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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힐드 코눙가모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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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힐드 코눙가모디르는 10세기 노르웨이의 인물로,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종종 사가에서 강력하고 마법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며, 덴마크 왕족, 할로갈란드의 귀족 가문, 또는 사미족 마법사와의 연관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군힐드는 노르웨이의 왕 에이리크 블로됙스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에이리크 사후에는 정치적으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며 아들 하랄 2세의 섭정으로 궁정을 지배했다. 그녀는 에길 스칼라그림손과의 적대적인 관계, 흐루트 헤르욜프손과의 불륜, 그리고 하랄 블루투스의 명령으로 늪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와 평가를 받으며, 대중문화에서도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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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힐드 코눙가모디르
기본 정보
올라프 트뤼그바손의 사가 - 군힐드 - C. 크로흐
올라프 트뤼그바손의 사가 - 군힐드 - C. 크로흐
칭호왕비
이름군힐드 고름스도티르
로마자 표기Gunnhild Gormsdóttir
다른 이름왕들의 어미 군힐드
로마자 표기Gunnhild konungamóðir
출생기원후 910년경, 덴마크, 유틀란드
사망기원후 980년경 (70세), 스코틀랜드, 오크니
배우자에리크 블로됙스
자녀감레 에이릭센
구토름 에이릭센
하랄 2세
라근프뢰드 에이릭센
라근힐드 에이릭스도테르
에를링 에이릭센
구드뢰드 에이릭손
시구르 슬레바
뢰gn발드 에릭손 (?)
왕가크뉘틀링 왕조
가문 유형왕조
아버지고름 덴 감레
어머니티라 (고름 왕비)
통치
노르웨이의 왕비931년 – 933년

2. 역사적 배경 및 기원

군힐드 코눙가모디르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은 논쟁의 대상이며, 심지어 그녀의 부모에 대한 내용조차도 이견이 존재한다.[3]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주로 아이슬란드 출처에서 비롯되는데, 이들은 아이슬란드 정착민들이 하랄의 폭정을 피해 도망쳤다고 주장한다. ''토지서''(Landnámabók)와 같은 출처의 역사성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하랄이 그들의 조상 중 많은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몰아냈다는 인식은 아이슬란드인들 사이에서 에이리크와 군힐드에 대한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낳았다. 따라서 그윈 존스와 같은 학자들은 사가에서 나타나는 일부 에피소드를 의심하기도 한다.[4]

사가에서 군힐드는 종종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제니 요헨스에 따르면 "그녀는 힘과 잔혹함으로 알려졌고, 아름다움과 관대함에 존경받았으며, 마법, 교활함, 성적 탐욕, 그리고 자극으로 두려움을 샀던" 인물이다.[5]

군힐드의 기원에 대해서는 덴마크 왕족설, 노르웨이 북부 홀로갈란의 귀족 가문설, 사미족 마법사 양육설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2. 1. 덴마크 왕족설

12세기 ''노르웨이의 역사''(Historia Norwegiæ)에 따르면 군힐드는 덴마크 왕 고름 구세와 튀라의 딸이었으며, 에리크와 군힐드는 고름이 주최한 연회에서 만났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이 버전을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6][7] 그들은 에리크와의 결혼이 노르웨이의 잉글링 가문과 초기 덴마크 왕가 사이의 왕조적 결합으로, 각자의 국가를 통일하고 통합하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에리크는 하랄과 윌란 출신의 덴마크 공주 라그닐드의 결합으로 태어났다.[8] 군힐드가 고름 구세의 딸이라는 점은 그녀가 남편 사망 후 덴마크에서 피난처를 찾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반면에 ''헤임스크링글라''와 ''에길의 사가''는 군힐드가 할로갈란드의 헤르시르 오주르 토티의 딸이라고 주장한다.[9] ''에길의 사가''는 "에이리크는 비아르말란드의 북드비나 강에서 큰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그에 대한 시가 기록하고 있다. 같은 원정에서 그는 오주르 토티의 딸 군힐드를 얻어 데려왔다."[10]라고 기록한다. 이처럼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자료에 따라 다르다.

그윈 존스는 아이슬란드 자료에서 군힐드에 관해 만들어진 많은 전통을 허구로 여겼다.[6] 그러나 테오도리쿠스 수도사와 ''노르웨이 왕의 사가 요약본''(Ágrip af Nóregskonungasögum) 모두 에리크의 죽음 이후 군힐드가 하랄 블루투스의 궁정에 있을 때 덴마크 왕이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했다고 전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기록은 군힐드를 하랄의 여동생으로 식별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최근 편집자들은 군힐드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신뢰할 수 없다는 존스의 견해를 따른다.[11]

2. 2. 할로갈란드의 귀족 가문설

''헤임스크링글라''와 ''에길의 사가''는 군힐드가 할로갈란드의 헤르시르 오주르 토티의 딸이라고 주장한다.[9] 자료에 따라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다르다. ''에길의 사가''는 "에이리크는 비아르말란드의 북드비나 강에서 큰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그에 대한 시가 기록하고 있다. 같은 원정에서 그는 오주르 토티의 딸 군힐드를 얻어 데려왔다."[10]라고 기록한다.

그윈 존스는 아이슬란드 자료에서 군힐드에 관해 만들어진 많은 전통을 허구로 여겼다.[6] 테오도리쿠스 수도사와 ''노르웨이 왕의 사가 요약본''(Ágrip af Nóregskonungasögum)은 에리크의 죽음 이후 군힐드가 하랄 블루투스의 궁정에 있을 때 덴마크 왕이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했다고 전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기록은 군힐드를 하랄의 여동생으로 식별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최근 편집자들은 군힐드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신뢰할 수 없다는 존스의 견해를 따른다.[11]

''헤임스크링글라''는 군힐드가 한동안 두 명의 사미족 마법사와 함께 오두막에서 살면서 그들에게서 세이드 마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두 마법사는 그녀에게 성적인 요구를 했고, 그녀는 비아르말란드에서 돌아오던 에리크에게 그들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에리크는 그 후 그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군힐드와 결혼할 의사를 밝혔다.[12] 그러나 더 오래된 ''파그르스킨나''는 에리크가 핀란드인 북부로의 원정 중에 군힐드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사미족 왕 모툴과 함께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다."고 간단하게 말한다.[13] 역사가 말린 시클라미니는 군힐드의 핀란드 체류를 에리크의 미래의 실정을 아내 탓으로 돌리기 위한 "우화"로 묘사한다.[14]

