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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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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회의 난은 264년 위나라 장수 종회가 촉한 정벌 후 일으킨 반란이다. 사마소는 종회가 반역할 것을 예상했으나, 그의 능력을 믿고 촉 정벌을 맡겼다. 종회는 등애를 제거하고 반란을 준비했으나, 호열의 밀고로 실패하여 강유와 함께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으며, 사마소는 종회의 반란을 진압하고 위관이 등애를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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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종회의 난
부분 분쟁삼국 시대의 전쟁
날짜264년 3월 1일 ~ 3월 3일
장소쓰촨성 청두
원인불명
영토 변화변화 없음
결과종회와 강유는 반란군에 의해 살해됨;
등애와 그의 아들은 처형됨;
반란 진압
교전 세력
교전국 1종회
교전국 2조위
교전국 3종회 휘하의 반란군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종회
강유
교전국 2사마소
가충
등애
등충
교전국 3위관
호열
호원
구건

2. 배경

사마소종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촉한 정벌군의 지휘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소제는 종회가 독신이고 거느린 군사가 많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마소는 이러한 우려를 알면서도 종회의 능력을 믿고 그를 임명했으며, 설령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촉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위나라 군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2]

등애와 종회는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에 참여하여 서로 대립했다. 종회는 검각을 통해 진격하려 했으나, 등애는 음평을 통해 진격했다. 강유는 종회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음평에서 군사를 이동시켰고, 등애는 빠르게 성도에 도착하여 유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촉 영토 점령 과정에서 등애는 독단적인 명령을 내렸고, 종회는 오만함을 보였다.

2. 1. 위나라의 촉한 정벌

사마소종회를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촉을 정벌하도록 임명하려 하자, 소제는 종회가 수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고, 독신이며, 걱정할 가족이 없기 때문에 위나라에 반역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마소는 웃으며 소제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종회의 촉 정벌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종회가 위나라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그는 또한 종회가 반역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촉 백성들은 그들의 나라가 정복된 것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종회를 돕지 않을 것이다. 둘째, 위나라 군대는 원정 후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므로 종회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2]

등애와 종회는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에 참여하여 침략 과정에서 서로 대립했다. 종회가 검각을 통해 진격을 요구한 반면, 등애는 대신 음평을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강유는 종회의 동쪽 공격에 놀라 음평에서 모든 군대를 이동시켜 종회의 진격을 막았다. 그 결과, 등애의 음평을 통한 진격은 신속하여 빠르게 성도에 도착하여 유선에게 항복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촉 영토 점령 과정에서 등애는 성도에서 독재적인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종회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고 믿으며 오만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2. 2. 종회와 등애의 갈등

사마소종회를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촉을 정벌하도록 임명하려 하자, 소제는 종회가 수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고, 독신이며, 걱정할 가족이 없기 때문에 위나라에 반역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마소는 웃으며 소제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종회의 촉 정벌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종회가 위나라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그는 또한 종회가 반역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촉 백성들은 그들의 나라가 정복된 것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종회를 돕지 않을 것이다. 둘째, 위나라 군대는 원정 후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므로 종회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2]

등애와 종회는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에 참여하여 침략 과정에서 서로 대립했다. 종회가 검각을 통해 진격을 요구한 반면, 등애는 대신 음평을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강유는 종회의 동쪽 공격에 놀라 음평에서 모든 군대를 이동시켜 종회의 진격을 막았다. 그 결과, 등애의 음평을 통한 진격은 신속하여 빠르게 성도에 도착하여 유선에게 항복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촉 영토 점령 과정에서 등애는 성도에서 독재적인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종회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고 믿으며 오만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2. 3. 강유의 계략

사마소종회를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촉을 정벌하도록 임명하려 하자, 소제는 종회가 수천 명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고 독신이며 걱정할 가족이 없기 때문에 위나라에 반역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마소는 웃으며 소제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종회의 촉 정벌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종회가 위나라 군대를 이끌도록 했다. 그는 또한 종회가 반역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촉 백성들은 그들의 나라가 정복된 것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종회를 돕지 않을 것이다. 둘째, 위나라 군대는 원정 후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므로 종회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2]

