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영국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국인은 대영 제국의 섬과 아일랜드의 주민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아스의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로마의 지배 이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으로 인해 웨일스, 콘월, 스코틀랜드 남부 등 브리토닉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국한되었다. 중세 튜더 시대에는 웨일스인과 콘월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으로 '대영 제국'이 탄생하면서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발전했다. 영국은 켈트족, 앵글로색슨족, 바이킹, 노르만족의 혼합 혈통을 가지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전 세계로 이주하여 다양한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 요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영어는 주요 언어이고, 기독교가 가장 지배적인 종교이다. 영국은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국가이며, 영국 국민은 영국 시민, 영국 해외 영토 시민, 영국 해외 시민, 영국 신민, 영국 국민(해외), 영국 보호국 출신자 등 다양한 국적 유형으로 구분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국 사람 - 빌럼 2세 (네덜란드)
    빌럼 2세는 네덜란드의 왕세자 빌럼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국 육군에서 복무하고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으며, 1840년 네덜란드 국왕이 되어 184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동성애적 성향 논란 속에 1849년 사망했다.
영국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영국 국기
영국 국기
민족영국인
인구영국 내: 약 7,200만 명
해외 거주 영국인: 약 2억 명
관련 민족북아일랜드인
앵글로색슨족
켈트족
거주 지역
영국57,678,000 명
미국영국계 미국인: 109,531,643 명
영국 출생: 678,000 명
캐나다영국계 캐나다인: 17,325,860 명
영국 시민권자: 603,000 명
호주영국계 호주인: 19,301,379 명
영국 시민권자: 1,300,000 명
뉴질랜드영국계 뉴질랜드인: 3,372,708 명
영국 시민권자: 215,000 명
남아프리카 공화국영국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1,603,575 명
영국 시민권자: 212,000 명
프랑스400,000 명
스페인297,229 명
아일랜드291,000 명
아르헨티나270,000 명
아랍에미리트240,000 명
독일115,000 명
언어
주요 언어영어
기타 언어앵글로로마니어
앤티가 바부다 크리올
영국 수화
콘월어
건지어
아일랜드어
아일랜드 수화
저지어
야니토어
맨어
핏케언어
세르크어
쉘타
터크스 케이커스 크리올
버진아일랜드 크리올
웨일스어
스코트어 (알스터 스코트어 포함)
스코틀랜드 게일어
종교
주요 종교기독교 (성공회, 장로교, 가톨릭교, 감리교)
참고영국의 종교

2. 용어의 역사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아스는 영국 제도 섬들을 탐험하며 αἱ Βρεττανίαι|하이 브레타니아이grc(브리타니아 제도)라고 불렀고,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맨섬 주민들을 Πρεττανοί|프레타노이grc, ''Priteni'', ''Pritani'', ''Pretani'' 등으로 불렀다. 그의 기록은 로마 제국 시대 저술가들이 많이 인용했다.[42]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저술가들은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주민들을 ''Priteni''라고 불렀으며,[43] 이는 라틴어 ''Britanni''의 어원이 되었다. 이 이름은 갈리아어에서 유래한 "형태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즈마풀로 만든 파란색 우드로 몸을 문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을 가리킨다.[44]

로마의 영국 정복과 함께 라틴어 용어 ''브리타니아''가 대영제국의 섬, 그리고 나중에는 칼레도니아 이남의 로마 점령지 영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로마의 영국 지배 종식 후, 대영제국은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 등 대륙 유럽 출신 사람들과 아일랜드 북부에서 영국 북부로 이주한 사람들의 침략을 받았다. 이들은 달 리아타와 알바 같은 게일 왕국을 건설했고, 결국 토착 브리토닉과 피크트 왕국을 흡수하여 스코틀랜드가 되었다.[49]

로마 이후 영국에서 앵글로색슨 문화는 영국 남부와 동부로, 게일 문화는 북부 대부분으로 확산됨에 따라 "브리튼인"이라는 명칭은 웨일스, 콘월, 잉글랜드 북서부(컴브리아), 스코틀랜드 남부(스트래스클라이드) 등 브리토닉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에게만 국한되었다.[50][51]

중세, 특히 튜더 시대에는 "영국인"이라는 용어가 웨일스인콘월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들이 브리튼인의 남은 후손으로 여겨졌다.[52] 이러한 개념은 제프리 몬머스가 저술한 ''브리타니아 왕국 역사''와 같은 텍스트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브리타니아 왕국 역사''는 브리튼인들의 전설적인 왕들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로, 트로이인들이 고대 영국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시작하여 7세기에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정착으로 브리튼인들이 서쪽과 북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끝난다.[52]

2. 1. 초기 기록

대영제국의 주민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아스의 탐험 항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피테아스는 영국 제도를 '브리타니아 제도'(αἱ Βρεττανίαι|하이 브레타니아이grc)라고 불렀고, 오늘날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맨섬의 주민들을 Πρεττανοί|프레타노이grc, ''Priteni'', ''Pritani'', ''Pretani'' 등으로 불렀다.[42]

아일랜드는 ''Ierne''(그리스인들은 ''Insula sacra'', "신성한 섬"으로 해석)로 언급되었고, "''Hiberni''(''gens hibernorum'')라는 다른 종족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영국은 ''insula Albionum'', "알비온인들의 섬"으로 불렸다.[42] ''Pritani''라는 용어는 갈리아인들이 섬 주민들을 부르는 말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피테아스에게 전해졌을 수 있다.[42]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의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저술가들은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의 주민들을 ''Priteni''라고 불렀으며,[43] 이는 라틴어 ''Britanni''의 어원이다. 이 이름은 "형태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즈마풀로 만든 파란색 우드로 몸을 문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을 가리키는 갈리아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44]

기원전 50년경에는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영국 제도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Prettanikē''의 동의어를 사용했다.[46] 로마의 영국 정복 이후, 라틴어 용어 ''브리타니아''는 대영제국의 섬, 그리고 나중에는 칼레도니아(포스 강과 클라이드 강 북쪽의 오늘날 스코틀랜드) 이남의 로마 점령지 영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

2. 2. 로마 시대

영국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탐험 항해를 통해 영국 제도를 둘러본 그리스 지리학자 피테아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그의 저술은 남아있지 않지만,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들은 그의 기록을 많이 인용했다. 피테아스는 이 섬들을 통틀어 αἱ Βρεττανίαι|하이 브레타니아이grc라고 불렀는데, 이는 '브리타니아 제도'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맨섬의 주민들은 Πρεττανοί|프레타노이grc, ''Priteni'', ''Pritani'', 또는 ''Pretani''라고 불렸다.[42]

이 집단에는 아일랜드도 포함되었는데, 아일랜드는 ''Ierne''(''Insula sacra'' "신성한 섬"으로 그리스인들이 해석함)로 언급되었고, "다른 종족인 ''Hiberni''가 거주하는 곳"(''gens hibernorum'')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은 ''insula Albionum'', "알비온인들의 섬"으로 불렸다.[42] ''Pritani''라는 용어는 섬 주민들을 부르는 말로 갈리아인들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갈리아에서 피테아스에게 전해졌을 수 있다.[42]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의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저술가들은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의 주민들을 ''Priteni''라고 불렀다.[43] 이는 라틴어 ''Britanni''의 어원이다. 이 이름은 갈리아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형태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즈마풀''로 만든 파란색 우드로 몸을 문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을 가리키는 것이다.[44] 고대 그리스 문법학자 니카이아의 파르테니우스와 9세기 어휘 백과사전인 ''에티모로지쿰 게누이눔''은 켈트족의 시조인 켈투스의 어머니인 켈티네의 아버지로 브레타누스(그리스어 Βρεττανός|브레타노스grc의 라틴어 형태)라는 신화 속 인물을 언급한다.[45]

기원전 50년경에는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영국 제도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Prettanikē''의 동의어를 사용했다.[46] 그러나 로마의 영국 정복과 함께 라틴어 용어 ''브리타니아''가 대영제국의 섬, 그리고 나중에는 칼레도니아(포스 강과 클라이드 강 북쪽의 오늘날 스코틀랜드) 이남의 로마 점령지 영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칼레도니아와 북쪽의 사람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동일한 브리튼인이었고, 게일족은 4세기 후에야 도착했다.[47][48]

2. 3. 로마 이후

로마의 영국 지배 종식 후, 대영제국의 섬은 게르만어족을 사용하는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 등 대륙 유럽 출신들과 아일랜드 북부에서 영국 북부로 이주한 중세 아일랜드어 사용자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 이들은 달 리아타와 알바 같은 게일 왕국을 건설했고, 결국 토착 브리토닉과 피크트 왕국을 흡수하여 스코틀랜드가 되었다.[49]

로마 이후 영국에서 앵글로색슨 문화는 영국 남부와 동부로, 게일 문화는 북부 대부분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브리튼인"이라는 명칭은 웨일스, 콘월, 잉글랜드 북서부(컴브리아), 스코틀랜드 남부(스트래스클라이드) 등 브리토닉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에게만 국한되었다.[50] [51] 또한, 오늘날 프랑스브르타뉴스페인 북서부의 브리토니아에도 이 용어가 적용되었는데, 이 두 지역은 모두 5세기에 앵글로색슨 침략을 피해 도망친 브리튼인들이 식민지화한 곳이다. 그러나 "브리타니아"라는 용어는 섬을 가리키는 라틴어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브리토니쿰 역사''는 브리토닉 왕들을 위한 권위 있는 족보로서 전설적인 기원을 주장했고, 이후 ''브리타니아 왕국 역사''가 잉글랜드 국왕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러한 의사 역사를 대중화했다.[52]

2. 4. 중세 및 튜더 시대

피테아스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로마 제국 시대 저술가들이 그의 기록을 많이 인용했다. 피테아스는 영국 제도 섬들을 통틀어 αἱ Βρεττανίαι|하이 브레타니아이grc라고 불렀으며, 이는 '브리타니아 제도'로 번역되었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맨섬 주민들은 Πρεττανοί|프레타노이grc, ''Priteni'', ''Pritani'', 또는 ''Pretani''라고 불렸다.[42]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저술가들은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주민들을 ''Priteni''라고 불렀으며,[43] 이는 라틴어 ''Britanni''의 어원이다. 이 이름은 갈리아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형태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즈마풀로 만든 파란색 우드로 몸을 문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을 가리킨다.[44]

로마의 영국 정복과 함께 라틴어 용어 ''브리타니아''가 대영제국의 섬, 그리고 나중에는 칼레도니아 이남의 로마 점령지 영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로마의 영국 지배 종식 후, 대영제국은 앵글로색슨족과 유트족 등 대륙 유럽 출신 사람들과 아일랜드 북부에서 영국 북부로 이주한 사람들의 침략에 개방되었다. 이들은 달 리아타와 알바와 같은 게일 왕국을 건설했고, 결국 토착 브리토닉과 피크트 왕국을 흡수하여 스코틀랜드가 되었다.[49]

로마 이후 영국에서 앵글로색슨 문화가 영국 남부와 동부로, 게일 문화가 북부 대부분으로 확산됨에 따라 "브리튼인"이라는 명칭은 웨일스, 콘월, 잉글랜드 북서부(컴브리아), 스코틀랜드 남부(스트래스클라이드) 등 브리토닉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에게만 국한되었다.[50][51]

중세, 특히 튜더 시대에는 "영국인"이라는 용어가 웨일스인콘월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들이 브리튼인의 남은 후손으로 여겨졌다.[52] 이러한 개념은 제프리 몬머스가 저술한 ''브리타니아 왕국 역사''와 같은 텍스트에 의해 뒷받침되었다.[52] ''브리타니아 왕국 역사''는 브리튼인들의 전설적인 왕들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로, 트로이인들이 고대 영국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시작하여 7세기에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정착으로 브리튼인들이 서쪽과 북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끝난다.[52]