2. 3. 사미족 마법사 양육설 (파그르스킨나)

''헤임스크링글라''에서는 군힐드가 한동안 두 명의 사미족 마법사와 함께 오두막에서 살면서 그들에게서 세이드 마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두 마법사는 그녀에게 성적인 요구를 했고, 그녀는 비아르말란드에서 돌아오던 에리크에게 그들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에리크는 그 후 그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군힐드와 결혼할 의사를 밝혔다.[12] 그러나 더 오래된 ''파그르스킨나''에서는 에리크가 핀란드인 북부로 원정을 갔을 때 군힐드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사미족 왕 모툴과 함께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다"고 간략하게 이야기한다.[13] 역사가 말린 시클라미니는 군힐드의 핀란드 체류를 에리크의 미래 실정을 아내 탓으로 돌리기 위한 "우화"로 묘사한다.[14]

2. 4. 역사적 평가

군힐드 코눙가모디르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은 논쟁의 대상이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에 대한 내용조차도 이견이 존재한다. 사가에서 그녀가 역사적 인물로 다뤄지지만, 그녀의 역사성조차 논쟁의 여지가 있다.[3]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세부 사항은 주로 아이슬란드 출처에서 비롯되며, 이 출처는 일반적으로 아이슬란드 정착민들이 하랄드의 폭정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주장한다. ''토지서''(Landnámabók)와 같은 출처의 역사성이 논쟁의 대상이지만, 하랄드가 그들의 조상 중 많은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몰아냈다는 인식은 아이슬란드인들 사이에서 에리크와 군힐드에 대한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낳았다. 따라서 그윈 존스와 같은 학자들은 그들이 보고한 일부 에피소드를 의심스럽게 여긴다.[4]

사가에서 군힐드는 종종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다. 제니 요헨스에 따르면 "그녀는 힘과 잔혹함으로 알려졌고, 아름다움과 관대함에 존경받았으며, 마법, 교활함, 성적 탐욕, 그리고 자극으로 두려움을 샀던" 인물로 묘사된다.[5]

그녀의 부모는 덴마크 왕족에서 노르웨이 북부 홀로갈란의 농부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핀마르크와 인접한 땅 출신이 되었고, 핀란드 마법사들에 의한 그녀의 마법 훈련은 더욱 그럴듯하게 되었다. 존스는 이러한 꾸며낸 이야기가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가 여왕에게 마법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영웅적인 조상들의 패배와 추방"을 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했다.[6]

12세기 ''노르웨이의 역사''(Historia Norwegiæ)에 따르면 군힐드는 덴마크 왕 고름 구세와 튀라의 딸이었으며, 에리크와 군힐드는 고름이 주최한 연회에서 만났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이 버전을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6][7] 그들은 에리크와의 결혼이 노르웨이의 잉글링 가문과 초기 덴마크 왕가 사이의 왕조적 결합으로, 각자의 국가를 통일하고 통합하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에리크는 하랄과 윌란 출신의 덴마크 공주 라그닐드의 결합으로 태어났다.[8] 군힐드가 고름 구세의 딸이라는 점은 그녀가 남편 사망 후 덴마크에서 피난처를 찾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반면에 ''헤임스크링글라''와 ''에길의 사가''는 군힐드가 할로갈란드의 헤르시르 오주르 토티의 딸이라고 주장한다.[9]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자료에 따라 다르다. ''에길의 사가''는 "에이리크는 비아르말란드의 북드비나 강에서 큰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그에 대한 시가 기록하고 있다. 같은 원정에서 그는 오주르 토티의 딸 군힐드를 얻어 데려왔다."[10]라고 기록한다.

그윈 존스는 아이슬란드 자료에서 군힐드에 관해 만들어진 많은 전통을 허구로 여겼다.[6] 그러나 테오도리쿠스 수도사와 ''노르웨이 왕의 사가 요약본''(Ágrip af Nóregskonungasögum) 모두 에리크의 죽음 이후 군힐드가 하랄 블루투스의 궁정에 있을 때 덴마크 왕이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했다고 전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기록은 군힐드를 하랄의 여동생으로 식별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최근 편집자들은 군힐드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신뢰할 수 없다는 존스의 견해를 따른다.[11]

''헤임스크링글라''는 군힐드가 한동안 두 명의 사미족 마법사와 함께 오두막에서 살면서 그들에게서 세이드 마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두 마법사는 그녀에게 성적인 요구를 했고, 그녀는 비아르말란드에서 돌아오던 에리크에게 그들을 죽이도록 유도했다. 에리크는 그 후 그녀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 군힐드와 결혼할 의사를 밝혔다.[12] 그러나 더 오래된 ''파그르스킨나''는 에리크가 핀란드인 북부로의 원정 중에 군힐드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사미족 왕 모툴과 함께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다."고 간단하게 말한다.[13] 역사가 말린 시클라미니는 군힐드의 핀란드 체류를 에리크의 미래의 실정을 아내 탓으로 돌리기 위한 "우화"로 묘사한다.[14]

3. 에리크 블로됙스와의 결혼

'''빨강''' - 노르웨이의 대왕의 영토.
'''노란색 지역'''은 하랄의 친족에게 할당된 작은 왕국들.
'''보라색''' - 흘라디르의 야를의 영토.
'''주황색''' - 뫼레의 야를의 영토.]]

