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쑹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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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궈쑹링은 20세기 초 중국의 군벌로, 청나라 말기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혁명 비밀 결사인 퉁멍후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장쭤린 휘하에서 봉천군벌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으나, 장쭤린의 친일 행보에 반발하여 1925년 반란을 일으켰다. 궈쑹링은 국민군과의 연계를 시도했으나, 일본 관동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반란은 만주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독립운동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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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쑹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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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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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궈쑹링 |
출생 | 1883년 |
사망 | 1925년 12월 25일 |
출생지 | 청나라 봉천성 심양시 |
사망지 | 중화민국 (1912-1949) 봉천성 요중현 라오다팡 마을 |
별칭 | 없음 |
군사 경력 | |
소속 | 청나라 (1905–1912) 중화민국 (1912-1949) 북양정부 (1911–1925) 봉천군벌 |
복무 기간 | 1905–1925 |
참전 | 제1차 직봉 전쟁 제2차 직봉 전쟁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궈쑹링은 1883년 선양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상의 고향은 타이위안이었다. 1905년 펑톈 육군 초급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바오딩 군관학교에 추천되었다. 1907년 졸업 후 청나라 신군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1909년 주칭란 장군의 후원을 받아 쓰촨성으로 이동했고, 1910년 혁명 비밀 결사 퉁멍후이에 가입했다.
2. 1. 청년기와 성장 과정
궈쑹링은 1883년 오늘날 선양인 청나라 펑톈성의 수도 무크덴 외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 고향은 중국 중부의 타이위안이었다.1905년, 만주총독 자오얼쉰이 펑톈 육군 초급학교를 설립했고, 22세의 궈쑹링이 입학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다음 해 바오딩 군관학교에 진학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바오딩 군관학교는 화북 최고의 군사학교였다. 1907년 졸업 후 그는 청나라의 신군에 들어가 무크덴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1909년, 장군 주칭란이 경비 사령관이 되었고, 주는 궈쑹링의 가까운 후원자가 되었다. 주가 보직을 옮기자, 궈쑹링은 주를 따라 쓰촨성의 새로운 보직으로 이동했다. 주가 감독하는 부대에서는 혁명 비밀 결사 퉁멍후이가 활동했으며, 묵인되었다. 궈쑹링은 1910년에 퉁멍후이에 가입했다.
2. 2. 군 입문 및 초기 활동
궈쑹링은 1883년 오늘날 선양인 청나라 펑톈성의 수도 무크덴 외곽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 고향은 중국 중부의 타이위안이었다.1905년, 만주총독 자오얼쉰이 펑톈 육군 초급학교를 설립했고, 22세의 궈쑹링이 입학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다음 해 바오딩 군관학교에 진학하라는 추천을 받았다. 바오딩 군관학교는 화북 최고의 군사학교였다. 1907년 졸업 후 그는 청나라의 신군에 들어가 무크덴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1909년, 장군 주칭란이 경비 사령관이 되었고, 주는 궈쑹링의 가까운 후원자가 되었다. 주가 보직을 옮기자, 궈쑹링은 주를 따라 쓰촨성의 새로운 보직으로 이동했다. 주가 감독하는 부대에서는 혁명 비밀 결사 퉁멍후이가 활동했으며, 묵인되었다. 궈쑹링은 1910년에 퉁멍후이에 가입했다.[2] 1911년, 쓰촨성에서 혁명파에 의한 봉기, 그리고 이어진 혼란이 발생하자 궈쑹링은 봉천으로 돌아와 혁명을 획책했다.[2] 그러나 자오얼쉰과 장쭤린의 단속을 받아 체포, 수감되었다. 동기 학생들의 지원으로 간신히 석방되었다.[3][4]
2. 3. 중국동맹회 가입과 활동
1909년 (선통 원년), 궈쑹링은 쓰촨성으로 전임하여 위대 관대에 임명되었다. 이때 팡성타오와 예취안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2] 1911년 (선통 3년), 쓰촨성에서 혁명파의 봉기와 혼란이 발생하자, 궈쑹링은 봉천으로 돌아와 혁명을 꾀했다.[2] 그러나 자오얼쉰과 장쭤린의 단속으로 체포, 수감되었으나, 동기생들의 지원으로 석방되었다.[3][4]3. 군사 경력
1911년, 철도 보호 운동 당시 궈쑹링은 쓰촨 퉁멍회의 봉기에 가담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진압했다. 공화주의 성향을 의심받아 자오얼펑에게 지휘권을 박탈당했으나, 주칭란의 탄원으로 복직했다.
