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6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이 6세는 1081년경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108년 왕위에 오른 루이 6세는 프랑스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강력한 봉건 영주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몽레리 가문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 대항하여 노르망디와 프랑스 귀족들의 연합을 이끌었다. 또한 플랑드르 백작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 프랑스 왕국의 위상을 높였다. 루이 6세는 말년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자신의 아들 루이 7세를 결혼시켜 카페 왕가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1137년 이질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81년 출생 - 베르크야루크
베르크야루크는 말리크 샤 1세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셀주크 제국의 술탄으로 즉위하여 제국의 분열과 권력 다툼 속에서 서부 이란과 이라크 지역의 권위를 강화하고 동부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잦은 내분과 무함마드 1세 타파르와의 갈등 끝에 제국을 분할 통치하다 사망했다. - 1081년 출생 - 그리퍼드 압 러스
그리퍼드 압 러스는 12세기 데허이바르스 왕국의 지배자로서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에 대항하여 웨일스 독립을 위해 싸웠고, 뛰어난 군사 전략과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구축으로 웨일스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1137년 사망 - 라마누자
라마누자는 11~12세기에 활동한 인도의 철학자이자 힌두교의 스리바이슈나바 전통의 중요한 인물로, 비시슈타드바이타 철학을 발전시키고 박티 운동을 이끌었으며 사회 개혁에도 기여했다. - 1137년 사망 - 로타르 3세
로타르 3세는 작센 공작, 독일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권력 투쟁과 이탈리아 원정을 겪고 시칠리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원정 중 사망했다. - 카페가 - 위그 카페
위그 카페는 987년부터 996년까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재위하며 카페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 로베르 2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하여 카페 왕조 세습의 기반을 다졌다. - 카페가 - 필리프 1세 (프랑스)
1052년 샹파뉴에퐁텐에서 태어나 7세에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리프 1세는 봉신들의 반란, 불륜과 재혼으로 인한 교회와의 갈등, 왕실 영토 확장 노력 등 권력 다툼과 스캔들로 점철된 통치 기간을 보냈다.
루이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프랑크인의 왕 |
통치 기간 | 1108년 7월 29일 – 1137년 8월 1일 |
대관식 | 1108년 8월 3일, 오를레앙 |
이전 군주 | 필리프 1세 |
다음 군주 | 루이 7세 |
섭정 | 필리프 (1129년–1131년) |
섭정 유형 | 공동 국왕 |
배우자 | 뤼시엔 드 로슈포르 아델 드 사부아 |
자녀 | 필리프 루이 7세 앙리, 랭스 대주교 로베르 1세 드 드뢰 콘스탄스, 툴루즈 백작부인 필리프, 파리 대부제 피에르 1세 드 쿠르트네 |
왕가 | 카페 |
아버지 | 필리프 1세 |
어머니 | 베르타 판 홀란드 |
출생일 | 1081년 12월 1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일 | 1137년 8월 1일 |
사망지 | 베티시생피에르, 프랑스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파리, 프랑스 |
별칭 | |
별칭 | 뚱보왕 (le Gros) |
기타 |
2. 생애
루이 6세는 왕위에 오른 후 프랑스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지만, 수제르를 정치 고문으로 중용하여 국내 안정에 힘썼다. 특히 종교 정책을 통해 귀족들을 통솔하고, 잉글랜드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루이 6세의 실질적인 통치 영역은 일드프랑스에 국한되었고, 주변 지역은 강력한 봉건 영주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은 명목상으로는 이들의 주군이었지만, 실제로는 도시 간 도로를 장악한 강도 기사들과 같은 성주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중에서도 몽레리-로슈포르 가문은 필리프 1세 시대부터 궁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왕권에 도전했다. 루이 6세는 이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104년 뤼시엔느 드 로슈포르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1108년에는 그들의 거점인 그르네 성을 점령했다. 이후 앙소 드 갈랑드를 세네샬(왕궁 집사)로 임명하고, 위그 드 크레시와 위그 3세 등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1109년, 루이 6세는 라 로슈-귀용 성을 점령했고, 1111년에는 르 퓌이제 성을 파괴했다. 1112년, 코르베유 백작 오도의 사망을 계기로 코르베유를 왕실 직할령으로 편입했지만, 이는 블루아 가문의 티보 4세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루이 6세는 위그 3세를 석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위그 3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와의 동맹을 통해 반란 진압을 시도했지만, 로베르 2세는 전투 중 사망했다.