군힐드는 에리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15]

3. 1. 자녀

군힐드와 에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감레
  • 구토름
  • 하랄
  • 라그프로드
  • 라그닐드
  • 에를링
  • 구드로드
  • 시구르 슬레바[15]


《에길의 사가》는 뢰그발드라는 아들을 언급하지만, 그가 《헤임스크링글라》에 언급된 인물 중 한 명인지, 또는 군힐드의 아들인지 아니면 다른 여자에게서 얻은 에릭의 아들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3. 2. 에리크의 형제 살해와 추방

군힐드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거나 사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16] 미발의 하랄이 죽기 전, 에릭의 이복 형제 할프단 하랄드손 검은색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군힐드는 "마녀에게 뇌물을 주어 그에게 죽음의 술을 먹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7] 그 직후 하랄이 죽고 에릭은 전국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군힐드의 사주를 받아 다른 형제들과 다투기 시작했고, 비에른 파르만을 시작으로 나중에 올라프와 시그뢰드를 퇸스베르그 전투에서 죽였다.[18]

에릭의 폭정으로 인해 노르웨이 귀족들은 그의 이복 형제 선량왕 호콘을 지지했고, 결국 에릭은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었다.[8]

3. 3. 오크니와 요르비크 통치

에릭의 폭정으로 인해 그는 노르웨이 귀족들이 그의 이복 형제 선량왕 호콘을 지지하면서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었다.[8] 아이슬란드 사가에 따르면, 에릭은 가족과 가신들을 이끌고 오크니 제도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수년간 정착했다. 그 기간 동안 에릭은 오크니 제도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야를 아르켈 투르프-에이나르손과 에를렌 투르프-에이나르손에 의해 "오크니 제도의 왕"으로 인정받았다.[19] 군힐드는 요크의 울프스탄 주교의 초청을 받아 전 노르웨이 왕이 북부 잉글랜드의 종속 왕으로 정착했을 때 에릭과 함께 요크로 갔다.[20] 요크에서 에릭과 군힐드는 모두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다.[21]

에릭이 요크를 잃고 스테인모어 전투 (954년)에서 죽은 후, 전투 생존자들은 노섬브리아에 있는 군힐드와 그녀의 아들들에게 패배 소식을 전했다.[22]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토르핀 스컬스플리터 신임 야를로부터 조공을 받기 위해 오크니 제도로 항해했다.[23]

결국, 군힐드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딸 라그닐드를 야를 토르핀의 아들 아르핀 토르핀손과 결혼시키고 다른 자녀들을 데리고 덴마크로 항해했다.[24]

몇몇 현대 역사가들은 요크를 통치한 에릭과 에릭 블러드액스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릭의 노섬브리아 통치에 대한 잉글랜드 자료는 그를 노르웨이 출신이나 하랄 파르헤어의 아들로 식별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1세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보낸 13세기 편지에는 에릭의 출신을 스코틀랜드인으로 밝히고 있다.[25] 19세기 후반에 글을 쓴 Lappenberg, Plummer, Todd는 에릭을 하랄 블루투스의 아들로 식별했는데, Downham은 이를 유지할 수 없는 주장으로 일축한다.[25] 하지만 Downham은 요크의 에릭 왕을 에릭 블러드액스와 구별되는 인물로 여기며, 따라서 군힐드의 오크니와 요크 체류는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다른 인물들을 혼동한 후대 사가 작가들의 창작물로 본다.[26]

4. 에길 스칼라그림손과의 갈등

군힐드는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숙적이었다. 에길은 그의 형 토롤프를 통해 에리크에게 소개되었는데, 토롤프는 왕자와 친구였으며, 형제는 원래 에리크와 군힐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7] 그러나 930년경 노르웨이에 머무는 동안 에길은 에리크 궁정의 특정 구성원들과 상속 분쟁에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왕의 측근 중 한 명인 바르르 아틀레이를 죽였다.[28]

군힐드는 두 형제에게 에길과 토롤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에길은 그들과 대립했을 때 그들을 죽였고, 이는 여왕의 복수심을 더욱 키웠다.[29] 에리크는 에길을 노르웨이에서 추방했고, 베르그-외눈드르가 에길을 붙잡으려다 죽임을 당했다.[29] 에길은 노르웨이 탈출 중 에리크의 아들 뢰그발드 에릭손을 죽였다.[30]

에길과 군힐드의 마지막 만남은 948년경 요르비크에서 일어났다. 에길은 근처 해안에서 난파되어 에리크에게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에길은 하룻밤 사이에 에리크를 칭찬하는 드라파인 호프드라우슬을 지었다.[32] 다음 날 아침 그것을 낭송하자, 에리크는 군힐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뢰그발드를 죽인 것을 용서했다.[33]

4. 1. 니드스통(Níðstǫng) 저주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사가와 시는 군힐드를 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930년경 노르웨이에 머무는 동안 에길은 에리크 왕의 궁정의 특정 구성원들과 상속 분쟁에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왕의 측근 중 한 명인 바르르 아틀레이를 죽였다.[28]

군힐드는 두 형제에게 에길과 그의 형 토롤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에길은 그들이 자신과 대립했을 때 그들을 죽였고, 이는 여왕의 복수심을 더욱 키웠다.[29]

그러자 에리크는 에길을 노르웨이에서 추방했다. 베르그-외눈드르가 에길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지만, 시도 중에 죽임을 당했다.[29] 노르웨이 탈출 중 에길은 에리크의 아들 뢰그발드 에릭손을 죽였다.[30] 그는 샤머니즘 의식으로 말의 머리를 기둥에 매달아 에리크와 군힐드를 저주했는데, 그 기둥은 ''니드스통''(또는 "니드-기둥")이었다. 니드는 대략 '경멸' 또는 '저주'로 번역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여기 나는 ''니드'' 기둥을 세우고 에리크 왕과 군힐드 여왕에 대한 이 ''니드''를 선언한다." — 그는 말머리를 육지를 향하게 했다 — "나는 여기에 있는 대지의 정령과 땅 자체에 이 ''니드''를 선언하여, 에리크 왕과 군힐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길을 잃고, 그들의 자리를 지키거나 찾지 못하게 하리라." 그는 니드의 기둥을 절벽에 세우고 세워두었다. 그는 말의 눈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기둥에 룬 문자를 새기고, 저주의 모든 공식적인 말을 말했다.[31]

4. 2. 호프드라우슬(Hǫfuðlausn)

