스주의만을 '단성론'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신학(주로 합성론)은 단성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칼케돈파라고 불린다.
2. 3. 칼케돈 공의회 이후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교황 레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서간[5] 등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위격으로 연합된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정의했다.[5] 이 공의회에서는 에우티케스의 사상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이 결정은 449년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 1세 주도로 열렸던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플라비아누스를 축출하고 에우티케스를 복권시킨 결정을 뒤집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 레오 1세는 449년 공의회를 에페소스 강도회의라고 비판하며 무효화했었다.칼케돈 공의회의 "두 본성" 정의를 받아들인 이들은 ''양성론자''로, 그리스도의 "하나의 ''피시스''(본성)"만을 강조하며 공의회 결정을 거부한 이들은 ''단성론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 구분은 이후 동방 교회에 큰 분열을 가져왔다.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위해 양측을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바실리스쿠스 황제는 475년 잠시 제논 황제를 몰아내고 칼케돈 공의회를 부정하는 칙령(《엔키클리온》)을 발표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듬해 철회하고 제논에게 축출되었다.[30][31] 제논 황제는 4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페트로스 3세의 지지를 받아 타협안인 헤노티콘(연합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에우티케스를 정죄하면서도 칼케돈 공의회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방식이었으나, 오히려 로마 교황청과의 아카키우스 분열(484년-519년)을 초래했고, 이집트의 강경파 단성론자들(아케팔리)로부터도 외면받았다.[32][33]
아카키우스 분열은 단성론에 동정적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치하에서도 계속되다가, 칼케돈파인 유스티누스 1세가 518년 즉위하면서 로마와의 관계를 회복하며 종식되었다.[32][33] 그의 뒤를 이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년-565년)는 칼케돈 신앙을 고수했지만,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자들을 비호했다.[35] 특히 테오도라는 가산 왕조의 군주 알-하리트 이븐 자발라를 통해 시리아 정교회를 후원했는데, 이는 교회의 생존과 부흥,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4]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유스티누스 2세는 초기에는 테오도라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즉위 후에는 단성론자들을 박해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35] 이후 황제들도 단일 에너지설이나 단의론과 같은 신학적 타협안을 모색하며 분열을 해결하려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칼케돈파'''(Non-Chalcedonian Churches) 또는 오리엔트 정교회라고 불린다. 이 교회들은 스스로를 단성론(Monophysitism)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에우티케스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는 극단적 단성론과는 구별되는 합성론(Miaphysitism), 즉 신성과 인성이 혼합이나 변화 없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입장을 따른다고 설명한다.[40]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단성론'으로 지칭하는 것을 거부한다.
3. 단성론의 여러 분파
원래 단성론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하며 이집트를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나,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단성론과 칼케돈파의 입장을 절충하려는 단의설이 등장하여 몇 차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 역시 배척되었다.
4세기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역시 단성론적 경향을 보이거나 단성론의 일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38] 하지만 명확한 의미의 단성론은 주로 다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는 유티케스(378년경~453년경)가 주장한 유티케스주의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을 지녔으나, 성육신 이후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만 남게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37]
둘째는 미아피시스주의(일성론)으로, 이는 비칼케돈파 교회들의 공식적인 입장이다.[40] 이들은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합성된 본성' 안에서 연합되었다고 주장하며, 유티케스주의와는 구별된다.
이 외에도 단성론 진영 내에서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잉태 순간부터 부패하지 않았다고 본 부패불가설파(아프타르토도케타이)[11], 그리스도의 인간적 지식이 제한적이었다고 본 무지파(아가노에타이)[8],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환영에 불과했다고 본 가현설[15], 성부, 성자, 성령의 개별성을 강조한 삼신론[22],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교회 구조를 형성한 무두파[6] 등이 있었다.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동방 정교회에 속하는 교회들은 역사적으로 단성론 교회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교회들은 스스로를 미아피시스주의로 정의하며, 유티케스주의와 같은 극단적 단성론은 이단으로 명확히 배격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을 '단성론파'로 지칭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칼케돈파'로 불리기를 선호한다.[40][27][28]
3. 1. 유티케스주의
유티케스(378년경~453년경)가 주장한 단성론의 한 형태로[37],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항하며 등장했다. 유티케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육신 이후에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단일한 성질만이 남게 되었다고 가르친다[37]. 이는 마치 포도주가 바다에 섞이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17][18]. 이 관점에 따르면,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은 인류와 동질적이지 않다(호모우시오스)[17][18]. 유티케스주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우위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형태로 평가받으며[21], 다른 단성론 분파와 구분하여 실제적 또는 존재론적 단성론으로 불리기도 한다[25][19][20].레오 1세는 유티케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서신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냈다. 이 서신에서 레오 1세는 그리스도가 단일한 위격을 가지지만, 그 안에는 서로 섞이거나 합쳐지지 않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존재하며, 각 본성은 고유한 작용을 하면서도 하나의 위격 안에서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두 본성이 가진 속성이 서로 교류된다는 이디오마의 교류 (신인 공통 호칭) 개념을 제시했다.
449년 에페소스에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디오스코루스를 의장으로 하여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는 로마 교황 특사와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도 참석했지만, 결과적으로 교황과 플라비아누스의 입장을 배척하고 그들의 퇴진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플라비아누스는 학대를 받아 사흘 만에 죽고, 교황의 특사였던 조제(助祭) 히라리아누스는 고난 끝에 도피하여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공의회는 후대에 에페소 강도회의(Robber Council of Ephesus)라는 비판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따라서 우리도 역시 사후에 거룩함으로 명성이 높았던 로마의 첼레스티노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의 주도 아래 에페소에서 소집되었던 거룩한 시노드에서 결정된 신경과 관련한 결정과 모든 기준을 지지한다."라고[41] 명시하여, 449년 에페소 공의회의 신학적 결정 자체는 공인되었음을 확인했다.
