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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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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습착치는 동진 시대의 양양 출신 인물로, 촉한의 후손이다. 그는 학문과 문필에 능했으며, 형주 자사 환온에게 등용되어 요직을 거쳤다. 환온의 찬탈 시도에 반대하여 《한진춘추》를 저술, 촉한 정통론을 주장했다. 전진의 부견에게 초빙되어 후대를 받았으나, 동진이 양양을 탈환한 후 국사 편찬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사망했다. 그의 아들 습벽강 역시 재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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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착치
기본 정보
습착치
습착치
이름습착치
언위 (彥威)
출생320년경
사망384년경 (64세)
시대동진
주요 활동역사가, 문학가
주요 저서《한진춘추 (漢晉春秋)》
《양양기 (襄陽記)》
생애
출신고평군 (高平郡, 현재의 산둥성 웨이산현)
주요 관직정서장군 (征西將軍) 환온 (桓溫)의 종사중랑 (從事中郞)
장사 (長沙) 내사 (內史)
특징환온의 북벌에 종군하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
불교를 숭상하여 혜원 등과 교류
업적《한진춘추》를 저술하여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 서술 시도
《양양기》를 저술하여 양양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

2. 생애

습착치는 양양(襄陽)의 호족 가문 출신으로, 촉한(蜀漢)을 섬겼던 습정(習禎)의 후손이다. 젊어서 뜻을 품고 학문과 문필에 능했다. 아들 습벽강(習辟強)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고 아버지와 같은 풍격이 있어, 표기장군 종사중랑(驃騎將軍 從事中郎)에 이르렀다.

2. 1. 초기 생애와 환온과의 만남

양양(襄陽) 출신의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촉한(蜀漢)을 섬겼던 습정(習禎)의 후손이다. 젊은 시절 뜻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여 많이 배우고 학식(學識)을 가졌으며, 문필(文筆)로 유명했다. 형주자사(荊州刺史) 환온(桓温)이 그를 등용하여 종사로 삼았고,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환온에게 추천하여 서조주부(西曹主簿)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별가(別駕)로 승진했다.[3] 환온은 습착치를 매우 존경하여 1년 동안 세 번이나 승진시켰고,[4] 습착치는 젊은 나이(아마도 30세가 채 되지 않음)에 형주의 중앙 행정부에서 기록관의 직책을 맡았다.[5]

환온이 출정할 때, 그를 대신하여 수비를 맡거나 종군하기도 하였고, 책임있게 맡겨진 자리를 모두 견디며 요직에서 실적을 쌓았다. 또한 논의에도 뛰어나 환온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후대하였다.[6] 그러나 수도를 방문했을 때 회계왕 사마욱(司馬昱, 후에 간문제) 또한 그를 존중하였는데, 환온이 “상왕(相王, 회계왕)은 누구를 닮은 인물인가?”라고 습착치에게 묻자,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환온의 분노를 사 호조참군(戸曹参軍)으로 좌천되었고, 이후 형양태수(滎陽太守)를 역임했다.[6][7][8][9]

2. 2. 환온과의 갈등과 형양태수 좌천

형주자사(荊州刺史) 환온(桓温)이 습착치를 등용하여 종사로 삼았고,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환온에게 추천하여 서조주부(西曹主簿)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별가(別駕)로 승진했다. 환온은 습착치의 능력을 인정하여 후대하였으나, 수도에 도착했을 때 회계왕 사마욱(司馬昱)도 그를 존중하는 것을 보고 질투하였다. 환온이 “상왕(相王, 회계왕)은 누구를 닮은 인물인가?”라고 묻자, 습착치는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환온의 분노를 사 호조참군(戸曹参軍)으로 좌천되었고, 후에 형양태수(滎陽太守)가 되었다.[6][7][8][9]

2. 3. 《한진춘추》 저술과 촉한 정통론

습착치는 환온이 찬탈을 꿈꾸던 시기에 《한진춘추》 54권을 저술하였다.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 저술된 역사서이지만,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위나라 조비후한 헌제로부터 협박으로 선양을 받고, 진나라는 선양했다고 말해도 찬탈한 역신이며, 사마소촉한을 평정하고 한나라가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한 것으로 보아,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촉한정통론).[18]

