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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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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융 빅뱅은 1980년대 영국에서 런던 금융 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추진된 일련의 금융 개혁 조치를 의미한다. 1986년 10월 27일, 매매 수수료 자유화, 은행 자본의 시장 참여 허용, 조버와 브로커의 겸업 허용 등을 포함한 대대적인 규제 완화가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런던은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지만, 2007-2008년 금융 위기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한국은 금융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여 금융 시장 발전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2. 역사적 배경

1980년대 초, 영국은 금융 시장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뉴욕 등 다른 금융 중심지에 뒤처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지만, 뉴욕에 추월당하고 있었고, 더 뒤처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13]

1970년대부터 공정거래청은 런던 증권 거래소의 제한적인 관행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런던 증권 거래소의 고정 최소 수수료 설정 규칙, "단일 자격" 규칙(고객을 위해 수수료를 받고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브로커와 시장을 조성하고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장부에 주식을 보유하여 유동성을 제공하는 조버 간의 분리 강제), 브로커와 조버 모두 독립적이어야 하며 더 넓은 금융 그룹의 일원이 아니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 그리고 증권 거래소 회원의 자격을 외국인에게서 배제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983년, 대처 정부와 런던 증권 거래소는 이전 정부에서 공정거래청이 1956년 제한적 무역 관행법에 따라 런던 증권 거래소를 상대로 제기한 광범위한 반독점 소송을 해결하기로 합의하면서 "금융 빅뱅"이 발생했다.

1976년 공정거래청은 거래 규제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는데,[20] 이는 같은 해에 경쟁 제한적 거래 관행 규정법이 개정된 것에 기인한다. 운송, 주택 금융 조합 금리, 보험을 제외한 서비스도 대상에 포함되었다. 1978년에는 브로커의 최저 수수료, 브로커와 조버의 겸업 금지, 거래소의 회원권 제한을 경쟁 제한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1979년에는 런던 거래소의 규칙이 경쟁 제한적 거래 관행 규정법에 저촉되는지 조사했다.

1983년 증권 거래소 이사장과 통상산업부 장관 사이에 개혁을 둘러싼 화해가 성립되었다. 거래소의 규칙은 예외로 간주되었다. 그 대신, 거래소 이사회에 런던 증권계 외부 인물을 참여시키는 것이 약속되었다. 이사회는 46명의 회원과 잉글랜드 은행 대표 1인으로 구성되었지만, 1983년 12월에 외부자 5명이 참여하여 총 52명이 되었다. 이는 캐드버리 보고서의 선구적인 조치였다. 1986년 3월에 거래소 이사회를 "최적화"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1987년 6월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 이사를 52명에서 25명으로 줄이고, 외부자는 이사 총수의 "1/4 이상 1/3 이하"로 비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13]

1986년 10월 27일, 런던 증권 거래소의 규칙이 변경된 날은 금융 시장 구조를 변경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조치의 집합으로 인해 예상되는 시장 활동 증가로 인해 "빅뱅"이라고 불렸다.

영국 외에도 1983년에는 캐나다, 1984년에는 호주에서 증권 시장의 규제가 철폐되었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파운드화 유로채의 발행액은 3억파운드에서 48억파운드로 급증했다.[13]

영국 본국에서는 같은 시기부터 실질적으로 은산분리가 철폐되었다. 브로커, 조버 기업의 주식을 증권 거래소 회원이 아닌 자, 즉 은행이 100%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대형 머천트 뱅크와 해외 금융 기관이 브로커, 조버 기업의 인수 경쟁을 벌였고, 그들이 빅뱅의 인프라를 먼저 완성해 버렸다.