결국 1114년, 루이 6세는 몽레리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들의 영지를 분할했다. 1118년, 다시 반란을 일으킨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는 항복 후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귀족들의 통제력 약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침입을 초래했지만, 수제르는 프랑스 귀족들을 결집시켜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수제르의 주도로 수도원 개혁이 추진되었다.
1137년, 루이 6세는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결혼을 성사시킨 후, 이질로 인해 베티시-생피에르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081년 ~ 1108년)
루이 6세는 1081년경 파리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네덜란드의 베르타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용기를 보였으며, 사냥과 무예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2]1098년, 루이는 퐁티외의 기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3] 1100년 크리스마스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궁정에 참석하여 "프랑크족의 선출된 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3] 1103년, 아버지 필리프 1세는 이미 루이를 왕국의 통치에 참여시켰다.[3]
1104년, 루이는 아버지의 집사인 로슈포르의 기 2세의 딸 루시엔느 드 로슈포르와 결혼했지만, 3년 후 파혼했다.[4] 이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4] 이후 1115년 8월 3일, 루이는 사보이아의 움베르토 2세와 부르고뉴의 기젤라의 딸이자 교황 칼릭스투스 2세의 조카인 모리엔느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4] 아델라이드는 프랑스 중세 여왕 중 가장 정치적으로 활발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루이 6세 통치 기간의 45개의 왕실 칙령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한다.[4]
생드니 수도원장 수제르는 루이의 조언자였으며, 1108년 7월 29일 루이가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보좌했다.[5] 루이의 이복형제는 그가 랭스에 도착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샹스의 대주교 다임베르는 8월 3일 오를레앙 대성당에서 루이에게 대관식을 거행했다.[5] 랭스 대주교인 랄프 그린은 사절을 보내 대관식과 성유식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세례명은 루이-티보(Louis-Thibaut)이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 베르트 사이에서 태어난 네 아들 중 장남이었으며, 성직자가 된 셋째 아들 샤를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성인이 된 왕자였다.
아버지 필리프 1세는 1092년에 루이의 어머니 베르트와 이혼하고 유부녀였던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재혼했지만, 이를 두고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와 대립하여 파문을 당했고, 권위를 상실했다. 그 때문에 루이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국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같은 해, 당시 루이는 10세 정도였지만, 아버지 필리프로부터 벡상, 망트, 퐁투아즈의 도시 통치를 맡았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공격으로부터 이들 영토를 지켜야 했다.
궁정에 설 자리가 없었던 루이는 소유지인 퐁투아즈에서 혼자 살았고, 이불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망토를 걸치고 잠을 자야 했다. 유년 시절을 생드니 수도원 부속 생드니 드 레스트레 수도원 학교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 수제르를 만났다.
루이는 12세 전후에 궁궐로 돌아왔지만, 새어머니 베르트라드는 그녀의 친자식인 이복형제자매들을 귀여워했지만, 루이는 분명히 차별받았다.
1098년, 루이는 어머니 베르트의 외사촌인 퐁티외 백작 기 1세에 의해 아브빌에서 기사 작위를 받고,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이후 루이는 1101년부터 1105년까지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기도 했다.
1100년, 병석에 누운 아버지 필리프 1세로부터 도팽(왕세자)으로 지명된 후, 새어머니 베르트라드는 루이가 여행 중 잉글랜드 런던에 머물렀을 때, 칙령을 통해 그를 그곳에 머물도록 하려 했다. 더욱이 루이가 귀국하자, 베르트라드는 세 명의 수도사에게 루이 왕세자 암살을 의뢰했다고 전해진다. 이 음모는 간발의 차이로 발각되었지만, 1101년에 발생한 독살 미수 사건은 막을 수 없었고, 루이는 독에 쓰러져 유대인 의사의 치료 기술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루이는 1104년, 로슈포르의 유력한 오랜 가신인 몽레리 가문의 분가인 로슈포르 가문의 세네샬(왕궁 집사) 기 1세의 딸 뤼시엔느 드 로슈포르와 결혼함으로써, 베르트라드 왕비파의 권력에 대항했다. 왕세자비 뤼시엔느는 베르트라드의 아들 필리프 드 망트의 장인 몽레리 영주 기 2세 드 몽레리의 사촌에 해당한다. 베르트라드는 아들을 Île-de-France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몽레리 가문의 여상속인 엘리자베트와 결혼시킴으로써 일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루이 역시 몽레리 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더욱이, 루이는 베르트라드와 공개적으로 화해하고, 이복동생 필리프에게 망트 백작령을 결혼 선물로 하사했다.