3. 역사

8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영국에는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이라는 세 가지 주요 문화적 분파가 등장했다. 11세기 초, 앵글로색슨 영국과 게일계 스코틀랜드는 오늘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해당하는 지역의 초기 브리토닉 켈트 정치체를 흡수했다.[60] 웨섹스의 애설스탠 왕은 브루난부르 전투 이후 937년에 영국을 단일 국가로 통일했다.[61]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급증한 신고전주의 기념물들은 영국성의 개념을 고전 시대의 그리스-로마 제국과 융합하려는 시도였다. 영국 제국은 "상향 이동성과 부의 축적에 대한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스코틀랜드, 웨일스 및 아일랜드 인구는 실용적인 이유로 민족주의 문제를 억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8] 영국 제국은 "영국 정체성과 영국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에 매우 중요했다".[99] 19세기 동안 스코틀랜드는 영국성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영국] 제국의 확장에 참여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맥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100] 웨일스인들 역시 영국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를 환영했다.[100] 그러나 잉글랜드인의 경우, 빅토리아 시대까지 영국성을 열렬히 수용하면서 영국성이 "잉글랜드인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101] "잉글랜드인과 영국인", "'잉글랜드'와 '영국'"은 다양한 맥락에서 서로 바꿔 사용되었다.[102] 잉글랜드는 마그나 카르타, 관습법유럽 대륙에 대한 적대감 등 영국 감성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103][104]

전쟁은 계속해서 대영국 국민을 하나로 묶는 요인이었다. 영국의 쇼비니즘은 남아프리카보어 전쟁 중에 다시 등장했다.[112][113] 영국 제국의 부상으로 인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의 경험은 영국성에 대한 예술 기법, 취향 및 감각에 매우 특정한 추진력을 가져왔다.[114] 1887년, 프레데릭 해리슨은 "도덕적으로, 우리 영국인은 모든 봉우리와 고갯길에 영국 국기를 꽂습니다. 그리고 유니온 잭이 펄럭이는 곳마다 우리는 차, 욕조, 위생 용품, 로운 테니스, 그리고 교회라는 핵심적인 영국 제도를 설치합니다."라고 썼다.[102]

트라팔가르 해전 (J. M. W. 터너, 캔버스에 유채, 1822–1824)은 트라팔가르 해전을 묘사하고 있다.


징병 포스터. 영국 국민 정체성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3. 1. 기원

영국 제도의 원주민들은 켈트족, 앵글로색슨족, 바이킹(노르스인), 노르만족의 혈통이 혼합되어 있다.[51][54][55][56][57][58][59] 8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영국에는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이라는 세 가지 주요 문화적 분파가 등장했다. 오늘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해당하는 지역의 초기 브리토닉 켈트 정치체는 11세기 초에 앵글로색슨 영국과 게일계 스코틀랜드에 흡수되었다.[60] 웨섹스의 애설스탠 왕은 브루난부르 전투 후 937년에 단일 국가로 영국을 통일했다.[61]

그 이전에 영국인(당시 고대 영어로 ''Anglecynn''으로 알려짐)은 독립적인 앵글로색슨 소국들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소국들은 점차 칠왕국으로 통합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국가는 머시아와 웨섹스였다. 스코틀랜드의 역사가이자 고고학자인 네일 올리버는 브루난부르 전투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모습을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투는 "노르스 켈트 동맹 대 앵글로색슨족이라는 두 가지 매우 다른 민족 정체성의 결전"이었으며, 영국이 단일 제국 세력의 통제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개의 별개의 독립 왕국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62] 그러나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13세기에 에드워드 1세가 영국 국민들에게 "그들의 국가 의식을 일깨워 준 유일한 책임자"라고 주장했다.[63] 샤마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이전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 스코틀랜드인의 국가 정체성은 게일계 아일랜드, 브리토닉, 픽트족, 노르스인, 앵글로노르만족의 기원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가정했다.[64][65]

중세 태피스트리로, 브리튼의 사건이라는 전설적인 고대 브리튼 통치자 아서 왕이 등장하며, 영국 왕실과 그 신민들의 조상 기원을 위한 선전으로 사용된 국가 신화입니다.


웨일스는 영국에 정복당했고, 1535~1542년 웨일스 법률에 따라 영국 왕국의 법 체계로 대체되었지만, 웨일스인들은 영국인과는 별개의 국가로 남았다. 11세기에 영국에 정복당한 콘월인들 역시 독특한 브리토닉 정체성과 언어를 유지했다.[66] 이후 잉글랜드 종교 개혁과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과 함께, 에드워드 6세는 섬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조언에 따라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연합을 통해 영국,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통합된 개신교 대영제국으로 통합하려 했다.[67] 섬머셋 공작은 "브리튼이라는 옛 이름"으로 영국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을 통합하는 것을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군주제가 모두 "로마 이전의 브리튼 군주제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67]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영국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게 상속되어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제임스 6세 겸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겸 영국의 제임스 1세)의 통치하에 인적 동군연합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사건은 왕관 연합으로 불린다.[68] 제임스 국왕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의 완전한 정치적 연합을 주장했고,[69] 1604년 10월 20일 "대영제국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 칭호는 잉글랜드 의회스코틀랜드 의회 모두 거부했고,[70][71] 따라서 영국법이나 스코틀랜드법의 근거가 없었다.

3. 2. 연합과 영국성의 발전



수 세기 동안 군사 및 종교 갈등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종교 개혁과 1603년 왕관의 연합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73] 광범위하게 공유된 언어, 섬, 군주, 종교 및 성경(킹 제임스 성경)은 두 주권 국가와 그 백성들 사이에서 점점 더 커지는 문화적 동맹에 기여했다.[73][74] 1688년의 명예혁명은 권리장전 1689와 권리주장법 1689를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유된 입헌군주제가 개신교도에 의해서만 유지된다는 것을 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제와 귀족 대부분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의회 법률에 의한 두 국가의 통합 시도는 1606년, 1667년 및 1689년에 실패했다.[74]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한 정치적 관리 강화는 비판을 야기했고 영국-스코틀랜드 관계를 긴장시켰다.[75][76]

대항해 시대 동안 잉글랜드의 해상 탐험은 17세기 말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새로운 제국적 권력과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약한 경제로 고통받았다.[75] 이에 대한 대응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2세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에 반대하여 다리엔 계획을 시작했는데, 이는 파나마 지협에 스코틀랜드의 식민지인 뉴 캘레도니아를 설립하려는 시도였다.[75] 그러나 질병, 스페인의 적대감, 스코틀랜드의 잘못된 관리 및 동인도회사와 잉글랜드 정부(스페인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싶어하지 않았다)의 계획에 대한 반대로 인해 이 제국적 모험은 실패로 끝났으며, 스코틀랜드 총 유동 자본의 약 25%가 손실되었다.[75][77]

다리엔 계획의 실패와 잉글랜드 의회가 통과시킨 1701년 왕위 계승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정치적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4년 안전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와 다른 군주를 스코틀랜드 왕위에 계승하도록 임명할 수 있게 했다.[75] 잉글랜드는 자코비즘 군주가 임명되면 제2백년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스-스코틀랜드의 군사 정복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았다.[75] 잉글랜드 의회는 1705년 외국인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민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고 스코틀랜드인이 소유한 재산을 외국인 재산으로 간주하며,[78] 스코틀랜드 제품의 잉글랜드 및 식민지로의 수입을 제한했다(스코틀랜드 무역의 약 절반).[79] 그러나 이 법률에는 스코틀랜드 의회가 통일된 그레이트브리튼 의회 창설 협상에 참여하고, 다리엔 계획에서 스코틀랜드의 재정적 손실을 보상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77]

스코틀랜드[75]와 잉글랜드[80]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06년에 연합 조약이 합의되었고, 1707년 연합 법률을 통해 양국 의회에서 비준되었다. 1707년 5월 1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대영 제국이라는 새로운 주권 국가가 탄생했다.[81][82][83] 이 왕국은 "적대적인 합병"으로 시작되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과의 "완전한 파트너십"으로 이어졌다.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이는 유럽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84] 1707년 이후 영국 국민 정체성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특히 잉글랜드에서 처음에는 저항을 받았다.[80] 1750년대까지 대영 제국 국민들은 자신을 영국인이자 동시에 스코틀랜드인, 잉글랜드인 또는 웨일스인으로 생각하는 "다층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80]

북부 브리튼인과 남부 브리튼인이라는 용어는 각각 스코틀랜드인과 잉글랜드인을 위해 고안되었으며, 전자는 특히 스코틀랜드 계몽의 경제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어느 정도 선호되었다.[85][86]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정체성의 윤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7] 연합에 대한 그들의 회의적인 시각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초기 중요한 시기에 영국성 건설을 지배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했다.[88] 이는 삭슨족과 켈트족 모두에게 공통적인 "자유의 정신... 로마 교회의 침탈에 맞서"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했다.[89] 제임스 톰슨은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이자 극작가였으며, 영국 문화와 국민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89] 그는 토마스 아른과 공동으로 알프레드를 썼는데, 이는 알프레드 대왕의 바이킹에 대한 승리를 다룬 오페라로, 1740년 조지 1세의 즉위와 오거스타 공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프레드릭 왕세자에게 공연되었다.[90] "룰, 브리타니아!"는 오페라의 절정 부분이었으며, "영국의 해상 우월성"을 기념하는 영국 애국가가 되었다.[91] 제국과 관련된 왕립 해군의 승리와 해전을 통해, 섬나라는 "영국성과 세계 속에서 영국의 위치에 대한 이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92]

대영 제국의 새로운 국가 의인화인 브리타니아는 1750년대에 "어떤 단일 국가 영웅이 아닌 국가와 제국"의 표현으로 확립되었다. 역사가 피터 보르세이는 브리타니아와 영국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1797년까지 브리타니아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왕립 해군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창은 삼지창으로 바뀌었습니다... 해군은...영국의 자유의 보루이자 영국인이 되는 것의 본질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93]

1707년 연합부터 1815년 워털루 전투까지 대영 제국은 "가톨릭 프랑스와의 연이은 매우 위험한 전쟁"에 참여했다.[94] 이 전쟁들은 "모두 충분한 군사적 및 해군적 승리를 가져와 영국의 자존심을 높였다".[95] 프랑스 제1제정과의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은 프랑스인이나 가톨릭 신자가 아님으로써 주로 자신을 유사하다고 정의하는 법을 배웠다".[96] 해양력과 제국과 결합하여 영국성이라는 개념은 "프로테스탄티즘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었다.[97]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이 "융합되어 그들의 많은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된" 문화적 공통점이다.[98]

3. 3. 아일랜드와의 연합

1800년 연합 조약을 통해 주로 가톨릭 신자였던 아일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이 정치적으로 통합되었다.[105][106] 이는 19세기 초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과 맞물려, 이전 세기의 호전적인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영국성 개념에 변화를 요구했다.[105][106] 새롭게 확장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권 문제를 재검토하고, 영국성의 정의를 아일랜드인에게까지 확대해야 했다.[106][107]

1800년 이후 아일랜드인을 지칭하는 "웨스트 브리튼"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1832년 가톨릭 해방 운동을 이끌었던 아일랜드 정치인 다니엘 오코넬은 영국의 하원에서 "아일랜드 국민은 이름뿐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혜택과 정의가 주어진다면 웨스트 브리튼인이 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아일랜드인이다."라고 말했다.[108]

1801년부터 1923년까지의 아일랜드는 경제적, 정치적 관리 부실과 방치가 이어지면서 아일랜드인들을 소외시켰고,[107] 이는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연합 이후 40년 동안,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문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1844년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아일랜드를 "굶주리는 인구, 부재지주 귀족, 그리고 외국 종교, 그 위에 세계에서 가장 무능한 행정부"를 가진 국가라고 묘사했다.[110] 아일랜드 연합주의자들조차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영국성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11]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은 가톨릭과 가톨릭 신자에 대한 영국의 태도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왔다.[115] 그 예로, 프랑스인의 아들이자 열렬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어거스터스 웰비 퍼긴과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인 찰스 배리 경이 웨스트민스터 궁전("영국의 국가적, 제국적 허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건물") 재설계에 협력한 것을 들 수 있다.[115]