군힐드는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숙적이었으며, 그의 사가와 시는 군힐드를 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길은 그의 형 토롤프에 의해 에리크에게 소개되었는데, 토롤프는 왕자와 친구였으며, 형제는 원래 에리크와 군힐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7] 그러나 930년경 노르웨이에 머무는 동안 에길은 에리크의 궁정의 특정 구성원들과 상속 분쟁에 휘말렸고, 그 과정에서 왕의 측근 중 한 명인 바르르 아틀레이를 죽였다.[28]

군힐드는 두 형제에게 에길과 토롤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에길은 그들이 자신과 대립했을 때 그들을 죽였고, 이는 여왕의 복수심을 더욱 키웠다.[29]

그러자 에리크는 에길을 노르웨이에서 추방했다. 베르그-외눈드르가 에길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지만, 시도 중에 죽임을 당했다.[29] 노르웨이 탈출 중 에길은 뢰그발드 에릭손, 에리크의 아들을 죽였다.[30] 그는 샤머니즘 의식으로 말의 머리를 기둥에 매달아 에리크와 군힐드를 저주했다(그 기둥은 ''니드스통'' 또는 "니드-기둥"이었다. 니드는 대략 '경멸' 또는 '저주'로 번역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나는 ''니드'' 기둥을 세우고 에리크 왕과 군힐드 여왕에 대한 이 ''니드''를 선언한다." — 그는 말머리를 육지를 향하게 했다 — "나는 여기에 있는 대지의 정령과 땅 자체에 이 ''니드''를 선언하여, 에리크 왕과 군힐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길을 잃고, 그들의 자리를 지키거나 찾지 못하게 하리라." 그는 니드의 기둥을 절벽에 세우고 세워두었다. 그는 말의 눈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기둥에 룬 문자를 새기고, 저주의 모든 공식적인 말을 말했다.[31]

에길과 군힐드의 마지막 만남은 948년경 요르비크에서 일어났다. 에길은 근처 해안에서 난파되었고 에리크 앞에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에길은 하룻밤 사이에 에리크를 칭찬하는 ''드라파''인 "호프드라우슬"을 지었다.[32] 다음 날 아침 그것을 낭송하자, 에리크는 군힐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뢰그발드를 죽인 것을 용서했다.[33]

5. 에리크 사후의 삶

남편 에리크가 사망한 후, 군힐드는 아들들과 함께 로스킬레의 하랄드 블로탄 궁정으로 피신했다.[34] 군힐드는 죽은 남편을 기리는 스칼드 시 에이리크스말을 의뢰했다고 전해진다.[35] 덴마크에서 군힐드의 아들 하랄드는 국왕에게 길러졌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재산과 칭호가 주어졌다.[36] 하랄드 국왕은 군힐드의 아들들을 노르웨이 국왕에 대한 대리인으로 활용하려 했을 수 있다.[37]

961년 피트야르 전투에서 아들들이 하콘 왕을 죽이자 군힐드는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하콘의 군대가 승리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권력 공백이 생겼고, 군힐드의 아들 하랄이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했다.[39] 이때부터 군힐드는 '코눙가모디르'(konungamóðir), 즉 "왕의 어머니"로 불렸다.[40]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하랄 회색가죽왕의 통치 기간 동안 군힐드는 궁정을 지배하며 "나라의 일에 많이 관여했다."[41] 군힐드의 아들들은 노르웨이 지방의 많은 족장과 소왕들을 죽이거나 폐위시키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이로 인해 기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하랄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다.[42]

군힐드는 아이슬란드 족장 흐루트 헤르욜프손(Hrútur Herjólfsson)의 후원자이자 연인이었다.[45] 군힐드가 흐루트보다 한 세대나 연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더욱 스캔들이 되었다.[46] 군힐드는 흐루트와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으며,[47] "상부 방"에서 단둘이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48] ''락스다엘라 사가''는 군힐드가 흐루트에게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묘사한다.[49] 군힐드는 흐루트가 유산을 차지하도록 도왔으며,[50] 흐루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음경발기증으로 그를 저주하여 결혼을 망치기도 했다.[51]

군힐드는 흐루트의 조카 올라프 파우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최고의 거래 장소와 품목에 대해 조언하고 무역 원정을 후원했다.[52]

5. 1. 덴마크 망명

남편의 사후, 군힐드는 아들들과 함께 로스킬레의 하랄드 블로탄 궁정으로 피신했다.[34]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군힐드는 죽은 남편을 기리는 스칼드 시 에이리크스말을 의뢰했다.[35]

덴마크에서 군힐드의 아들 하랄드는 국왕에게 길러졌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재산과 칭호가 주어졌다.[36] 하랄드 국왕은 호콘의 노르웨이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면서, 군힐드의 아들들을 노르웨이 국왕에 대한 대리인으로 활용하려 했을 수 있다.[37]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인 감레는 960년경 호콘 왕과 싸우다 죽었다.[38]

5. 2. 노르웨이 귀환과 왕모(王母)

군힐드는 961년 피트야르 전투에서 남은 아들들이 하콘 왕을 죽이자 승리감에 젖어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투는 하콘의 군대가 승리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권력 공백이 생겼고, 군힐드의 아들 하랄이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39] 아들들이 노르웨이의 군주가 되면서, 군힐드는 이때부터 ''코눙가모디르''(konungamóðir), 즉 "왕의 어머니"로 알려지게 되었다.[40]

하랄 회색가죽왕의 통치 기간 동안, 군힐드는 궁정을 지배했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그녀는 "나라의 일에 많이 관여했다."[41] 군힐드의 아들들은 노르웨이 지방을 통치했던 많은 족장과 소왕들을 죽이거나 폐위시키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이러한 정복전쟁으로 인해 발생했거나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기근이 하랄의 통치를 괴롭혔다.[42]

963년경 살해된 왕들 중에는 트뤼그비 올라프손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아스트리드 에릭스도터는 아들 올라프 트뤼그바손과 함께 스웨덴으로 도망쳐 동쪽 발트해 지역으로 향했다.[43]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아스트리드의 도망과 그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는 군힐드가 아들을 납치하거나 죽이기 위해 군인을 보낸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한다.[44]