1108년, 아버지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다. 루이 6세는 프랑스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렸지만, 어린 시절부터의 절친 수제르(성직자이자 생드니 대수도원 원장)를 정치 고문으로 중용하여, 종교 정책을 통한 귀족 통솔, 아버지 대부터 대립해 온 잉글랜드와의 외교 등을 통해 국내 안정화에 힘썼다.
1108년 8월 3일, 아버지 필리프 1세 서거 후, 생부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에 아버지가 매장된 직후 루이의 대관식과 즉위식이 오를레앙에서 급히 거행되었고, 상스의 대주교 댕베르에 의해 집행되었다. 이미 이때 루이는 몽레리 가문 및 몽포르 가문의 광범위한 반대 세력의 봉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왕 대관의 전통적인 성별 장소인 랑스에서는 당시 랑스 대주교 후보가 분열되어, 망부 필리프 1세가 임명한 제르베 드 르텔이 취임했지만, 교회 및 교황 파스칼 2세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짧은 기간 만에 해임되었고, 라울 르 베르가 취임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성별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고, 교황청은 랑스 교구에 칙령을 내렸다. 더욱이, 랑스에서는 루이는 이복동생 필리프와 그와 동맹 관계에 있던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 대관식에는 왕실의 고관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루이 6세 이전 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권위와 명성이 최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이는 오를레앙에서 루이 6세로 대관했고, 새어머니 베르트라드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루이는 베르트라드에게 망부 필리프 1세의 유산을 매각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수익으로 퐁트브로 수도원에 속한 오트-브뤼이에르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녀가 그곳에 은거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복동생 필리프로부터 망트 백작령 및 기타 요새를 몰수하는 대신, 필리프를 석방했다.
하지만 루이는 치세 초부터 지배의 존속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의 실질적인 영토인 왕령은 오를레앙, 파리, 생리를 중심으로 한 일드프랑스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 영토 주변에는 북쪽으로 노르망디와 플랑드르, 동쪽으로 샹파뉴, 서쪽으로 앙주와 브르타뉴, 남쪽으로 아키텐과 같은 강력한 봉건 영주령이 있었다. 이들 지방 영주들은 국왕을 형식적으로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할 뿐, 독자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은 실질적으로 부분적인 지배자에 불과했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 대부분은 강도 기사처럼 행동하는 강력한 성주들이 지배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장 유력했던 것은 전처 뤼시엔느의 친가인 몽레리-로슈포르 가문으로, 그들은 몽레리, 로슈포르앙이브린, 브레이쉬르센, 크레시앙브리 등에 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그 친족 간의 연계도 넓어 아버지 필리프 1세 시대부터 궁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루이 자신도 왕국의 세네샬 기 1세의 딸 뤼시엔느와 결혼했고, 그의 형인 위그 드 크레시는 1106년 아버지로부터 세네샬 직을 쉽게 물려받았다. 베르트라드를 무력화한 루이는 이제 몽레리 가문의 세력 무력화를 도모했다.
그 시작으로 1104년, 뤼시엔느와 루이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루이는 혈연 관계를 이유로 혼인 무효를 주장했다. 교황 파스칼 2세의 요청에 따라 트루아 공의회에서 그 주장이 유효하다고 판결되어 이혼하게 되었다.
뤼시엔느의 친가인 아버지 기 1세와 형 위그를 반란으로 몰아넣고, 루이는 1108년 그들의 거성이었던 그르네 성을 포위·점령했다. 그 직후 기 1세가 사망했지만, 몽레리-로슈포르 가문의 반역은 약해지지 않았다.