1919년, 장쭤린이 만주군 육군 강무당(东三省陆军讲武堂)을 설립하자 궈쑹링은 군사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장쉐량은 궈쑹링의 제자 중 한 명으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920년 장쉐량이 강무당을 졸업하고 펑톈군 여단장이 되자, 궈쑹링은 장쉐량의 추천으로 참모장이 되었다.
궈쑹링은 참모장으로서 장쉐량의 여단을 펑톈군 최고의 정예 부대 중 하나로 훈련시켰다. 같은 해 7월, 즈리-안후이 전쟁에서 즈리 군벌과 연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궈쑹링은 톈진에서 안후이 군대를 격파하여 장쭤린의 신임을 얻었다.
1921년, 장쭤린은 펑톈군을 10개 혼성 여단으로 확장했고, 궈쑹링은 제8여단 지휘를 맡았다. 제3여단(장쉐량 지휘)과 제8여단은 연합 사령부를 구성, 궈쑹링은 두 부대의 작전과 훈련을 책임졌다. 1922년 제1차 즈리-펑톈 전쟁에서 펑톈 군벌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제3, 제8 혼성 여단은 큰 피해 없이 후퇴했다. 이후 장쭤린은 육군 정리처(陆军整理处)를 설치, 장쉐량을 참모장, 궈쑹링을 부참모장으로 임명했다.
3. 1. 신해혁명과 쓰촨 군정부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쓰촨성으로 확산되었다. 쓰촨은 독립을 선언하고 청두에 "쓰촨 중화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 기간 동안 주칭란과 같은 외부 출신 장교들은 현지 쓰촨 출신 장교들에게 밀려 군사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궈쑹링은 후원자가 제거되자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2]3. 2. 호법운동 참여
1917년 7월, 쑨원이 베이양 군벌의 국가 정부 장악에 반대하며 호법운동을 선포하고 광저우에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궈쑹링의 후원자였던 주칭란은 쑨원과 동맹을 맺고 쑨원 휘하의 광둥성 주지사 직을 맡았고, 궈쑹링은 주칭란을 따라 광둥으로 갔다.[5] 이 기간 동안 궈쑹링은 광둥, 광시, 후난 국경 감독 사무소의 참모와 광둥 군사 연대장을 역임했다. 젊은 장교였던 궈쑹링은 쑨원의 칭찬을 받았다.[5] 그는 사오관 강무당 중교 교관으로 부임하여 쑨원과 직접 만나 계군(광시군)의 발흥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5] 1918년 5월, 쑨원이 군벌의 압력으로 광저우 군사 정부를 해산하자, 궈쑹링은 펑톈으로 돌아갔다.[5][6][4]3. 3. 봉천군벌에서의 활약
궈쑹링은 친화(秦華)의 추천으로 봉천 독군서 중교 참모가 되었다. 1919년 장쭤린이 동삼성 육군 강무당(동삼셩 육군 강무당)을 재건하자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장쉐량이 강무당을 졸업하고 순열사서 위대 여단 여단장이 되면서, 궈쑹링은 장쉐량의 요청으로 여단 참모장 겸 제2단 단장이 되었다.[7][8][4]궈쑹링은 군대 훈련에 힘써 장쉐량의 여단을 봉천파 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1920년 7월 안직 전쟁(安直戦争)에서 궈쑹링은 선봉 사령관으로 참전, 톈진에서 안휘파(安徽派) 군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비적 토벌에도 기여하며 장쭤린의 신임을 얻었다.[9]
1921년 장쭤린은 펑톈 육군을 10개 혼성 여단으로 확대하며, 장쉐량을 제3혼성 여단장, 궈쑹링을 제8혼성 여단장으로 임명했다.[8] 두 여단은 연합 사령부를 구성, 궈쑹링은 군 운영 및 훈련의 실질적 책임을 맡았다. 1922년 제1차 봉직 전쟁(奉直戦争)에서 봉천파가 대패했으나, 장쉐량과 궈쑹링의 부대는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이후 장쭤린은 육군 정리처를 설치, 장쉐량을 참모장, 궈쑹링을 참모장 대리에 임명해 군대 정리 및 훈련을 맡겼다.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민력 휴양과 내정 근대화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3. 3. 1. 장쉐량과의 관계
1919년, 장쭤린이 만주군 육군 강무당(东三省陆军讲武堂)을 설립하자 궈쑹링은 군사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강무당에서 배우고 있었는데, 궈쑹링의 능력에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7][8][4] 1920년 봄, 장쉐량은 강무당을 졸업하고 펑톈군 여단장에 임명되었고, 궈쑹링은 장쉐량의 추천으로 그의 참모장 겸 제2단 단장이 되었다.[7][8][4]궈쑹링은 참모장으로서 장쉐량의 여단을 펑톈군 최고의 정예 부대 중 하나로 훈련시켰다. 같은 해 7월, 즈리-안후이 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장쭤린에 의해 안후이 군벌에 대항하는 연합군 선봉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궈쑹링의 군대는 톈진에서 안후이 군대를 격파하여 장쭤린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었다.[9]
