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1897년)
1. 개요
김상윤은 1897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같은 해 김원봉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을 창단했다. 의열단에서 과격한 폭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1925년 의열단 해체 후 중국 복건성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기념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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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김씨 -
김수선
김수선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제헌 및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장하고 자유당을 비판했으나 후에 입당하기도 했으며, 저서와 질문서로 인해 자유당에서 제명 및 징계 처분을 받았다. -
아나키스트 -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자연주의자로서, 월든 연못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을 담은 『월든』과 시민 불복종 사상으로 미니멀리즘, 비폭력 저항 운동, 환경 보호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아나키스트 -
에밀리아노 사파타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879년 멕시코에서 태어나 농민들의 토지 권리를 위해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여 남부 해방군을 이끌었고, 농민 자치 정부를 수립했으나 1919년 암살당했으며 멕시코 국민 영웅으로 존경받는다. -
19세기 한국 사람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19세기 한국 사람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2. 생애
김상윤은 1897년 9월 12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호는 초산(楚山),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밀양 동화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자 상경하여 중앙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회영이 지린성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3·1독립운동이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만 극심하게 되자, 김상윤은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무력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2.1. 의열단 창단
1919년 11월 10일 새벽, 김상윤은 김원봉 등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중국 길림성에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을 창단하였다. 이들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라는 뜻을 담아 단체 이름을 의열단이라 하였다.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 지역의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보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창단 당시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고, 특히 밀양 동화학교에서 수학한 김상윤,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한봉근, 한봉인 등 6명의 동지가 규합하여 김원봉이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열단은 초기에는 명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구축왜노(驅逐倭奴, 왜놈들을 몰아낸다), 광복조국(光復祖國, 조국을 되찾는다), 타파계급(打破階級, 계급을 없앤다), 평균지권(平均地權,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한다)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는 민중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노선과는 차별화된 것이었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 10조',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 목표를 기본 규약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다음과 같다.
| 번호 | 내용 |
|---|---|
| 1 |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
| 2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
| 3 |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
| 4 | 단의(團義)에 먼저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
| 5 |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
| 6 | 언제 어디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
| 7 | 언제 어디에서나 초회(招會)에 반드시 응함. |
| 8 |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다함. |
| 9 |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
| 10 | 단의(團義)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
2.2. 의열단 활동
의열단은 조국 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적극적인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했으며, 암살 및 파괴 대상을 다음과 같이 지정했다.
| 암살 대상 | 파괴 대상 |
|---|---|
의열단은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폭탄 제조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김원봉, 김상윤은 신흥무관학교 학생 시절 중국인 교관 주황(周況)에게서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 모험단(救國 冒險團)의 김성근(金聲根)이 폭탄 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길림으로 초빙하여 단원들에게 폭탄 제조 기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2.2.1. 주요 의거
김상윤과 의열단이 주도하거나 참여한 주요 의거는 다음과 같다.
2.3. 의열단의 해체와 최후
1924년 5월, 김상윤은 의열단 대표로서 민족주의 노선을 주창하며 의열단 재건에 힘썼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의 재정난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의열단 지도부는 5년간 격렬한 무력 항쟁을 벌이며 거사를 기획하고, 단원 확충, 교육 훈련, 무기 및 자금 확보 등 조직 유지가 어려워졌다. 이에 단장 김원봉은 1925년 독립운동 노선 변경 및 조직 재정비를 명분으로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김상윤은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거부하고,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는 의열단 재건 의지를 굽히지 않아, 사실상 초기 의열단은 해체되었다.
이후 김상윤은 아나키즘 사상이 퍼져있던 중국 복건성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1927년 10월, 31세의 나이로 복건성 천주(泉州) 설봉사(雪峯寺)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유해를 찾을 수 없어 국내로 봉환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