루이는 위그가 왕에 대한 반역으로 물러난 세네샬 직의 후임으로 앙소 드 갈랑드를 임명했다. 앙소 드 갈랑드는 몽레리 가문과 혼인 관계에 있었지만, 루이의 충신이었다. 위그는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와 동맹을 맺고 샤르트르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1109년, 루이는 라 로슈-귀용 성을 점령하고, 1111년에는 르 퓌이제 성을 파괴하고 위그 3세를 사로잡아 샤토-랑동에 유폐했다. 왕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르 퓌이제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투리 성을 쌓았다.
루이는 그 직후, 뫼랑 백작 로베르 1세가 왕실군의 영내 침입에 대한 보복으로 파리의 시테 섬을 공격하고 약탈한 것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1112년, 파리와 오를레앙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코르베유의 통치자 코르베유 백작 오도가 사망함으로써 상황은 악화되었다.
루이는 이 기회를 통해 코르베유를 정주령으로 삼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상속권을 주장하던 블루아 가문의 티보 4세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루이는 코르베유의 영유권을 포기한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를 석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단 자유의 몸이 된 위그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다시 반란군과 동맹을 맺었다. 이 궁지에 몰린 루이는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와 동맹을 맺고 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위그 3세는 이것을 타고 투리 성을 포위했지만, 루이는 군을 되돌려 투리 성을 탈환했다. 그 후, 사촌인 베르망두아 가문의 라울 1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 위그 드 크레시, 블루아 가문의 티보 4세, 로슈포르 백작 기 1세, 라울 드 보장시 등과 함께 르 퓌이제 영지를 다시 멸망시키고, 영주 위그 3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블루아 백작은 왕실의 동맹자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를 모에서 죽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1114년 로슈포르 백작 기 2세와 위그 드 크레시 부자를 그르네 성에 유폐하고, 그들의 복종을 받아낸 루이가 승리했다. 이로써 몽레리 가문은 멸망했고, 몽레리 가문의 재산은 왕실에 분할되었다. 루이는 몽레리, 고메츠, 샤토-포르를 왕령으로 삼고, 로슈포르 백작령은 자신의 충신인 앙소 드 갈랑드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르네는 다섯째 아들인 로베르 1세 드 드루에게, 브레이쉬르센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에게, 크레시앙브리는 샤티용 가문에게 각각 보상으로 주었다. 위그 드 크레시는 클뤼니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갔다.
1118년, 루이의 공격을 받았을 때,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는 자신의 외숙부인 앙소를 살해한 후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위그 3세 역시 항복을 강요당했다. 그 후,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는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더욱이, 귀족들의 통솔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는 위기에 처했지만, 수제르는 파리의 디오니시우스의 군기를 의미하는 오리프람을 휘두름으로써, 신앙심을 바탕으로 프랑스 귀족들을 결집시켜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수제르의 주도하에 수도원 개혁 등도 이루어졌다.
1137년, 두 번째 아내인 아델 드 사보이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장남 필리프 드 프랑스(1116-1131)가 요절한 뒤 1131년부터 공동 왕위에 있었던 루이 7세(소년왕)와 남프랑스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아키텐 공령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 다키텐과의 혼인을 결정한 후, 이질에 걸려 베티시-생피에르에서 서거했다.
