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타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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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궈타이치는 중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베이징 정부, 호법군정부, 국민정부에서 활동하며 외교부 차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신해혁명 이후 후베이성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쑨원의 호법군정부에 참여하여 외교 차장을 지냈으며,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주영 공사 및 대사를 거쳐, 중일 전쟁 중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941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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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타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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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궈타이치 (郭泰祺) |
로마자 표기 | Guo Taiqi (Kuo T'ai-ch'i) |
출생일 | 1888년 12월 4일 |
사망일 | 1952년 2월 29일 |
사망 장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
국적 | 중화민국 |
소속 정당 | 중국 국민당 |
학력 | |
출신 학교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경력 | |
주 유엔 중화민국 대표 | 1946년 7월 21일 ~ 1947년 11월 13일 |
외교부장 | 1941년 4월 10일 ~ 1941년 12월 27일 |
수상 | |
훈장 | 삼성 훈장 1등급 (1937년) |
2. 사적
궈타이치는 교육, 외교,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중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했다. 그의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교육: 후베이 방언학교, 우창 국립 외국어학교, 우창 상과대학 등에서 교장을 역임했다.[4][5][6] 1935년에는 런던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5][6]
- 외교:
- 1918년 호법군정부 외교 차장으로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7][5][6]
-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호법군정부 대표로 파견되었으나, 베이징 정부를 위한 활동으로 대표 자격을 얻지 못했다.[7][5][6]
-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 정전 교섭에 중국 측 대표로 참가,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10][6]
- 1932년-1941년 주영 공사 및 초대 주영 대사로 재임하며 국제 연맹에서 만주국 승인에 반대했다.[5][6]
-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 국제 연맹에 일본의 군사 행동을 비난했다.[11]
- 1941년 외교부장으로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한 국가와 단교를 추진했다.[5]
- 1947년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중국 수석 대표 및 상주 대표를 역임했다.[13][5][6]
- 정치:
- 1912년 신해혁명 이후 후베이 군정부 외교고장에 임명되고 국민당에 가입했다.[4][5][6]
- 1916년 리위안훙 대총통 승격 후 고등 고문 겸 외교부 참사에 임명되었다.[4][5][6]
- 1920년 군정부 참사 겸 선전국 국장에 임명되었다.[8][5][6]
- 1922년 광둥성 정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8][5][6]
- 1927년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에게 협력하여 장쑤성 외교 교섭원 겸 상하이 정치분회 위원이 되었다.[5][6]
- 이후 서산회의파, 신광서파, 왕징웨이 등 반(反)장제스파에 가담했다.[9]
- 1935년 및 1945년 중국 국민당 중앙 감찰 위원에 선출되었다.[5][6]
- 말년: 1947년-1949년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13][5][6]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귀국 제안을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1952년 미국에서 사망했다.[13][5][6]
2. 1. 베이징 정부 시대의 활동
1912년(민국 원년) 신해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후베이 군정부 외교고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국민당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했다. 이듬해 2월, 리위안훙이 부총통으로 임명되자, 궈타이치는 영문 비서로 그를 수행하여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1916년(민국 5년) 6월, 위안스카이 사망에 따라 리위안훙이 대총통으로 승격되자, 궈타이치는 고등 고문 겸 외교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7월, 장쉰 복벽이 일어나 리위안훙이 실각하자 궈타이치도 하야했다. 그 후에는 후베이성으로 돌아가, 후베이 방언학교와 우창 국립 외국어학교, 우창 상과대학에서 교장을 역임했다.[4][5][6]2. 2. 호법군정부에서의 활동