결정적으로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유티케스의 사상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고 배척되었다.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비칼케돈파로 분류되는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일성론(합성론)으로 설명하며, 유티케스주의는 단성론의 한 형태로 간주하여 명확히 거부하고 있다.
3. 2. 아폴리나리우스주의
4세기에 일어난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단성론의 경향을 보이거나, 혹은 단성론의 일종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38]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390년 사망)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사상은 예수가 정상적인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영혼 대신 신성한 마음을 가졌다고 보았다.[13]이 가르침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이후 수십 년 안에 사라졌다.[13]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은 이를 두고 '미친 제안'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4]
3. 3. 무지파 (아가노에타이)
무지파(Agnoetae)는 534년경 테미스티우스 칼로니무스에 의해 창시되었다. 이들은 예수의 본성이 신성(神性)이지만, 지식에 있어서는 제한적이며 다른 모든 면에서 일반 사람들과 같다고 주장했다.[8][9] 이들은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4세기의 다른 그룹과는 구별해야 하는데, 4세기 그룹은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10]3. 4. 부패불가설파 (아프타르토도케타이)
부패불가설파(阿弗他爾托多凱泰派, Ἀφθαρτοδοκῆται|아프타르토도케타이grc)는 환상설파 또는 지도자인 할리카르나소스의 율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율리아누스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부패하지 않고 불멸하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였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후의 상태와 같았으며,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본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그 본성에 반하여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11]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들의 가르침을 정통 교리로 받아들이고자 했으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망하였다.[12]3. 5. 가현설파 (도가니파)
가현설파는 예수가 인간의 본성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수의 인간성이 단지 환영에 불과하며, 이는 예수가 무감각하고 비물질적인 신성한 본성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고통을 겪거나 죽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15][16] 모든 가현설파가 단성론자는 아니었다.[15][16]3. 6. 기타 분파
단성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무두파: 482년 아카키우스와 협정을 맺은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3세로부터 분리된 단성론자들이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은 헤노티콘 칙령을 통해 이 협정을 승인했다. 이 칙령은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를 모두 비판했지만,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 양성론 교리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무두파는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사용한 '미아 피시스(하나의 본성)' 개념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칼케돈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교회적으로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는데, 이 때문에 '머리가 없다'는 뜻의 무두파로 불리게 되었다.[6][7]
- 무지파: 534년경 테미스티우스 칼로니무스가 창시한 분파이다. 이들은 예수의 본성은 신성이지만, 인간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했다.[8][9] 이들은 4세기에 존재했던, 하느님이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 동명의 그룹과는 구별된다.[10]
- 부패불가설파: 환상설파 또는 지도자 할리카르나소스의 율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율리아누스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은 잉태된 순간부터 부패하지 않고 불멸하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였다. 이는 부활 후의 상태와 같으며,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인간적 조건에 반하는 기적이었다"고 믿었다.[11]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이 가르침을 정통 교리로 채택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망했다.[12]
- 아폴리나리우스파: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390년 사망)의 이름을 딴 분파이다. 이들은 예수가 정상적인 인간의 몸을 가졌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영혼 대신 신성한 마음(nous)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 가르침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고, 이후 수십 년 안에 그 영향력을 잃었다.[13]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이를 매우 비합리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했다.[14]
- 가현설파: 모든 가현설파가 단성론자는 아니었지만, 이들은 예수가 실제 인간의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인간성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고통을 느끼지 않고 물질적이지 않은 신성한 본성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고통받거나 죽을 수 없다고 보았다.[15][16]
- 유티케스파: 예수가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하나의 본성만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신성이 인성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마치 꿀 한 방울이 바닷물에 섞여 사라지듯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변형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변형된 그리스도의 몸은 일반적인 인류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호모우시오스가 아님)고 주장했다.[17][18] 유티케스파는 '실재적' 또는 '존재론적' 단성론자로 불리기도 하며,[25][19][20] 그들의 가르침은 단성론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형태로 평가받는다.[21]
- 삼신론자: 6세기에 등장한 단성론자 그룹으로, 안티오크의 요한 아스쿠나게스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22] 주요 이론가인 요한 필로포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공통된 본성은 각 개별 위격(位格)의 특수한 본성에서 추상화된 개념일 뿐이라고 가르쳤다.[23][24]
- 동방 정교회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의 이름을 따 세베루스파라고도 불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인간 본성을 인정하며 그의 몸이 부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두 인격이 아닌 한 인격이므로, 단일한 본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정의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의한다고 여기며, 일부에서는 이들을 '언어적 단성론자'로 부르기도 한다.[25][26] 동방 정교회는 스스로를 단성론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성론을 이단으로 간주하며, 자신들의 비칼케돈파 신학을 미아피시스주의로 설명한다.[27][28]
4. 현대의 단성론 논쟁
신학자 후스토 L. 곤잘레스는 현대에 '단성론 교회'로 불리는 교회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는 "20세기까지 존속해 온 소위 단성론 교회들의 신학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는, 단성론의 모든 극단적인 종파들이 짧은 기간 내에 사라졌다는 점과, 현재 소위 단성론 교회들의 기독론은 실제 단성론보다는 언어적 단성론에 더 가깝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29] 이는 현대의 단성론 관련 논의에서 중요한 점으로, 과거의 극단적인 단성론과 현재 교회들의 입장을 구분해야 함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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