군힐드는 군힐드의 아들 하랄이 통치하던 시절 노르웨이를 방문한 아이슬란드 족장 흐루트 헤르욜프손(Hrútur Herjólfsson)의 후원자이자 연인이었다.[45] 이들의 불륜은 나이 차이로 인해 더욱 스캔들이 되었다. 군힐드가 흐루트보다 한 세대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로 여겨졌다.[46] 군힐드는 포옹으로 그의 목을 감싸는 등 일반적으로 부부에게만 허용되는 애정 표현을 흐루트와 공개적으로 했다.[47] 게다가 군힐드는 흐루트와 "상부 방"에서 단둘이 잠자리를 함께 했다.[48] 특히 ''락스다엘라 사가''는 그녀가 흐루트에게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여왕 군힐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말솜씨나 다른 모든 면에서 그와 동등한 사람이 경호대 안에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남자들을 비교하고, 귀족들을 지적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은 군힐드가 어떤 사람이 흐루트와 동등하다고 말한다면 그 밑바탕에는 순전한 부주의함이나 시샘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49]

그녀는 흐루트가 자신의 하인 아우그문드와 아들 구드로드가 소티라는 남자를 죽이도록 하여 유산을 차지하도록 도왔다.[50] 흐루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군힐드는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음경발기증으로 그를 저주하여 모르드 피들의 딸 운과의 결혼을 망쳤다. 결국 둘은 이혼했다.[51]

군힐드는 또한 흐루트가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노르웨이 궁정을 방문한 흐루트의 조카 올라프 파우에게 큰 호의를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최고의 거래 장소와 품목에 대해 조언했고, 심지어 그의 무역 원정을 후원했다.[52]

5. 3. 흐루트 헤룔프손과의 관계

군힐드는 흐루트 헤르욜프손의 후원자이자 연인이었다.[45] 이들의 불륜은 나이 차이 때문에 더욱 큰 스캔들이 되었다. 군힐드가 흐루트보다 한 세대나 연상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46] 군힐드는 흐루트의 목을 포옹으로 감싸는 등, 일반적으로 부부에게만 허용되는 애정 표현을 공개적으로 했다.[47] 또한 군힐드는 흐루트와 "상부 방"에서 단둘이 잠자리를 함께 했다.[48] 특히 ''락스다엘라 사가''는 그녀가 흐루트에게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여왕 군힐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말솜씨나 다른 모든 면에서 그와 동등한 사람이 경호대 안에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남자들을 비교하고, 귀족들을 지적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은 군힐드가 어떤 사람이 흐루트와 동등하다고 말한다면 그 밑바탕에는 순전한 부주의함이나 시샘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49]

그녀는 흐루트가 자신의 하인 아우그문드와 아들 구드로드가 소티라는 남자를 죽여 유산을 차지하도록 도왔다.[50] 흐루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군힐드는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음경발기증으로 저주하여 모르드 피들의 딸 운과의 결혼을 망쳤고, 결국 둘은 이혼했다.[51]

5. 4. 올라프 파우와의 관계

피트야르 전투에서 하콘 왕이 죽은 후, 군힐드의 아들 하랄이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의 권력을 장악했다.[39] 이때부터 군힐드는 '코눙가모디르'(konungamóðir), 즉 "왕의 어머니"로 불렸다.[40]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하랄 회색가죽왕의 통치 기간 동안 군힐드는 궁정을 지배하며 "나라의 일에 많이 관여했다."[41] 군힐드의 아들들은 노르웨이 지방의 많은 족장과 소왕들을 죽이거나 폐위시키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이로 인해 기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하랄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다.[42]

963년경 살해된 왕들 중에는 트뤼그비 올라프손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 아스트리드 에릭스도터는 아들 올라프 트뤼그바손과 함께 스웨덴으로 도망쳐 동쪽 발트해 지역으로 향했다.[43]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군힐드가 아들을 납치하거나 죽이기 위해 군인을 보냈기 때문에 아스트리드는 도망쳤고, 이로 인해 재앙적인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한다.[44]

군힐드는 아이슬란드 족장 흐루트 헤르욜프손(Hrútur Herjólfsson)의 후원자이자 연인이었다.[45] 군힐드가 흐루트보다 한 세대나 연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더욱 스캔들이 되었다.[46] 군힐드는 흐루트와 공개적으로 애정 표현을 했으며,[47] "상부 방"에서 단둘이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48] ''락스다엘라 사가''는 군힐드가 흐루트에게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여왕 군힐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말솜씨나 다른 모든 면에서 그와 동등한 사람이 경호대 안에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남자들을 비교하고, 귀족들을 지적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은 군힐드가 어떤 사람이 흐루트와 동등하다고 말한다면 그 밑바탕에는 순전한 부주의함이나 시샘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49]

군힐드는 흐루트가 유산을 차지하도록 도왔으며,[50] 흐루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음경발기증으로 그를 저주하여 결혼을 망치기도 했다.[51]

군힐드는 흐루트의 조카 올라프 파우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최고의 거래 장소와 품목에 대해 조언하고 무역 원정을 후원했다.[52]

6. 몰락과 죽음

유리 덮개 관에 안치된 하랄스케르 여인, 베일레, 덴마크


호콘 시구르손이 하랄 블루투스의 묵인 하에 하랄 그레이펠을 암살한 후, 군힐드는 아들들과 함께 오크니로 갔다.[53] 군힐드의 아들들은 그곳에서 야를 토르핀을 지배자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호콘을 습격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했다.[54] 군힐드는 권력을 잡는 것보다는 조용히 사는 것을 더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55]

''욤스비킹가 사가''에 따르면, 977년경 군힐드는 덴마크로 돌아갔지만 하랄 왕의 명령으로 늪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 ''Ágrip''과 테오도리쿠스 모나쿠스의 ''Historia de Antiquitate Regum Norwagiensium''에도 이 내용이 있다.[56]

1835년, 유틀란트의 늪에서 살해당했거나 의례적으로 인신 제물로 바쳐진 하랄스케르 여인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욤스비킹가 사가''와 다른 자료에 나온 군힐드의 살해 사건 때문에, 이 시신은 군힐드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프레데릭 6세는 군힐드가 왕족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그녀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정교한 석관을 목공예로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하랄스케르 여인의 유해가 잘 보존된 것은 이러한 왕실의 대우 덕분이다. 반면, 나중에 발견된 톨룬드 남자는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시신의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머리만 전시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하랄스케르 여인은 군힐드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여성임이 밝혀졌다.[57]