2. 1. 1908년 규칙과 그 영향

1907년 공황으로 투자 신탁이 피해를 입자, 1908년 런던 증권 거래소는 회원에 대해 브로커와 조버를 엄격히 구분하고, 비회원과의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규칙을 도입했다. 다만, 브로커는 더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는 경우, 조버는 국외 차익 거래에 한해 각각 비회원과의 거래가 허용되었다.[13]

이 규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30년대 영국 증권 거래가 개인 투자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13]

2. 2. 모건의 역할과 기관화

모건 갤런티 트러스트(현 JP모건 체이스)는 1927년에 미국 예탁 증서를 고안했다.[13] 이는 실물 이동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증권 거래의 효율성을 높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보험 회사와 연금 기금 등 기관 투자자의 성장은 런던 시장의 기관화를 가속화시켰다. 1938년 17억 4천만 파운드였던 보험 회사의 자산은 1958년 59억 9천만 파운드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연금 기금은 거의 없는 수준에서 25억 파운드로 성장했다. 1963년 영국 주식에서 기관 투자자가 보유하는 비율은 27.8%였다.[13]

모건은 런던 시장의 국제화와 기관 투자자 유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경 미국 예탁 증서 시장에서 모건 갤런티 트러스트는 상장된 171개 종목 중 79개 종목의 수탁 은행이었다.[13] 1968년에는 유로클리어를 설립하여 기관 투자자를 런던 시장으로 유도했다.[13]

2. 3. 세컨더리 뱅킹의 성장과 위기

1952년, 미국 부흥 금융 공고에 대한 대외 채무를 상환한 영국은 담보를 처분하여 거액의 US 달러를 얻었다. 1953년, 윈스턴 처칠 내각은 국유 산업을 민영화하여 추가 자금을 마련했고[14], 이 자금은 세컨더리 뱅킹에 투입되었다.

'''세컨더리 뱅킹'''은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가 런던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처음에는 어음 할인을 했지만, 1960년대부터 시장과 업태에 특징이 나타났다. 전 세계의 대형 은행이 그 시장에 참여하여, 협정을 무시하고 경쟁했다. 곧 업태는 경쟁에 적응했다. 대규모로, 주로 유로 통화로 예금을 받아, 일류 다국적 기업에 대출했다. 이러한 홀 세일은 70%가 영국 해외 거주자 대상이었고, 세컨더리 뱅킹은 전통적인 무역 금융과 외국에 대한 직접 투자에 매진했다. 대출은 오로지 맞춤형으로 이루어졌다. 즉, 대출을 받은 후 은행 간 거래인 콜머니를 활용하여 자금을 조달했다.[15]

경쟁의 결과는 1950년대 말에 이미 나타났다. 서독에서는 독일 연방 은행의 설립을 두고 영미가 대립하면서(유럽 중앙 은행#주립 은행의 과거), 각각 자금을 투입하여 경제 기적을 낳았다. 캐나다나 호주의 광업에도 거액이 투입되었다. 대신 터키나 인도에서는 순식간에 외환 보유고가 감소하거나, 로이즈 은행이 남북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처칠의 민영화에 응한 기관 투자자도 세컨더리 뱅킹에 자금을 공급하여 경쟁을 부추겼다[16] . 샤를 드골의 금융 세력이 대규모로 재편되었고, 수에즈 금융이 왕실에서 모건으로 기울었다[17] . 1968년, 모건 갤런티 트러스트가 유로클리어를 설립하여, 기관 투자자를 런던 시장으로 유도했다[13] . 이듬해 1969년, 시티의 머천트 뱅크가 포레스트를 매각했다.

1973년, 인수 상사(Accepting House) 17개사로 구성된 위원회에 대해, 이들에게 자본 참여를 금지하는 비공개 규칙을 잉글랜드 은행이 해제한다고 발표했지만, 인수 상사는 모두 대형 머천트 뱅크였다[18] . 그리고 세컨더리 뱅킹 위기가 일어났다(Secondary banking crisis). 시티는 오일 쇼크에도 직면했다.

3. 런던 증권 거래소의 개혁

1976년, 공정거래청이 거래 규제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20] 이는 같은 해에 경쟁 제한적 거래 관행 규정법이 개정되어 서비스도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78년에는 브로커의 최저 수수료, 브로커와 조버의 겸업 금지, 거래소의 회원권 제한을 경쟁 제한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1979년에는 런던 증권 거래소의 규칙이 경쟁 제한적 거래 관행 규정법에 저촉되는지 조사했다.