3. 4. 현대

제1차 세계 대전은 20세기 초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강화했다.[106][112] 영국에서의 징병을 포함한 전쟁 참전을 통해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은 영국인으로서 싸웠다".[106] 전쟁 후에는 추모일과 양귀비 캠페인을 통해 영국의 국가적 추모 행사가 제도화되었다.[106] 제2차 세계 대전 또한 영국 국민에게 유사한 통합 효과를 가져왔다.[118] 그러나 그 결과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유럽주의와의 현저한 대조를 바탕으로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118] 영국인이 "섬나라 민족을 구성하고 민주주의를 대표한다"는 개념은 전쟁 중에 강화되었고, 윈스턴 처칠의 연설, 역사책, 신문을 통해 전국에 퍼져나갔다.[118]

국제적 전성기에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전 세계 사람들을 공유하는 전통과 공통의 충성심으로 하나로 묶었고, 이는 끈기 있게 유지되었다".[119]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제국은 급속한 탈식민화를 경험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국에서 분리됨으로써 1922년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아일랜드적 요소"가 사라졌고,[118] 독립 운동으로 인해 축소된 제국은 20세기 중반 국가연합에서 영국 정체성에 대한 매력을 감소시켰다.[120]

1948년 영국 국적법과 그 이후 국가연합 및 세계 각지에서 영국으로의 대규모 이민 이후로 "영국의 문화 생활 표현과 경험은 성별, 민족, 계급, 지역의 영향으로 단편화되고 재편되었다".[121] 또한 1973년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은 대륙 유럽과 구별되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개념을 약화시켰다.[122][123] 따라서 1970년대 이후로 "영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위기감이 존재했고",[124]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더 큰 정치적 자치 요구가 증가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125]

20세기 후반에는 입법 전 국민투표 이후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대한 자치 국가 행정부 설립과 함께 영국의 정치에 큰 변화가 있었다.[126] 네 개의 영국의 구성국에 대한 더 큰 자치권 요구는 각 구성국이 서로 연합된 이후로 존재해 왔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탄력을 받았다.[125] 자치는 "점점 더 단호해지는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국가 정체성"으로 이어졌고,[127] 이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더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가져왔거나,[128] 아니면 완전한 거부로 이어졌다.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웨일스 민족주의자 정치인인 귄포어 에번스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아일랜드인에게 영국 문화를 확장하는 영국인을 위한 정치적 동의어"로 일축했다.[129]

1945년 5월 8일 런던 화이트홀에서 윈스턴 처칠의 승전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영국인들.


2004년, 정치 이론가이자 민주사회주의자였던 버나드 크릭 경은 영국 생활 시험 개발을 맡았을 때 "영국인이라는 것은 포괄적인 정치적, 법적 개념이며, 영국을 하나로 묶는 법률, 정부, 광범위한 도덕적, 정치적 개념(관용과 표현의 자유와 같은)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한다"고 말했다.[265][130]

고든 브라운은 2006년 영국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131] 브라운이 패비안 협회의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회의에서 한 연설은 영국의 가치가 새로운 헌법적 합의와 현대적 애국심을 대표하는 상징(새로운 청소년 공동체 봉사 계획 및 영국 기념일 기념)을 요구한다고 제안했다.[131] 패비안 협회 회의에서 확인된 중심 문제 중 하나는 영국 정체성이 자치 영국 체제 내에서 어떻게 들어맞는가 하는 것이었다.[131] 영국 정체성을 증진하려는 영국 정부의 계획을 표명한 것은 2006년 6월 27일에 처음 개최된 초대 참전용사의 날이었다. 브라운은 이 기념 행사의 첫 번째 행사에서 무장 세력 참전용사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 외에도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영국이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여러분이 지지하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에 대해 전 세계에 전할 말이 있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축구, 자치, 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132]

2018년 윈드러시 스캔들은 수백 명의 영국인이 부당하게 추방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 국민으로서의 복잡한 발전을 보여주었다.[133] 제국의 해체와 전후 재건을 배경으로 하는 윈드러시 세대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CUKC 시민으로 도착했다. 전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난 그들은 1973년 이전에 영국에 정착했으며, 1971년 이민법에 따라 "거주권"을 부여받았다.[134] 추방을 당하거나 추방된 많은 아프리카 카리브해계 영국인들은 집, 생계, 건강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134] 이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많은 기관과 선출된 정치인들은 법적으로 영국 시민권이나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 사람들이 사실상 영국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확인했다. 여기에는 영국 총리 테레사 메이,[135] 런던 시장 사디크 칸,[136] 검찰청 감찰부 웬디 윌리엄스와 그녀의 하원에서 의뢰한 ''윈드러시 교훈 분석 보고서'',[137][138] 주택공인협회,[134] 국제앰네스티,[139] 옥스퍼드 대학교의 사회 지리학자 대니 도링,[140] 그리고 다른 공인 등이 포함된다.[141][142]

4. 지리적 분포



영국인의 이주는 5세기와 6세기경 브리토닉 켈트족이 앵글로색슨족을 피해 프랑스 북부와 스페인 북서부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143] 이들은 브르타뉴와 브리토니아 식민지를 건설했다. 브르타뉴는 16세기 초까지 독립을 유지하며 고유한 문화를 지켰지만, 브리토니아는 9세기 말 스페인에 흡수되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이주한 집단 중 하나였다.[143] 19세기 전반기 영국 제국의 확장은 "영국인들의 특별한 분산"을 가져왔고, 특히 오스트랄라시아북아메리카에 집중되었다.[143] 영국 제국은 "영국인들의 해외 이주 물결 위에 건설"되었으며,[144] 이들은 "전 세계에 도달하여 세 대륙의 인구 구조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143] 영국 아메리카 식민화 결과, 미국은 영국인들의 주요 이주 목적지가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높은 출산율을 보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터전을 빼앗았다.[143]

남부 로디지아, 영국 동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 등에는 영구 거주 영국인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소수였지만 문화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144]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에서는 영국계 혈통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앵글로스피어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144]

1861년 영국 인구 조사는 해외 영국인을 약 250만 명으로 추산했지만, 대부분은 "여행자, 상인, 전문직 종사자 및 군인"이었다.[143] 1890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150만 명이 넘는 영국 태생 인구가 있었다.[143] 2006년 공공정책연구소는 영국에 560만 명의 영국인이 거주한다고 추산했다.[145][146]

영국과 해외 영토를 제외하고, 영국계 혈통 비율은 오스트레일리아(76%), 뉴질랜드(70%), 캐나다(48%), 미국(33%), 칠레(4%), 남아프리카 공화국(3%) 순이다.[147][12][8][148][149][13] 홍콩은 영국과 해외 영토를 제외하고 영국 국민 비율(47%)이 가장 높으며, 바베이도스(10%), 아일랜드 공화국(7%), 오스트레일리아(6%), 뉴질랜드(5%)가 그 뒤를 잇는다.[145]

4. 1.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국기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당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깃발의 왼쪽 상단에 영국 국기가 포함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계 백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시대 시작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영국 출신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이주자의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원을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151] 1788년 1월 26일에 설립된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는 1770년에 영국 왕국이 주장한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절반에 속했으며, 처음에는 유형의 이주를 통해 영국인들이 정착했다. 1901년 1월 1일, 대체로 자치적인 5개의 다른 영국령 식민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성립되었다.

영국의 지배 역사는 오스트레일리아가 "19세기에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로 이전되어 식민지 문화와 정치의 일부가 된 영국의 문화와 정치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회 정부의 웨스트민스터 제도와 찰스 3세를 오스트레일리아 국왕으로 유지하고 있다. 198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의 국가적 지위는 공식적으로 "영국 국민: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으로 묘사되었다. 영국인들은 여전히 상당한 비율의 이민자들을 구성한다.[151]

194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기본적으로 영국계였으며, 인구의 7,524,129명(99.3%)이 자신을 유럽인으로 선언했다.[152] 2016년 인구 조사에서 상당수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영국계 조상과 자신을 동일시했는데, 7,852,224명(36.1%)이 잉글랜드계이고 2,023,474명(9.3%)이 스코틀랜드계라고만 응답했다.[153][154] 상당한 비율(33.5%)이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응답했는데, 통계청은 이들 대부분이 앵글로-켈트계 식민지 출신이라고 밝혔다.[155] 모든 오스트레일리아의 6개 주는 각 주의 깃발 왼쪽 상단에 유니온잭을 유지하고 있다.

4. 2. 영국 해외 영토

해외 영토에 거주하는 약 25만 명의 주민들은 출신 또는 귀화를 통해 영국 시민권을 갖는다.[156] 이들은 공통적인 영국 정체성의 여러 측면을 공유하지만, 각 영토의 특수한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156]

예를 들어,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당시 포클랜드 제도 입법평의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클리프턴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56]

"영국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교육적 가치는 포클랜드 제도만의 독특한 영국적인 특징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영국에 거주하는 다른 시민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낍니다. 이는 지리적 고립이나 작은 섬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며, 마치 일부 영국인들이 유럽인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브롤터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지브롤터 주민들은 "영국인임을 고집하며" 영국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을 보인다.[157] 지브롤터의 주권은 스페인-영국 관계에서 쟁점이 되어 왔지만, 압도적인 수의 지브롤터 주민들은 스페인의 영토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강한 확신으로 영국인임을 받아들인다.[157][158][159]

영국 시민 및 영국 해외 영토 시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4. 3. 캐나다

1965년 이전 캐나다의 국기였던 캐나다 붉은 깃발(Canadian Red Ensign)에는 깃발의 왼쪽 상단에 연합왕국 국기가 그려져 있다. 캐나다에는 영국계 유산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한다.


195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이 그려진 우표


캐나다는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프랑스와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북아메리카 탐험을 통해 국가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7년 전쟁 이후 1763년에 거의 모든 누벨프랑스를 할양하였고,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이후 퀘벡과 노바스코샤는 "영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남긴 식민지의 핵심"을 형성했다.[160] 영국 북아메리카는 "반역적인" 미국을 떠난 유나이티드 엠파이어 로열리스트들, 즉 영국인들을 끌어들였고, 이는 미래의 캐나다에서 영국계 공동체의 규모를 키웠다.[160]

1867년, 영국 북아메리카의 세 식민지는 연합하여 캐나다 연방이라는 연방제 도미니언을 형성했다.[161][162][163] 이는 추가적인 주와 준주들의 편입과 영국으로부터의 자치권 확대 과정의 시작을 알렸으며, 웨스트민스터 법령 1931을 통해 강조되었고, 1982년 캐나다법에서 영국 의회에 대한 법적 의존의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와 영국 사이의 "오래 지속되고 긴밀한 관계의 지속적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다.[164] 캐나다 현대 인구의 상당 부분이 "영국 기원"을 주장하며, 영국의 문화적 영향은 캐나다 제도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165]

1977년에야 비로소 캐나다 여권에서 "캐나다 시민은 영국 신민이다"라는 문구가 사라졌다. 캐나다의 정치는 영국의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166][167]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졌지만, 캐나다는 웨스트민스터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민주적 의회 체제에 의해 통치되며, 찰스 3세를 캐나다 국왕이자 국가 원수로 유지하고 있다.[168][169] 영어는 캐나다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언어이며 캐나다의 공식 언어이다.[170]

영국의 상징은 많은 캐나다 국기 디자인에 여전히 나타나며, 13개의 캐나다 주 및 준주 깃발 중 10개가 디자인에 어떤 형태의 영국 상징을 채택하고 있다. 유니언잭 또한 캐나다에서는 왕립 유니언 깃발로 알려진 공식 의례용 깃발이며, 연방 건물 외부에 1년에 3일 동안 게양된다.[171][172]

4. 4. 뉴질랜드

제임스 쿡의 1768-1771년 항해의 장기적인 결과로,[173] 상당수의 뉴질랜드인들이 영국계이며, 영국인으로서의 의식은 그들의 정체성에 기여했다.[174] 1950년대 후반까지 영국계 뉴질랜드인들은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키스 홀리오크 총리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에베레스트 산 등정 성공을 두고 "영국 민족과 뉴질랜드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고 묘사했다.[175] 1974년까지 뉴질랜드 여권에는 국민을 "영국 신민: 뉴질랜드 시민"으로 표기했으나, 이후 "뉴질랜드 시민"으로 변경되었다.[176]