2. 2. 즉위와 통치 (1108년 ~ 1137년)
루이 6세가 왕위에 오르자, 프랑스 왕국은 여러 봉건 영지들의 집합체였다. 일드프랑스를 넘어 프랑스 국왕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지만, 루이 6세는 이를 변화시키고 카페 왕조의 권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2세기가 걸렸지만, 루이 6세와 그의 아버지 필리프 1세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1]루이 6세는 즉위 초기부터 왕권에 저항하는 강탈 귀족들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통행세를 부과하고, 상인과 순례자를 습격하고, 농민을 위협하며,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했다.[1]
1108년, 루이 6세는 크레시의 휴와 전쟁을 벌여 라 페르트 알레에 가두었던 코르베유 백작 오드를 석방시켰다.[1] 같은 해, 아이몽 베르바슈가 조카의 부르봉 영지를 빼앗자 군대를 일으켜 제르미니 렉잠(Germigny-l'Exempt)의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다.[1]
1109년, 루이 6세는 이복형제 필립을 망트라졸리(Mantes-la-Jolie)에서 포위했다.[1] 필립의 음모에는 몽포르 라모리(Montfort-l'Amaury)의 영주들이 포함되었고, 몽포르의 아모리 3세(Amaury III de Montfort)는 많은 성을 소유하여 파리 남쪽의 통신을 위협했다.[1]
1121년, 루이 6세는 센 강 무역을 규제하기 위해 "물 상인(marchands de l'eau)"을 설립했다.[1]
1122년, 오베르뉴 백작 윌리엄 6세(William VI, Count of Auvergne)에게 쫓겨난 클레르몽의 주교(Bishop of Clermont) 아이메리가 루이 6세에게 호소했다. 루이 6세는 군대를 일으켜 오베르뉴로 진군, 퐁 뒤 샤토(Pont-du-Chateau) 요새를 점령하고 클레르몽을 공격하여 윌리엄 6세를 굴복시켰다. 4년 후 윌리엄 6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 6세는 몽페랑을 불태우고 클레르몽을 점령, 윌리엄 6세를 오를레앙 법정에 데려왔다.[1]
쿠시 영주 토마스(Thomas, Lord of Coucy)는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노장의 기베르(Guibert of Nogent)는 그의 지하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록했다.[1]
르 퓌세(Le Puiset) 영주 휴는 샤르트르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1111년, 루이 6세는 멜랑(Melun) 궁정에서 휴에 대한 고소를 듣고 그를 심문했지만, 휴는 소환을 회피했다. 루이 6세는 르 퓌세를 포위, 함락하고 휴를 사로잡았다.[1]

루이 6세는 휴를 석방했지만,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전쟁 중일 때 휴는 다시 강도 행위를 시작했다. 루이 6세가 르 퓌세를 재건한 휴를 공격했을 때, 휴는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2세(Theobald II, Count of Champagne)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휴는 테오발드가 그를 버릴 때까지 저항했다. 루이 6세는 르 퓌세를 파괴했고, 휴는 다시 강도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성을 재건하고 이웃을 다시 위협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휴를 물리치고 재산을 빼앗았다. 휴는 성지 순례 중 사망했다.[1]
루이 6세는 끊임없이 군대를 이끌고 반항적인 귀족들을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 결과 프랑스 사회는 왕을 보호자로 여기게 되었다.[1]

헨리 1세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공국을 빼앗고 지소르 성을 점령했다. 이는 루앙과 파리를 잇는 도로를 장악한 전략적 요충지로, 헨리 1세와 루이 6세 간의 이전 합의를 위반한 것이었다.[1]
루이 6세는 헨리 1세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두 왕은 1109년 3월 군대를 이끌고 만났다.[1] 헨리 1세가 지소르를 포기하지 않자, 루이 6세는 결투를 제안했지만 헨리 1세는 거부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여 2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1]
전쟁 초기에는 루이 6세에게 유리했지만,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2세가 헨리 1세 편으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112년 초, 테오발드는 여러 백작들을 연합시켜 루이 6세에 대항했다.[1]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 등과 동맹을 맺고 테오발드의 연합군을 물리쳤지만,[1] 1113년 3월, 헨리 1세를 브르타뉴와 메인의 종주로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1] 1116년 4월까지 평화가 지속되었지만, 프랑스와 노르망디 베크생에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1]