습착치는 촉한을 한나라의 정당한 계승자로 보았는데, 촉한의 역법을 사용하고 유선의 마지막 재위 기간의 기록에서 왕조 창시자인 진무제의 휘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3] 그는 위나라가 중국 전체를 통치하지도 않았고 황실에 황족의 혈통도 없었으므로, 왕망신나라와 다를 바 없는 부당한 왕조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습착치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구양수, 사마광 등이 그의 기준에 동조하면서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수용되기 시작했다.[25][26] 주희는 촉한의 정당성 확립에 정치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다른 근거와 방향에서 습착치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25]

2. 4. 전진 부견과의 만남

전진(前秦)의 부견은 그의 이름을 듣고 습착치를 그의 친구인 승려 도안과 함께 초빙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습착치는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부견은 "진이 를 평정했을 때에는 육씨 형제(육기, 육운)를 얻었지만, 지금 우리들이 한나라 남쪽을 차지하여 얻은 인물은 한 명 반이다"라고 말했다.[18] 그 후, 습착치는 양양으로 돌아갔다.[19][20]

2. 5. 동진 복귀와 죽음

촉한을 섬겼던 습정의 후손으로, 젊어서부터 학식과 문필로 명성이 높았다. 환온에게 등용되어 종사, 서조주부, 별가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환온이 간문제 (사마욱)에 대해 묻자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환온의 분노를 사 호조참군, 형양태수로 좌천되었다.[6][7][8][9]

환온의 찬탈 야욕을 비판하며 《한진춘추》를 저술하여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후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를 다룬 이 책에서 위나라 조비후한 헌제를 협박해 찬탈했고, 진나라도 찬탈한 역신이라고 주장했다.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하고 한나라가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했으므로, 하늘의 뜻은 세력으로 강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1]

병으로 고향에 돌아갔으나, 양양이 부견의 전진에 함락되자 부견에게 초빙되어 도안과 함께 후한 대우를 받았다. 부견은 "진나라가 오나라를 평정했을 때 육기, 육운 형제를 얻었지만, 지금 우리가 한나라 남쪽을 차지하여 얻은 인물은 한 명 반"이라고 말했다.[17][18]

동진이 양양을 탈환하자 조정에서 국사 편찬을 맡기려 했으나, 그 직전에 사망했다.[18] 죽기 전 위나라를 찬탈자로 규정한 자신의 설에 대한 반론에 재반박했다.

3. 저서

습착치는 『한진춘추』, 『양양기구기』(『양양기』) 등의 저서를 남겼다.[18][21][22][23][24][25][26][27]


  • '''한진춘추(漢晉春秋)''' 54권: 후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삼국 시대에 대해서는 나라를 찬탈한 역신으로 규정하고, 촉한을 정통으로 보았다. 그러나 촉한 역시 불완전한 정권으로 평가했다.[18][23][24] 이러한 관점은 사마광주희송나라 시대의 역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25][26]
  • '''양양기구기(襄陽耆舊記)''' (양양기): 배송지진수의 『삼국지』 동윤전 주석에서 『한진춘추』와 『양양기』 두 책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선행 사서에 해당 기사가 없으므로 습착치가 창작한 것으로 추정했다.

4. 평가 및 영향

습착치의 이론은 그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 수 세기 동안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5] 송나라 시대에 구양수, 사마광 등이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그의 기준에 동조하면서 주류 역사학계가 습착치의 사상을 수용했다.[25][26] 주희촉한의 정당성 확립에 정치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다른 근거와 방향에서 습착치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25] 이후, ''사고전서'' 편찬자들에 따르면 "진수를 거부하고 습착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시대의 산물임을 강조했다.[21][27]

습착치는 대대로 토지의 호족으로 번영한 일족 출신으로, 촉한을 섬긴 습정의 후손이다. 젊어서 뜻을 품고 박학하며 문필로 유명했다. 형주자사환온에게 초빙되어 종사로 일했고, 강하 원교의 추천으로 서조주부로 전임되어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별가로 승진했다.

환온의 출정 때 유수를 지키거나 종군하면서 맡겨진 직책을 모두 훌륭히 수행했고, 요직을 맡아 실적이 있었으며, 논쟁에 능숙하여 환온도 능력을 인정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도읍으로 사신으로 갔을 때 회계왕 사마(후의 간문제)도 그를 중하게 여겼지만, 환온이 "상왕(승상록상서사)은 누구와 닮은 인물인가"라고 묻자, "아직 그런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환온에게 형양군태수로 좌천되었다.