2006년 ''뉴질랜드 리스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야당 대표였던 돈 브래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영국 이민자들은 여기에서 아주 잘 적응합니다. 저의 조상도 모두 영국인입니다. 뉴질랜드의 가치는 마그나 카르타 이후 수세기 동안의 투쟁에서 비롯된 영국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뉴질랜드를 현재와 같은 사회로 만듭니다.[177]

뉴질랜드의 정치는 영국의 정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졌지만, 뉴질랜드는 웨스트민스터식 민주주의와 비슷한 민주적 의회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찰스 3세를 뉴질랜드 군주제의 원수로 유지하고 있다.[178] 영어는 뉴질랜드에서 사용되는 주요 공용어이다.[179]

4. 5. 홍콩

1985년 홍콩법에 따라 340만 명의 홍콩인에게 영국 해외 시민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영국 국적이 부여되었다.[183] 이들 중 일부는 영국 해외 시민권과 함께 영국 시민권도 가지고 있다. 영국 해외 시민과 영국 시민 모두 영국 국적법에 따라 영국 국민이자 영연방 시민이며, 이를 통해 영국에서 다양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구분설명
영국 시민 (British Citizen)영국 시민
BOTC - 영국 해외 영토 시민 (British Overseas Territories citizen)영국 해외 영토 시민(영국의 해외 영토)
기본적으로 아래의 4가지 폐지된 구분은 순차적으로 BOTC로 대체된다. 다음은 기본적으로 새로 부여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효력이 없는 구분이며, 매우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상속되지도 않는다.
BOC - British Overseas citizen
British subject(주로 영국령 인도나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자 등)
BN(O) - British National (Overseas)영국 국민 (해외): 홍콩 반환 이전에 등록된 홍콩주민권 소지자.
BPP - British protected person


4. 6. 미국

북아메리카에 영국의 존재는 16세기 후반 로아노크 식민지와 버지니아 식민지로 시작되었지만, 최초의 성공적인 영국 정착지는 1607년 제임스강의 제임스타운에 설립되었다.[184] 1610년대까지 약 1,300명의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로 건너왔으며, 이들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영국 제도 출신 이민자들의 첫 번째 물결"이었다.[184] 1620년, 순례자들은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하여 "잉글랜드에서의 영구 이주가 놀랍도록 가속화"되었으며, 대서양 횡단 영국 이민자의 60% 이상이 뉴잉글랜드 식민지에 정착했다.[184] 17세기 동안 약 350,000명의 영국과 웨일스 이민자들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했는데, 이는 1707년 연합 조약 이후 한 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수와 비율을 넘어선 것이다.[185]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해 우호적 방임 정책을 펼쳐 무역 제한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들이 영국의 이익에 충실하도록 유도했다.[186] 이는 유럽 출신 건국자들과는 다른 문화적 정신인 아메리칸 드림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186] 영국령 아메리카13개 식민지는 1775년 영국 통치에 대한 무장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대영 의회가 그들을 대표 없이 통치할 권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776년 독립을 선포하고 미합중국의 최초 13개 주를 구성했으며, 연합 조항 비준으로 1781년 주권 국가가 되었다. 1783년 파리 조약은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주권에 대한 영국의 공식적인 인정을 의미한다.[187]

이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랜 문화적, 역사적 유대는 현대에 와서 특별 관계를 낳았는데, 이는 영국과 미국 사이의 역사적으로 긴밀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협력을 의미한다.[188] 프린스턴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영국성 전문가인 린다 콜리는 미국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영향 때문에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을 "신비롭고 역설적인 사람들, 물리적으로는 멀리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깝고, 매력적으로 비슷하지만 짜증나게 다르다"고 여긴다고 제안했다.[189]

2세기가 넘는 미국의 초기 역사 동안, 두 명(반 뷰렌과 케네디)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은 순례자와 청교도에서부터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정착민까지 다양한 식민지 시대 영국계 출신이었다.[190] 2015년 미국 커뮤니티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영국계 민족적 조상이라고 자기 신고한 사람들의 가장 많은 집중 지역은 유타주(35%), 메인주(30%), 뉴햄프셔주(25%), 버몬트주(25%)였다.[191] 2013-17년 ACS에서 미국인의 10.7%가 민족적 조상을 "영국계"의 어떤 형태로 보고했는데, 이는 독일계아프리카계 조상 다음이며, 멕시코계아일랜드계 조상과 비슷하다.[192]

4. 7. 칠레

안토파가스타 시의 기념물에 있는 영국과 칠레 국기


코킴보의 문장, 영국 국기가 포함되어 있음


칠레 인구의 약 4%는 영국계 또는 아일랜드계이다.[193] 1840년부터 1914년까지 5만 명이 넘는[194] 영국 이민자들이 칠레에 정착했다. 상당수는 마가야네스 주에 정착했는데, 특히 푼타 아레나스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가는 주요 세계 해항으로 번영했다. 약 3만 2천 명의 영국인들이 발파라이소에 정착하여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발파라이소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195] 그러나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과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많은 이들이 발파라이소를 떠나거나 유럽으로 돌아갔다.

발파라이소에는 가장 크고 중요한 영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영국식 특징을 지닌 지역, 학교, 사교 클럽, 스포츠 클럽, 사업 조직 및 정기 간행물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은행과 해군, 축구, 경마, 홍차 마시는 관습 등 특정 분야와 사회 활동에서 그 영향력이 나타난다.

칠레 독립(1818) 운동 당시에는 주로 영국인들이 코크레인 경의 지휘 아래 칠레 해군을 구성했다. 영국의 투자가 칠레의 번영에 기여했고, 영국 선원들은 칠레 해군이 남태평양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도록 도왔다. 칠레는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전쟁과 1878-79년 페루볼리비아의 연합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전쟁인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했다. 1891년 자유주의 사회주의 "혁명"은 영국 의회 관행과 법 제정을 본뜬 정치 개혁을 도입했다.

영국 이민자들은 초석 붐이 일었던 이키케와 피사구아 항구 등 칠레 북부 지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석의 왕" 존 토마스 노스는 질산염 채굴의 주요 거물이었다. 영국의 유산은 이키케 시의 역사 지구 거리와 클럽 히피코(경마 클럽)와 같은 여러 기관의 설립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석 위기와 함께 영국의 활동적인 존재는 끝을 맺었다.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은 기후와 빙하와 섬이 있는 숲이 우거진 풍경이 고향(하이랜드와 스코틀랜드 북부)을 연상시킬 수 있는 온대 지역에 정착했고, 영국계 칠레인과 웨일스계 칠레인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종종 영국인과 혼동되었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상인, 장인 및 선원으로서 주요 무역 도시와 항구에 영국인들과 함께 정착했다. 1914년부터 1950년 사이에 많은 영국(주로 웨일스) 이민자들이 현재 마가야네스 지역에 정착했다. 영국 가정은 산티아고, 코킴보, 아라우카니아 및 칠로에와 같이 칠레의 다른 지역에도 정착했다.

칠레에서 영국의 문화적 유산은 주목할 만하며 영국계 칠레인 공동체를 넘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영국에서 유래한 관습으로는 애프터눈 티(칠레인들은 온세스라고 부름), 축구, 럭비 유니온 및 경마가 있다. 또 다른 유산은 칠레인들이 영국식 이름을 널리 사용하는 것이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영국 정착민의 후손이 가장 많은 국가이다. 70만 명이 넘는 칠레인들이 영국(영국, 스코틀랜드인웨일스인) 출신일 수 있으며, 이는 칠레 인구의 4.5%에 해당한다.[196]

4. 8.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 지역에 영국인들이 도착한 것은 18세기 초였지만, 상당한 정착은 18세기 말 희망봉에서 시작되었다.[197] 19세기 후반, 금과 다이아몬드의 발견은 영국인들에 의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식민화를 더욱 장려했고, 영국계 남아프리카인 인구는 상당히 증가했지만, 보어 전쟁으로 알려진 시대에 영국인과 아프리카너(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들의 후손) 사이에는 격렬한 경쟁이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영국계 남아프리카인은 거의 200만 명에 달하며, 전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가장 많은 영국계 백인 인구는 콰줄루-나탈 주와 케이프타운, 더반, 포트엘리자베스 도시에 있다.[198]

세실 존 로즈, 케이프 식민지(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두 주로 분할됨)의 제6대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자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회사의 설립자

4. 9. 아일랜드

패디 메인(다운주 출신); 특수공중부대(SAS)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영국 군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를 대표하여 럭비도 했습니다.


아일랜드 식민은 중세와 근세 초기에 걸쳐 영국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아일랜드로 이주시킨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생겨난 프로테스탄트 지배층은 아일랜드 영주권의 귀족 계급으로, 대체로 자신을 앵글로-아일랜드인으로 여겼다.[199] 16세기와 17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영국 정착민들은 얼스터 식민과 아일랜드 윌리엄 왕조 전쟁 동안 아일랜드 북부의 가톨릭계 게일족 주민들을 복속시켰는데, 이는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이익에 충성하는 민족적, 종교적 요소를 도입하여 아일랜드를 전략적으로 통제하려는 명백한 시도"였다.[200]

얼스터 스코틀랜드인은 제임스 6세(스코틀랜드) 겸 1세(잉글랜드) 통치 시대에 아일랜드의 계획된 식민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저지대 출신의 스코틀랜드인들이 얼스터 지방에 대거 정착하면서 형성된,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영국계 민족 집단이다. 이들은 영국과 웨일스 정착민들과 함께 프로테스탄트(특히 스코틀랜드 교회장로교)와 얼스터 스코틀랜드 방언 및 영어를 주로 아일랜드 북동부에 전파했다. 아일랜드 분할과 현재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으로 이들 중 일부는 더 이상 영국 내에 살지 않게 되었다.

북아일랜드는 수년 동안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주로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아일랜드 연합주의를 대표하는 주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사이의 격렬하고 씁쓸한 민족 종파 갈등인 북아일랜드 분쟁의 장소였다.[201] 연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원하며,[202] 민족주의자들은 통일 아일랜드를 원한다.[203][204]

1998년 벨파스트 협정 체결 이후, 분쟁에 연루된 대부분의 준군사 조직은 무장 투쟁을 중단했으며, 헌법적으로 북아일랜드 주민은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고 출생 당시 영국 시민권자 또는 아일랜드 시민권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주 기간에 제한 없이 북아일랜드에 거주할 권리가 있는 부모 중 한 명 이상을 둔 모든 사람"으로 인정받았다.[205] 벨파스트 협정은 북아일랜드 모든 주민의 "자신을 아일랜드인 또는 영국인, 또는 양쪽 모두로 확인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출생권"을 보장한다.[205]

5. 문화

대영제국의 확장으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파키스탄, 미국 및 영국 해외 영토 등 광범위한 국가들의 언어와 문화에서 영국의 문화적 영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앵글로스피어로 불리기도 한다. 제국에 대한 영국의 영향뿐만 아니라, 제국 또한 영국 문화, 특히 영국 요리에 영향을 미쳤다. 휴머니즘, 프로테스탄티즘, 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유럽 문화 내의 혁신과 운동 또한 영국을 변화시켰다. 영국의 형성 역사의 결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문화는 다양하며,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5. 1. 요리

역사적으로 영국 요리는 "질 좋은 현지 재료로 만든 소박한 요리에, 맛을 감추기보다는 강조하는 간단한 소스를 곁들인 것"을 의미했다.[207] 상상력이 부족하고 무겁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풀잉글리쉬 브렉퍼스트와 크리스마스 디너를 제외하고는 국제적인 인정을 거의 받지 못했다.[208] 그러나 이는 1922년 이후 영국에 정착한 사람들의 요리 영향을 받아 영국 아시아인의 치킨 티카 마살라와 같은 혼합 요리가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영국의 진정한 국가 요리"라고 칭찬하기도 한다.[209]



켈트 농업과 동물 사육은 켈트족과 브리튼인에게 다양한 식량을 제공했다. 앵글로색슨족은 유럽에서 일반화되기 전에 고기와 향신료가 든 스튜 요리 기술을 개발했다. 노르만 정복은 중세 시대에 영국에 이국적인 향신료를 도입했다.[208] 영국 제국은 "강하고 톡 쏘는 향신료와 허브"의 인도의 식문화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208] 20세기 전시 기간 동안 영국 정부가 시행한 식량 배급 정책은 영국 요리의 국제적인 평판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208]

영국 요리에는 피시 앤 칩스, 선데이 로스트, 뱅거스 앤 매시 등이 있다. 영국 요리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요리 등 여러 국가 및 지역별 변종이 있으며, 각각 자체 지역 또는 현지 요리를 개발했는데, 그중 많은 요리는 지리적 표시 식품으로, 체다 치즈, 체셔 치즈, 요크셔 푸딩, 아브로스 스모키, 콘월 파스티, 웨일스 케이크 등이 있다.