등애와 종회는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에 참여하여 침략 과정에서 서로 대립했다. 종회가 검각을 통해 진격을 요구한 반면, 등애는 대신 음평을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강유는 종회의 동쪽 공격에 놀라 음평에서 모든 군대를 이동시켜 종회의 진격을 막았다. 그 결과, 등애의 음평을 통한 진격은 신속하여 빠르게 성도에 도착하여 유선에게 항복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후 촉 영토 점령 과정에서 등애는 성도에서 독재적인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종회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고 믿으며 오만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대로 강유는 유선과 연락하여 종회를 반역하도록 유도하고, 위나라 군대를 약화시킨 다음, 종회를 죽이고 군대의 권력을 장악하여 촉의 독립을 재선언하는 계획을 세웠다.

2. 4. 등애 제거

종회는 등애가 반란을 꾀했다는 가짜 편지를 위조하여 사마소와 등애 사이에 불신을 조성했다. 이는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낸 서신에서 드러낸 오만함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종회는 등애가 위나라 조정에 보낸 보고서를 은밀히 가로채 편집하여 등애의 오만함을 과장하는 한편, 등애에 대한 의심을 표명하는 보고서를 직접 제출했다. 또한 사마소가 등애에게 보낸 편지를 파기하여 등애를 더욱 고립시키려 했다.[3]

264년 초, 사마소는 종회를 내사(內史)로 임명하고 등애를 체포하여 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 위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위관은 종회의 명령에 따라 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鄧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종회는 위관이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여 등애에 대한 거짓 혐의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기를 바랐지만, 위관은 사마소의 조서에 따라 등애의 군대가 무기를 내려놓은 밤에 등애를 기습했다. 등애는 결국 체포되어 수레에 갇혔다.[4]

2. 5. 반란 준비

종회는 등애가 반란을 꾀했다는 가짜 편지를 위조하여 사마소와 등애 사이에 불신을 조성했다.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낸 서신에서 드러낸 오만함은 이러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켰다. 종회는 위조에 능숙하여 등애가 위나라 조정에 보낸 보고서를 은밀히 가로채 편집하여 등애의 오만함을 과장하는 한편, 등애에 대한 의심을 표명하는 보고서를 직접 제출했다. 또한 사마소가 등애에게 보낸 편지를 파기하여 등애를 더욱 고립시키려 했다.[3]

264년 초, 사마소는 종회를 내사(內史)로 임명하고 등애를 체포하여 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 위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위관은 종회의 명령에 따라 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鄧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종회는 위관이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여 등애에 대한 거짓 혐의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기를 바랐지만, 위관은 사마소의 조서에 따라 등애의 군대가 무기를 내려놓은 밤에 등애를 기습했다. 등애는 결국 체포되어 수레에 갇혔다.[4]

사마소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충과 함께 낙양을 출발하여 성도로 향했다. 사마소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 주둔하려 하자, 소제(邵悌)는 사마소에게 종회가 등애보다 5~6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장안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사마소는 "전에 했던 말을 잊었는가? 어째서 이제 와서 나에게 가지 말라고 하는가? 우리가 나눈 대화를 비밀로 해 주십시오. 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존경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충성하는 한, 나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충이 최근에 나에게 '종회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오늘 당신을 임무에 보낸다면 당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5]

종회는 즉시 옛 촉(蜀) 영토에서 위(魏) 군대의 임시 사령관이 되었고, 이때 그의 오만함은 극에 달했다. 종회는 낙양을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강유는 사곡(斜谷)에서 선봉 부대를 이끌고 나와 장안을 공격할 것이다. 종회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뒤따라 지원할 것이다.

# 장안을 점령한 후, 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뉜다. 보병은 위수황하를 따라 낙양 근처 맹진(孟津)으로 항해하고, 기병은 육로로 낙양으로 이동할 것이다. 종회는 이 여정에 5일이 걸릴 것으로 추산했다.