1983년에 증권 거래소 이사장과 통상산업부 장관 사이에 개혁을 둘러싼 합의가 이루어졌다. 거래소의 규칙은 예외로 간주되었지만, 그 대신 거래소 이사회에 런던 증권계 외부 인물을 참여시키는 것이 약속되었다. 이사회는 원래 46명의 회원과 잉글랜드 은행 대표 1인으로 구성되었지만, 1983년 12월에 외부인 5명이 참여하여 총 52명이 되었다. 이는 캐드버리 보고서의 선구적인 조치였다. 1986년 3월에 거래소 이사회를 "최적화"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1987년 6월까지 런던 증권 거래소 이사를 52명에서 25명으로 줄이고, 외부 인사는 이사 총수의 "1/4 이상 1/3 이하"로 비율을 늘린다는 것이었다.[13]

4. 금융 빅뱅의 내용 (1986년 10월 27일)

1986년 10월 27일 런던 증권 거래소의 규칙이 변경된 날은 금융 시장 구조를 변경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조치의 집합으로 인해 예상되는 시장 활동 증가로 인해 "빅뱅"이라고 불렸다.

금융 빅뱅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 매매 수수료 자유화

# 거래소 회원권 개방을 통한 은행 자본의 시장 참여

# 조버(Jobber)와 브로커의 겸업 허가

# 주식 거래세 1%에서 0.5%로 인하

# 주식 매매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무인화

# 거래소 집중 의무 철폐[25]

이러한 변화로 인해 런던 시장에서도 현물을 이동하지 않는 증권 거래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기관 투자자들이 뉴욕 시장의 규제를 피해 런던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25]

자동 호가 시스템(SEAQ)이 도입되었고[26], 바클레이즈, 리먼 브라더스, UBS가 대표적인 마켓 메이커가 되었다.[13]

금융 빅뱅의 결과는 런던의 금융 시장 구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많은 구식 기업들이 국내외 대형 은행에 인수되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금융 규제 환경에 추가적인 변화가 생겨 결국 금융감독청이 설립되었다.

5. 금융 빅뱅의 결과와 영향

금융 빅뱅의 영향은 극적으로 나타나, 런던은 금융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결정적으로 강화되었다. 200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금융 중심지로 평가받기도 했다.[3][4] 이는 로슨 붐으로 이어져, 여러 기관들이 인근 도그 섬 지역, 특히 카나리 워프의 새로운 개발 구역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금융 빅뱅"이 증권 시장 거래를 완화시켰지만, 그 영향이 2007-2008년 금융 위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쟁이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2010년, 금융 빅뱅 당시 마거릿 대처의 재무 장관이었던 나이젤 로슨은 BBC 라디오 4 프로그램 ''분석''에 출연하여 은행 개혁에 대해 논의했다.[5]

2011년 영국의 전 총리 고든 브라운은 1997년에서 2007년까지 재무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도시에서 과도한 규제를 하지 말라는 "끊임없는 압력"에 대응하여 더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표명했다.

1986년10월 27일에 실시된 금융 빅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매매 수수료 자유화
  • 거래소 회원권 개방을 통한 은행 자본의 시장 참여
  • 조버(Jobber)와 브로커의 겸업 허가
  • 주식 거래세 1%에서 0.5%로 인하
  • 주식 매매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무인화
  • 거래소 집중 의무 철폐


이러한 변화로 런던 시장에서도 현물을 이동하지 않는 증권 거래가 가능해졌다. 기관 투자자들이 뉴욕 시장의 규제를 피해 런던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영국 기업의 모습은 사라진 채 시티가 표면적으로 활황을 나타내는 윔블던 현상이 나타났다.[25]

자동 호가 시스템(SEAQ)이 도입되었고[26], 바클레이즈, 리먼 브라더스, UBS가 대표적인 마켓 메이커가 되었다.[13] 빅뱅으로 시티에 참여하는 기관 투자자들을 총괄하는 것은, 커스터디언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유로클리어와 세델(현재 클리어스트림)이었다.