환온은 당시 찬탈의 야망을 품고 있었지만, 습착치는 군에 있으면서 『한진춘추』 54권을 저술하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서이지만, 삼국 시대에 관해서는 를 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찬탈한 역신으로 보았다.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하고 비로소 한이 멸망하고 진이 흥한 것으로 보았고, 천의는 세력이 있다고 해서 강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촉한정통론). 한편, 천하 통일을 정통의 제1조건으로 여겨, 삼국 시대를 "만성에게 주 없음(만민을 통치하는 군주는 부재)", "촉은 정통이지만 약했다"고 평가하는 등, 촉한 자체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정권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그 후, 다리 병을 앓아 향리에 돌아갔지만, 태원 4년(379년)에 양양이 전진부견에게 함락되었다. 부견은 그의 이름을 듣고 습착치를 친구인 승려 도안과 함께 불러내어 이야기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습착치는 다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부견은 "진이 를 평정했을 때에는 육기, 육운 형제를 얻었지만, 지금 우리가 한남을 깨고 얻은 인물은 한 명과 반이었다"고 각지에 서신을 보냈다. 이후 습착치는 양양으로 돌아갔다. 태원 8년(383년), 진이 양양을 탈환하자 조정은 습착치에게 국사 편찬을 맡기려 했지만, 같은 해 10월에 사망했다. 임종에 즈음하여 상소를 올려, 위를 참칭자로 하는 자설에 대한 반론에 반박했다.

아들 습벽강은 재능과 학문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풍격이 있었고, 관위는 표기장군 종사중랑에 이르렀다. 습착치는 『한진춘추』 외에도, 『양양기구기』(『양양기』)를 저술했다(『수서』경적지2).

4. 1. 비판

습착치는 조비위나라한나라를 정당하게 계승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나라가 중국 전체를 통치하지 못했고 황실 혈통도 없었기 때문에 왕망신나라와 같이 부당한 왕조로 간주했다.[22] 이러한 주장은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진수는 위나라를 한나라의 정당한 계승자로 보았고, 이는 진나라가 위나라를 통해 천명을 이어받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21]

습착치는 자신의 저서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책 제목에서 위나라를 제외하고 한나라와 진나라만 언급한 것에서 그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유비촉한을 한나라의 정당한 계승자로 보았으며, 이는 촉한의 역법을 사용하고 유선의 마지막 재위 기간 기록에서 진나라 진무제의 휘를 사용한 것에서 드러난다.[23]

습착치의 이론은 당대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송나라 시대에 구양수, 사마광 등이 그의 기준에 동조하면서 주류 역사학계에 수용되었다.[25][26] 주희 또한 촉한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습착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25]

배송지는 삼국지 주해에서 습착치의 기록을 여러 번 인용했지만, 그가 왕릉의 편지를 위조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29] 또한, 습착치의 ''양양기''에 나오는 동회에 관한 일화가 ''한진춘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그를 경솔한 학자라고 비판했다.[30]

5. 가족

항목내용
삼촌뤄충(羅崇), 뤄유(羅友)[6]
아들습벽강(習辟彊) (표기장군 종사중랑)[31]



촉한(蜀漢)을 섬겼던 습정(習禎)의 후손이다. 아들 습벽강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고 아버지와 같은 풍격이 있었다.

참조

[1] 서적 Shishuo Xinyu
[2] 간행물 Veritable Records of Jiankang Tang dynasty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Continuation of the Annals of Jin Tan Daoluan
[5] 서적 Shishuo Xinyu
[6] 서적 Book of Jin
[7] 서적 Mather
[8] 서적 Chittick
[9] 서적 Shishuo Xinyu
[10] 서적 Mather
[11] 서적 Records of the Elders of Xiangyang
[12] 서적 Zürcher
[13] 서적 Zürcher
[14] 서적 Yan Kejun
[15] 서적 Zürcher
[16] 서적 Yan Kejun
[17] 서적 Zürcher
[18] 서적 Book of Jin
[19] 서적 Zürcher
[20] 서적 Chittick
[21] 서적 Yong Rong
[22] 서적 Chittick
[23] 서적 Tang Qiu
[24] 서적 Book of Jin
[25] 서적 Chittick
[26] 서적 Zizhi Tongjian
[27] 서적 dynastic Legitimacy during the Eastern Chin: Hsi Tso-ch'ih and the Problem of Huan Wen
[28]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9]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0]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1] 서적 Book of Jin
[32] 문서 건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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