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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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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학성은 1913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한 영화 촬영 감독이다. 1939년 영화 《성황당》으로 데뷔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새로운 맹서》를 촬영하며 배우 최은희와 결혼했으나,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이혼했다.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을 비롯하여 《오발탄》, 《아리랑》 등 10여 편의 영화에 참여했으며,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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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191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학성
현지어 표기金學成
별명호(號)는 초수(草樹)
일본식 창씨명가네이 세이이치(金井成一)
생애1913년 8월 10일 ~ 1982년 11월 20일 (70세)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수원
사망지대한민국 인천직할시
종교불교
군 복무
복무 기간1950년 ~ 1953년
최종 계급[[파일:중사.JPG|25px]] 육군 중사
근무주한 미8군 공보실
지휘정훈부사관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서훈 내역1951년 금성무공훈장
정치 활동
정당무소속
가족 관계
부모김연식(부)
자녀슬하 1남
친척김학근(이복 형)
김연실(이복 누나)
기타 이력
직업영화 촬영감독
영화 기획가 겸 영화제작자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장

2. 생애

경기도 수원 출신의 영화 촬영 감독이다. 형 김학근과 누나 김연실의 영향을 받아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일본 유학 후 1939년 《성황당》으로 데뷔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국책 영화인 《집 없는 천사》(1941), 《풍년가》(1942), 《거경전》(1944) 등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1]

광복 후에는 《새로운 맹서》(1947) 촬영을 계기로 배우 최은희와 만나 결혼했으나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끝에 헤어졌다.[2][3] 한국 전쟁 중에는 종군하여 미군 공보원 소속 촬영기사로 활동하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전쟁 후 최은희가 신상옥과 결혼하자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으나 법적으로 성립되지는 않았다.[4]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1958)[5]을 비롯하여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마지막 작품이 된 《아리랑》(1968) 등 10여 편의 영화 촬영을 담당했다. 한국영화기술자협회 제4대 회장을 역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영화계 입문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평안남도 평양과 경상북도 경주에서 잠시 살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누나 손에서 자랐다. 그의 누나는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간 영화 배우 김연실이며, 형 김학근은 우미관의 변사였다.

형과 누나의 영향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5년 무렵부터 경성촬영소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웠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영화 촬영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일본에서 영화 3편을 촬영하고 돌아와, 1939년 방한준 감독의 영화 《성황당》의 촬영을 맡으며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작부터 깨끗한 화면으로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2. 2. 영화 촬영 감독 데뷔 및 친일 행적

형 김학근과 누나 김연실의 영향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5년경부터 경성촬영소에서 근무하며 도제 경험을 쌓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영화 촬영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3편의 일본 영화를 촬영하고 귀국한 뒤, 1939년 방한준이 연출한 《성황당》 촬영을 맡으며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작부터 깨끗한 화면으로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친일 영화가 대거 제작되었는데, 그도 국책 영화인 《집 없는 천사》(1941), 《풍년가》(1942), 《거경전》(1944)을 촬영하여 잇따라 세 편의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2. 3. 광복 후 활동 및 최은희와의 결혼과 이혼

광복 후 《새로운 맹서》(1947) 촬영을 통해 활동을 재개했다. 이 영화는 연극 배우였던 최은희의 영화 데뷔작이다. 김학성은 《새로운 맹서》를 찍으면서 최은희를 만나 같은 해 결혼했다. 김학성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러나 13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2] 최은희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한 결혼이었고 전처 소생의 아이를 키우는 부담 속에서 김학성이 음주 후 폭력을 행사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3] 삐걱거리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최은희가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돌아오는 파란만장한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파탄났다.

한국 전쟁 중 김학성은 종군하여 미군 공보원 소속 촬영기사로 활동하며 기록 영화를 제작했다. 기록 영화 《정의의 진격》 촬영 중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한국 전쟁 종전 후 최은희신상옥과 결혼하자, 김학성은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간통죄는 성립되지 않았다. 다만 후배에게 아내를 빼앗긴 김학성은 영화계 선후배들의 동정을 받았으며, 이 일로 신상옥과 최은희는 한동안 따돌림을 당했다고 전해진다.[4]

2. 4. 주요 작품 활동 및 사망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생명》(1958)[5]을 촬영했다.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오발탄》(1961) 등 1960년대 한국 영화사의 주요 작품들을 촬영했으며, 1968년 《아리랑》을 마지막으로 촬영하고 은퇴했다. 총 10여 편의 영화 촬영을 담당했으며, 한국영화기술자협회 제4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3. 평가 및 영향

김학성은 1939년 방한준 감독의 영화 《성황당》 촬영을 맡으며 데뷔했고, 이 작품부터 깨끗한 화면을 구현하여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국 영화 촬영 기술 발전에 기여한 선구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국책 영화인 《집없는 천사》(1941), 《풍년가》(1942), 《거경전》(1944) 등 다수의 친일 영화 촬영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광복 이후에는 《새로운 맹서》(1947)를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종군하여 기록 영화를 촬영하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전후에는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생명》(1958)[5]을 비롯하여,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아리랑》(1968) 등 10여 편의 영화 촬영을 담당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기술적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한국영화기술자협회 제4대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영화 기술 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의 기술적 성취와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영화 제작에 협력한 행적은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4. 작품 목록

연도제목비고
1939년성황당방한준 연출, 촬영 데뷔작
1941년집없는 천사국책 영화 (친일 영화)
1942년풍년가국책 영화 (친일 영화)
1944년거경전국책 영화 (친일 영화)
1947년새로운 맹서광복 후 활동 재개작, 최은희 데뷔작
한국 전쟁 중정의의 진격기록 영화, 촬영 중 부상
1958년생명한국 최초 시네마스코프 영화[5]
1961년오발탄유현목 연출
1968년아리랑마지막 작품


5. 기타

한국영화기술자협회의 제4대 회장을 역임했다.

참조

[1] 뉴스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컬처뉴스 2005-09-02
[2] 저널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한국 영화 ‘원조 스타’ 최은희" http://www.donga.com[...]
[3] 저널 "[인물연구] 다시 무대에 서는 崔銀姬의 진한 체험" http://monthly.chosu[...]
[4] 뉴스 정일성 "부끄러운 영화, 대표작 못돼도 평생의 스승” -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사각 앵글의 예술가, 정일성 촬영감독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07-08-02
[5] 뉴스 김준기의 극장순례 -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 스카라극장 컬처뉴스 200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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