1921년, 장쭤린은 펑톈군을 10개의 혼성 여단으로 확장했고, 장쉐량은 제3여단, 궈쑹링은 제8여단 지휘를 맡았다. 제3여단과 제8여단은 연합 사령부를 구성했고, 궈쑹링은 두 부대의 작전과 훈련을 책임졌다. 1922년 4월, 제1차 즈리-펑톈 전쟁에서 펑톈 군벌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장쉐량과 궈쑹링이 이끄는 제3, 제8 혼성 여단은 큰 피해 없이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이후 장쭤린은 육군 정리처를 설치하고 장쉐량을 참모장, 궈쑹링을 부참모장에 임명하여 군대 정리와 훈련을 맡겼다.[8][4] 한편,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민력 휴양과 내정 근대화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3. 3. 2. 제1차, 제2차 직봉전쟁 참전
1919년 장쭤린이 만주군 육군 강무당(东三省陆军讲武堂)을 설립했을 때, 궈쑹링은 군사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있었는데, 장쉐량은 궈쑹링의 능력에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1920년 장쉐량이 강무당을 졸업하고 펑톈군 여단장이 되자, 장쉐량의 추천으로 궈쑹링은 그의 참모장이 되었다.[7][8][4]궈쑹링은 참모장으로서 장쉐량의 여단을 펑톈군 최고의 정예 부대 중 하나로 훈련시켰다. 같은 해 7월, 즈리-안후이 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장쭤린에 의해 안후이 군벌에 대항하는 즈리 군벌 연합군의 선봉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궈쑹링의 군대는 톈진에서 안후이 군대를 격파하여 장쭤린의 신임을 더욱 얻었다.[9]
1921년, 장쭤린은 펑톈군을 10개의 혼성 여단으로 확장하면서 장쉐량을 제3혼성여단 여단장, 궈쑹링을 제8혼성여단 여단장으로 임명했다.[8] 제3여단과 제8여단은 연합 사령부를 구성했고, 궈쑹링은 두 부대의 작전과 훈련을 책임졌다. 1922년 4월, 제1차 즈리-펑톈 전쟁이 발발하여 펑톈 군벌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장쉐량과 궈쑹링이 이끄는 제3, 제8 혼성여단은 큰 피해 없이 후퇴했다. 이후 장쭤린은 육군 정리처(陆军整理处)를 설치하고 장쉐량을 참모장, 궈쑹링을 부참모장으로 임명하여 군대 재건과 훈련을 맡겼다.[8][4]
4. 궈쑹링의 반란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펑위샹, 이경림 등 반(反) 장쭤린파 군벌의 지원을 받아,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 장쭤린에게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궈쑹링은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을 결성하고,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목표로 내걸었다.[8][4]
약 7만여 명의 동북군(장쭤린 휘하 부대)이 궈쑹링의 반란에 가담했다. 11월 30일, 궈쑹링은 사령부를 산하이관으로 이동하고, 진황도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게 일본군의 중립을 요청했다. 이 소식은 중국과 만주 전역에 퍼져나가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와 몽골의 몽골족, 그리고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까지 호응했다. 12월 7일, 궈쑹링군은 진저우를 점령하는 등 초기에는 군사 작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15]
그러나 제2차 직봉 전쟁 당시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과 국민군 펑위샹의 장쭤린 아들 옹립 제안을 받아들여 일으킨 이 반란은, 션양의 일본 수비대가 장쭤린을 옹호하고, 예상했던 민중의 지지나 국민군의 지원이 없어 좌절되었다. 결국 궈쑹링의 군대는 한 달 만에 奉天 군대에 포위되어 전멸했고, 1925년 12월 24일 궈쑹링과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었다.