6. 1. 하랄 회색 망토의 죽음과 재추방

호콘 시구르손은 971년경, 양자 하랄 블루투스의 묵인 하에 하랄 그레이하이드의 죽음을 꾸몄다. 하랄 블루투스는 양자를 덴마크로 초청하여 새로운 덴마크 봉토를 수여하려 했다. 야를 호콘과 에리크와 군힐드의 생존한 아들들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했지만, 호콘이 승리했고 군힐드는 남은 아들 구드뢰드와 라그프레드를 데리고 다시 노르웨이를 떠나야 했다.[53] 그들은 다시 오크니로 가서 야를 토르핀을 지배자로 자처했다.[54] 그러나 군힐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조용히 살 곳을 찾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아들들은 섬을 호콘의 이익에 대한 실패한 습격의 기지로 사용했다. 따라서 오크니의 정부는 확고하게 토르핀의 손에 있었다.[55]

''욤스비킹가 사가''에 따르면, 군힐드는 977년경 덴마크로 돌아갔지만 하랄 왕의 명령으로 늪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 ''Ágrip''과 테오도리쿠스 모나쿠스의 ''Historia de Antiquitate Regum Norwagiensium''에도 이 내용이 담겨 있다.[56]

1835년, 살해당했거나 의례적으로 인신 제물로 바쳐진 여인의 시신, 이른바 하랄스케르 여인이 유틀란트의 늪에서 발굴되었다. ''욤스비킹가 사가''와 다른 자료에 담긴 군힐드의 살해 사건 때문에, 시신은 실수로 군힐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가 왕족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프레데릭 6세는 그녀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정교한 석관을 목공예로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하랄스케르 여인의 유해에 대한 이러한 왕실의 대우는 시신의 뛰어난 보존 상태를 설명한다. 반대로, 나중에 발견된 톨룬드 남자는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시신의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머리만 전시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후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하랄스케르 여인은 군힐드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여성임이 밝혀졌다.[57]

6. 2. 죽음에 대한 기록

호콘 시구르손과 하랄 블루투스의 묵인 하에 하랄 그레이펠이 암살당한 후, 군힐드는 아들들과 함께 노르웨이를 떠나 오크니로 갔다.[53] 그곳에서 아들들은 야를 토르핀을 지배자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호콘에 대한 습격 기지로 사용했다.[54] 군힐드는 권력보다는 조용한 삶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55]

''욤스비킹가 사가''에 따르면, 군힐드는 977년경 덴마크로 돌아갔지만 하랄 왕의 명령으로 늪에 빠져 죽었다. ''Ágrip''과 테오도리쿠스 모나쿠스의 ''Historia de Antiquitate Regum Norwagiensium''에도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56]

1835년, 유틀란트의 늪에서 하랄스케르 여인이라 불리는 여인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이 시신은 ''욤스비킹가 사가'' 등의 기록 때문에 군힐드로 오인되었고, 프레데릭 6세는 정교한 석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다. 그러나 이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하랄스케르 여인은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여성으로 밝혀졌다.[57]

6. 3. 하랄스케르 여인



''욤스비킹가 사가''에 따르면, 군힐드는 977년경 덴마크로 돌아갔지만 하랄 왕의 명령으로 늪에 빠져 죽임을 당했다. ''Ágrip''과 테오도리쿠스 모나쿠스의 ''Historia de Antiquitate Regum Norwagiensium''에도 이 내용이 담겨 있다.[56]

1835년, 유틀란트의 늪에서 살해당했거나 의례적으로 인신 제물로 바쳐진 여인의 시신, 이른바 하랄스케르 여인이 발굴되었다. ''욤스비킹가 사가''와 다른 자료에 담긴 군힐드의 살해 사건 때문에, 시신은 실수로 군힐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가 왕족이라는 믿음에 근거하여, 프레데릭 6세는 그녀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정교한 석관을 목공예로 조각하도록 명령했다. 하랄스케르 여인의 유해에 대한 이러한 왕실의 대우는 시신의 뛰어난 보존 상태를 설명한다. 반대로, 나중에 발견된 톨룬드 남자는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시신의 대부분이 유실되었고, 머리만 전시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후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하랄스케르 여인은 군힐드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여성임이 밝혀졌다.[57]

7. 사가 속 마법 능력

군힐드는 사가에서 마법을 부리는 강력한 인물로 묘사된다. 제니 요헨스에 따르면 군힐드는 "그녀의 힘과 잔혹함으로 알려졌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관대함에 존경받았으며, 그녀의 마법, 교활함, 성적 탐욕, 그리고 그녀의 자극으로 두려움을 샀던" 인물이다.[5]

사가에서는 군힐드가 세이드 마법을 부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하랄이 죽기 전, 에리크의 이복 형제인 할프단 하랄드손 검은색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군힐드는 "마녀에게 뇌물을 주어 그에게 죽음의 술을 먹게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17]

군힐드의 마법 능력은 에길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에길은 연회에서 군힐드의 지지자 중 한 명을 죽이고 도망친 후, 군힐드에게 "그녀가 그를 볼 때까지 아이슬란드에서 평화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61] 에길은 잉글랜드로 가던 중 난파되어 에리크와 군힐드에게 붙잡혔는데, 이는 군힐드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에길은 에리크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목숨을 건졌지만, 그날 밤 군힐드가 변신술을 써서 새로 변신해 에길을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2]

7. 1. 핀란드 마법사와의 관계

군힐드는 아이슬란드 사가(Icelandic sagas)에서 종종 마법과 연관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군힐드가 핀족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군힐드는 핀마르크(Finnmark)에서 핀란드 마법사 두 명과 함께 오두막에 살면서 그들에게서 마법을 배웠다고 한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에이리크는 젊었을 때 북부 노르웨이에서 습격에 나섰다가 군힐드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에이리크의 부하들은 군힐드가 머물던 핀족의 오두막에 우연히 들어가 그녀를 "그들이 결코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묘사했다.[58] 군힐드는 에이리크의 부하들에게 핀족의 오두막에 숨도록 설득한 다음, 린넨 자루의 내용물을 오두막 안팎에 뿌렸다. 이 행동은 마법의 징후로 여겨지며, 핀족이 돌아오자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잠들게 했다. 군힐드는 물개 가죽으로 그들의 머리를 덮고 에이리크의 부하들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하여 마법을 완성한 후 에이리크에게 돌아갔다.[58] 역사학자 말린 시클라미니(Marlene Ciklamini)는 군힐드의 핀란드 체류를 에이리크의 실정을 아내에게 전가하기 위한 "우화"라고 묘사한다.[59]

