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세주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과 동향이자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였으며, 3·1 운동 참여와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전선통일연맹,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의용대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송 윤씨 - 윤회 (조선)
윤회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받으며 이조정랑, 예문관제학, 집현전제학 등을 역임했고 훈민정음 창제와 《자치통감훈의》 편찬에 기여했으며 청백리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쳐 사후 문도라는 시호를 받았다. - 무송 윤씨 - 윤자운
윤자운은 조선 초 문신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윤회의 손자이자 신숙주의 처남이며, 여러 관직을 거쳐 수양대군 즉위 후 좌익공신에 책록,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성격이 편협하고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조선민족혁명당 - 김학규 (1900년)
김학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군인, 정치인으로, 3·1 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에 참여, 한국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본관, 출생년도, 친손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조선민족혁명당 - 신익희
신익희는 해공이라는 호를 가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외무부장을 역임하고 국민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의열단 - 김시현 (1883년)
김시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2대 및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 의열단 - 신채호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문필가로,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윤세주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파평(坡平) |
자 | 석정(石鼎) |
호 | 소룡(嘯룡) |
출생 | 1879년 5월 10일 (음력 3월 20일) |
사망 | 1919년 4월 28일 |
묘소 | 대한민국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정정화 |
자녀 | 2남 |
활동 | |
소속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역할 | 임시정부 특파원 군자금 조달 |
주요 활동 |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블라디보스토크 파견 간도 파견 군자금 모금 |
기타 정보 |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
2. 생애
경상남도 밀양 출신인 윤세주는 김원봉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동화중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였고,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여한 후 밀양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피신했다. 당시 19세로, 윤치형 등과 시위를 주도하여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 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인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11월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 주요 기관 폭탄 투척을 결정한 의열단의 결정에 따라 국내로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
1932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참여했다. 1933년에는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
1938년 1월,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반 교관을 맡았고, 10월에 조선의용대 창설 후 정치위원을 맡았다. 이후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화북 지방으로 북상,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에 참가했다.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진광화와 중국 공산당 군인의 묘소 옆에 매장되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1. 생애 초기
윤세주는 경상남도 밀양 태생으로, 두 살 위인 김원봉과는 같은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이후 평생 독립운동의 동지로 함께하게 된다.[1]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자,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에 학교에서 나눠주는 일장기를 변소에 버리는 등 어린 시절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보였다.[1]
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윤세주는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에 입학했다. 당시 교장 전홍표는 저명한 항일 인사였으며,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항상 슬프고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한시라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으로 윤세주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역무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고, 개천절 기념행사와 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었다.[1]
2. 2. 청년기: 3.1 운동과 밀양 만세운동
윤세주는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서울에서의 3·1 운동의 감격을 밀양 사람들에게도 전하고자 고향으로 내려와 밀양시장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다. 은사인 전홍표 교장을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고 밀양에서도 독립운동 시위를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며, 그의 지도 아래 거사를 준비했다.[1]거사일은 3월 13일 밀양 장날로 정해졌고,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몰래 빼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백 장씩 인쇄하여 숨겨놓았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장터에서 윤세주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했다. 일제의 즉각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윤세주는 어린 나이 덕분에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1]
당시 19세로 나이가 어렸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운동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형인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1]
2. 3. 중국 망명과 의열단 활동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김원봉과 재회한 윤세주는 3·1 운동을 반성하며,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일제에 대항할 수 있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는 의열단을 조직했다.1919년 12월 하순, 김원봉, 이종암, 곽재기, 이성우 등은 프랑스 조계의 상해임시정부를 찾아가 폭탄, 탄피 제조기, 약품 등을 입수했다. 의열단은 입수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하여 암살 및 파괴 활동을 계획했다. 당시 밀양청년회 회장이었던 김병환이 국내에서 폭탄을 받아 보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0년 6월 6일, 경성 인사동 중국 유리점 2층에서 윤세주, 곽재기, 이성우, 신철휴, 김기득, 한봉근 등 6명이 모였을 때, 악질 고등계 형사 김태석이 일본 경찰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상해 일본 영사관에서 먼저 정보를 입수하고 경기도 경찰부에 통보하여 포위망이 쳐진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윤세주는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2. 4. 신간회 활동과 민족협동전선
1927년 2월 7일 출옥 후, 윤세주는 고향으로 돌아가 중외일보 기자, 경남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매달 받아보며 선진 지식을 습득하는 데 힘썼고, 밀양청년회, 신간회 지방 지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윤세주는 독립운동 방식이 더욱 조직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1927년 8월에 일어난 난창 폭동에 가담했다. 난창 폭동은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과 윤세주를 제외한 의열단원이 희생되는 결과를 맞았다.[1]
1930년 이후, 신간회에 참여한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일제에 대한 적대 의식이 약화되면서 신간회 해소 압력이 거세졌고, 결국 신간회는 해산되었다. 윤세주를 비롯한 밀양 지회는 민족협동전선의 유지 및 강화를 위해 신간회 해소를 반대했지만, 결국 해산을 막지 못했다.[1]
2. 5. 2차 중국 망명과 조선혁명간부학교
