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덕
1. 개요
김병덕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4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대교를 시작으로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고종 즉위 후에도 요직을 두루 거치며, 병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독판군국사무,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으며, 저서로 《속간고》가 있다. 평안감사 재임 시 유흥과 풍기를 단속하고 청렴함을 유지했으며, 재물욕이 없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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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사망 -
다테 무네나리
다테 무네나리는 에도 시대 우와지마 번의 번주로서 공무합체를 지지하며 막말 정치 활동을 펼쳤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활동하며 외교에 참여했으며, 번주 시절에는 식산흥업을 중심으로 번정 개혁을 추진하는 등 우와지마 번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
1892년 사망 -
리처드 오언
리처드 오언은 19세기 영국의 비교 해부학자이자 고생물학자로, 런던 자연사 박물관 설립에 기여하고 "공룡"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나, 연구 부정행위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좌의정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좌의정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1. 관직 생활
1847년(헌종 1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교(待敎)가 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 아래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한성부판윤, 홍문관제학, 규장각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참찬, 좌참찬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63년(고종 즉위) 후에도 숙청되지 않고 1867년(고종 4년)에는 이조판서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3차례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1879년 병조판서, 1880년 통리기무아문당상(堂上)으로 있다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수원부유수 등의 여러 외직을 지낸 후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를 지내고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885년 의정부좌의정을 거쳐 관제 개편 뒤에는 총리군국사무가 되었으며, 1891년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를 극진히 섬겼는데, 공적인 일로 바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세 번 씩 아버지가 있는 친가에 가 문안을 드리고 살폈다. 심지어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을 때는 부모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개는 것은 물론, 물을 끼얹어 씻고 비로 쓰는 청소 일도 손수 했다.
2.2. 개인적인 삶과 효행
김병덕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를 극진히 섬겼는데, 공적인 일로 바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세 번씩 아버지가 있는 친가에 가 문안을 드리고 살폈다. 심지어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을 때도 부모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개는 것은 물론, 물을 끼얹어 씻고 비로 쓰는 청소 일도 손수 했다.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3. 사상과 신념
김병덕은 안동 김씨 집권기에도 권력투쟁에 참여하지 않고 욕심 없이 의연하게 처신했으며, 사촌동생 김병시의 권력욕을 경계했다. 그는 식사 때 고기와 생선을 함께 올리지 않았고, 버선 한 벌로 3~4개월을 신었는데, 때가 묻어 진한 회색으로 변하거나 작은 흠집이 생겨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기워 신었다.
3.1. 유흥, 풍기 단속
김병덕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에도 청렴함은 조금도 변치 않아, 도내의 관리와 백성 모두 그의 맑은 다스림을 한입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평양의 화류계는 대쪽같은 감사 때문에 그 빛을 잃어 가고 있었지만, 감히 어쩌지 못하고 절망의 장탄식만을 늘어놓았다.
"우리 사또의 기상은 하늘에 있는 은하수와 같아서, 그저 바라볼 수 있을지언정 가깝게 친할 수는 없다!"
3.2. 청렴성
그는 고관으로 재직했음에도 재물욕이 없었다. 그는 안동 김씨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각 파 간의 권력투쟁에는 조금도 끼어들지 않고 욕심 없이 의연하게 처신했으며, 사촌동생 김병시의 권력욕을 크게 우려하며 경계했다.
그는 식사 때 고기와 생선을 함께 상에 올리지 않았고, 버선 한 벌로 반드시 3~4개월을 지냈는데, 버선의 흰색이 때가 묻어 진한 회색으로 변하거나 작은 흠집이 생겨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기워서 신었다. 이러한 그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맑은 물에는 고기가 새끼를 낳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여야 했다.
3.3. 양자론
그의 양자 김종규 역시 관직생활 내내 청렴한 관료였다. 김종규는 청빈한 명성을 잘 이어나갔으며, 세상 사람들은 "김종규와 윤용구 같이 가문의 명성을 지키며 수성할 만한 양자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굿을 하며 친아들 얻게 해 달라고 빌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4. 저서
《속간고(續諫考)》
5.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할아버지 | 김명순 |
| 아버지 | 김흥근 |
| 양자 | 김종규 |
| 양손자 | 김하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