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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스 웃딘 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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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야스 웃딘 발반은 13세기 델리 술탄 왕조의 맘루크 왕조 출신 술탄으로, 몽골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노예 출신으로 권력을 장악한 그는 엄격한 통치와 공포 정치를 통해 술탄의 권위를 높였으며, 몽골과의 전투에서 장남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발반 사후, 그의 손자가 즉위했으나, 곧 반동과 내분으로 맘루크 왕조는 멸망하고 할지 왕조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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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야스 웃딘 발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갸야스 웃딘 발반
직위노예 왕조 제9대 군주
발반의 통치 시기에 주조된 은화
재위 기간1266년 - 1287년
출생일1216년 (추정)
출생지투르키스탄
사망일1287년
사망지알 수 없음
매장지델리
왕조노예 왕조
종교알 수 없음
가족 관계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무함마드 하네 샤히드
부그라 칸
딸 (나시르 웃딘의 아내)

2. 생애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으로, 부모는 모두 불명이다. 투글루크 왕조의 궁정 역사가인 지야 웃딘 바라니에 따르면 만년의 발반은 "80세를 넘었다"고 하므로[1], 1210년대 초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젊은 시절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붙잡혀 맘루크 (노예 군인)가 되었고, 1232년 노예 왕조의 술탄 일투투미쉬에게 궁정 노예로 섬겼다. 일투투미쉬 시대에 "칸"[2]으로 임명되어 일투투미쉬 측근 40명의 노예 중 한 명이 되었다.[3]

1236년 일투투미쉬가 죽은 후, 발반은 역대 술탄 아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나시르 웃딘 마흐무드 샤 시대에는 섭정으로서 중추를 장악했고, 1249년에는 딸을 나시르 웃딘에게 시집보내 일투투미쉬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울루그 칸 아잠" 칭호를 받고 국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5]

그러나 1253년 나시르 웃딘과의 대립으로 해임되었으나, 1254년 터키계 장교들의 반발로 다시 권력을 잡았다. 1266년에는 나시르 웃딘을 독살하고 스스로 술탄으로 즉위했다.[6]

발반은 즉위 후 술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엄격한 정치를 단행했다. 영토 전체에 스파이망을 정비하여 밀고를 장려하고 귀족의 약화를 꾀했으며, 술탄 권력을 신성화했다.[7]

당시 차카타이 칸국과 일 칸국이 인도 방면에 여러 차례 침략했다. 발반은 1257년 물탄을 포위한 차카타이 칸국 군대를 호라산까지 물리쳤다.[10]

1285년 일 칸국아르군 칸펀자브를 침공했을 때, 전투에서 장남 무함마드가 전사했다.[11][12] 1287년 아르군 칸의 군대가 다시 펀자브를 침입하여 라호르를 약탈했다.[11] 발반은 80세를 넘겨 병을 얻었고, 죽기 3일 전 장남 무함마드의 아들 카이호스로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13]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으로, 부모는 모두 불명이다. 출생 연도는 투글루크 왕조의 궁정 역사가인 지야 웃딘 바라니의 말에 따르면 만년의 발반은 "80세를 넘었다"고 하므로[1], 1210년대 초 무렵으로 추측된다.

젊은 시절에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붙잡혀 맘루크 (노예 군인)가 되었고, 1232년에 노예 왕조의 당시 술탄이었던 일투투미쉬에게 궁정 노예로 섬겼다. 이 일투투미쉬 시대에 "칸"[2]으로 임명되어 일투투미쉬 측근의 40명의 노예 중 한 사람이었다[3]。 하지만 당시에는 음주와 도박에 빠져 일주일에 2, 3번은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4]

1236년 일투투미쉬가 죽은 후, 그 후계자들은 정권을 귀족에게 빼앗겨 실권을 갖지 못했다. 발반은 일투투미쉬 가문의 역대 술탄 아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 일투투미쉬의 아들이자 제8대 술탄인 나시르 웃딘 마흐무드 샤 시대에는 섭정으로서 중추를 장악했고, 1249년에는 딸을 나시르 웃딘에게 시집보내 일투투미쉬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나시르 웃딘으로부터 "울루그 칸 아잠"의 칭호를 받고 국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튀르크계 귀족의 제1인자로서 정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위까지 올라섰다[5]

그러나 나시르 웃딘과 점차 대립하게 되었다. 1253년에는 해임되어 자령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1254년, 나시르 웃딘이 발반이 쓰던 터키인 대신 비(非) 터키계 인재를 중용하자 터키계 장교들이 나시르 웃딘에게 반발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델리를 포위하고, 발반의 중추 복귀를 요구했다. 이때 발반은 나시르 웃딘에게 왕족을 상징하는 흰색 양산 (차트르)을 비롯한 왕의 소지품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을 모두 빼앗았다. 어느 날, 양산을 사용하자 고참 귀족이 험한 말을 하자 발반은 이 귀족을 즉시 살해했다. 그리고 1266년에는 꼭두각시였던 나시르 웃딘을 독살하고 스스로 술탄으로 즉위했다[6]

2. 2. 공포 정치와 중앙집권 강화

기야스 웃딘 발반은 노예 왕조의 세 번째 왕조인 발반 왕조의 지배를 시작했지만, 즉위 후 술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엄격한 정치를 단행했다. 지인이든 낯선 사람이든 친하게 대하지 않았고, 농담도 허용하지 않았다. 웃는 일도 없었고, 큰 소리로 웃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영토 전체에 스파이망을 정비하여 밀고를 장려하고 귀족의 약화를 꾀했으며, 술탄 권력의 신성화, 일족 우대 등을 통해 술탄 권력을 강화했다.[7]

특히 라지푸트의 정통 크샤트리아(전사 계급)로서 사회적 지위를 요구했던 메오족에 대해서는 두 차례에 걸쳐 군대를 보내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7] 델리에서 동쪽으로 170km 떨어진 카테헬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남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고, 바라니의 기록에는 "폭도들의 피는 강을 이루어 흘렀고, 어느 마을에도, 어느 밀림에도, 참살된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시취는 갠지스강까지 풍길 정도였다"고 적혀 있다.[8] 이처럼 자신의 독재 권력 구축에 매진했다.