7. 2. 하콘 왕의 죽음에 대한 책임

군힐드는 미발의 하랄이 죽기 전, 에릭의 이복 형제 할프단 하랄드손 검은색이 의문의 죽음을 맞자 "마녀에게 뇌물을 주어 그에게 죽음의 술을 먹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7]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군힐드는 하콘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전투에서 화살이 하콘의 팔뚝 근육을 관통했는데, "군힐드의 마법을 통해 한 부엌 아이가 돌며 외쳤다. '왕의 살해자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시오!' 그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무리에 화살을 날려 왕을 부상시켰다."[60]

7. 3. 에길에 대한 저주

에길 스칼라그림손의 사가와 시는 군힐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군힐드는 에길의 숙적이었다. 에길은 그의 형 토롤프를 통해 에리크에게 소개되었고, 형제는 원래 에리크, 군힐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7] 그러나 930년경 에길은 에리크 궁정의 특정 구성원들과 상속 분쟁에 휘말려 왕의 측근인 바르르 아틀레이를 죽였다.[28]

군힐드는 두 형제에게 에길과 토롤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에길은 그들과 대립했을 때 그들을 죽였고, 이는 여왕의 복수심을 더욱 키웠다.[29]

에리크는 에길을 노르웨이에서 추방했다. 베르그-외눈드르가 에길을 붙잡으려다 죽임을 당했고,[29] 에길은 노르웨이 탈출 중 에리크의 아들 뢰그발드 에릭손을 죽였다.[30] 에길은 샤머니즘 의식으로 말의 머리를 기둥에 매달아 에리크와 군힐드를 저주했는데, 그 기둥은 ''니드스통'' 또는 "니드-기둥"이었다. 니드는 대략 '경멸' 또는 '저주'로 번역된다. 에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나는 ''니드'' 기둥을 세우고 에리크 왕과 군힐드 여왕에 대한 이 ''니드''를 선언한다." — 그는 말머리를 육지를 향하게 했다 — "나는 여기에 있는 대지의 정령과 땅 자체에 이 ''니드''를 선언하여, 에리크 왕과 군힐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길을 잃고, 그들의 자리를 지키거나 찾지 못하게 하리라." 그는 니드의 기둥을 절벽에 세우고 세워두었다. 그는 말의 눈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기둥에 룬 문자를 새기고, 저주의 모든 공식적인 말을 말했다.[31]


948년경 요르비크에서 에길과 군힐드는 마지막으로 만났다. 에길은 근처 해안에서 난파되어 에리크에게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에길은 하룻밤 사이에 에리크를 칭찬하는 ''드라파''인 "호프드라우슬"을 지었다.[32] 다음 날 아침 에길이 시를 낭송하자, 에리크는 군힐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풀어주고 뢰그발드를 죽인 것을 용서했다.[33]

8. 유산과 평가

군힐드 코눙가모디르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은, 예를 들어 그녀의 부모에 대한 내용조차 논쟁의 대상이다. 비록 그녀가 사가에서 역사적 인물로 다뤄지지만, 그녀의 역사성조차 논쟁의 여지가 있다.[3]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세부 사항은 주로 아이슬란드 출처에서 비롯되며, 이 출처는 일반적으로 아이슬란드 정착민들이 하랄드의 폭정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주장한다. ''토지서''(Landnámabók)와 같은 출처의 역사성이 논쟁의 대상이지만, 하랄드가 그들의 조상 중 많은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몰아냈다는 인식은 아이슬란드인들 사이에서 에리크와 군힐드에 대한 전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낳았다.[4] 따라서 그윈 존스와 같은 학자들은 그들이 보고한 일부 에피소드를 의심스럽게 여긴다.[4]

사가에서 군힐드는 종종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다. 제니 요헨스에 따르면 군힐드는 "그녀의 힘과 잔혹함으로 알려졌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관대함에 존경받았으며, 그녀의 마법, 교활함, 성적 탐욕, 그리고 그녀의 자극으로 두려움을 샀던" 인물로 묘사된다.[5]

군힐드의 부모는 덴마크 왕족에서 노르웨이 북부 홀로갈란의 농부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핀마르크와 인접한 땅 출신이 되었고, 핀란드 마법사들에 의한 그녀의 마법 훈련은 더욱 그럴듯하게 되었다. 존스는 이러한 꾸며낸 이야기가 아이슬란드 사가 작가가 여왕에게 마법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영웅적인 조상들의 패배와 추방"을 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했다.[6]

8. 1. 권력과 역할

캐럴린 래링턴은 군힐드가 지녔던 권력의 양과 노르웨이 궁정 내에서 여왕으로서의 전반적인 역할에 대해 흥미롭게 고찰한다. 여왕직이라는 개념은 노르웨이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했으며, 래링턴이 지적하듯이 노르웨이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들은 보통 왕의 아내가 아닌 왕의 어머니였다. 군힐드는 이러한 규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적인 예외 중 하나로 작용했는데, 이는 에이리크와 그녀의 아들들의 통치 기간 동안 모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군힐드는 남편 에이리크가 전투에서 사망한 후 점점 더 정치적으로 활동적이 되었으며, 그 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그녀의 아들들을 권력에 앉히고, 아들 하랄을 왕위에 올렸다. 또한 군힐드는 딸의 결혼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크니 백작에게 주선하여 정치적 이점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군힐드는 남은 생애 동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끈기를 보였으며, 아들 하랄의 섭정 여왕으로 활동했고, 주요 결정 요인이자 정치적 조언의 원천으로 계속 남았다.