영국인은 1인당 소비량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으며, 1년에 1인당 평균 2.1kg을 소비한다.[210] 영국 차 문화는 19세기, 인도가 영국 제국의 일부였고 영국의 이익이 아대륙의 차 생산을 통제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 2. 언어

영어는 영국 시민들이 사용하는 주요 언어이며, 영국 인구의 70% 이상이 모국어로 사용한다. 따라서 영어는 영국의 사실상의 공식 언어이다.[211] 그러나 유럽 지역 또는 소수 언어 헌장에 따라,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콘월어, 아일랜드 게일어, 얼스터 스코츠, 맨섬어, 스코틀랜드어는 영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역 또는 소수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212] 섬 지역 노르망디어는 저지와 건지의 공식 언어로 인정되지만, 쇠퇴하고 있다.[213] 표준 프랑스어는 두 지역 모두의 공식 언어이다.[214][215]

원주민이 모국어로 계속 사용하는 토착어로서 웨일스어스코틀랜드 게일어는 다른 소수 언어와는 다른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언어 중 일부가 일반적으로 모국어로 사용된다. 더 넓은 지역에서는 중앙 정부 또는 지방 정부 정책에 따라 이중 언어 환경에서의 사용이 때때로 지원되거나 장려된다. 귀화를 위해서는 영국 생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영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또는 웨일스어에 대한 일정 수준의 능력이 필요하다.[216] 그러나 영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스코틀랜드 게일어웨일스어는 훨씬 적게 사용된다.

영국 전역에는 독특한 구어 표현과 영어 지역 방언[40]이 있으며, 이는 특정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217] 영국의 방언에 대한 인식과 지식은 "사람이 자란 지역을 몇 마일 이내로 특정할 수 있게 해준다".[218]

5. 3. 문학

영국 문학은 "세계를 선도하는 문학 중 하나"이다.[219] 영어로 쓰여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스코틀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얼스터 스코츠 방언, 콘월어 문학, 웨일스어로 쓰여진 작품들도 있다.

영국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들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들 중 일부는 영국에서 나왔는데, 예를 들어 영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인 서사시 베오울프가 있다.[220] 영국이라는 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도, 영국에 살았던 유명 작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칭찬받는 작가들 중에 포함된다. 잉글랜드에서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크리스토퍼 말로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시대를 정의했다.[221]

upright


영국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잘 알려진 운동 중 하나였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로버트 번즈, 윌리엄 워즈워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문학에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들 중 한 명이었다.[222] 이들에 이어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 바이런 경과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등장하여 유럽에서 낭만주의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223] 빅토리아 시대에는 찰스 디킨스와 윌리엄 메이커리 택커리를 포함하여 영국 문학이 더욱 번성했다.[224]

영국의 여성 문학은 길고 종종 힘든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여성 작가들이 조지 엘리엇과 같이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225] 세계 문학에 기여한 다른 위대한 여성 소설가로는 프랜시스 버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그리고 브론테 자매인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앤 브론테가 있다.[226]

영국 문학사에서 논픽션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에 거주했던 새뮤얼 존슨이 영어 사전을 처음으로 편찬했다.[227]

5. 4. 미디어와 음악

영화, 연극, 무용, 라이브 음악도 인기 있지만,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오락은 텔레비전 시청이다.[230] 영국의 공영 방송 영국의 텔레비전은 1936년 BBC 텔레비전 서비스(현재 BBC 원) 개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영국과 왕관령에서는 어떤 출처에서든 방송되는 모든 텔레비전 서비스를 합법적으로 수신하려면 텔레비전 수신료를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는 상업 채널, 케이블 및 위성 전송, 그리고 인터넷이 포함된다. 텔레비전 수신료로 발생한 수익은 영국방송협회의 라디오, 텔레비전 및 인터넷 콘텐츠와 S4C의 웨일스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공에 사용된다. 영국방송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의 약칭인 BBC는 세계 최대의 방송사이다.[231][232] 영국의 다른 방송사와 달리, BBC는 공공 서비스 기반, 준자율적, 법정 공사이며, BBC 트러스트가 운영한다. 전국적으로 이용 가능한 무료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은 BBC 원, BBC 투, ITV, 채널 4(웨일즈에서는 S4C), 그리고 파이브이다.

영국 최고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100선은 영국 영화 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가 2000년에 업계 전문가 설문조사를 통해 역대 최고의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선정한 목록이다.[233] 그 목록 1위는 가상의 토키 호텔을 배경으로 한 존 클리스 주연의 영국 시트콤인 ''폴티 타워''였다.[233]



"영국 음악 전통은 본질적으로 보컬 중심"이며, 영국의 음악과 게르만 문화가 지배적이며,[234] 찬송가와 앵글리칸 교회 음악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235] 그러나 특유의 전통적인 웨일스 음악과 스코틀랜드 음악은 독특하며, 켈트 음악 전통에 속한다.[236] 영국에서는 축구 경기보다 라이브 음악 공연에 참석하는 사람이 더 많다.[237] 영국 록은 20세기 중반 미국발 록 앤 롤과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으로 탄생했다. 초기 주요 수출품은 비틀즈, 롤링 스톤스, , 그리고 킨크스였다.[238] 영국의 다른 밴드들과 함께 이들은 미국의 영국 팝과 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영국 침공을 이루었다. 1970년대에는 헤비 메탈, 뉴 웨이브, 그리고 투 톤이 등장했다.[238] 브릿팝은 1990년대 초 영국 인디 음악계에서 등장한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 장르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 기타 팝 음악을 부활시킨 밴드들이 특징이다. 브릿팝의 대표 주자는 블러, 오아시스, 그리고 펄프였다.[239] 1990년대 영국에서 인기를 얻은 또 다른 음악은 국내에서 제작된 여러 종류의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이었는데, 애시드 하우스, UK 하드 하우스, 정글, UK 개러지 등이 있으며, 이는 2000년대 그라임과 영국 힙합에 영향을 주었다.[239] 브릿 어워드는 국제 및 영국 대중음악을 대상으로 하는 영국 음반 산업(British Phonographic Industry)의 연례 시상식이다.

5. 5. 종교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군주들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곳이며, 군주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종교였으며, 여전히 대다수 영국인들의 신앙으로 남아있다.[240] 기독교는 영국 문화에 "기도와 예배의 영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교회와 대성당은 국가 도시와 마을의 건축 환경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많은 학교와 병원은 기독교적 동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남녀에 의해 설립되었다".[240] 영국 전역에서 "기독교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부활절크리스마스공휴일로 인정받는다.[240]

21세기 영국 인구의 주요 종교는 여전히 기독교이며, 그 뒤를 이어 신자 수 순으로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그리고 유대교가 있다. 2007년 티어펀드 설문 조사에 따르면 53%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밝혔는데, 이는 2004년 영국 사회 태도 조사[241][242] 및 기독교를 종교라고 밝힌 71.6%의 2001년 영국 인구 조사[243] 결과와 유사하다. 그러나 티어펀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 10명 중 1명만이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244] 세속주의계몽주의 시대에 영국에서 발전했으며, 영국 휴머니스트 협회와 국립 세속 사회와 같은 현대 영국 단체는 회원들에게 "비종교적 환경에서 도덕적 및 철학적 문제를 토론하고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240]

연합 조약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개신교 계승과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와 국가 간의 연관성을 보장했다. 잉글랜드 교회(성공회)는 법적으로 국교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영국 의회에서 성직 귀족을 통해 대표성을 유지하며, 영국 군주는 교회의 회원이자 최고 통치자이기도 하다.[245][246] 잉글랜드 교회는 또한 총회를 통해 (종교 행정과 관련된) 입법 조치 초안을 작성할 권리를 유지하며, 이는 의회에서 법으로 통과될 수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약 500만 명의 신자를 보유한 두 번째로 큰 기독교 교회이며, 주로 잉글랜드에 있다.[247] 또한 성장하고 있는 정교회,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교회가 있으며, 잉글랜드의 오순절 교회는 현재 교회 출석률 측면에서 잉글랜드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이어 세 번째이다.[248] 다른 큰 기독교 단체로는 감리교와 침례교가 있다.

장로교스코틀랜드 교회(커크로 비공식적으로 알려짐)는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인정받고 있으며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영국 군주는 일반 회원이며, 즉위 시 교회의 "안보를 수호할" 맹세를 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로 큰 기독교 교회이며, 스코틀랜드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한다.[249] 성공회 공동체의 일부인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1690년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가 최종적으로 확립된 이후 신학 및 의례 문제를 놓고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분리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추가적인 분열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를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다른 장로교 교회의 창설로 이어졌다. 1920년대에 웨일스 교회는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국교에서 벗어났지만' 성공회 공동체에 남아 있다.[245] 감리교와 다른 개신교 교회는 웨일스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북아일랜드의 주요 종교 단체는 아일랜드 전역을 기준으로 조직되어 있다. 집합적으로 개신교가 전체적으로 다수를 차지하지만,[250] 아일랜드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장 큰 단일 교회이다. 신학과 역사 측면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19세기에 국교에서 벗어난 아일랜드 교회(성공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교회이다.

5. 6. 스포츠

스포츠는 영국 문화의 중요한 요소이며, 영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가 활동 중 하나이다. 영국 내에서는 성인의 거의 절반이 매주 하나 이상의 스포츠 활동에 참여한다.[251] 영국은 축구, 럭비 유니온, 럭비 리그, 크리켓, 테니스, 배드민턴, 복싱, 골프, 스누커, 스쿼시 등 다양한 스포츠를 발명하거나 발전시켜 세계에 전파했다.[252][253]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별도의 기구, 팀 및 클럽이 국제 수준에서 개별 영국의 구성국을 대표한다. 하지만, 럭비 유니온과 같은 일부 스포츠에서는 아일랜드 전 지역 팀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를 모두 대표하고, 영국-아일랜드 라이언스가 아일랜드와 영국 전체를 대표한다. 영국은 올림픽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단일 팀(올림픽 영국 선수단)으로 참가하여 65개의 메달(금메달 29개 - 1908년 하계 올림픽 이후 최다)을 획득하며 3위를 차지했다.[254] 영국의 스포츠 선수들은 프로 복싱, 조정, 스누커, 스쿼시, 모터사이클 스포츠와 같은 다양한 스포츠에서 50개 이상의 세계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251]

2006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축구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나타났다.[255] 잉글랜드에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FA)에 가맹된 축구 클럽이 320개, 지역 또는 지구 협회에 가맹된 클럽이 42,000개가 넘는다. 1863년에 설립된 FA와 1888년에 설립된 풋볼 리그는 모두 세계 최초였다.[256] 스코틀랜드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의 관할 하에 78개의 정회원 및 준회원 클럽과 거의 6,000개의 등록 클럽이 있다.[256] 웨일스의 두 클럽은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에서 활동하고 다른 클럽들은 비리그 수준에서 활동하며, 웨일스 축구 리그에는 20개의 준프로 클럽이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12개의 준프로 클럽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리그인 IFA 프리미어십에서 활동한다.[256]