4. 1. 장쭤린에 대한 불만과 갈등
궈쑹링은 장쭤린의 계속되는 전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24년 제2차 봉직 전쟁 당시, 궈쑹링은 펑위샹과 연락을 취하며 장쭤린 타도를 꾀하기도 했다.[11]1925년 10월, 궈쑹링은 군사 시찰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이 장쭤린의 군사적 확장을 지원하고 있으며, 장쭤린이 일본에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궈쑹링은 장쭤린과 일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12]
이러한 불만은 펑위샹, 이경림 등 반(反)장쭤린 군벌의 지원에 대한 믿음과 함께,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이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궈쑹링의 반란에는 약 7만여 명의 동북군이 가담했다. 궈쑹링은 산해관으로 사령부를 이동하고 진황도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게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이 만주로 진주할 때 일본군은 중립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와 몽골의 몽골족, 그리고 독립운동 세력까지 궈쑹링의 반란에 호응했다. 궈쑹링군은 12월 7일 금주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직봉 전쟁 당시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 국민군의 펑위샹으로부터 장쭤린의 아들을 만주 왕위에 앉히도록 돕자는 권유를 받아들여 일으킨 반란은, 션양의 일본 수비대가 장쭤린을 옹호하고, 예상했던 민중의 지지나 국민군의 지원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좌절되었다.
4. 1. 1. 양위팅과의 갈등
1924년 제2차 봉직 전쟁에서 궈쑹링이 공을 세워 봉천군이 승리했지만, 양위팅은 궈쑹링을 정적으로 여기고 제거하려 했다. 이로 인해 둘은 심하게 대립했다.[8] 궈쑹링은 장쭤린의 전쟁 지속 방침에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제2차 봉직 전쟁 중 궈쑹링은 펑위샹과 연락하여 장쭤린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1]1925년 10월, 궈쑹링은 일본을 군사 시찰하면서 장쭤린의 군사적 확장 배후에 일본이 있고, 장쭤린이 일본에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இதனால் 장쭤린과 일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커졌다.[12] 같은 해 11월, 봉군과 펑위샹의 국민군이 충돌하자,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국민군 토벌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궈쑹링은 '''황화강 72 열사''' 중 한 명인 린줴민의 형이자 중화민국 임시약법 제정으로 알려진 린창민을 비서장으로 삼아 장쭤린과 양위팅을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린창민이 1924년에 '일본인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대중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에, 궈쑹링 또한 관동군에게 적대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궈쑹링은 장쉐량을 옹호할 계획이었으나, 장쉐량은 궈쑹링의 내전 중단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군사 행동에는 반대했다.[13]
4. 2. 국민군과의 연계 시도
궈쑹링은 펑위샹의 국민군과 연계를 시도하며, 1925년 11월 22일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인 장쭤린의 하야를 권고하고 그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8] 궈쑹링은 제2차 직봉 전쟁 당시 친구의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과 경쟁 세력인 국민군의 펑위샹으로부터 장쭤린의 아들을 만주 왕위에 앉히도록 돕자는 제안을 받고 반란을 결심했다.궈쑹링은 장쭤린에게 전쟁 지속 방침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제2차 직봉 전쟁 중에 이미 펑위샹과 연락을 취하며 장쭤린 타도를 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11] 1925년 10월 일본 군사 시찰을 통해 군사적 확장을 계속하는 장쭤린의 배후에 일본이 있으며, 장쭤린이 일본에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장쭤린과 일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키웠다.[12]
11월, 봉군과 펑위샹의 국민군 간 충돌이 발생하자 궈쑹링은 장쭤린으로부터 국민군 토벌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는 '''황화강 72 열사''' 중 한 명인 린줴민의 형이자 중화민국 임시약법 제정으로 알려진 린창민을 비서장으로 삼아 장쭤린과 양위팅을 토벌하려 했다.[13]
4. 3. 반란의 발발과 전개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펑위샹, 이경림 등 반(反)*장쭤린파 군벌의 지원을 믿고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 장쭤린에게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4] 궈쑹링은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을 결성하고,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목표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8][4]약 7만여 명의 동북군(장쭤린 휘하 부대)이 궈쑹링의 반란에 가담했다. 11월 30일, 궈쑹링은 사령부를 산하이관으로 이동하고, 진황도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게 일본군의 중립을 요청했다. 이 소식은 중국과 만주 전역에 퍼져나가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와 몽골의 몽골족, 그리고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까지 호응했다. 12월 7일, 궈쑹링군은 진저우를 점령하는 등 초기 군사 작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15]
제2차 직봉 전쟁 당시 궈쑹링은 친구의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과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국민군 펑위샹의 권유를 받아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11월 22일, 선양에 있는 장쭤린의 사령부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으나, 선양의 일본 수비대가 장쭤린을 옹호하기 위해 개입했고, 예상했던 민중의 지지나 국민군의 지원도 없어 좌절되었다.
