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근
1. 개요
김흥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25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헌종 때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나, 가문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철종 즉위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했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별장을 탐내어 별장을 헌납하게 되었으며, 철종의 병세가 위중했을 때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으며,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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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조선의 좌의정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좌의정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생애
김흥근은 1825년(순조 25) 성균관 공자묘 앞에서 주관하는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철종 때 영의정까지 역임했다.
흥선군은 김흥근의 별장을 탐내어 대원군이 된 후 별장을 요구했다. 김흥근이 이를 거절하자,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데리고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임금이 머문 곳을 사저로 쓸 수 없다는 사회 통념 때문에 김흥근은 별장을 헌납했고, 흥선대원군은 석파정이라 이름 붙인 이 별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2.1. 관직 생활
1825년(순조 25) 성균관 공자묘 앞에서 주관하는 과거 시험인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이조참의, 검교대교를 지냈고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전교관이 되고,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대사헌을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고,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여러번 지냈고 이후 다시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헌종 즉위 후 35년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여러번 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철종 즉위 후, 1851년 풀려났으며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1852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철종이 병석에서 사경을 헤매자, 차라리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가 친족들은 말도 안된다며 묵살해버렸다. 김좌근의 집에서 때로 구걸하기도 했던 흥선군을 어떤 의도로 추대했는지 목적은 불확실하다.
2.2. 철종 시대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철종 즉위 후, 1851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었고, 185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흥선군은 김흥근의 별장을 탐냈고, 대원군이 된 후 별장을 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흥근이 이를 거절하자,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데리고 그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임금이 머문 곳을 사저로 쓸 수 없다는 사회 통념 때문에 김흥근은 별장을 흥선대원군에게 헌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의 별장을 반강제로 압수한 뒤, 별장 이름을 석파정이라 바꾸고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김흥근은 철종이 병석에서 사경을 헤매자, 차라리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가 친족들은 말도 안 된다며 묵살해버렸다. 김좌근의 집에서 때로 구걸하기도 했던 흥선군을 어떤 의도로 추대했는지 그 목적은 불확실하다.
2.3. 고종 즉위 반대
김좌근과 김흥근은 철종이 병석에 눕자 만나서 비밀리에 숙의했다. 김좌근과 김흥근은 "만일 흥선군이 대원군이라는 위치를 믿고 국정에 간섭해서 그 위세로 나라의 법을 변경하면 이 일을 감히 누가 막을 자가 있겠소? 그리 되면 나라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종묘사직에 위험이 미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윤효정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놓고, 그들의 예상대로 됐다고 보았다.
윤효정은 이를 두고 김좌근과 김흥근 두 정승의 통찰력과 먼 훗날을 염려하는 마음이라 평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둘의 만남을 전해듣고 앙심을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