1987년과 1991년 유로클리어와 세델의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13]

1987년 4월 10일 유로클리어 이사진
1991년 9월 13일 세델 이사진



관련법 시행 후 마이클 밀켄이 체포되었다. 1991년 국제 기업 인수 자문 랭킹 1위는 골드만삭스였다.[13] 빅뱅 이후 4~5년 만에 영국의 지니 계수는 약 0.05 상승했다.[27]

런던 시장의 레포 시장과 관련하여, 빅뱅 이후 미국 국채·독일 국채는 비교적 거래량을 늘렸지만, 영국 국채는 독점 시장으로서의 규모에 머물렀다.

5. 1. 주요 참여자와 역할

금융 빅뱅의 주요 참여자와 그 역할은 다음과 같다.
머천트 뱅크머천트 뱅크는 브로커와 조버(Jobber, 증권 중개인) 기업 인수 등을 통해 금융 빅뱅 이후 시장 재편을 주도했다. 다음은 주요 인수 사례이다.[13]

머천트 뱅크인수 대상 (조버 또는 브로커)
S.G. 워버그아크로이드 스미서스 (조버)
N. M. 로스차일드 앤 선즈스미스 브라더스 (조버)
새뮤얼 몬태규 (미들랜드 은행 자회사)W. 그린웰 (브로커)
험브로스스트라우스 터블 (브로커)
모건 그린펠핀친 데니 (조버), 팸버 앤 보일 (브로커)
클라인워트그리브슨 그랜트 (브로커)
힐 새뮤얼우드 맥켄지 (브로커)
슈로더헬버트 워그 (브로커)
베어링스 은행윌슨 앤 월포드 (조버)


외국 금융 기관1985년까지 런던 시장에는 400개의 외국 은행이 참여했다. 이들은 런던 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경쟁을 심화시켰다. 다음은 주요 인수 사례이다.[13]

외국 금융 기관인수 대상 (조버 또는 브로커)
시큐리티 퍼시픽 (Security Pacific Bank)호아 고벳 (브로커), C.T. 퓨레이 (조버)
시티코프비커스 다코타, 스크림지어 비커스, J.E. 데비 (브로커)
스칸디아 (Skandia)킬터 구디슨 (브로커)
셰어슨 리먼L. 메셀 & Co. (브로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은행 자회사 그린들레이 뱅크케이펠 큐어마이어스 (브로커)
홍콩 상하이 은행자임스 케이펠 (브로커)
UBSPhillips & Drew (브로커), J. 모우르스달 (조버)
체이스 맨해튼라우리 밀뱅크, 사이먼 앤 코러스 (브로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핵 (North Carolina National Bank)판뮤어 고든 (브로커)[21]
방크 브뤼셀 람베르윌리엄 드 브로 힐 채플린 (브로커)
크레디 스위스북마스터 앤 무어 (브로커)
아랍 인터내셔널 (Banque arabe internationale dinvestissement)셰퍼드 앤 체이스 (브로커)
CIBC그렌펠 앤 콜스그레이브
메릴린치A.B. 길스 앤 크레스웰 (조버)
파리바킬터 구디슨 (브로커)
소시에테 제네랄스트라우스 턴불
롬바르 오디에마셜 (브로커)


국제 증권 집중 보관 기관


  • 유로클리어세델(현 클리어스트림): 국제 증권 집중 보관 기관으로서 기관 투자자들의 런던 시장 참여를 지원했다.

커스터디언

  • 커스터디언: 기관 투자자들을 대신하여 자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6. 금융 빅뱅 이후의 발전

1986년 주택 금융 조합법(Building Societies Act 1986) 개정으로 과거 주택 금융 조합의 전매특허였던 모기지 대출에 은행들이 진입할 수 있게 되었고, 주택 금융 조합은 무담보 대출 비율을 5%까지 늘릴 수 있게 되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26] 같은 해 금융 서비스 법(Financial Services Act 1986)은 공사채 투자 신탁 등 뮤추얼 펀드화를 허용하고, 런던 증권 거래소의 권한을 증권 투자 위원회(Securities and Investments Board)로 이양했다.[26]

자동 호가 시스템(SEAQ)이 도입되었고[26], 바클레이즈, 리먼 브라더스, UBS 등이 주요 마켓 메이커가 되었다.[13] 커스터디언의 집합체인 유로클리어와 세델(현재 클리어스트림)은 시티에 참여하는 기관 투자자들을 총괄했다.