1918년(민국 7년), 궈타이치(郭泰祺)는 광저우로 가서 쑨원의 호법군정부에 가입하여 참사 겸 외교 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여름, 천유런, 왕정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의 호법군정부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19년(민국 8년) 1월, 궈타이치와 천유런은 호법군정부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궈타이치와 천유런은 미국에서 베이징 정부 부인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후에 별도로 파견된 왕정팅이 강화 회의에서 호법군 대표가 되었다.[7][5][6]1920년(민국 9년) 11월 25일, 쑨원 등이 군정부를 개편함에 따라 궈타이치는 군정부 참사 겸 선전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 쑨원이 비상 대총통이 되자 궈타이치는 총통부 참사가 되었다. 1922년(민국 11년) 4월, 광둥성 정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외교부 차장이 되었다. 1924년(민국 13년), 국립 우창 상과대학 교장에 임명되었다.[8][5][6]
2. 3. 국민정부에서의 활동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궈타이치는 장제스에게 협력하여 장쑤성 외교 교섭원 겸 상하이 정치분회 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외교부 차장 겸 중국 국민당 중앙선전부 상하이 사무처 국제조 주임이 되었다[5][6]. 그러나 이후 궈타이치는 서산회의파, 신광서파, 왕징웨이 등 반(反)장제스파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1931년 12월 각 파의 대동 단결까지 이러한 입장을 유지했다[9]。1932년 1월,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이 되면서 뤄원간은 외교부장, 궈타이치는 외교 차장에 각각 임명되었다[5]. 같은 달, 제1차 상하이 사변 (1.28 사변) 이후 정전 교섭에 중국 측 대표로 참가하여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때 상하이의 각 단체와 학생들이 반대 운동을 벌였고, 궈타이치는 엽전을 맞아 머리를 다쳐 입원했다. 이로 인해 협정 조인은 병원 침대에서 이루어졌다[10][6]。
같은 해 6월, 궈타이치는 외교 차장에서 물러나 주영 공사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국제 연맹에 세 차례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만주국 승인에 반대하는 논쟁을 벌였다. 1935년 5월, 공사에서 대사로 승격됨에 따라 초대 주영 대사가 되었다. 같은 해 런던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1월에는 중국 국민당 제5기 중앙 감찰 위원으로 선출되었다[5][6]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 (항일 전쟁)이 발발하자 궈타이치는 여러 차례 국제 연맹에 일본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는 조회를 보냈다[11]。
2. 4. 외교부장 시절
1941년 4월, 궈타이치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왕총후이의 후임으로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5] 궈타이치는 장제스의 반대파였고, 장제스는 본래 측근인 왕스지에를 후임으로 원했지만, 왕스지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천궈푸가 이를 원치 않아, 그 운동의 결과로 궈타이치가 임명되었다. 궈타이치는 왕징웨이의 난징 국민정부를 승인한 국가와의 단교를 추진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궈타이치는 갑작스럽게 외교부장에서 해임되어 국방 최고 회의 외교 위원회 주석으로 이동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미(對美) 협상에서의 장제스와의 의견 대립, 혹은 거액의 관저 수축 비용에 대한 비난 등이 거론되었지만, 명확하지 않다.[12]2. 5. 전후 활동과 죽음
1941년 4월, 궈타이치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왕총후이의 후임으로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5]。 궈타이치는 반 장제스파 인물이었고, 장제스는 본래 측근인 왕스지에를 후임으로 원했지만, 왕스지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천궈푸가 이를 원치 않아, 그 운동의 결과로 궈타이치가 임명되었다. 궈타이치는 왕징웨이의 난징 국민정부를 승인한 국가와의 단교를 추진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궈타이치는 갑작스럽게 외교부장에서 해임되어 국방 최고 회의 외교 위원회 주석으로 이동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미(對美) 협상에서의 장제스와의 의견 대립, 혹은 거액의 관저 수축 비용에 대한 비난 등이 거론되었지만, 명확하지 않다[12]。1945년 5월, 국민당 제6기 중앙 감찰 위원에 재선되었다[5][6]。중일 전쟁 종결 후 1947년 4월, 궈타이치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의 중국 수석 대표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그대로 안보리 상주 대표를 역임했다. 같은 해 12월에 브라질 대사로 전임되어 1949년까지 재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공산당 지도자가 궈타이치의 귀국을 환영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 무렵 궈타이치는 이미 병에 걸려 귀국할 수 없었다. 1952년 2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만 64세)였다[13][5][6]。
참조
[1]
뉴스
Ar Triju zvaigžņu ordeni apbalvoto 22. saraksts
http://periodika.lv/[...]
2022-01-02
[2]
서적
邵(2000)、98頁と劉国銘主編(2005)、1848頁による。徐主編(2007)、1273頁は1890年生まれとする。
[3]
서적
以上、邵(2000)、98頁による。徐主編(2007)、1273頁と劉国銘主編(2005)、1848頁によると、[[1909年]](光緒元年)に郭は帰国して湖北方言学校を創設、自ら校長に就任した、としている。しかしこれが事実であれば、郭は当時数え年22の若さで校長に就任したことになる。
[4]
서적
邵(2000)、98-99頁。
[5]
서적
徐主編(2007)、1273頁。
[6]
서적
劉国銘主編(2005)、1848頁。
[7]
서적
邵(2000)、99頁。
[8]
서적
邵(2000)、99-100頁。
[9]
서적
邵(2000)、100-101頁。
[10]
서적
邵(2000)、101頁。
[11]
서적
邵(2000)、101-102頁。
[12]
서적
邵(2000)、102頁。なお劉国銘主編(2005)、1848頁は後者の理由をとる。
[13]
서적
邵(2000)、10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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