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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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둔자 전투는 1920년 6월, 만주 지역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한 사건이다. 독립군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인해 삼둔자 서남쪽 야산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고, 봉오동 전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삼둔자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일제는 전투의 패배와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은폐했다.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의 용맹함과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며, 독립군의 첫 국내 진공 시도이자 일본군의 중국 불법 침공의 선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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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둔자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분쟁 | 삼둔자 전투 |
| 일부 | 한국 독립 운동 |
| 날짜 | 1920년 6월 4일 - 1920년 6월 6일 |
| 장소 | 지린성 만주 삼둔자, 월신강 |
| 결과 | 한국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남양 수비대 제19사단 헌병대 |
| 교전국 2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북로독군부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니이미 지로 중위 아라요시 지로 중위 |
| 지휘관 2 | 박승길 이흥수 홍범도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보병 1개 중대 헌병 1개 중대 |
| 병력 2 | 30명 |
| 사상자 및 피해 | |
| 사상자 1 | 경찰관 1명 부상, 군인 60명 사망 |
| 사상자 2 | 전투원 2명 사망, 한국인 민간인 9명 사망, 3명 부상 |
2. 배경
2. 1. 만주 독립군 부대의 통합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었다.[1][4]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결성하였다.[9] 이들은 두만강 건너 북방에 위치한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하여 국내 진입전을 계획했다.[8]대한군북로독군부는 정치, 행정과 군사, 지휘를 분권하여 운영하였다. 군무도독부의 최진동과 국민군의 군무위원이었던 안무가 정치, 행정의 총책임자와 북로독군부의 대표 및 부부장을 맡았고, 통합된 북로독군부의 군사 지휘는 홍범도가 맡았다.[8]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 약 550명으로 총 대원 1천 2백여 명으로 일제 측에 의해 탐지되었으며, 화력으로는 무기가 기관총 2문, 군총 약 9백 정 이상, 권총 약 2백 정, 폭탄(수류탄) 약 1백 개, 망원경 7개, 탄환 군총 1정 당 150발 등으로 집계되었다.[9] 그 밖에 이흥수(李興秀)가 거느리는 약 60명 가량의 신민단독립군이 집결하여 봉오동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8]
2. 2. 선제 공격 준비
1920년 5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간도 국민회 소속 부대, 안무(安武)가 이끄는 부대, 신민단 등 만주 지방에서 활약하는 독립군 부대들이 왕청현 봉오동으로 집결했다.[11] 봉오동은 산을 가운데 두고 좌우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잡았는데 모두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산마루에 진을 치고 주변 마을에 정찰대를 파견,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11] 그러나 일본군이 쉽게 나타나지 않자 이들은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선제 공격을 계획한다.[1][4]1920년 6월 4일 새벽 5시,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한 30여 명의 독립군 소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의 일본군 1개 소대를 초토화했다.[12] 일제는 즉각 육사 23기 출신의 아라요시 지로(新美二郞) 중위에게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를 보내 뒤쫓게 했다.[1][5][1]
3. 전개 과정
3. 1. 삼둔자 기습 (1920년 6월 4일)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각각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 월신강(月新江)을 넘어 간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켰다.[13][6][7][1] 이는 독립군의 첫 국내 진공 작전이었다.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 기밀을 입수하고 만주 국경 지대 주변에 활보하는 한국인 독립군 활동에 관심을 갖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던 중이라 이는 전투의 도화선이 된다.
