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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 드 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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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베르 드 노장은 1053년경 태어나 1124년 사망한 프랑스의 수도사이자 작가이다. 그는 자서전인 《모노디에》와 《프랑크족의 업적》을 저술했으며, 유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기베르는 클레르몽-앙-보베지 근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난산으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성직자가 되기로 서약했다. 그는 생제르메르-드-플리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으며, 베크의 안셀름의 영향을 받아 신학을 공부했다. 1104년 노장-수-쿠시 수도원 원장이 된 후 저술 활동을 시작했으며,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기록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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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 드 노장
기본 정보
출생1055년경
사망1124년
직업역사가, 신학자, 작가
분야역사, 신학

2. 생애

클레르몽-앙-보베지 근처의 작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기베르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 아래 교육받았으며, 12세 무렵 어머니를 따라 생제르메르-드-플리 근처의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초기에는 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 같은 고전 문학을 공부했으나,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베크의 안셀름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1104년, 그는 노장-수-쿠시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교회 문제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주교들이나 궁정 사회와 교류하며 저술 활동에 몰두할 시간을 확보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제1차 십자군의 역사를 다룬 ''프랑크족의 업적''(Dei gesta per Francoslat)[3]과 자신의 삶과 시대를 기록한 자서전 ''모노디에''(Monodiaelat)가 있다. 특히 그의 자서전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모델로 삼아 쓰였으며, 당시 사회상과 수도원 생활, 개인적 성찰을 생생하게 담아내어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는다.

기베르는 가톨릭 성유물의 진위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지만[4][5], 동시에 프랑스루이 6세가 스크로풀라 환자를 기적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등[6] 복합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기베르 드 노장은 클레르몽-앙-보베지 근처의 작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저서 ''Monodiae''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결혼 후 7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기베르는 난산 끝에 태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산모와 아기 모두 생명이 위태로웠다고 한다. 이에 그의 가족은 성모 마리아의 성소에 봉헌물을 바치며, 만약 기베르가 살아남는다면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서약했다. 기베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이 서약을 따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불성실하며 과음하는 성향을 지녔으며,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8개월 후에 사망했다.[2] 기베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일종의 축복으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그를 기사로 만들려 했을 것이고, 이는 성모 마리아에게 한 서약을 어기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지배적인 성격이었지만 아름답고 지적이며 신앙심이 깊었다. 기베르가 어머니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기술했기 때문에, 아르샹보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기베르의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졌으며, 그를 또래 아이들과 격리시키고 여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개인 교사를 두어 가르쳤다. 기베르는 이 교사가 매우 엄격하고 무능했다고 회고했지만, 동시에 그와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고도 언급했다. 기베르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생제르메르-드-플리 근처의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기베르도 곧 어머니를 따라 그곳으로 갔다. 생제르메르-드-플리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정식 입회한 그는 학문에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초기에는 세속 시인인 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 심취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저술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는 베크의 안셀름(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됨)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학문적 방향을 전환했다.

2. 2. 수도원장과 저술 활동

1104년, 기베르는 가난하고 작은 노장-수-쿠시 수도원(1059년 설립)의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교회 문제에서 더 활발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주교들이나 궁정 사회와 교류할 기회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 그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은 ''프랑크족의 업적''(Dei gesta per Francoslat)으로, 제1차 십자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1108년에 완성되어 1121년에 수정되었다.[3] 이 역사는 익명의 노르만족 저자가 쓴 ''게스타 프랑코룸''(Gesta Francorumlat)을 바탕으로 화려하게 각색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십자군 역사가들은 기베르가 ''게스타 프랑코룸''의 내용을 너무 그대로 따랐고, 그의 라틴어 문체가 불필요하게 어렵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편집자들과 번역가들은 그의 뛰어난 글쓰기 능력과 독창적인 자료 활용에 주목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프랑크족의 업적''이 당시 프랑스에서 십자군 운동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베르는 십자군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직접 알고 지냈으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기억과 경험을 기록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1115년에 쓰인 그의 자서전(''De vita sua sive monodiarum suarum libri treslat'') 또는 ''Monodiaelat''('고독한 노래'라는 뜻으로, 흔히 그의 ''회고록''으로 불림)가 가장 흥미로운 작품으로 여겨진다. 말년에 쓰인 이 작품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모델로 삼아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기까지의 삶을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고국의 풍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텍스트는 세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책은 그의 출생부터 성인기까지의 삶, 두 번째 책은 그가 속한 수도원의 간략한 역사, 세 번째 책은 인근 라옹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기록이다. 그의 자서전은 당시 성과 수도원의 일상생활, 유행했던 교육 방식 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동시대 주요 인물과 부차적인 인물들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열정과 편견이 담겨 있어 독특한 색채를 더한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및 수많은 성인들의 가톨릭 유물의 진위 여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4][5] 그는 일부 성지나 순례지에서 특정 유물의 소유권을 두고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루이 6세가 스크로풀라(연주창)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

2. 3. 자서전 《모노디에》

현대 독자들에게 기베르 드 노장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1115년에 쓰여진 그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De vita sua sive monodiarum suarum libri tresla이며, 흔히 Monodiaela('고독한 노래') 또는 그의 ''회고록''이라고 불린다. 말년에 작성된 이 자서전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모델로 삼아, 기베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기까지의 삶을 추적한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와 조국의 풍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제공한다.

이 텍스트는 총 세 권의 "책"으로 나뉘어 있다.

  • 제1권: 기베르의 출생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다룬다.
  • 제2권: 그가 원장으로 있던 노장-수-쿠시 수도원의 간략한 역사를 담고 있다.
  • 제3권: 인근 도시 라옹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한 묘사를 포함한다.


《모노디에》는 성(城)과 수도원의 일상생활, 당시 유행했던 교육 방식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그 시대의 주요 인물과 부차적인 인물들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기베르의 작품은 그의 개인적인 열정과 편견으로 채색되어 있어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및 수많은 성인들의 가톨릭 유물의 진위 여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일부 성소와 순례지가 특정 유물의 소유권에 대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루이 6세가 자신의 눈앞에서 스크로풀라 환자를 기적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

3. 사상과 영향

(내용 없음)

참조

[1] 백과사전 Guibert of Nogent (1055 – c. 1125)
[2] 서적 William Rufus University of California 1983
[3] 간행물 Gesta Dei per Francos Robert Appleton Company 1909
[4] 뉴스 Brooding on God History Today 2012-03
[5] 서적 Holy bones, Holy dust: how relics shaped the history of Medieval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11
[6] 서적 Les Rois thaumaturges Armand Colin 1961
[7] 백과사전 Guibert of Nogent (1055 – c.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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