4. 3. 1. 린창민의 역할
궈쑹링은 1925년 11월 22일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약 7만 명의 동북군 병사들이 가담했다.[14] 궈쑹링은 산하이관으로 사령부를 이동하고, 진황도의 일본 무관에게 일본군의 중립을 요청했다. 궈쑹링의 반란 소식은 만주 전역에 퍼져나가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 몽골의 몽골족과 독립운동 세력까지 호응했다. 12월 7일, 궈쑹링군은 진저우를 점령했다.[15]제2차 직봉 전쟁 당시 궈쑹링은 친구의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과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펑위샹의 권유를 받아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선양의 일본 수비대가 장쭤린을 옹호하고, 예상했던 민중이나 국민군의 지원이 없어 좌절되었다. 궈쑹링의 군대는 펑톈 군대에 포위되어 전멸했고, 1925년 12월 24일 궈쑹링과 그의 아내는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었다.[18][8][4]
일본 측은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14]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장쭤린을 몰아내고 삼민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만주에 소련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우려했다.[14]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토모이치로도 궈쑹링의 반란 성공으로 일본의 권익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
펑톈의 요시다 시게루 총영사 등 외무성 당국자들도 궈쑹링이 만주를 장악하면 적화 위협이 있다고 보고, 장쭤린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판단했다.[16] 일본 정부는 만주 문제를 중국의 "일부 정세"로 판단했고,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 대신도 장쭤린을 지지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인식했다.[17]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통보하여 장쭤린이 반격할 수 있게 했다. 궈쑹링은 12월 23일에 패배하여 도망쳤지만 체포되어 12월 25일 랴오중 현에서 총살되었다.[18][8][4]
5. 일본의 개입과 반란의 실패
일본은 궈쑹링에게 장쭤린 타도에 협조하는 대가로 이권 보장을 요구했으나, 궈쑹링은 이를 거부했다. 궈쑹링은 일제를 경계했고, 장쭤린 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장쭤린과 비밀 조약을 체결,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을 보장하고 장쭤린을 지원하기로 했다.
백천(白川) 일본군 사령관은 동북국민군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하였다. 관동군의 출병과 철도, 도로 봉쇄로 궈쑹링의 동북국민군은 곤경에 처했다. 1925년 12월 24일경, 궈쑹링 군대는 펑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신민둔 일대에서 오준승, 장쭤린 군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만주 주둔 일본군 (관동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궈쑹링이 패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궈쑹링과 그의 부인은 신민둔 백기보(지금의 신민현 백기보)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8]
5. 1. 일본의 개입 배경
1925년 11월, 궈쑹링이 친일 군벌 장쭤린에 반기를 들고 만주를 장악하려 하자, 일본은 만주에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개입을 결정했다. 궈쑹링은 펑위샹 등 반(反)장쭤린 군벌의 지원을 받았고, 초기에는 진저우를 점령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15]일본은 궈쑹링에게 장쭤린 타도에 협조하는 대가로 이권 보장을 요구했으나, 궈쑹링은 이를 거부했다. 궈쑹링은 평소 일제를 경계했고,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장쭤린과 비밀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을 보장받고 장쭤린을 지원하기로 했다.