약 30명 가량으로 구성된 독립군의 한 소부대는 그해 6월 4일 새벽에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종성군 북방 5리 지점에 있는 강양동(江陽洞)으로 진격, 그곳에서 후쿠에(福江)가 인솔하는 일본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한 후,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여 작전을 종료했다.[13] 6월 4일 오전 종성군 헌병 순찰소가 초토화되자 남양수비대는 독립군의 짓임을 알아채고 즉각 출병한다.[6][7][1]
3. 2. 일본군 남양수비대의 반격과 격퇴
6월 4일 아침, 기습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니히미 지로 남양수비대 예하 육군 중위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삼둔자 주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확인한 국경초소지대의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13]이들 부대는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분풀이로 무고한 양민만 살육했는데,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야산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하여 섬멸시켜 버렸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고 유인해 남양수비대 예하 중대를 격멸시켰다. 아라요시는 잔존 병력을 끌고 급히 도주했다.[12] 이로서 6월 6일 새벽, 전투는 종결되었다.[13]
독립군 연합부대 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의 언덕인 범진령 기슭에 매복시키고,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이 이끄는 약간의 병력을 고지대에 배치시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것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 사령부와 일본군 제19육군보병사단에서는 1920년 6월 6일 오전 6시경 병력을 출병한다.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가 잠복해 있는 범진령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는 6월 6일 오전 10시경 이었다.[1]
6월 6일 정오 무렵, 독립군은 높이 약 100미터의 산악 언덕에서 일제 사격을 가해 일본군 남양 수비대 1개 중대 병사 60명을 사살했다. 독립군 2명이 사망하고 인근 마을 주민 9명이 유탄 파편에 맞아 사망했다. 이 전투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 이화일 소대장의 지휘 작전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1]
3. 3. 일본군의 재출병과 봉오동 전투 준비
일본군 제19보병사단장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인 월강추격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 최진동 등 독립군 지휘부는 독립군 밀정이 새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띄워 보낸 편지를 통해 1,2시간 만에 이 사실을 접하였다. 독립군 지휘부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이로운 꼭대기 고지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이 덜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조를 나누어 배치를 하였다. 일부는 산 꼭대기로 올려보내고, 일부는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 진지를 만드는 한편, 인근 지역에 목책과 허수아비들을 설치하였다.4. 임시정부와 일본 측의 발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1920년 6월 4일 오전 5시에 아군 1개 소대가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서 출발하여 종성군 북방 약 5리 되는 종성군 강양동 상류로 도섭하여 해당지 왜적의 소초장 헌병 군조 후쿠에(福江三太郞)가 인솔한 적병(헌병 巡査兵丁) 약 1소대를 격파했다고 발표했다.[14][1] 그리고 6월 6일 오후 10시, 일본 남양수비대장 新美二郞 보병 중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복수전을 위해 아군을 공격했지만, 아군의 매복 작전에 의해 괴멸되었다고 밝혔다.[14][1] 임시정부는 삼둔자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독립군의 사기를 높였다.
임시정부의 보고서에는 양민 학살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15][1]
한편 일제측의 軍事戰鬪報告書는 그들이 참패한 삼둔자 전투의 경과와 양민 학살의 사실을 기술하고 있으나, 그들이 한국인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참패당한 사실과 피해는 은폐했다. 일제 측 보고서는 이밖에도 당시 여러 전투에서 자기들의 피해 상황을 대부분 은폐하고 있다.[15][1]
5. 결과 및 의의
만주지방에서는 3·1 운동 이후 고조되던 항일 열기를 이어받아 무력으로 일제와 싸우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갔다.[1]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벌들은 국내 진주를 시도 하였고, 만주 지역에는 크고작은 독립군이 조직되었다.[1] 동만주지방의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군은 1920년 초부터 서로 연결, 연합하여 활동하였다.[1] 삼둔자 전투에서의 첫 승리는 만주 독립군들로 하여금 사기를 올려 곧이어 벌어진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1]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의 첫 국내 진공 시도였다.[1] 당시 일본군은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국경지대에 출몰하는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 이들을 위협 세력으로 간주하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1]
삼둔자 전투는 일본군이 중국을 불법 침략하는 선례를 만들었다.[1]
6. 기타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이 도화선이 됐다.[8] 동시에 일본군이 불법으로 중국을 침공하는 전례가 되기도 했다.[8]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이 도화선이 되었다.[8] 동시에 일본군이 불법으로 중국을 침공하는 전례가 되기도 했다.[8] 이 전투는 독립군의 전략 전술과 용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민간인 학살 등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6. 1. 봉오동 전투와의 연관성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이 도화선이 되었다.[8] 동시에 일본군이 불법으로 중국을 침공하는 전례가 되기도 했다.[8]6. 2. 역사적 평가
삼둔자 전투는 독립군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던 소규모 국내 진입 작전이 도화선이 되었다.[8] 동시에 일본군이 불법으로 중국을 침공하는 전례가 되기도 했다.[8] 이 전투는 독립군의 전략 전술과 용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민간인 학살 등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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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둔자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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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둔자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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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둔자 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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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지린성 봉오동전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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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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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둔자·봉오동·청산리…1920년대 대한독립군 3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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