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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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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희중은 대한제국 시대의 독립운동가로, 1894년에 출생하여 1920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이후 중국 베이징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경리부 부장을 역임했다. 1921년 국내에서 독립단 결성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활동을, 1927년에는 만주에서 재만 조선 동포의 권익 보호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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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189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산남 김희중
한자 표기山南 金熙重
국적대한제국
출생일1894년 6월 6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문경
사망일1932년 5월 1일
사망지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 지린
종교유교(성리학)
본관수안(遂安)
정당무소속
부모아버지 김융탁(金隆卓)
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密陽 朴氏 夫人)
배우자전주 유씨 부인(全州 柳氏 夫人)
자녀슬하 2남 2녀
장남 김홍갑(金洪甲)
학력한성교동보통학교
형제남동생 김희진(金熙晉)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경력
경력前 한국독립당 국가민족권익보호행정특보위원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재만주조선인대회 중앙집행위원

2. 생애

김희중은 1894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1899년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1900년에 부친상을 치렀고, 1907년 한성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대한제국 황자 의친왕 이강의 종로 잠저에서 시동을 지냈으며, 1909년 전주 유씨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1913년까지 의친왕부에서 시종을 지냈다. 이후 1919년까지 경기도 양천향교에서 유생으로 지냈다.

1916년 그의 아우 김희진은 고종의 서녀이자 의친왕의 이복 여동생인 이문용 궁주와 결혼하여, 김희중은 옛 주군인 의친왕과 친인척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8년 제수 이문용 여사와의 사이에서 조카 김창을이 태어났지만,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직후 아우 김희진이 한강에서 익사하고, 조카 김창을도 1920년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3월 독립단 결성을 추진하다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6월 만기 출감 후, 1921년 1월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핑으로 망명하여 박용만, 이회영 등이 주도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경리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태평양 회의를 계기로 국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1921년 8월 귀국하였으나, 1921년 9월 황정연, 이춘구 등과 대한독립군 사령부 조직을 모의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2월 14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24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1927년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 지린으로 망명, 1928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재만주조선인대회에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석, 재만주조선인대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 조선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2. 1. 유년과 청년기 (1894년 ~ 1919년)

그는 대한제국 시대 항일 의병장 김기중(金祺重)의 7촌 조카이기도 하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홍산 김융탁(洪山 金隆卓)의 슬하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899년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1년 후 1900년에 부친상을 치렀고, 1907년 한성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대한제국 황자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종로 잠저(鍾路 潛邸)에서 시동(侍童)을 지냈으며, 1909년 전주 유씨(全州 柳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910년 일본의 계략으로 대한제국이 강제 멸국되는 사태를 목도하였으며, 이후 1913년까지 경성 종로 의친왕부에서 시종을 지냈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는 경기도 양천향교에서 유생으로 지냈다.

2. 2. 아우 김희진과 이문용 궁주와의 혼인 (1916년 ~ 1919년)

한편 그는 의친왕 곁을 잠시 떠난 사이, 그의 아우 김희진(金熙晉, 1896년 2월 29일 ~ 1919년 4월 30일)은 1916년 고종의 서녀(庶女)이자 의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며 덕혜옹주의 이복 언니인 이문용 궁주와 결혼하여 김희중도 옛 주군(主君)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공과 친인척 사돈 관계를 이루었다. 1918년 제수 이문용 여사와 사이에 슬하 1남 김창을(金昌乙, 김희중에게는 조카)을 얻었지만,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직후 아우 김희진이 1919년 4월 30일, 갑자기 경성부 한강에서 사고로 비명횡사(익사)하였고, 조카 김창을도 1920년에 폐렴으로 향년 3세로 병사하였다.

2.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 1920년)

1919년 경성부에서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3월 조선 국내에서 독립단 결성을 추진하려다가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0년 6월 만기 출감하였다.

2. 4.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과 재투옥 (1921년 ~ 1924년)

1920년 6월 만기 출감 후에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김희중은 1921년 1월 중화민국에 망명, 허베이성 베이핑에서 박용만, 이회영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대한독립단 경리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태평양 회의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전 민족이 안팎으로 호응하여 독립 운동을 개시하면 대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 민족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내 각지에 독립단을 결성할 목적으로 1921년 8월 귀국하였다. 1921년 9월에는 평소 독립 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 이춘구 등과 모임을 갖고 대한독립군 사령부를 조직할 계획임을 통보하였다. 이에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군사령부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모의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일경의 밀정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4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2. 5. 만주 지역 활동 (1925년 ~ 1928년)

1927년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 지린으로 망명하여 1928년 1월 둥베이 지방 각 지역 대표의원 46명이 모여 재만 조선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개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재만주조선인대회(在滿洲朝鮮人大會)에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위원회(在滿同胞退去問題對策安東縣講究會) 위원장으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상설기구였던 재만주조선인대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 조선 동포들의 생활 안정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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