# 보병과 기병은 낙양 외곽에서 합류하여 함께 도시를 공격할 것이다.[6]

2. 6. 반란 선포

사마소등애가 항복하지 않을까 두려워 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사곡으로 진입하여 낙성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에 주둔할 것이며, 곧 서로 만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종회에게 보냈다. 편지를 읽은 종회는 충격을 받고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께서 나에게 등애를 체포하라고 명하셨을 때, 혼자서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지금,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신 것을 보면 나를 의심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 성공하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촉한으로 물러나 유비처럼 될 수 있다. 내가 수춘 반란 이후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어찌 이런 명성에 만족하겠는가?"[7] 종회는 강유 등을 자신의 주 장수로 삼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포했다.

264년 2월 29일, 종회는 성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는 모든 고위 장교들과 옛 촉 장교들을 불러 최근 사망한 곽태후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옛 촉 황궁에 모이게 했다. 추모식에서 그는 곽태후가 죽기 전에 내렸다고 주장하는 가짜 조서를 보여주었다. 그 조서에는 곽태후가 위나라에 충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마소에 대항하여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라고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종회는 장교들에게 의견을 묻고, 곽태후의 유언을 따르겠다면 명단에 서명하라고 요구한 다음, 측근들에게 각 군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장교들을 각자의 사무실에 가두고 문을 닫게 했으며, 성문은 폐쇄하고 삼엄하게 경비하도록 명령했다.[8]

종회의 장교 중 한 명은 호열의 부하였고 사마소에게 추천을 받은 구건(丘建)이었다. 종회는 구건을 매우 아끼고 중용하여 자신의 부대로 전출을 요청했다. 구건은 홀로 방에 갇힌 호열을 동정하여 종회에게 다가가 구금된 각 장교들이 개인적인 필요를 돌볼 하인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고, 종회는 동의했다. 호열은 하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구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종회가 자신의 부대가 아닌 장교들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 소문은 구금된 모든 장교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종회의 부하들은 그 소문을 듣고 상관에게 "아문기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모든 장교들을 처형하고 등애 부대의 병력을 반란군에 흡수할 것을 제안했다. 강유는 특히 이를 지지했는데, 이는 촉나라 부활에 앞서 위나라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개인적인 계략이었다. 종회는 의심스러웠지만 이 계획에 동의했다.[9]

2. 7. 호열의 밀고와 진압

사마소로부터 등애가 항복하지 않을까 두렵다는 편지를 받은 종회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신속하게 행동하여 성공하면 천하를 얻고, 실패하면 촉한으로 물러나 유비처럼 될 수 있다고 결심한다.[7] 종회는 수춘 반란 이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자신의 명성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종회는 강유 등을 자신의 주 장수로 삼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포한다.

264년 2월 29일, 종회는 성도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는 고위 장교들과 옛 촉 장교들을 곽태후 추모식 명목으로 옛 촉 황궁에 모이게 했다. 추모식에서 그는 곽태후가 죽기 전에 내렸다고 주장하는 가짜 조서를 보여주었다. 그 조서에는 곽태후가 위나라에 충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마소에 대항하여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라고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종회는 장교들에게 의견을 묻고, 곽태후의 유언을 따르겠다면 명단에 서명하라고 요구한 다음, 측근들에게 각 군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장교들을 각자의 사무실에 가두고 문을 닫게 했으며, 성문은 폐쇄하고 삼엄하게 경비하도록 명령했다.[8]

종회의 장교 중 한 명은 호열의 부하였고 사마소에게 추천을 받은 구건(丘建)이었다. 종회는 구건을 매우 아끼고 중용하여 자신의 부대로 전출을 요청했다. 구건은 홀로 방에 갇힌 호열을 동정하여 종회에게 다가가 구금된 각 장교들이 개인적인 필요를 돌볼 하인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고, 종회는 동의했다. 호열은 하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구건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종회가 자신의 부대가 아닌 장교들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 소문은 구금된 모든 장교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졌다. 종회의 부하들은 그 소문을 듣고 상관에게 "아문기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모든 장교들을 처형하고 등애 부대의 병력을 반란군에 흡수할 것을 제안했다. 강유는 특히 이를 지지했는데, 이는 촉나라 부활에 앞서 위나라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개인적인 계략이었고, 종회는 의심스러웠지만 이 계획에 동의했다.[9]

