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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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정은 촉한 말기의 인물로, 조부 극검은 익주 자사였으나 도적에게 살해당했고, 아버지 극읍은 맹달의 영도독이었다가 위나라에 항복하여 중서령사가 되었다. 극정은 촉한에서 비서령을 지냈으며, 촉한 멸망 시 등애에게 항복 조서를 작성했다. 유선을 보필하여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유선이 위나라 섭정 사마소에게 촉나라를 그리워하는지 질문받았을 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각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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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郤正 (극정) |
본명 | 郤纂 (극찬) |
자 | 令先 (영선) |
출생지 | 사례 하남윤 옌스현 |
사망 | 278년 |
관직 | |
안양령 | ? ~ 273년 |
비서랑 | ? ~ ? |
비서령 | ? ~ ? |
파서태수 | 273년 ~ 278년 |
작위 | 관내후 |
군주 | |
섬긴 군주 | 유선 → 조환 → 사마염 |
가족 | |
아버지 | 郤揖 (극읍) |
친척 | 극검 |
직업 | |
직업 | 문필가, 시인, 정치가 |
2. 촉한에서의 생애
극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글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비서리가 되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비서령까지 올랐다. 황호(黃皓)와 같은 시기에 일했으나,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기 때문에 황호로 인한 화는 면했다.
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등애(鄧艾)에게 바치는 항복 조서를 작성했다. 성도(成都)에서 종회(鐘會)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단신으로 유선(劉禪)을 보필하였다. 유선은 이때 극정을 발탁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 직후, 극정은 관내후에 봉해졌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극정(郤正)은 옌스(현재의 허난성 옌스)에서 시주안(郤纂)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극정이 아주 어렸을 때 뤄양에서 서쪽으로 이주하여 이주(현재의 쓰촨성 및 충칭시 지역)로 이주했다. 조부 극검(郤儉)은 익주 자사를 지내던 중 도적에게 살해되었고, 아버지 극읍(郤揖)은 맹달(孟達)의 영도독이 되었고, 후에 맹달을 따라 위에 항복하여 중서령사가 되었다.[2]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글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비서사가 되었고,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르던 황호(黃皓)와 같이 일했으나,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황호에 의한 화는 면했다. 극정은 황호의 저택 옆에 30년 동안 살았지만, 특별히 총애받지도 미움을 받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녹봉은 600석을 넘지 못했지만, 관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다.
어릴 때 아버지 극읍이 죽고 어머니도 재혼했기 때문에 혼자 생계를 꾸려갔다. 생활은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서적을 읽었고, 주로 역사와 정치 분야에서 독학했다. 그는 언어에 재능이 있었고, 이주 전역의 문인들로부터 책과 에세이를 빌려 공부했다. 촉한에 출사하여 비서리가 되었고, 승진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 비서령에 이르렀다.
2. 2. 황호와의 관계
극정은 황호(黃皓)의 집 옆에서 30년 동안 살았지만, 특별히 총애를 받지도 미움을 받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녹봉은 600석을 넘지 못했지만, 관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다.[1]2. 3. 촉한 멸망과 항복 문서 작성
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등애(鄧艾)에게 항복 조서를 썼으며,[3] 성도(成都)에서 종회(鐘會)가 난을 일으키자, 단신으로 유선(劉禪)을 보필하였다.[1] 유선은 극정을 발탁하지 못함에 한탄하였고, 이후 극정은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4] 유선이 낙양으로 이송될 때 처자를 버리고 따라갔으며, 유선은 극정의 보좌로 잘못 없이 행동할 수 있었으므로, "극정을 평가하는 것이 늦었다"라고 후회했다고 한다.3. 촉한 멸망 이후의 삶
촉한 멸망 이후, 극정은 사예교서(司隸校書) 직을 맡았다. 촉나라에서 고위직에 있었지만, 권신 황호와는 거리를 두어 정치적 다툼을 피할 수 있었다.[2]
263년 등애에게 항복하는 문서를 작성했고, 이 문서는 ''삼국지''에 기록되었다.[3] 종회의 난 당시 가족을 뒤로하고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간 충신이었다.[1] 이후 위나라에서 제후로 봉해진 다섯 명 중 한 명이 되었다.[4]
273년, 파서군의 태수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 함녕 4년 (278년)에 사망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등애에게 보낸 유선의 항복 문서와 다른 에세이 한 편이 남아 ''삼국지''에 전해진다.
