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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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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무도독부는 1919년 최진동이 만주 봉오동에서 조직한 무장 독립군 부대이다. 대한독립군,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이후 대한북로독군부로 통합되기도 했다. 군무도독부는 소총, 권총, 기관총 등 당시 최신 무기를 갖추고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했다. 봉오동 전투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의해 최초로 인정받은 군사 조직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적 기원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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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도독부
개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기
지휘관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창설일1920년 5월 22일
해체일1921년 6월
소속대한민국 임시정부
본부중국 지린성 왕칭현 펑우둥
이념한국 독립 운동
병력 규모670명
전투 및 작전
주요 전투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자유시 참변
명칭
한글군무도독부
한자軍務都督府
로마자 표기gunmudodokbu
다른 이름도독부
독군부

2. 연원 및 변천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온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형제는 북간도 왕청현에 자리 잡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한인 사회 청년들을 모아 군무도독부를 결성했는데,[1] 이는 '''도독부(都督府)''' 또는 '''독군부(督軍府)'''라고도 불렸다.

군무도독부는 1919년 왕청현 봉오동에서 최진동을 중심으로 공식 편성되었으며, 초기 병력은 약 600여 명이었다. 당시 주요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참모장박영(朴英)
대대장이춘승(李春承)
중대장이동춘(李東春)
소대장최문인(崔文仁)



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공식적인 군대 중 하나였다. 군무도독부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실전과 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였으며, 최진동 형제는 프리모르스키 지방에 주둔하던 체코 군단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확보하여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했다.[2] 군무도독부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등 국내로 진입하는 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1]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을 ‘독립 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면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임시 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안정근, 왕삼덕, 조상섭 등을 대표로 파견하여 통합을 추진했으며, ‘국무원 포고 제1호’와 ‘군무부 포고 제1호’ 등을 통해 청년들의 독립군 참여를 독려했다.[2]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0년 5월 28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 홍범도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이로써 총 병력은 1,0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 연합 부대를 대한 북로군정서라고 칭하기도 한다.[3] 통합된 부대는 1920년 봄부터 두만강 인근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3] 이러한 활동은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안무,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조직

군무도독부는 '''도독부(都督府)''' 또는 '''독군부(督軍府)'''라고도 불렸다. 1919년 만주 왕청현 봉오동(汪淸縣鳳梧洞)에서 최진동(崔振東)이 중심이 되어 편성하였다.

편성 당시 병력은 약 600여 명이었으며, 주요 간부로는 참모장 박영(朴英), 대대장 이춘승(李春承), 중대장 이동춘(李東春), 소대장 최문인(崔文仁) 등이 있었다.[1][4][5] 이후 최운산, 최치흥 등도 지휘관으로 활동했다.[1][4][5]

군무도독부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펼쳤다. 1920년 5월 28일에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 홍범도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고, 총병력은 1,000명을 넘어섰다.

이 연합 부대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봉오동 전투를 치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군무도독부는 중대와 소대로 구성된 강력한 무장 독립군 부대로, 1920년대 전반까지 여러 차례 재조직되며 활동을 이어갔다.[1][4] 1920년 8월 일본 군경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병력은 약 600명이었으나, 이후 670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3][4]

또한, 군무도독부는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군사학교를 통해 양성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대한북로군정서의 주력 부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3. 1. 장비

군무도독부는 소총 400정, 권총 50정, 수류탄 20개, 기관총 2정을 보유하고 있었다.[3][4] 주력 소총은 유효 사거리가 700m에 달하는 모신-나강 소총이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군의 주력 소총인 아리사카 소총의 유효 사거리 500m보다 우수한 성능이었다. 또한, 당시 최신형 무기였던 맥심 기관총과 대포도 보유하고 있었다.[2]

4. 주요 활동

군무도독부는 도독부(都督府) 또는 독군부(督軍府)라고도 불렸다. 1919년 만주 왕청현 봉오동(汪淸縣鳳梧洞)에서 최진동(崔振東)이 중심이 되어 편성하였다. 편성 당시 병력은 약 600여 명이었으며, 주요 간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참모장박영(朴英)
대대장이춘승(李春承)
중대장이동춘(李東春)
소대장최문인(崔文仁)



3.1 운동 이후 독립 전쟁을 준비하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형제는 북간도 왕청현에 자리 잡고 한인 청년들을 모아 군무도독부를 결성했다.[1] 군무도독부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활발히 펼쳤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군대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실전과 같은 훈련을 실시한 정예 부대였다. 최씨 형제는 연해주에 주둔하던 체코 군단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매하여 부대의 무장을 강화했다.[2]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1920년을 ‘독립 전쟁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임시 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이를 위해 안정근, 왕삼덕, 조상섭 등을 대표로 파견했다. 임시 정부는 1920년 1월 ‘국무원 포고 제1호’와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여 서간도와 북간도 청년들의 독립군 참여를 독려했다.[2]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0년 5월 28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 홍범도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통합된 부대의 총 병력은 1,000명을 넘어섰다. 대한북로독군부는 1920년 봄부터 두만강 인근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3]

한편, 최운산 장군은 대종교 지도자 서일과 함께 군무도독부 창설에 기여했으며, 부대의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일대의 사유지를 제공했다. 6개월 과정의 장교 훈련소였던 심립평 역시 최운산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군무도독부는 이후 대한군정서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은 일제에 맞서는 한민족의 저항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1][3][4][2]

4. 1. 주요 전투

군무도독부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초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36차례 국내 침투 작전을 수행했다.[1][3][4][2]

1920년 6월 초, 독립군을 소탕하려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삼둔자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을 격파했다.[1][3][4][2] 이후 일본군을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매복 작전을 펼쳤다.[1][3][4][2]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최진동이 이끈 군무도독부는 안무(安武)의 국민회군,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는 1920년 5월 28일 세 부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구성한 이후 거둔 중요한 성과였다.[1][3][4][2]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이후 청산리 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1][3][4][2]

5. 해체 및 이후

1920년 봉오동 전투 이후 군무도독부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과 분리되었다. 이후 훈춘 사건을 빌미로 간도 북서부에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한 뒤 연해주로 이동하였다.[1][3][4]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한 군무도독부는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일부 병력은 소련 적군에 편입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1923년 만주로 돌아와 굴하지 않고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나갔다.[1][3][4]

6. 역사적 의의

군무도독부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만주 지역 항일 독립군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사 조직인 군무부와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적 뿌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2]

참조

[1] 뉴스 Provincial Office of Military Affairs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2-05
[2] 웹사이트 홍범도 흉상 이전 육사 정체성 흔들고 국군 뿌리 부정 http://www.redian.or[...] Redian 2023-09-24
[3] 웹사이트 Provincial Office of Military Affairs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24
[4] 웹사이트 다. 대한군무도독부 http://contents.hist[...] Our History Net Culture 2023-09-24
[5] 웹사이트 대한민국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100주년 세미나 열린다 https://www.ohmynews[...] OhmyNews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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