3월 3일 정오 무렵, 호열의 아들 호연과 그의 형제, 아버지의 부하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고,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그들은 이끌 사람이 없어 무질서하게 성문으로 돌진했다. 위관과 구건은 종회에 대항하는 봉기에 합류했다. 그 무렵 강유는 종회에게서 갑옷과 무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후, 많은 병사들이 성문 근처에 몰려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종회는 놀라 강유에게 "저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강유는 "죽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회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아직 사무실에 억류되어 있는 장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부 장교들은 가구 조각으로 문을 막았다. 종회의 부하들은 문을 들이받았지만 열 수 없었다. 잠시 후, 사다리를 타고 성문에 올라가거나 건물에 불을 지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혼란이 벌어졌고, 화살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억류된 장교들은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병사들과 재결합하여 종회와 강유를 공격했다. 종회와 강유는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싸워 다섯 명 또는 여섯 명 정도를 죽였지만, 결국 압도당하여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鍾會|종회중국어는 죽었을 때 동아시아 나이로 40세였다. 이 반란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잃었다.[10]

3. 결과 및 영향

강유는 종회에게서 갑옷과 무기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시 후, 많은 병사들이 성문 근처에 몰려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종회는 놀라 강유에게 "저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강유는 "죽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종회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아직 사무실에 억류되어 있는 장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부 장교들은 가구 조각으로 문을 막았다. 종회의 부하들은 문을 들이받았지만 열 수 없었다. 잠시 후, 사다리를 타고 성문에 올라가거나 건물에 불을 지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혼란이 벌어졌고, 화살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억류된 장교들은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병사들과 재결합하여 종회와 강유를 공격했다. 종회와 강유는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싸워 다섯 명 또는 여섯 명 정도를 죽였지만, 결국 압도당하여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종회는 죽었을 때 동아시아 나이로 40세였다. 이 반란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잃었다.[10]

사마소장안에 도착했을 때, 종회는 이미 사마소가 예견한 대로 반란으로 죽임을 당했다.[11] 위관은 종회의 군대를 장악한 후, 등애와 등충이 체포된 것에 대한 보복을 시도할까 두려워 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 이후 위관은 사마소 휘하로 복귀하여, 결국 그의 아들 사마염과 그가 곧 건국한 진나라에서 봉직했다.

4. 평가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섹션 제목, 요약 등을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5. 대중문화 속 종회의 난

종회의 난은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제119장에 등장한다. 소설 속 관련 일화에는 강유가 죽은 뒤 시신이 훼손되었는데, 그의 쓸개(중국 문화에서 용기를 상징)가 크게 부풀어 있었다고 묘사된다. 이는 '담대여두(膽大如斗)'라는 속담으로 쓰이며, 무모한 어리석음을 뜻한다.[12] 강유의 쓸개는 시신과 별도로 묻혔고, 그의 묘소는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에 있다.[13]

5. 1. 관련 인물

반란은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제119장에 등장한다. 반란과 관련된 소설에 포함된 인기 있는 일화는 강유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이 훼손되어 쓸개(중국 문화에서 용기의 전통적인 근원)가 거대한 크기로 부풀어 무모한 어리석음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속담으로 사용되는 구절인 "담대여두(膽大如斗)"로 묘사된다.[12] 그의 쓸개는 시신과 별도로 묻혔다고 하며, 그의 묘소가 그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에 있다.[13]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http://www.iep.utm.e[...]
[2] 서적 Sanguozhi vol. 28
[3]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4] 서적 Sanguozhi vol. 28
[5] 서적 Sanguozhi vol. 28
[6] 서적 Sanguozhi vol. 28
[7] 서적 Sanguozhi vol. 28
[8] 서적 Sanguozhi vol. 28
[9] 서적 Sanguozhi vol. 28
[10] 서적 Sanguozhi vol. 28
[11] 서적 Sanguozhi vol. 28
[12] 문서 dou
[13] 웹사이트 Three Kingdoms tombs http://www.china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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