2. 3. 몽골의 침입 방어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칭기즈 칸의 차남인 차카타이를 시조로 하는 차카타이 칸국과 칭기즈의 손자인 훌레구를 시조로 하는 일 칸국이 세력을 떨치며, 인도 방면에 여러 차례 침략을 가했다. 발반은 즉위 전인 1257년에 차카타이 칸국의 군대에 물탄이 포위되자 군을 이끌고 몽골과 싸워 이를 호라산까지 물리쳤다.[10] 이후에도 사촌 셰르 칸의 활약 등으로 여러 차례 몽골군의 침략을 격퇴했다.

1285년 일 칸국아르군 칸가즈니에서 펀자브로 군대를 침공시켰다.[11] 이 전투에서 방어군 지휘하에 있던 장남 무함마드가 전사하면서 발반은 기대했던 후계자를 잃고 큰 슬픔에 잠겼다.[12]

2. 4. 후계자 문제와 죽음

1285년 일 칸국아르군 칸가즈니에서 펀자브로 군대를 침공했다.[11] 이 전투에서 방어군을 지휘하던 발반의 장남 무함마드가 전사하여, 발반은 큰 슬픔에 잠겼다.[12]

1287년, 아르군 칸의 군대가 다시 펀자브를 침입하여 라호르를 약탈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80세를 넘긴 발반은 병을 얻었고, 죽기 3일 전 주요 신하들을 불러 장남 무함마드의 아들 카이호스로를 후계자로 지명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13]

3. 사후

1285년 비아스 강 전투에서 장남 무함마드가 전사하면서 발반은 큰 슬픔에 잠겼다.[12] 1287년 일 칸국의 침입으로 라호르가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80세를 넘긴 발반은 병으로 쓰러졌고, 죽기 3일 전 무함마드의 아들 카이호스로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13]

바라니는 발반이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빛을 부여하고 제반 관청에 질서를 가져왔으며, 효력이 쇠퇴하거나 무너져가던 제도를 되돌렸다고 칭찬했다.[14] 그러나 발반의 독재적인 정치는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고,[15] 중신들은 발반의 유언을 무시하고 손자 카이쿠바드를 즉위시켰다. 이후 반란과 내분이 잇따랐고, 1290년 카이쿠바드가 살해되면서 노예 왕조는 멸망하고 할지 왕조가 들어섰다.

4. 평가

기야스 웃딘 발반은 노예 왕조의 세 번째 왕조인 발반 왕조를 세웠지만, 술탄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매우 엄격한 정치를 시행했다.[7] 그는 가까운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농담, 웃음, 큰 소리로 웃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영토 전체에 감시 체계를 구축하여 밀고를 장려하고 귀족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술탄 권력의 신성화, 일족 우대 등을 통해 술탄의 권력을 강화했다.

특히, 라지푸트의 정통 크샤트리아(전사 계급)로서 사회적 지위를 요구했던 메오족에 대해서는 두 차례나 군대를 보내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7] 델리에서 동쪽으로 170km 떨어진 카테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남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바라니의 기록에는 "폭도들의 피가 강을 이루어 흘렀고, 어느 마을, 어느 밀림에도 참살된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시취는 갠지스강까지 풍길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처럼 발반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1271년에는 사촌이자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던 뛰어난 장수였던 셰르 한과 대립하여 그를 독살했다.[9]

1280년대 초, 발반이 총애하던 벵골 총독이자 노예였던 투그릴이 몽골 방어에 집중하던 발반의 빈틈을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투그릴은 스스로 술탄이라 칭하고, 자신의 화폐를 만들었으며, 금요 예배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게 했다. 발반은 두 차례 진압군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투그릴을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반란에 가담했거나 투그릴을 섬긴 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모두 교수형에 처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칭기즈 칸의 차남 차카타이를 시조로 하는 차카타이 칸국과 칭기즈 칸의 손자 훌레구를 시조로 하는 일 칸국이 세력을 떨치며 인도 방면으로 여러 차례 침략해왔다. 발반은 즉위 전인 1257년에 차카타이 칸국의 군대가 물탄을 포위하자 군대를 이끌고 몽골군과 싸워 이들을 호라산까지 물리쳤다.[10] 이후에도 사촌 셰르 칸의 활약 등으로 여러 차례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5. 후계자 정책

발반은 장남이자 유능한 무함마드를 몹시 아꼈다. 그래서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훈계장을 보내는 등 후계자로서의 경험을 쌓게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몽골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발반은 그 슬픔으로 병을 얻었고, 결국 후계자를 잃게 되어 왕조 멸망까지 이어졌다. 훈계장의 내용은 사치 금지, 왕의 그릇과 야심, 능력 있는 자를 측근으로 둘 것 등을 명하고 있다.[16]

참조

[1]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2]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3]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4]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5]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6]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7]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8]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9]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0] 서적 南アジア史
[11] 서적 南アジア史
[12]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3]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4]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5]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6] 서적 ムガル帝国歴代誌
[17] 서적 History of Medieval India ORIENT BLACKSWAN
[18] 서적 History of Medieval India ORIENT BLACKSWAN
[19] 서적 History of Medieval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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