레크리에이션 낚시, 특히 낚시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참여 활동 중 하나이며, 영국에는 약 300만~400만 명의 낚시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252][257]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는 낚시는 붕어류 낚시이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주로 연어송어 낚시를 한다.[252]

5. 7. 시각 예술과 건축

수세기 동안 영국의 예술가와 건축가들은 서양 미술사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았다.[258] 독특한 영국 미학과 예술 양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인정받는 최초의 시각 예술가 중 한 명은 윌리엄 호가스이다.[258] 영국 제국의 부상으로 인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경험은 영국의 예술 기법, 취향, 감각에 매우 특정한 추진력을 가져왔다.[114] 영국인들은 자신의 예술을 "자연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지배력을 보여주는 데" 사용했으며, 영국 북아메리카, 오스트랄라시아, 남아프리카의 정착민들은 "자국의 정체성에 적합한 독특한 예술적 표현을 찾는 노력"을 시작했다.[114] 제국은 "영국 미술사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에" 있었으며, 제국주의적 영국 시각 예술은 영국성의 건설, 기념, 표현에 근본적이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현대 미술에 대한 태도는 "양극화"되었다.[259] 현대주의 운동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에 의해 소중히 여겨지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했다. 인상파는 처음에 "많은 보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파괴적인 외국 영향"으로 간주되었지만, 20세기 초 영국 미술에 "완전히 동화"되었다.[259] 표현주의전간기 동안 허버트 리드에 의해 "필연적으로... 혁명적"으로 묘사되었으며, 1950년대까지 고전주의가 영국 시각 예술에서 사실상 사라질 정도로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제작되었다.[259]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의 현대 영국 예술은 탈식민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물질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제국 이후의 문화적 불안으로 인식됨"을 특징으로 한다.

영국의 건축은 다양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발전은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이루어졌지만,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여러 시대에 걸쳐 건축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60] 영국 제도에는 선사 시대와 고전 시대의 구조물이 있지만, 영국 건축은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597년에 영국에 도착한 직후 건설된 최초의 앵글로색슨 기독교 교회부터 시작한다.[260] 노르만 건축은 11세기부터 성과 교회의 형태로 대규모로 건설되어 노르만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260] 1180년부터 1520년경까지 번성한 영국 고딕 건축은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수입되었지만, 곧 독특한 특징을 발전시켰다.[260] 영국 전역의 세속적인 중세 건축은 거대한 돌 을 남겼으며, "최고의 예"는 14세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당시 영국-스코틀랜드 국경 양쪽에 세워졌다.[261] 화약과 대포의 발명으로 성은 쓸모없게 되었고, 그 뒤를 이은 영국 르네상스는 주택 건축을 위한 새로운 예술 양식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튜더 양식, 영국 바로크 양식, 앤 여왕 양식 및 팔라디오 양식 등이 그것이다.[261] 조지 왕조 시대 건축과 신고전주의 건축은 스코틀랜드 계몽 이후 발전했다. 영국 외 지역에서는 특히 남인도에서 영국 건축의 영향이 강하다.[262] 이는 19세기 영국의 인도 지배의 결과이다. 벵갈루루, 첸나이, 뭄바이 등 인도 도시에는 고딕 부흥과 신고전주의 양식의 영국 건축 양식으로 설계된 법원, 호텔, 기차역이 있다.[262]

5. 8. 정치 문화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영국의 국회의사당이다.


영국의 정치 문화는 제도 및 시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가치와 오래된 가치의 미묘한 융합"을 보여준다.[200][263] 안정적인 의회 정부와 자유주의 개념을 포함하는 입헌 군주제 원칙은 "영국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264] 버나드 크릭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러한 견해를 강화했다.[265]

영국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법, 선출된 의회 및 민주적 정치 구조, 상호 관용, 평등한 권리에 대한 존중, 상호 관심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보호를 받는 대가로 국가(일반적으로 왕관으로 상징됨)에 충성을 다합니다.영어

영국의 정치 제도는 웨스트민스터 시스템, 영연방, 영국 국왕 밀의회를 포함한다.[266] 국왕 밀의회는 주로 영국의 제도이지만, 다른 영연방 왕국의 관리들도 임명된다.[267] 가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사례는 뉴질랜드 총리로, 뉴질랜드의 고위 정치인, 수석 재판관 및 항소 법원 판사는 관례적으로 밀의원으로 임명된다.[268] 영국 군주를 국가 원수로 유지하는 영연방 국가의 총리들은 계속해서 밀의원으로 선서한다.[267]

21세 이상 남성에 대한 보통선거는 1918년에, 성인 여성에 대한 보통선거는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 1928년에 부여되었다.[271] 영국의 정치는 다당제이며, 보수당, 노동당, 스코틀랜드 국민당이라는 세 개의 주요 정당이 있다. 영국의 사회 구조, 특히 사회 계급은 "당에 대한 충성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요인 중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으며, 여전히 영국인의 당 정치적 충성도의 "주요 기반"으로 남아 있다.[272] 보수당은 역사적인 토리당(1678년 잉글랜드에서 설립)에서 유래했으며, 전통적으로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 중도우파 보수주의 정당이다.[273][274] 키어 하디가 설립한 노동당은 19세기의 노동 조합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에서 성장했으며, 스스로를 "민주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계속해서 묘사한다.[275]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당원이자 유권자였던 저임금 노동 계급의 대표를 위해 존재한다고 밝힌다.[2]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당원 수와 의회 의석 수 모두에서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이며, 2015년 총선에서 스코틀랜드 의석 59석 중 56석을 획득했다. 자유민주당자유주의 정당이며, 당원 수와 선출된 국회의원 수 면에서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로 큰 정당이다. 이 당은 19세기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영국의 주요 여당이었던 자유당에서 유래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당에 의해 대체되었다.[276] 자유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276] 영국에는 300개가 넘는 다른 소규모 정당이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다.[277][278]

6. 국적 구분

영국 사회 태도 조사에 따르면, 영국 정체성에는 민족적 측면과 시민적 측면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널리 존재한다.[279]

민족적 측면영어은 출생지, 조상, 영국 거주, 영국 관습과 전통 공유 등을 포함한다. 시민적 측면영어은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법과 제도 존중, 영어 사용, 영국 시민권 보유 등을 포함한다.[279]

영국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중 시민적 정의가 압도적으로 "주된 개념"이 되었으며,[104]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인임은 때때로 제도적이거나 포괄적인 주권 국가 정체성으로 간주된다.[103][104][265] 이는 1세대, 2세대, 3세대 이민자들이 영국인이라고 스스로를 묘사할 가능성이 영국인이 아닌 잉글랜드인이라고 묘사할 가능성보다 더 높은 이유를 설명하는데, 귀화와 영국 국적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제도적이고 포괄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280] 영국의 소수 민족 출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긴다.[281]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스코틀랜드웨일스보다 잉글랜드에서 더 흔하다. "백인 잉글랜드인들은 자신을 먼저 잉글랜드인으로, 그다음 영국인으로 여겼고, 소수 민족 출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겼지만, 백인과만 연관짓는 잉글랜드인으로는 아무도 자신을 식별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백인 영국인과 소수 민족 사람들이 모두 영국보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와 더 강하게 동일시했다.[282]

연구 및 설문 조사는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 대다수가 스코틀랜드인/웨일스인이자 영국인으로 자신을 여기지만 강조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했습니다".[280] 인종 평등위원회는 영국에서의 국적 개념과 관련하여 "영국 국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객관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개념은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283] 그러나 "잉글랜드 참가자들은 자신을 잉글랜드인 또는 영국인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참가자들은 모두 영국인보다 스코틀랜드인 또는 웨일스인으로 자신을 훨씬 더 쉽게 식별했습니다".[283]

일부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인 또는 웨일스인이라고 느꼈지만 영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이기도 했습니다"라는 이유로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결합"하기로 선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배타적으로 스코틀랜드인 또는 배타적으로 웨일스인으로 여겼고 "자신을 영국인(그들은 영국인을 잉글랜드인으로 보았습니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느꼈습니다".[283] 해설가들은 후자의 현상을 "민족주의"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일부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이 영국 정체성을 "영국 통치 엘리트"가 영국에 부과한 "문화적 제국주의"로 해석하기 때문에 영국 정체성을 거부하거나,[284] 아니면 "잉글랜드"라는 단어와 "영국"을 동일시하는 역사적 오용에 대한 반응이다.[285] 이는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아일랜드인 사이에서 자신의 유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영국 정체성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286]

영국 국적법은 구 영국 식민지 출신자를 포함하여 다음 여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구분설명
영국 시민
영국 해외 영토 시민(영국의 해외 영토)기본적으로 아래의 4가지 폐지된 구분은 순차적으로 이 구분으로 대체된다.
British Overseas citizen영어기본적으로 새로 부여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효력이 없는 구분이며, 매우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상속되지도 않는다.
British subject영어 (주로 영국령 인도나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자 등)
영국 국민 (해외)홍콩 반환 이전에 등록된 홍콩주민권 소지자.
British protected person영어


7. 분류

영국 사회 태도 조사에 따르면, 영국 정체성에는 민족적 측면과 시민적 측면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널리 존재한다.

영국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중 시민적 정의가 압도적으로 "주된 개념"이 되었으며,[104]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인임은 때때로 제도적이거나 포괄적인 주권 국가 정체성으로 간주된다.[103][104][265] 이는 1세대, 2세대, 3세대 이민자들이 영국인이라고 스스로를 묘사할 가능성이 영국인이 아닌 잉글랜드인이라고 묘사할 가능성보다 더 높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화와 영국 국적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제도적이고 포괄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280] 영국의 소수 민족 출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긴다.[281]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스코틀랜드나 웨일스보다 잉글랜드에서 더 흔하다. "백인 잉글랜드인들은 자신을 먼저 잉글랜드인으로, 그다음 영국인으로 여겼고, 소수 민족 출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겼지만, 백인과만 연관짓는 잉글랜드인으로는 아무도 자신을 식별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백인 영국인과 소수 민족 사람들이 모두 영국보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와 더 강하게 동일시했다.[282]

연구 및 설문 조사는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 대다수가 스코틀랜드인/웨일스인이자 영국인으로 자신을 여기지만 강조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했습니다".[280] 인종 평등위원회는 영국에서의 국적 개념과 관련하여 "영국 국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객관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개념은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283] 그러나 "잉글랜드 참가자들은 자신을 잉글랜드인 또는 영국인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참가자들은 모두 영국인보다 스코틀랜드인 또는 웨일스인으로 자신을 훨씬 더 쉽게 식별했습니다".[283]

일부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인 또는 웨일스인이라고 느꼈지만 영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이기도 했습니다"라는 이유로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결합"하기로 선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배타적으로 스코틀랜드인 또는 배타적으로 웨일스인으로 여겼고 "자신을 영국인(그들은 영국인을 잉글랜드인으로 보았습니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느꼈습니다".[283] 해설가들은 후자의 현상을 "민족주의"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일부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스인이 영국 정체성을 "영국 통치 엘리트"가 영국에 부과한 "문화적 제국주의"로 해석하기 때문에 영국 정체성을 거부하거나,[284] 아니면 "잉글랜드"라는 단어와 "영국"을 동일시하는 역사적 오용에 대한 반응이다.[285] 이는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아일랜드인 사이에서 자신의 유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넓은 영국 정체성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286]

영국 국적법은 구 영국 식민지 출신자를 포함하여 다음 여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구분설명
영국 시민 (British Citizen)
영국 해외 영토 시민(영국의 해외 영토) (BOTC - British Overseas Territories citizen)기본적으로 아래의 4가지 폐지된 구분은 순차적으로 이 구분으로 대체된다.
British Overseas citizen영어 (BOC)다음은 기본적으로 새로 부여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효력이 없는 구분이며, 매우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상속되지도 않는다.
British subject영어 (주로 영국령 인도나 아일랜드 공화국 출신자 등)
영국 국민 (해외) (BN(O) - British National (Overseas))
British protected person영어 (BPP)


