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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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5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 격동의 시기에 삼군부지사, 외무아문독판, 영의정 등을 지냈다. 특히 청·일 양군의 개입에 반대했으며, 아관파천 이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용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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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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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Gim Byeong-si |
2. 생애
김병시는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조선 말기의 격동기를 겪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외세의 개입에 반대했고, 개화와 개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병시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 | 사건 |
---|---|
1854년 | 문과 급제 |
1860년 | 홍문관 교리 |
1869년 | 종2품으로 승진 |
1870년 | 충청도 관찰사 |
1875년 | 정2품으로 승진 |
1878년 | 지삼군부사 |
1879년 | 규장각 제학, 호조 판서 |
1882년 | 임오군란 발생, 삼군부지사 역임 |
1884년 | 갑신정변 발발, 외무아문독판 취임, 러시아와 러·조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우의정 취임 |
1885년 | 임오군란 조선 정부 측 조사 위원 |
1888년 | 좌의정 취임 |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발발, 영의정 취임(6월 20일) 및 사임(6월 24일), 군국기무처 독판, 중추원 의장 역임 |
1895년 |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발생, 단발령 반대 |
1896년 | 아관파천 발생, 내각총리대신 임명(취임 거부), 의정부 의정(9월 24일 ~ 다음 해 1월 10일) |
1897년 | 의정부 의정 (2월 19일 ~ 4월 18일), 대한제국 선포(10월 12일) |
1898년 | 의정부 의정 (7월 21일 ~ 8월 12일) |
문집으로는 《용암집》이 있다.
2. 1. 관직 생활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60년 홍문관 교리(校理), 1862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이어서 도승지, 총융사(摠戎使), 무영도통사(武營都統使), 우포도대장(右浦盜大將), 좌포도대장(左浦盜大將) 등의 무관직을 역임하고 1870년(고종 7)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1] 이후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의정부우참찬을 거쳤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재집정했을 때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가 되었다.[1]1884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보수당원으로서 그들과 대결,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당을 몰아내고 사대당 중심의 내각을 조직하였다.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에 취임하여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1]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조정의 관리들은 청군을 끌어들여야 한다, 일본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로 나뉘었으나 그는 청․일(淸日) 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 농민운동 후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게 하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독판(軍國機務處督辦)에 취임하고, 이것이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그 의장이 되었다.[1]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1]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開國)을 반대하고, 1895년 단발령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1]
2. 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을 때 김병시는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가 되었다.[1]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보수당원으로서 그들과 대결,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당을 몰아내고 사대당 중심의 내각을 조직하여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에 취임하였다.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이탈리아․영국․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2]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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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 7월 23일 - 임오군란 발생. 일본인 군사 고문과 일본 공사관원 등이 살해되고, 일본 공사관이 습격받음[1] |
1884년 | 7월 - 통리군국아문 독변이용군국사무[2]로서 사후 처리와 각국과의 교섭을 수행 |
1884년 | 7월 7일 - 서울에서 전권대사(독변이용군국사무)로 베베르 (Waeber, K. I.)와 러·조 수호 통상 조약 체결 |
1885년 | 1월 - 임오군란 조선 정부 측 조사 위원 |
2. 3.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정의 관리들은 청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일본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으나, 김병시는 청나라와 일본 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 운동 후 김병시는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을 설치하게 하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 독판에 취임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1]김병시는 1894년 동학 농민군 봉기 당시 6월 20일 영의정에 취임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4일 사임하였다.[3]
2. 4. 아관파천과 말년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3] 김병시는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開國)을 반대하고, 1895년 단발령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고조부 | 김달행(金達行) | |
증조부 | 김이경(金履慶) | |
할아버지 | 김명순(金明淳) | |
백부 | 김홍근(金弘根) | |
사촌 | 김병계(金炳桂) | |
조카 | 김성규(金性圭) | |
숙부 | 김흥근(金興根) | |
사촌 | 김병덕(金炳德) | |
조카 | 김종규(金宗圭) | |
아버지 | 김응근(金應根) | |
부인 | 홍종서의 딸 | |
아들 | 김용규(金容圭) | |
손자 | 김태진(金泰鎭) | |
손자 | 김승진(金昇鎭) | |
손자 | 김풍진(金豊鎭) | |
손자 | 김복진(金復鎭) | |
장녀 | 서상윤에게 출가 | |
서자 | 김택규(金宅圭) | |
서자 | 김복규(金宓圭) |
4. 역대 정승
연도 | 직책 |
---|---|
1884년 11월 | 우의정 |
1888년 8월 | 좌의정 |
1894년 6월 20일 | 영의정 (6월 24일 사임) |
1896년 2월 11일 ~ 4월 22일 | 내각총리대신[3] |
1896년 9월 24일 ~ 1897년 1월 10일 | 의정부 의정 |
1897년 2월 19일 ~ 4월 18일 | 의정부 의정 |
1897년 10월 12일 | 의정부 의정 (대한제국 국호 변경) |
1898년 7월 21일 ~ 8월 12일 | 의정부 의정 |
참조
[1]
간행물
公文別録・朝鮮事変始末・明治十五年・第一巻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82-00-00 # Meiji 15 corresponds to 1882. The exact date is unknown.
[2]
문서
臨時代理公使島村久ヨリ朝鮮国統理衙門督弁其他更迭ノ近況報告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3]
문서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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