3. 1. 유선 보필과 서진 출사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문재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비서사가 되었고,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르던 황호(黃皓)와 같이 일했으나,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황호에 의한 우환은 면했다.[2]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등애(鄧艾)에게 항복 조서를 썼으며,[3] 성도(成都)에서 종회(鐘會)가 난을 일으키자, 단신으로 유선(劉禪)을 보필하였다.[1] 이때 유선은 극정을 발탁하지 못함에 한탄하였다. 그 직후,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4]
낙양에서 유선은 예법과 품행에 관한 문제에 대해 극정을 의지했다.[1]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위나라 섭정 사마소가 언젠가 유선에게 촉나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지 물었고, 이에 유선은 너무 행복해서 촉나라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대답했다. 극정은 유선을 찾아가서 만약 그가 다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가족 묘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슬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5]
이후 안양 현령·파서태수로 출세했다.
3. 2. 사마소와의 일화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위나라 섭정 사마소가 유선에게 촉나라를 생각하는지 묻자, 유선은 너무 행복해서 촉나라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대답했다.[5] 희정은 유선에게 만약 다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가족 묘지에서 멀리 떨어져 슬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5]4. 평가 및 기타
극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뛰어난 문재로 널리 알려져 젊은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비서사가 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며, 당시 권력을 쥐고 흔들던 황호와 함께 일했음에도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아 황호로 인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등애에게 바치는 항복 조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성도에서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홀로 유선을 보필하였으며, 유선은 극정을 등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 직후, 극정은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일부 삼국지연의 판본에서는 '''각정'''(卻正)으로 나온다.
4. 1. 문학적 업적
극정은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문장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사마상여, 반고, 장형 등 역대 문인들의 문장, 편, 부와 동시대의 뛰어난 논문 등 익주에 관련된 것은 거의 모두 읽었다.100편에 달하는 시, 논, 부를 썼으며, 강유를 높이 평가한 논문과, '석기(釈譏)'라는 자신을 비판하는 글에 대한 변명문이 남아있다.
비서랑 시절, 극정은 자주 맹광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다. 한번은 맹광이 극정에게 황태자 유선의 성격과 능력을 묻자, 극정은 신중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맹광은 이를 높이 평가했지만, 황태자가 갖춰야 할 모습을 논하며 극정을 감탄하게 했다.
촉나라 항복 후, 유선은 사마소에게 "때로는 촉나라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여기(위나라)가 즐거워서 생각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극정은 이 말을 듣고 "다음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선조의 묘가 멀리 롱서(隴蜀)에 있어,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진언했다. 유선이 이 진언을 따랐는데, 사마소가 그것을 간파하고 비웃음을 샀다.
4. 2. 인물됨과 일화
극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뛰어난 문재로 널리 알려져 젊은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비서사가 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며, 당시 권력을 쥐고 흔들던 황호(黃皓)와 함께 일했음에도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아 황호로 인한 화를 피할 수 있었다.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등애(鄧艾)에게 바치는 항복 조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성도(成都)에서 종회(鐘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홀로 유선을 보필하였다. 이때 유선은 극정을 등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 직후, 극정은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극정은 명예보다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사마상여, 반고, 장형 등 역대 문인들의 문장과 당대 뛰어난 논문 등 익주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섭렵하였다.
100편에 달하는 시, 논, 부를 남겼으며, 강유를 높이 평가한 논문과 자신을 비판하는 글에 대한 변론인 '석기(釈譏)'가 전해진다.
비서랑 시절, 극정은 맹광을 자주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맹광이 황태자 유선의 성격과 능력을 묻자, 극정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맹광은 이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황태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논하여 극정을 감탄하게 했다.
촉한 멸망 후, 유선이 사마소에게 "촉나라가 그립지 않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여기(위나라)가 즐거워 생각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극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다음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선조의 묘가 멀리 陇西(농서)에 있어,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십시오"라고 조언했다. 유선이 이 조언을 따랐으나, 사마소는 이를 간파하고 비웃었다.
4. 3. 연의에서의 등장
일부 삼국지연의 판본에서는 '''각정'''(卻正)으로 나온다.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4]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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