참조

[1] 서적 Britannia's Children: Emigration from England, Scotland, Wales and Ireland Since 1600 https://books.google[...] A&C Black 2020-11-02
[2] 웹사이트 Population By Country of Birth and Nationality tables January 2013 to December 2013 http://www.ons.gov.u[...] 2014-04-07
[3] 위키 British overseas territories
[4] 위키 Ulster Scots peopl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6-01-01
[5] 웹사이트 Detailed Races and Ethnic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Puerto Rico: 2020 Census https://www.census.g[...] United States census 2024-01-02
[6] 뉴스 Brits Abroad: Country-by-country http://news.bbc.co.u[...] 2009-05-24
[7] 위키 Immigration and Ethnocultural Diversity Highlight Tables http://www12.statcan[...] statcan.gc.ca 2017-10-25
[8] 웹사이트 Canada Census https://www12.statca[...]
[9] 위키 Feature Article – Ethnic and Cultural Diversity in Australia (Feature Article) http://www.abs.gov.a[...] Commonwealth of Australia 2022-07-28
[10] 웹사이트 Census of Population and Housing: Cultural diversity data summary, 2021 https://www.abs.gov.[...] 2022-07-28
[11] 위키 Country Profile: New Zealand http://www.fco.gov.u[...] 2021-11-03
[12] 웹사이트 2018 Census totals by topic – national highlights https://www.stats.go[...] 2019-12-12
[13] 서적 Census 2011: Census in brief http://www.statssa.g[...] Statistics South Africa
[14] 웹사이트 Présentation du Royaume-Uni http://www.diplomati[...] diplomatie.gouv.fr 2014-04-08
[15] 웹사이트 TablaPx http://www.ine.es/ja[...] 2017-05-22
[16] 뉴스 End to Mediterranean dream for 90,000 Britons who left Spain last year https://www.telegrap[...] 2014-04-22
[17] 웹사이트 150th anniversary of Welsh voyage to Patagonia https://www.itv.com/[...] ITV 2015-05-30
[18] 뉴스 Stories of Homecoming - We're on the march with Argentina's Scots http://www.scotsman.[...] 2024-06-18
[19] 뉴스 Fare of the country: A bit of Britain in Argentina https://query.nytime[...] 2009-05-21
[20] 웹사이트 The other special relationship: the UAE and the UK http://www.thenation[...] 2014-02-26
[21] 웹사이트 The most popular British emigration destinations http://local.live.co[...] local.live.com 2009-05-24
[22] 백과사전 Brit http://www.lexico.co[...] Oxford University Press
[23] 법률 Isle of Man
[24] 사전 Briton
[25] 사전 British http://dictionary.re[...] dictionary.reference.com 2009-02-19
[26] 학술지 The Anglo-Saxon migration and the formation of the early English gene pool 2022-10-17
[27] 웹사이트 Genetic study reveals 30% of white British DNA has German ancestry https://amp.theguard[...]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웹사이트 British? Irish? Or what? http://cain.ulst.ac.[...] cain.ulst.ac.uk 2009-02-19
[32] 웹사이트 United Kingdom - People https://2009-2017.st[...] state.gov 2008-07-01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웹사이트 2011 Census: Ethnic group, local authorities in the United Kingdom http://www.ons.gov.u[...] 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2013-10-11
[37] 뉴스 Gordon Brown: We must defend the Union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08-03-25
[38] 웹사이트 DIVERSITY AND CITIZENSHIP CURRICULUM REVIEW http://www.devon.gov[...] 2010-08-13
[39] 웹사이트 UK dialects 'strong and varied' http://news.bbc.co.u[...] BBC 2005-08-15
[40] 논문 (Rosen, 2003, p. 3) 2003
[41] 웹사이트 Estimates of the population for the UK, England, Wales, Scotland and Northern Ireland: mid-2021 https://www.ons.gov.[...] www.ons.gov.uk
[42]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Ireland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01-11-01
[43] 논문 (Snyder, 2003, pp. 12, 68) 2003
[44] 논문 (Cunliffe, 2002, p. 95) 2002
[45] 웹사이트 Patrhenius, Love Stories 2; XXX. The Story of Celtine http://www.theoi.com[...] theoi.com
[46] 논문 (O'Rahilly, 1946) 1946
[47] 위키소스 4.20 wikisource:Commentar[...]
[48] 논문 (Cunliffe, 2002, pp. 94–95) 2002
[49] 웹사이트 Anglo-Saxons http://www.bbc.co.uk[...]
[50] 서적 Picts, Scots and Gaels — Early Historic Scotland Birlinn 2014
[51] 에피소드 A New Civilization
[52] 논문 (Bradshaw & Roberts, 2003, p. 1) 2003
[53] 웹사이트 Book 1, Ch. 6: The pleasantness and fertility of Wales http://www.visionofb[...] visionofbritain.org.uk
[54] 웹사이트 Cornish Stannary Parliament Archives – Documents – UNITED NATIONS RECOGNISES CORNISH IDENTITY http://cornishstanna[...] Cornish Stannary Parliament 2008-07-06
[55] 웹사이트 Mebyon Kernow – The Party for Cornwall – BETA http://www.mebyonker[...] Mebyon Kernow
[56] 웹사이트 About RTÉ- RTÉ Awards http://www.rte.ie/ab[...] Raidió Teilifís Éireann 2009-01-13
[57] 웹사이트 Welsh Assembly Government – Celtic countries connect with contemporary Cymru http://wales.gov.uk/[...] Welsh Assembly Government 2008-05-13
[58] 뉴스 A United Kingdom? Maybe https://www.nytimes.[...] 2007-03-06
[59] 웹사이트 Myths of British Ancestry http://www.prospectm[...] prospect-magazine.co.uk 2006-10
[60] 논문 (Smyth, 1998, pp. 24–25) 1998
[61] 웹사이트 Athelstan (c.895 – 939) http://www.bbc.co.uk[...] BBC
[62] 에피소드 The Last of the Free
[63] 에피소드 Nations
[64] 논문 (Smyth, 1998, p. xii) 1998
[65] 에피소드 Hammers of the Scots
[66] 논문 (Bradshaw & Roberts, 2003, p. 11) 2003
[67] 논문 (Ryrie, 2006, p. 82) 2006
[68] 논문 (Ross, 2002, p. 56) 2002
[69] 논문 (Robbins, 1998, p. 53) 1998
[70] 논문 (Croft, 2003, p. 67) 2003
[71] 논문
[72] 웹사이트 British Flags http://www.flaginsti[...] flaginstitute.org 2009-05-14
[73] 논문
[74] 웹사이트 The Future of Scotland: Union? http://www.parliamen[...]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2009-12-22
[75] 웹사이트 Scotland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http://www.bbc.co.uk[...] BBC 2009-05-14
[76] 논문
[77] 논문
[78] 웹사이트 Westminster passes the 'Alien Act', 1705 https://web.archive.[...]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2009-02-08
[79] 논문
[80] 논문
[81] 웹사이트 Acts of Union 1707 http://www.parliamen[...]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2011-01-09
[82] 웹사이트 Uniting the kingdom? http://www.nationala[...] nationalarchives.gov.uk 2011-01-09
[83] 웹사이트 Making the Act of Union 1707 http://www.scottish.[...]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2011-01-09
[84] 방송 Britannia Incorporated
[85] 논문
[86] 논문
[87] 논문
[88] 논문
[89] 논문
[90] 논문
[91] 논문
[92] 논문
[93] 간행물 New approaches to social history. Myth, memory, and place: Monmouth and Bath 1750–1900. 2006-03-22
[94] 논문
[95] 논문
[96] 논문
[97] 논문
[98] 논문
[99] 논문
[100] 논문
[101] 논문
[102] 논문
[103] 논문 Britishness or Englishness? The Historical Problem of National Identity in Britain
[104] 논문
[105] 논문
[106] 논문
[107] 논문
[108] 논문
[109] 서적 Disraeli https://books.google[...] Faber & Faber 2012-04-19
[110] 논문
[111] 논문
[112] 논문
[113] 논문
[114] 웹사이트 Art and Empire http://www.britishem[...] britishempire.co.uk 2008-10-24
[115] 논문
[116] 논문
[117] 논문
[118] 논문
[119] 논문
[120] 논문
[121] 논문
[122] 논문
[123] 논문
[124] 논문
[125] 논문
[126] 간행물 Reforging the Union: Devolution and Constitutional Change in the United Kingdom https://web.archive.[...] 1998-01-01
[127] 논문
[128] 논문
[129] 웹사이트 South East Wales Public Life – Dr Gwynfor Evans https://web.archive.[...] BBC 2010-04-13
[130] 웹사이트 All this talk of Britain is so ... English https://www.theguard[...] 2004-04-12
[131] 뉴스 Brown speech promotes Britishness http://news.bbc.co.u[...] 2006-01-14
[132] 뉴스 Brown pinning his hopes on a new regiment https://archive.toda[...] 2006-06-27
[133] 뉴스 May says sorry to Caribbean leaders over Windrush scandal https://www.ft.com/c[...] 2018-04-17
[134] 웹사이트 Windrush Lessons Learned Review https://assets.publi[...] UK Home Office 2020-03-01
[135] 뉴스 Windrush: Theresa May hits back at Labour over landing cards https://www.bbc.com/[...] BBC 2018-04-18
[136] 웹사이트 Sadiq Khan: Government must act to avoid second Windrush-style scandal https://www.london.g[...] London Assembly 2018-05-14
[137] 뉴스 Windrush Review: Key findings https://www.belfastt[...] 2020-03-19
[138] 웹사이트 Windrush scandal 'foreseeable and avoidable' and victims let down by 'systematic operational failings' https://www.itv.com/[...] ITV News 2020-03-19
[139] 웹사이트 Windrush one year on: Scandal 'far from over' https://www.amnesty.[...] 2019-04-15
[140] 서적 Rule Britannia: Brexit and the End of Empire Biteback Publishing 2016
[141] 뉴스 Why Theresa May is to blame for the Windrush scandal https://www.spectato[...] 2018-04-17
[142] 뉴스 The Windrush scandal is heartbreaking, but it should not be used as an excuse to stop sensible migration controls https://www.telegrap[...] 2018-04-18
[143] 논문
[144] 논문
[145] 웹사이트 Brits Abroad http://news.bbc.co.u[...] 2006-12-11
[146] 간행물 Brits Abroad: Mapping the scale and nature of British emigration http://www.ippr.org.[...]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ippr.org.uk 2006-12-11
[147] 간행물 Feature Article – Ethnic and Cultural Diversity in Australia (Feature Article) http://www.abs.gov.a[...] Commonwealth of Australia
[148] 웹사이트 Detailed Races and Ethnic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Puerto Rico: 2020 Census https://www.census.g[...] United States census 2023-09-21
[149] 웹사이트 Historia de Chile, Británicos y Anglosajones en Chile durante el siglo XIX http://www.biografia[...]
[150] 웹사이트 House of Commons – Foreign Affairs – Fifth Report https://publications[...] Parliament of the United Kingdom
[151] 웹사이트 Population characteristics: Ancestry of Australia's population http://www.abs.gov.a[...] abs.gov.au 2003-06-03
[152] 서적 Official Year Book of the Commonwealth of Australia No. 37 https://books.google[...] 1947
[153] 웹사이트 THE ANCESTRIES OF AUSTRALIANS http://www.abs.gov.a[...] 2016
[154] 웹사이트 Census of Population and Housing: Reflecting Australia http://www.abs.gov.a[...] 2016
[155] 웹사이트 Feature Article – Ethnic and Cultural Diversity in Australia (Feature Article) http://www.abs.gov.a[...] 1995
[156] 논문
[157] 뉴스 Gibraltar's people ought to accept this sensible deal https://www.independ[...] 2002-02-04
[158] 웹사이트 Regions and territories: Gibraltar http://news.bbc.co.u[...] 2007-07-18
[159] 웹사이트 Gibraltar https://www.theguard[...] 2004-08-04
[160] 논문
[161] 웹사이트 Territorial evolution http://atlas.nrcan.g[...] Natural Resources Canada
[162] 웹사이트 Canada: History http://www.thecommon[...] thecommonwealth.org
[163] 백과사전 Commonwealth https://www.thecanad[...]
[164] 논문
[165] 논문
[166] 법률 Constitution Act, 1867 http://www.solon.org[...] Queen's Printer 1867-03-29