남경으로 간 윤세주는 김원봉 등 의열단의 옛 동지들과 다시 만났다. 의열단 동지들은 개인 테러가 아닌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1] 조직적인 무장 투쟁을 위해 1932년 10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가 개설되었다. 윤세주는 이 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했다. (동기생으로는 이육사, 김세일, 김민산 등이 있었다.)[1]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윤세주는 교관으로 발탁되어 2기생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조직론, 한국민족해방운동사, 의열단운동사, 유물사관과 유물론 철학, 정치경제학 등 운동사와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1] 한편, 상해에서는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지회 등 5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고, 송병조, 김두봉, 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여했다.[1] 이 단체는 "일체의 반일 혁명 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바탕으로 "직접 군사적 행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초기 형태의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가 참여했으며, 1933년에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1] 민족혁명당은 청년 활동가를 양성하여 국내와 중국 동북 지방으로 파견, 항일 무장 대오를 건립하고자 노력했다.[1]2. 6. 중일전쟁과 조선의용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윤세주는 이 전쟁을 한국의 민족 해방 전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청년 당원 10여 명을 이끌고 상해로 가서 중국 민중과 한국 민족 해방 운동 세력 간의 공동 행동을 이끌어내고자 했다.[1] 이러한 활동의 주요 전략으로 중국편의대, 의용군 본부, 중국의 각 항일 신문사 등과 연계하며 중한 합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선전 활동을 통해 여론을 조성했다.[1] 1938년 2월부터 중앙육군사관학교 성자분교의 한국 학생 독립 중대 교관으로 임명되어 교육에 전념했다.[1] 윤세주는 성자분교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1937년 12월에 결성된 조선민족연맹에 가입시키고, 민족혁명당에 입당시키는 활동을 병행했다.[1]성자분교에서 교육받던 한국 청년들이 중국 관내에서의 활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반성하고,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 동북 지방으로 진출하여 직접 연계 투쟁해야 한다며 독자적으로 북상 항일을 결의하는 일이 발생했다.[1] 이는 모든 경비와 교육을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지원받는 민족혁명당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이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1] 김원봉과 윤세주는 이들을 다시 포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장 대오를 당내에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1938년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정치위원을 맡았다.[1]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였던[1] 윤세주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다가, 1941년 김원봉과 결별하고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했다.[1]
2. 7. 화북지대 활동과 태항산 전투
조선의용대는 대적 선전, 민간인에 대한 선전, 포로 심문, 적 문건 번역, 선전 간부 교육 등의 활동을 전개했고, 때로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거나 전투 중 무장 선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활동 지역은 조선인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조선 동포에 대한 직접적인 선전과 공작은 매우 미흡했다.[1]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 간부 회의는 기존의 선전 임무에서 벗어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활동 지역을 조선인이 급증하는 화북과 화중 지역으로 옮겨 적 후방에서의 공작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1] 제2지대가 먼저 북상하고, 갈등하던 1·3 혼성 지대의 지도 간부였던 윤세주와 김민산을 조선의용대 내 조선공산당원이었던 호철명과 이상조가 설득하여 북상하게 되었다.[1]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화북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1] 지회장에는 진광화, 부지회장에는 윤세주가 선출되었다.[1] 이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로 확대되어 간부 양성에 힘썼다.[1]1942년 5월, 일본은 제36사, 제41사 주력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중국 공산당의 태항산 근거지를 공격했다.[1] 이때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의 5월 소탕에 맞서 반소탕전을 전개했다.[1] 당시 조선의용군에는 팔로군 전방 총사령부 각 기관의 방대한 비전투 요원, 간부, 가족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비전투 요원에 대한 보호 임무가 주어졌다.[1] 6월 2일, 팔로군 전방 총사령부가 요현 마전일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 1,000여 명이 비행기 2대까지 동원하여 포위 공격해 왔다.[1] 당시 전투 역량은 조선의용군 1개 지대와 약간의 경위 부대뿐이었다.[1] 팔로군 총사령부는 고지를 공격하여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조선의용군에게 혈로를 개척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1] 조선의용군은 고지를 점령하고 팔로군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비전투 정치 간부와 가족들을 산 뒤로 퇴각시켰다.[1]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다.[1] 팔로군 정치부 주임 나서경은 모두 분산하여 적의 포위를 돌파할 것을 명령했다.[1] 윤세주는 김두봉과 그의 가족들, 진광화 등과 함께 이동하다 일본군에게 발각되었고, 전우들을 엄호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1] 사후, 시신은 진광화와 중국 공산당 군벌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1]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3. 이론적 노선
윤세주의 이론적 노선은 일본 유학과 와세다 학보 등을 구독하며 공부했던 학문적 자세, 신흥무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성자분교 등에서 습득한 군사 이론 및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1] 여기에 신간회, 조선민족혁명당을 거치며 항일 민족 역량을 통합하려 했던 시도와 어린 시절부터의 대일 투쟁 경험이 더해져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노선으로 발전했다.[1]
4. 사후 평가 및 영향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김원봉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다.[1] 밀양시의 민족주의적 사립학교 동화중학교를 통해 학생운동을 했으며,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1]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지만 중국으로 피신했다. 당시 19세였고, 윤치형 등과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인해 부재 재판에서 밀양 만세 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인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1]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김원봉이 같은 해 11월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주요 기관에 폭탄 투척이라는 테러 행위를 결정하고 그와 신철휴, 윤치형 등을 국내로 파견했다. 이때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1]
오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1932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난징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해외 독립운동 단체가 연합전선을 구축한 한국광복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참여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가 참여했고,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1]
1938년 1월,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반 교관을 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은 후,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다가 1941년에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북 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1] 1942년 태항산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팔로군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진광화와 중국 공산당의 左权|좌권중국어 묘소 옆에 매장되었다.[1]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윤희규(尹熺奎) |
어머니 | 경주 김씨 김경이(金卿伊) |
부인 | 하소악(河小岳) |
아들 | 윤남선(尹南善), 아명 용문(龍文) |
손자 | 윤영식(1945년생) |
형님 | 윤치장(尹致璋) |
조카 | 윤태선(尹泰善), 아명 차암(且岩) |
형님 | 윤치선(尹致瑄) |
형님 | 윤치견(尹致堅) |
재종형 | 윤세용(尹世茸) |
재종형 | 윤세복(尹世復) |
6. 윤세주를 연기한 배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