8. 2. 대중문화 속 묘사

군힐드는 로버트 레이튼의 1934년 소설 ''영광스러운 올라프''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며,[64] 이 소설은 올라프 트리그바손의 허구적인 전기이다. 폴 앤더슨의 소설 ''왕들의 어머니''의 주요 등장인물이며,[65] 이 소설에서는 그녀를 로그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손녀로 묘사하며, 핀란드 주술사들과 함께 살았다는 설을 받아들여 그녀가 마녀라는 점을 강조한다. 세실리아 홀랜드의 ''영혼 도둑''에도 등장한다.[66] 폴 앤더슨과 밀드레드 다우니 브록슨이 공동 집필하고 마이클 웰런과 앨리샤 오스틴이 삽화를 담당한 ''스캐터리 섬의 악마''에서[67] 바이킹 할도르와 전직 수녀아일랜드 브리깃이 군힐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로버트 로우의 "까마귀 뼈"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제네비에브 고르니첵의 역사 판타지 소설 "직조공과 마녀 여왕"의 제목을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이슬란드 배우 라그네이뒤르 라그나르스도티르가 텔레비전 시리즈 ''바이킹''에서 군힐드를 연기했다.[68]

참조

[1] 문서 Gunnhildr Özurardóttir
[2] 웹사이트 Harald I ! Biography & Facts https://www.britanni[...] 2021-06-16
[3] 문서 Downham 112-120; Jones (1968) 121–24; Bradbury 38; Orfield 129; Ashley 444; Alen 88; Driscoll 88, note 15.
[4] 문서 Jones (1968) 121–24.
[5] 서적 Old Norse Images of Women
[6] 문서 Jones (1968) 121–22.
[7] 문서 Bradbury 38; Orfield 129; Ashley 444; Alen 88; Driscoll 88, note 15.
[8] 문서 Jones (1968) 94–95.
[9] 문서 For example, Harald Fairhair's Saga § 34. The Ágrip af Nóregskonungasögum calls her father Ozurr lafskegg [dangling beard], thus also Fagrskinna; Driscoll § 5 & p. 88, note 15.
[10] 문서 Egil's Saga § 37.
[11] 문서 Theodoricus, § 6 & p. 64, note 54; Driscoll, § 11 & p. 91, note 39.
[12] 문서 Harald Fairhair's Saga § 34.
[13] 문서 Fagrskinna § 8.
[14] 문서 Ciklamini 210-211.
[15] 문서 Harald Fairhair's Saga § 46.
[16] 문서 E.g., Harald Fairhair's Saga § 34; Njal's Saga §§ 5–8; Fox 289–310.
[17] 문서 "Harald Fairhair's Saga" § 44.
[18] 문서 Harald Fairhair's Saga §§ 45–46.
[19] 문서 E.g., Ashley 443–44.
[20] 문서 According to the "Saga of Haakon the Good", it was King [[Athelstan of England]] who appointed Erik as ruler of Jorvik, but this is chronologically problematic; Athelstan died in 939. Ashley, among others, proposes that Erik received his commission from Athelstan but did not take it up until later. Ashley 443–44.
[21] 문서 Saussaye 183.
[22] 문서 Haakon the Good's Saga §§ 4–5.
[23] 문서 Haakon the Good's Saga § 5.
[24] 문서 Ashley 443; see also Haakon the Good's Saga § 5; Fagrskinna §§ 8–9. Ragnhild would later, according to the [[Orkneyinga Saga]], murder Arnfinn, marry his brother Havard, murder him in turn, and then marry their brother Ljot. Ashley 443–44.
[25] 문서 Downham 116.
[26] 문서 Downham 118.
[27] 문서 Egil's Saga § 36.
[28] 문서 Egil's Saga §§ 56–58.
[29] 문서 Egil's Saga §§ 59–60.
[30] 문서 Egil's Saga § 60.
[31] 문서 Egil's Saga § 60. the Icelandic source is, essentially, giving Egil credit for the ouster of Gunnhild and Erik from Norway.
[32] 문서 He did so despite being pestered by the noise of a bird, which he believed was Gunnhild disguised with magic. Egil's Saga § 62
[33] 문서 Egil's Saga § 64.
[34] 문서 Haakon the Good's Saga § 10. As noted above, Harald may have been Gunnhild's brother or half-brother.
[35] 문서 Jones (1968) 123; Fagrskinna § 8; Haakon the Good's Saga § 10.
[36] 문서 Fagrskinna
[37] 문서 Haakon the Good's Saga
[38] 문서 Haakon the Good's Saga
[39] 서적 Saga of Haakon the Good
[40] 서적
[41] 서적 Harald Grafeld's Saga
[42] 서적 Harald Grafeld's Saga
[43] 서적 Olaf Tryggvason's Saga
[44] 서적 Olaf Tryggvason's Saga
[45] 문서 Njal's Saga
[46] 문서
[47] 문서
[48] 문서
[49] 문서 Laxdaela Saga
[50] 문서 Njal's Saga
[51] 문서 Njal's Saga
[52] 문서 Laxdaela Saga
[53] 문서 Olaf Tryggvason's Saga
[54] 문서 Olaf Tryggvason's Saga
[55] 문서
[56] 문서 Jomsvikinga Saga
[57] 웹사이트 Haraldskaer Woman: Bodies of the Bogs http://www.archaeolo[...] Archaeological Institute of America 1997-12-10
[58] 서적 Heimskringla
[59] 서적 The Folktale in Heimskringla (Hálfdanar Saga Svarta. Hákonar Saga Góða)
[60] 서적 Heimskringla
[61] 서적 Egil's Saga
[62] 서적 Egil's Saga
[63] 간행물 Queens and Bodies: The Norwegian Translated lais and Hakon IV's Kinswomen
[64] 문서 Macmillan 1929
[65] 문서 Tor Books 2003
[66] 문서 Forge Books 2002
[67] 문서 Ace Books 1979
[68] 웹사이트 From the Olympics to "Vikings" with New York Film Academy Acting Alum Ragga Ragnars https://www.nyfa.edu[...] New York Film Academy 2018-01-05
[69] 문서
[70] 서적 Old Norse Images of Women
[71] 서적 Jones 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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