1990년대 이후 런던 시장의 레포 시장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 1996년 이전: 영국 국채 공매도는 길트 에지 마켓 메이커에게만 허용, 영국 국채 담보 레포 거래는 이들과 밀접한 은행 간 거래 시장(SEMBs)을 통해서만 가능, 잉글랜드 은행의 레포 대출은 계절적 자금 부족을 맞추는 정도, 영국 국채 이자 소득에 25% 원천 징수세 부과 (국채 결제 기관(Central Gilts Office) 가맹 기관 등을 통해 거래 시 면제).
  • 1996년 이후: 일반 기관 투자자도 영국 국채 레포 시장 참여, 1997년 잉글랜드 은행의 일상적인 레포 운영, 2001년 일중 즉시 총액 결제를 위한 레포 운영 활용, 1998년 영국 국채 이자 소득 원천 징수 폐지.


2001년 5월 말, 영국 국채 레포 시장 규모는 1,200억 파운드(1200억파운드)를 넘어섰다.[28]

위그노 출신 머천트 뱅크인 카제노브 상회(Cazenove)는 19세기부터 영국 금융 기관화에 기여해 왔으며, 2004년 JP모건 체이스에 인수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ig Bang 20 years on https://web.archive.[...] Centre for Policy Studies 2006-10
[2] 뉴스 In Depth – Big Bang http://www.ft.com/in[...] 2006-10-29
[3] 뉴스 The day Big Bang blasted the old boys into oblivion https://www.independ[...] 2006-10-26
[4] 뉴스 Revolution hailed but City warned of a looming fight for supremacy https://www.theguard[...] 2006-10-27
[5]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6m12s) https://www.bbc.co.u[...] 2010-02-01
[6]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12m48s) https://www.bbc.co.u[...] 2010-02-01
[7]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9m30s) https://www.bbc.co.u[...] 2010-02-01
[8]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8m8s) https://www.bbc.co.u[...] 2010-02-01
[9]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9m40) https://www.bbc.co.u[...] 2010-02-01
[10] 웹사이트 Glass-Steagall: A Price Worth Paying? (from 10m35s) https://www.bbc.co.u[...] 2010-02-01
[11] 뉴스 Brown admits 'mistake' on banks https://www.bbc.com/[...] 2011-04-11
[12] 간행물 JAPAN'S BIG BANG https://web.archive.[...] 1997-11
[13] 논문 機関化傾向と取引所改革 ビッグバンの意味するもの
[14] 문서 住宅建設にも力を入れ、ノリッジ・ユニオン(現アビバ)ら機関投資家のモーゲージ貸付業績に貢献した。
[15] 서적 マーチャント・バンキング 金融財政事情研究会 1976
[16] 문서 政界はプロヒューモ事件で混乱し、当時の経済情勢は大きく報道されることがなかった。
[17] 서적 転換期のフランス企業 同文館 1979
[18] 서적 マーチャント・バンキング
[19] 문서 2014年に判例変更がなされている(McCutcheon v. FEC)。個人が選挙で大金を献金しても政治家との対価関係(quid pro quo)には直結しないという詭弁であった。
[20] 문서 See also: Restrictive Practices Court
[21] 문서 パンミュア・ゴードン商会は1899年の日本国外債引受者であった。
[22] 서적 Enduring Success: What We Can Learn from the History of Outstanding Corporation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23] 서적 Cornhill in London and The Cornhill Insurance Company Limited Allom 1935
[24] 문서 Stock Exchange Money Brokers
[25] 문서 テニスのウィンブルドン選手権ではイギリス人のプレイヤーは姿が見えず、イギリスは場所を貸しているだけである
[26] 서적 規制緩和と民営化 東洋経済新報社 1993
[27] 논문 2011年イギリス「8月暴動」をめぐる諸議論 : 社会的排除との関連から https://hdl.handle.n[...] 京都産業大学経済学部
[28] 서적 最新 レポ取引のすべて 日本実業出版社 2001-12
[29] 뉴스 미룰 수 없는 거래소 구조개편 http://news.heraldco[...]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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