1119년, 루이 6세는 브르뮬 전투에서 패배하고 르 랑들리로 후퇴했다.[1] 이브뢰를 통해 브르퇴유를 점령하려는 반격은 실패했고, 건강이 악화된 루이 6세는 평화를 모색했다.[1]
루이 6세는 교황 칼릭스투스 2세에게 호소했고, 교황은 1120년 11월 지소르에서 헨리 1세와 만났다.[1] 평화 조건에는 헨리 1세의 상속인 윌리엄 아델린이 노르망디에 대해 루이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는 것이 포함되었지만, 루이 6세는 지소르를 헨리 1세에게 양보해야 했다.[1]
루이 6세는 아버지 필리프 1세와 베르트 사이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루이-티보였다. 아버지 필리프 1세는 1092년 베르트와 이혼하고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재혼했지만, 교황과 대립하여 파문당하고 권위를 상실했다. 루이 6세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국정 실권을 장악했다.[1]
루이 6세는 10세 때 벡상, 망트, 퐁투아즈의 통치를 맡아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했다. 궁정에 설 자리가 없었던 루이 6세는 퐁투아즈에서 혼자 살았고, 생드니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평생의 친구 수제르를 만났다.[1]
루이 6세는 12세 전후에 궁궐로 돌아왔지만, 새어머니 베르트라드는 친자식들을 더 귀여워했다. 1098년, 루이 6세는 기사 작위를 받고 청년기를 궁정 밖에서 보냈다. 이후 1101년부터 1105년까지 베르망두아 백작이 되기도 했다.[1]
1100년, 루이 6세는 도팽(왕세자)으로 지명되었지만, 베르트라드는 루이 6세를 암살하려 했다. 1101년 독살 미수 사건으로 루이 6세는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유대인 의사의 치료로 살아남았다.[1]
1104년, 루이 6세는 뤼시엔느 드 로슈포르와 결혼하여 베르트라드 왕비파에 대항했다. 그러나 루이 6세는 베르트라드와 화해하고 이복동생 필리프에게 망트 백작령을 주었다.[1]
1108년, 루이 6세는 아버지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다. 루이 6세는 수제르를 정치 고문으로 중용하여 국내 안정화에 힘썼다.[1]
1108년 8월 3일, 루이 6세의 대관식은 오를레앙에서 거행되었다. 랑스 대주교 후보 분열과 이복동생 필리프의 위협 때문이었다. 대관식에는 왕실 고관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아 왕실 권위가 낮았음을 보여준다.[1]
루이 6세는 베르트라드에게 유산 매각을 허락하고 퐁트브로 수도원 부속 오트-브뤼이에르 수도원을 설립하여 은거하게 했다. 이복동생 필리프로부터 망트 백작령 등을 몰수하는 대신 석방했다.[1]
루이 6세의 실질적인 영토는 일드프랑스에 국한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강력한 봉건 영주들이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은 부분적인 지배자에 불과했고, 도로는 강도 기사 같은 성주들이 지배했다.[1]
가장 유력한 것은 몽레리-로슈포르 가문이었다. 루이 6세는 뤼시엔느와 이혼하고, 1108년 그들의 거성 그르네 성을 점령했다. 앙소 드 갈랑드를 세네샬로 임명하고, 위그 드 크레시와 위그 3세를 진압했다.[1]
1109년, 루이 6세는 라 로슈-귀용 성을 점령하고, 1111년 르 퓌이제 성을 파괴했다. 1112년, 코르베유 백작 오도가 사망하자 코르베유를 정주령으로 삼았지만, 티보 4세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루이 6세는 위그 3세를 석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위그 3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 6세는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와 동맹을 맺고 진군했지만, 로베르 2세는 사망했다.[1]
1114년, 루이 6세는 몽레리 가문을 멸망시키고 재산을 분할했다. 1118년, 르 퓌이제 영주 위그 3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항복했고,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하여 사망했다.[1]
귀족 통솔 실패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침공을 받았지만, 수제르는 오리프람을 휘둘러 귀족들을 결집시켜 격퇴했다. 수제르는 수도원 개혁도 주도했다.[1]
1137년, 루이 6세는 아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혼인을 결정한 후, 이질로 서거했다.[1]
2. 3. 플랑드르 개입과 신성 로마 제국 침공 격퇴 (1127년 ~ 1128년)