일본은 궈쑹링의 봉기가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 확대와 소련의 개입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특히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토모이치로는 궈쑹링의 성공이 "동삼성이 적화 운동에 유린"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14]
5. 1. 1. 요시다 시게루 등 일본 주요 인물들의 역할
일본 측은 만주 군벌 교체 가능성과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되어 있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도 받고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14]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장쭤린을 몰아내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아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 분명하며, 동삼성을 전란에 휩싸이게 하고 만주에 소련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국방 및 만몽 정책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한다"고 판단했다.[14]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토모이치로는 궈쑹링의 반란 성공으로 "동삼성이 적화 운동에 유린되어 만철이나 관동주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 지대’가 출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일본의 권익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펑톈의 요시다 시게루 총영사와 톈진의 아리타 하치로 총영사를 포함한 외무성 당국자들도 궈쑹링이 만주를 장악하면 국민당의 진출을 초래하고 적화 위협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장쭤린의 세력을 유지하여 현상 유지를 꾀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판단했다.[16] 일본 정부는 만주 문제를 중국의 "일부 정세"로 보았다.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 대신도 "대국 상 불리함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의 존재를 지지하는 데 크게 노력하는 것이 제국을 위해 득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7]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와 그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이로 인해 장쭤린은 반격하기 위한 동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 2. 관동군의 군사 개입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동북 국민군" 결성을 선언했다.[14]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목표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8][4] 궈쑹링의 부대는 5만 명으로 펑톈 군(奉天軍) 중 가장 정예 부대로 평가받았다.[14] 궈쑹링은 11월 28일에 산하이관을 공략하고, 12월 1일에 만주로 진입했으며,[14] 12월 7일에는 진저우도 점령했다.일본은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도 받고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14]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삼민주의를 실현하려 함이 분명하며, 동삼성을 전란에 휩싸이게 하고, 만주에 소련의 세력을 유치하여 일본의 국방 및 만몽 정책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한다"고 판단했다.[14]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토모이치로도 궈쑹링의 반란 성공으로 인해 "동삼성이 적화 운동에 유린되어 만철이나 관동주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 지대’가 출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일본의 권익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했다.
펑톈의 요시다 시게루 총영사 등을 포함한 외무성 당국자들도 궈쑹링이 만주를 장악하면 국민당의 진출을 초래하고 적화 위협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장쭤린의 세력을 유지하여 현상 유지를 꾀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판단했다.[16] 일본 정부는 만주 문제를 중국의 "일부 정세"로 판단했다.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 대신도 "대국 상 불리함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의 존재를 지지하는 데 크게 노력하는 것이 제국을 위해 득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7]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와 그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통보했다. 이로 인해 장쭤린은 반격하기 위한 동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궈쑹링은 12월 23일에 패배하여 부인 한수슈와 함께 도망쳤지만, 결국 체포되었다. 12월 25일, 궈쑹링과 한수슈는 펑톈성 랴오중 현에서 함께 총살되었다.[18][8][4]
5. 3. 반란의 좌절과 궈쑹링의 처형
장쭤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군(관동군)이 출병하고 철도와 도로를 봉쇄하면서, 궈쑹링의 동북국민군은 곤경에 처했다. 1925년 12월 24일경, 궈쑹링 군대는 펑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신민둔 일대에서 오준승, 장쭤린 군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14] 만약 일본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궈쑹링이 패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2월 23일, 궈쑹링은 패배하여 부인 한수슈와 함께 도망쳤지만, 결국 신민둔 백기보(지금의 신민현 백기보)에서 체포되었다.[18] 12월 25일, 궈쑹링과 한수슈는 펑톈성 랴오중 현에서 함께 총살되었다. 궈쑹링은 43세, 한수슈는 35세였다.[18][8][4]
궈쑹링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만주 군벌이 교체될 가능성이 있었고,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도 받고 있다는 점을 일본은 경계했다.[14]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장을 몰아내고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여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실현하려 함"으로 판단했고,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토모이치로도 궈쑹링의 반란 성공으로 인해 "동삼성이 적화 운동에 유린"될 것을 우려했다.
