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시
1. 개요
김병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5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 격동의 시기에 삼군부지사, 외무아문독판, 영의정 등을 지냈다. 특히 청·일 양군의 개입에 반대했으며, 아관파천 이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용암집》이 있다.
| hangeul: 김병시 hanja: 金炳始 hiragana: きんへいし katakana: キム ビョンシ latin: Kim Byeong-si | |
| 로마자 표기 | Gim Byeong-s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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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의정대신 -
조병세 (18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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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의정대신 -
심순택
심순택은 심의겸의 11대 손으로, 조선 후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의정대신을 역임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 군대 출동을 요청하고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1906년에 사망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32년 출생 -
허드슨 테일러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륙 선교회를 설립하고 중국 문화 존중과 믿음 선교 원칙을 통해 51년간 중국 선교에 헌신한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이다. -
1832년 출생 -
귀스타브 에펠
프랑스의 토목기사이자 건축가인 귀스타브 에펠은 철골 구조 건축의 선구자로서 에펠탑 건설과 자유의 여신상 내부 구조 설계에 참여했으며, 후기에는 항공학 발전에도 기여했지만 파나마 운하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
2. 생애
김병시는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조선 말기의 격동기를 겪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외세의 개입에 반대했고, 개화와 개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병시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연도 | 사건 |
|---|---|
| 1854년 | 문과 급제 |
| 1860년 | 홍문관 교리 |
| 1869년 | 종2품으로 승진 |
| 1870년 | 충청도 관찰사 |
| 1875년 | 정2품으로 승진 |
| 1878년 | 지삼군부사 |
| 1879년 | 규장각 제학, 호조 판서 |
| 1882년 | 임오군란 발생, 삼군부지사 역임 |
| 1884년 | 갑신정변 발발, 외무아문독판 취임, 러시아와 러·조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우의정 취임 |
| 1885년 | 임오군란 조선 정부 측 조사 위원 |
| 1888년 | 좌의정 취임 |
|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발발, 영의정 취임(6월 20일) 및 사임(6월 24일), 군국기무처 독판, 중추원 의장 역임 |
| 1895년 |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발생, 단발령 반대 |
| 1896년 | 아관파천 발생, 내각총리대신 임명(취임 거부), 의정부 의정(9월 24일 ~ 다음 해 1월 10일) |
| 1897년 | 의정부 의정 (2월 19일 ~ 4월 18일), 대한제국 선포(10월 12일) |
| 1898년 | 의정부 의정 (7월 21일 ~ 8월 12일) |
문집으로는 《용암집》이 있다.
2.1. 관직 생활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60년 홍문관 교리(校理), 1862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이어서 도승지, 총융사(摠戎使), 무영도통사(武營都統使), 우포도대장(右浦盜大將), 좌포도대장(左浦盜大將) 등의 무관직을 역임하고 1870년(고종 7)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의정부우참찬을 거쳤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재집정했을 때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가 되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보수당원으로서 그들과 대결,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당을 몰아내고 사대당 중심의 내각을 조직하였다.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에 취임하여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조정의 관리들은 청군을 끌어들여야 한다, 일본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로 나뉘었으나 그는 청․일(淸日) 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농민운동 후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게 하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독판(軍國機務處督辦)에 취임하고, 이것이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그 의장이 되었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開國)을 반대하고, 1895년 단발령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2.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재집권했을 때 김병시는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가 되었다.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보수당원으로서 그들과 대결,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당을 몰아내고 사대당 중심의 내각을 조직하여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에 취임하였다.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이탈리아․영국․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3.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정의 관리들은 청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일본군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으나, 김병시는 청나라와 일본 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농민 운동 후 김병시는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을 설치하게 하고 영의정이 되었으나,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 독판에 취임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김병시는 1894년 동학 농민군 봉기 당시 6월 20일 영의정에 취임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4일 사임하였다.
2.4. 아관파천과 말년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김병시는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開國)을 반대하고, 1895년 단발령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