1127년 3월 2일, 브뤼헤(생도나시안 대성당)에서 플랑드르 백작 샤를르 르 본(Charles the Good)이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위욤 드 이프르, 티에리 드 알자스, 아르놀드 드 덴마크, 보드뱅, 고드프리 1세 등 여러 인물들이 계승권을 주장하며 분쟁이 발생했다.[1]루이 6세는 플랑드르를 확보하기 위해 샤를르 르 본의 암살자들을 체포하고 경쟁자들을 축출했다. 4월 2일에는 겐트를, 4월 5일에는 브뤼헤를, 4월 26일에는 이프르를 점령하여 위욤 드 이프르를 릴에 감금했다. 또한 위욤 드 이프르에게 충성하는 도시들을 점령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루이 6세는 샤를르 르 본의 암살자들이 생도나시안 교회 지붕에서 던져져 처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1]
루이 6세는 로베르 쿠르토즈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를 지지하며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로 진격하여 귀족들에게 그를 새 백작으로 선출할 것을 촉구했다. 윌리엄 클리토는 삼촌인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 의해 노르망디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1127년 3월 23일, 윌리엄 클리토는 플랑드르 백작으로 선출되었다.[1] 그러나 윌리엄 클리토의 통치는 좋지 못했고, 플랑드르 시민들에 대한 무능한 대우로 인해 도시들에서 반대가 커졌다.[2] 겐트와 브뤼헤는 티에리 드 알자스와 아르놀드 드 덴마크에게 호소했다.[1]
루이 6세는 다시 개입하려 했으나, 브뤼헤 시민들은 그를 거부하고 티에리 드 알자스를 백작으로 인정했다. 루이 6세는 아라스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랭스 대주교가 티에리 드 알자스를 파문하고 릴 시에 교령(interdict)을 내리게 했다.[3] 1128년 7월 27일 알로스트 공성전 중 윌리엄 클리토가 사망했고, 결국 루이 6세는 티에리의 주장을 인정해야 했다.[1]
2. 4. 말년과 사망 (1137년)
루이 6세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긍정적인 상황들이 나타났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1135년 12월 1일에 죽고 블루아의 스테판이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면서 헨리 1세에게 마틸다를 지지하겠다고 맹세했던 서약을 어겼다. 따라서 스테판은 프랑스 왕관에 대해 잉글랜드-노르망디 연합군을 이끌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루이 6세는 또한 그의 귀족들에 대한 왕권을 행사하는 데 큰 발전을 이루었고, 테오발드 2세조차도 마침내 카페 왕가의 대의에 합류했다.[4]
1137년 4월 9일, 죽어가던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는 그의 15세 된 딸이자 상속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후견인으로 루이 6세를 임명했다.[5] 엘레오노르는 갑자기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속녀가 되었고, 루이 6세는 1137년 7월 25일 보르도의 생트-앙드레 대성당에서 자신의 상속자인 미래의 루이 7세와 그녀를 결혼시키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5] 루이는 단숨에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공국 중 하나를 카페 왕가의 영토에 추가했다.
루이는 7일 후인 1137년 8월 1일에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곧 앙주 제국이 될 강대국의 성장이 그의 후계자를 압도하게 될 것이며, 그 씨앗은 황후 마틸다와 제프리 플랜태지넷의 결혼에서 뿌려졌고 그들의 아들인 잉글랜드의 헨리 2세를 통해 실현되었다.
루이 6세는 파리의 생드니 바실리카에 안장되었다.
3. 자녀
루이 6세는 1115년에 아델라이드 드 모리엔느(1092–1154)와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5]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필리프 | 1116년 8월 29일 | 1131년 10월 13일 | 프랑크 왕(1129–1131); 말에서 떨어져 사망 |
루이 7세 | 1120년 | 1180년 9월 18일 | 프랑크 왕 |
앙리 | 1121년 | 1175년 11월 13일 | 랭스 대주교 |
위그(Hugh) | 약 1122년 | 요절 | |
로베르 | 약 1123년 | 1188년 10월 11일 | 드뢰 백작 |
피에르 | 1126년 9월 | 1183년 4월 10일 | 쿠르트네 가문의 영애 엘리자베스와 결혼 |
콘스탄스 | 약 1128년 | 1176년 8월 16일 | 부를뉴 백작 외스타슈 4세(스티븐 왕의 장남)와 결혼, 이후 툴루즈의 레이몽 5세와 결혼 |
필리프 | 약 1132년 | 1160년 | 파리의 사제 |
루이 6세는 르노 드 브뢰유이 드 두르당(Renaud de Breuillet de Dourdan)의 딸 마리 드 브뢰유이(Marie de Breuillet)와의 사이에서 딸 한 명을 두었다.
- 이자벨(약 1105년 ~ 1175년 이전): 1117년 윌리엄 드 쇼몽과 결혼(약 1119년)
참조
[1]
웹사이트
LOUIS VI
https://touslesroisd[...]
[2]
문서
르시엔느의 가계와 루이 6세와의 관계
[3]
문서
루이 6세의 왕비 르시엔느와 정치적 상황
[4]
문서
루이 6세와 르시엔느의 이혼
[5]
서적
Lines of Succession
Little, Brown & Compan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