[167] 서적 A Crown of Maples http://www.pch.gc.ca[...] Queen's Printer for Canada
[168] 웹사이트 Ceremonial and Canadian Symbols Promotion > The Canadian Monarchy http://www.pch.gc.ca[...] Queen's Printer for Canada
[169] 웹사이트 The Queen and the Commonwealth > Queen and Canada http://www.royal.gov[...] Queen's Printer
[170] 웹사이트 Canada; Key Facts http://www.thecommon[...] thecommonwealth.org
[171] 웹사이트 The Honours, Flags and Heritage Structure of the Canadian Forces http://www.saskd.ca/[...] Queen's Printer for Canada 2001-01-05
[172] 웹사이트 Statement by the Hon. Jason Kenney, PC, MP, Secretary of State (Multiculturalism and Canadian Identity) on Commonwealth Day http://www.pch.gc.ca[...] Queen's Printer for Canada 2008-03-10
[173] 논문
[174] 웹사이트 Britons http://www.teara.gov[...] teara.govt.nz 2007-10-01
[175] 웹사이트 Panel Discussion 3c – Population Change And International Linkages http://www.executive[...] executive.govt.nz
[176] 웹사이트 Kiwis overseas – Staying in Britain http://www.teara.gov[...] teara.govt.nz 2007-04-13
[177] 웹사이트 So who do we keep out? http://www.listener.[...] listener.co.nz 2006-09-02
[178] 논문
[179] 웹사이트 New Zealand; Key Facts http://www.thecommon[...] thecommonwealth.org
[180] 웹사이트 Hong Kong (August 1997) - Library of Congress Information Bulletin https://www.loc.gov/[...]
[181] 웹사이트 British Nationality Act 1948 section 33 https://www.legislat[...]
[182] 웹사이트 British Nationality Act of 1948 https://parliament.g[...]
[183] 웹사이트 Hong Kong Act 1985 http://www.legislati[...] legislation.gov.uk 1985-04-04
[184] 논문
[185] 논문
[186] 웹사이트 History of Colonial America http://encarta.msn.c[...]
[187] 웹사이트 Chapter 3: The Road to Independence http://usinfo.state.[...] usinfo.state.gov 2005-11
[188] 간행물 An Endangered Partnership: The Anglo-American Defence Relationship in the Early Twenty-first Century 2006-03
[189] 논문
[190] 서적 Albion's Seed: Four British Folkways in Americ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91] 웹사이트 Overview of the United States https://statisticala[...]
[192] 웹사이트 Selected social characteristics in the United States: 2013–2017 American Community Survey 5-Year Estimates https://factfinder.c[...] US Census Bureau
[193] 웹사이트 Inmigrantes británicos. http://arpa.ucv.cl/a[...]
[194] 웹사이트 Noticias La Emigración De Chilenos Al Exterior E Inmigración A Chile http://www.galeon.co[...] Galeon.com
[195] 웹사이트 Inmigración britanica en Chile http://www.galeon.co[...]
[196] 웹사이트 Historia de Chile, Británicos y Anglosajones en Chile durante el siglo XIX http://www.biografia[...] biografiadechile.cl
[197] 서적 Comparative Politics: Interests, Identities, and Institutions in a Changing Global Order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 서적 Census 2011: Census in brief http://www.statssa.g[...] Statistics South Africa
[199] 논문
[200] 논문
[201] 웹사이트 Northern Ireland LIFE & TIMES survey. Question: Generally speaking, do you think of yourself as a unionist, nationalist or neither? http://www.ark.ac.uk[...] ARK Research
[202] 웹사이트 Standing up for Northern Ireland http://www.uup.org/p[...] uup.org
[203] 웹사이트 Strategy Framework Document: Reunification through Planned Integration: Sinn Féin's All Ireland Agenda http://www.sinnfein.[...] sinnfein.ie
[204] 웹사이트 Policy Summaries: Constitutional Issues http://www.sdlp.ie/p[...] sdlp.ie
[205] 웹사이트 Agreement reached in the multi-party negotiations http://cain.ulst.ac.[...] cain.ulst.ac.uk/ 1998-04-10
[206] 논문
[207] 웹사이트 British cuisine http://goodfood.uktv[...] uktv.co.uk
[208] 논문
[209] 웹사이트 Chicken tikka masala: Spice and easy does it http://news.bbc.co.u[...] 2001-04-20
[210] 웹사이트 Britons have less time for tea http://www.foodanddr[...] foodanddrinkeurope.com 2003-06-16
[211] 웹사이트 United Kingdom; Key Facts http://www.thecommon[...] thecommonwealth.org 2009-05-27
[212] 웹사이트 European Charter for Regional or Minority Languages https://web.archive.[...] scotland.gov.uk 2006-06-13
[213] 웹사이트 The Jersey Language https://members.soci[...] 2022-01-06
[214] 웹사이트 Guernésiais and French to be made official languages https://gsy.bailiwic[...] 2022-01-06
[215] 논문 The Language of the Law: The Importance of French https://www.jerseyla[...] 2005-06-01
[216] 웹사이트 Background to the test http://lifeintheukte[...] lifeintheuktest.gov.uk 2009-05-28
[217] 서적
[218] 서적
[219] 웹사이트 Harry Potter – History of the Books • Hypable http://www.hypable.c[...] Hypable.com 2014-02-26
[220] 서적 A History of Western Literature: From Medieval Epic to Modern Poetry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2013-06-29
[22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Elizabethan World: Britain, Ireland, Europe and Americ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22] 서적 Encyclopedia of the Romantic Era, 1760–1850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23] 서적 Encyclopedia of Gothic Literature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24] 서적 Major Trends in English Literature ( 1837–1945 ) https://books.google[...] Academic Foundation
[225] 서적 The Cambridge Companion to George Eliot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6] 서적 English Writers: A Bibliography With Vignettes https://books.google[...] Nova Publishers
[227] 서적 The Making of Johnson's Dictionary 1746–1773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8] 웹사이트 The Last Night https://web.archive.[...] BBC 2008-10-22
[229] 웹사이트 Last Night of the Proms brought to a rousing finale with patriotic splendour https://web.archive.[...] sundayherald.com 2008-10-22
[230] 서적
[231] 웹사이트 About the BBC http://www.bbc.co.uk[...] 2008-12-30
[232] 웹사이트 About the BBC – What is the BBC https://web.archive.[...] BBC 2008-06-14
[233] 웹사이트 The bfi TV 100 https://web.archive.[...] bfi.org.uk 2006-09-04
[234] 서적
[235] 서적
[236] 서적
[237] 서적
[238] 서적
[239] 서적
[240] 서적
[241] 웹사이트 Tearfund Survey 2007 https://web.archive.[...] 2007-05-05
[242] 웹사이트 British Social Attitudes Survey https://web.archive.[...] data-archive.ac.uk 2008-02-25
[243] 웹사이트 UK Census 2001 http://www.statistic[...] 2007-04-22
[244] 웹사이트 Prayer in the UK http://www.methodist[...] methodist.org.uk 2007-11-11
[245] 서적
[246]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Church of England https://web.archive.[...] cofe.anglican.org 2008-11-23
[247] 웹사이트 The Church in England and Wales https://web.archive.[...] catholic-ew.org.uk 2008-11-27
[248] 뉴스 'Fringe' Church winning the believers https://web.archive.[...] 2006-12-19
[249] 웹사이트 Analysis of Religion in the 2001 Census: Summary Report http://www.scotland.[...] scotland.gov.uk 2008-12-06
[250] 웹사이트 Communities in Northern Ireland https://web.archive.[...] statistics.gov.uk 2008-10-29
[251] 논문
[252] 논문
[253] 논문
[254] 위키 올림픽 역대 메달 집계표, Great Britain at the Olympics
[255] 웹사이트 Crowded Summer of Sport https://web.archive.[...] Ipsos Mori 2008-10-17
[256] 논문
[257] 웹사이트 Sport Fishing http://www.safewater[...] safewatersports.co.uk 2009-06-03
[258] 논문
[259] 논문
[260] 웹사이트 British Architecture > page 1 https://www.webcitat[...] MSN 2009-06-18
[261] 웹사이트 British Architecture > page 2 https://archive.toda[...] MSN 2009-06-18
[262] 논문
[263] 논문
[264] 논문
[265] 논문
[266] 논문
[267] 논문
[268] 웹사이트 The title 'The Honourable' and the Privy Council http://www.dpmc.govt[...] Department of the Prime Minister and Cabinet 2008-08-03
[269] 웹사이트 Order Paper and Notice Paper, 20 October 2000 https://sencanada.ca[...] Senate of Canada 2008-09-12
[270] 웹사이트 Commonwealth Judges http://www.justice.g[...] Ministry of Justice 2008-09-12
[271] 논문
[272] 논문
[273] 뉴스 Tories secure centre-right deal http://news.bbc.co.u[...] 2010-01-02
[274] 논문
[275] 웹사이트 Labour's policies https://web.archive.[...] labour.org.uk 2007-07-21
[276] 논문
[277] 웹사이트 Register of political parties https://web.archive.[...] electoralcommission.org.uk 2009-05-13
[278] 웹사이트 Register of political parties (Northern Ireland) https://web.archive.[...] electoralcommission.org.uk 2009-05-13
[279] 논문
[280] 논문
[281] 뉴스 Ethnic minorities feel strong sense of identity with Britain, report reveals https://web.archive.[...] 2004-01-08
[282] 간행물 Commission for Racial Equality 2005
[283] 간행물 Commission for Racial Equality 2005
[284] 간행물 2004
[285] 서적 The Making of English National Identity http://assets.cambri[...] assets.cambridge.org
[286] 뉴스 The English: Europe's lost tribe http://news.bbc.co.u[...] 1999-01-14
[287] 간행물 2004
[288] 웹사이트 2009 American Community Survey http://factfinder.ce[...]
[289] 뉴스 Brits Abroad: Country-by-country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2-11
[290] 웹사이트 Ethnic origins, 2006 counts, for Canada, provinces and territories http://www12.statcan[...] statcan.ca
[291] 웹사이트 Australians overall claim more than 250 ancestries, speak 400 languages at home http://www.abs.gov.a[...] abs.gov.au 2007-06-27
[292] 웹사이트 QuickStats About Culture and Identity https://web.archive.[...] stats.govt.nz 2009-02-04
[293] 웹사이트 http://www.publicati[...]
[294] 뉴스 Brits Abroad: Country-by-country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2-11
[295] 웹사이트
[296] 웹사이트 The most popular British emigration destinations http://local.live.co[...] local.live.com 2007-04-13
[297] 뉴스 Fare of the country: A bit of Britain in Argentina http://query.nytimes[...] nytimes.com 1985-06-23
[298] 웹사이트 http://www.thenation[...]
[299] 뉴스 Brits Abroad: Asia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0] 뉴스 Brits Abroad: Europe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1] 뉴스 Brits Abroad: Middle East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2] 뉴스 Brits Abroad: Asia-Pacific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3] 웹사이트 Persons with immigrant background by immigration category, country background and sex http://www.ssb.no/en[...] Statistics Norway 2009-01-01
[304] 뉴스 Brits Abroad: Africa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5] 뉴스 Brits Abroad: Caribbean http://news.bbc.co.u[...] news.bbc.co.uk 2006-12-11
[306] 뉴스 Brits Abroad: Country-by-country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2-11
[307] 웹사이트
[308] 웹사이트 Population By Country of Birth and Nationality tables January 2013 to December 2013 http://www.ons.gov.u[...] 2014-11-04
[309] 웹사이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