일본 정부는 만주 문제를 중국의 "일부 정세"로 판단했고,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 대신도 "대국 상 불리함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의 존재를 지지하는 데 크게 노력하는 것이 제국을 위해 득책"이라고 인식했다.[17]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와 그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통보했고, 이는 장쭤린이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6. 반란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궈쑹링의 반란은 만주와 중국 정세,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만주에서는 평소 친일 군벌에 불만을 품던 몽골족과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이 궈쑹링의 반란에 호응했다.[1] 궈쑹링은 1925년 11월 22일 장쭤린에게 하야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약 7만 명의 동북군이 이에 가담했다.[1][2] 11월 30일에는 일본군에게 중립을 요청했으며,[3] 12월 7일에는 금주를 점령하는 등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4]
그러나 일본은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지원했다.[14] 결국 궈쑹링은 1925년 12월 23일 패배하고, 12월 25일 랴오중 현에서 부인과 함께 총살당했다.[18][8][4] 궈쑹링의 실패로 펑위샹은 1926년 1월 초 하야하고 소련으로 퇴각했다.[19]
궈쑹링의 반란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1]
6. 1. 만주 정세에 미친 영향
궈쑹링의 반란은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몽골의 몽골족과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풍옥상, 이경림 등 반장쭤린파 군벌의 지원을 믿고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 장쭤린의 하야를 권고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 약 7만여 명의 동북군(장쭤린 휘하 부대)이 궈쑹링의 반란에 가담했다.[2]궈쑹링은 11월 30일 산해관으로 사령부를 이동하고 진황도 주재 일본 무관에게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의 만주 진주 시 일본군의 엄정 중립을 요청했다.[3] 12월 7일에는 궈쑹링군이 금주를 점령하는 등, 반란의 소식은 중국과 만주 전역에 퍼져나갔다.[4]
6. 2. 펑위샹의 하야와 국민군
제2차 직봉 전쟁 당시 궈쑹링은 친구의 지휘관 해임에 대한 불만과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펑위샹의 제안을 받아들여 1925년 중반에 반란을 일으켰다.[14]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하야를 요구하며 '동북 국민군' 결성을 선언하고,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목표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8][4]궈쑹링의 부대는 5만 명으로 펑톈 군 중 가장 정예 부대로 여겨졌다.[14] 궈쑹링은 11월 28일에 산하이관을 공략하고, 12월 1일에 만주로 진입했으며,[14] 12월 7일에는 진저우도 점령하는 등 초반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션양의 일본 수비대가 장쭤린을 옹호하기 위해 개입하고, 예상했던 민중이나 국민군의 지원이 없어 그의 반란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14]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장을 몰아내고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여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실현하려 함"으로 판단했다.[14] 1925년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와 그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통보하여 장쭤린이 반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궈쑹링은 1925년 12월 23일에 패배하고, 12월 25일 랴오중 현에서 부인 한수슈와 함께 총살되었다.[18][8][4] 궈쑹링의 반란 실패로 궁지에 몰린 펑위샹은 1926년 1월 초에 하야를 선언하고 외몽골을 거쳐 소련으로 퇴각했다.[19]
6. 3.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1925년 11월 22일경, 궈쑹링은 만주의 대표적인 친일 군벌 장쭤린의 하야를 권고하고 그를 타도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약 7만여 명의 동북군(장쭤린 휘하 부대)이 가담했다.[1] 11월 30일, 궈쑹링은 사령부를 산해관으로 이동하고 진황다오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게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의 만주 진주 시 일본군의 엄정 중립을 요청했다.[1]궈쑹링의 반란 소식은 중국과 만주 전역에 퍼져나갔다. 평소 친일파에 불만을 품던 만주·몽골의 몽골족 외에도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까지 이 반란에 호응했다.[1] 궈쑹링군은 12월 7일 진저우를 점령했다.[1] 이 사건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참조
[1]
서적
多数説は1883年生まれ。劉主編(2005)、1841頁は1882年としている。
[2]
서적
徐主編(2007)、1267頁。
[3]
서적
任・武(2005)、420-421頁。
[4]
서적
劉主編(2005)、1841頁。
[5]
서적
任・武(2005)、421頁。
[6]
서적
徐主編(2007)、1267-1268頁。
[7]
서적
任・武(2005)、421-422頁。
[8]
서적
徐主編(2007)、1268頁。
[9]
서적
任・武(2005)、422頁。
[10]
서적
任・武(2005)、422-423頁。
[11]
서적
任・武(2005)、423-424頁。
[12]
서적
任・武(2005)、424-425頁。
[13]
서적
任・武(2005)、425-426頁。
[14]
서적
臼井(1971)、8頁。
[15]
서적
任・武(2005)、427-428頁。
[16]
서적
臼井(1971)、8-9頁。
[17]
서적
臼井(1971)、9-10頁。
[18]
서적
任・武(2005)、428-429頁。
[19]
서적
臼井(1971)、11-1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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