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만동구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만동구족은 일본에서 사용된 서양식 갑옷을 지칭하며, 오다 노부나가가 애용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사료상 최초의 전래는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증정된 갑옷이다. 17세기에는 일본에서 제작된 남만동구족도 등장했으며, 유럽 상선들이 무구로 싣고 온 갑옷을 입수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매체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카게무샤』 속 오다 노부나가의 이미지와 우에스기 겐신과의 연관성을 통해 묘사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 갑주 - 대개
    오요로이는 헤이안 시대 일본 기마 사무라이들이 착용한 갑옷으로, 말 위에서의 활 사용에 특화된 구조와 독특한 디자인이 특징이며, 실전 사용은 줄었으나 가문의 상징으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 일본 갑주 - 당세구족
    당세구족은 센고쿠 시대에 전투의 대규모화와 조총 도입으로 인해 대량 생산, 높은 방어력, 기동성을 갖추도록 변화된 갑옷으로, 에도 시대에는 장식적인 요소가 강화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실용적 가치를 상실했다.
남만동구족
명칭
명칭남만동구족(南蛮胴具足)
로마자 표기Nambandōgusoku
다른 이름남만 갑옷(南蛮甲)
남만도구족(南蛮胴具足)
양인 갑옷(洋人甲)
종류
종류갑옷
시대
시대무로마치 시대 말기 ~ 에도 시대 초기
사용 국가
사용 국가일본
역사
기원16세기 중반, 포르투갈 등 유럽에서 전래된 플레이트 아머 모방
발전일본 갑옷 제작 기술과 결합하여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짐
특징가슴 부분을 둥글게 만든 흉갑 형태
조총 방어에 효과적
구조 및 재료
재료
가죽
주요 부위동(胴): 몸통 보호
소데(袖): 어깨 보호
하이 다테(佩楯): 허벅지 보호
고테(籠手): 팔 보호
스네아테(臑当): 정강이 보호
특징적인 디자인이국적인 장식
화려한 색상
영향
영향일본 갑옷 디자인에 새로운 요소 도입
조총의 도입과 함께 갑옷의 형태 변화에 기여
기타
참고남만(南蛮)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일본에 온 유럽인들을 지칭하는 용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유럽 문화는 이국적이고 신기한 것으로 여겨짐

2. 역사적 배경

현대 오락 매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남만동 애용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료상으로는 1588년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의 인도 부왕(총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외교 문서(묘호인 소장)와 함께 증정한 갑옷이 최초의 남만동 전래로 확인된다.[3]

히데요시가 남만동을 사용하거나 하사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1600년 리프데 호 관련 기록이 최초의 사용 예이다. 아케치 미츠하루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일본제 남만동 구족(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도 1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유럽 선박들은 적대국과의 분쟁, 항해 중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여 상선(리프데 호 등)에도 무기를 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항해한 선박도 마찬가지였다. 지중해 무역에서는 이탈리아제 갑옷이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항해 선박에서 남만동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관련 사료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2. 1. 남만동의 전래와 수용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당세구족의 일종으로, 서양에서 수입된 갑옷(남만구족)의 동(胴)에 풀섶, 소매 등을 부착하는 등의 개조를 가했다. 앞뒤 2장의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의 하단이 뾰족하고, 전면 중앙부가 예각적으로 솟아 있어 조총의 공격에도 강했다. 이와 유사하게, 서양의 투구를 수입·개조·모방한 것을 '''남만 투구'''라고 부르며 사용되었다.

동과 투구만 서양 갑옷의 양식을 도입하고, 그 외에는 일본 갑옷의 양식을 채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서양의 해병이 착용한 갑옷은 육전용 플레이트 아머에서 팔 부분, 다리 부분의 부품을 생략한 것으로, 그것이 그대로 당시 일본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팔 부분, 다리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양식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서양 갑옷은 개인의 체격에 맞춰 주문 제작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착용하면 움직이는 것도 곤란했고, 풀 세트의 갑옷을 수입한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 산악 지형이 많고, 또한 성의 형식의 차이로 인해, 일본 무사는 경사지나 돌담을 기어 올라 전투를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서양 갑옷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 희귀함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무장에게도 애용되었지만, 무게가 무겁고 고가의 갑옷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남만동 구족을 자신이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와타나베 모리츠나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에게도 자신의 남만 투구를 주었는데[1], 이것은 일본에 표착한 리프데 호(윌리엄 애덤스가 탑승한 배)에서 회수한 갑옷을 재이용한 것이다. 이 남만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착용 및 하사되었다[2].

이것을 모방하여, 순수 국산의 일본식 남만동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구별 방법으로는, 수입 개조품의 남만동은 동 하단이 뾰족하고 V자형인 반면, 일본식 남만동은 뾰족하지 않고 역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식 띠를 매는 착용 방식에서는, 앞이 뾰족하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만동은 그 견고함을 확인하고 강도를 과시하기 위해, 총으로 시험 사격을 하는 것이 행해졌으며, 현존하는 유품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존재한다. 일본식 남만동에서도 이 시험 사격이 행해졌지만, 나중에는 탄흔과 같은 무늬를 조각한, 겉치레용도 제작되었다. 실전에서의 탄흔이 남아 있는 유품도 있으며, 나루세 요시마사 소용 남만동이 그 좋은 예이다.

사료상으로는 1588년에 포르투갈령 인도고아 인도 부왕(총독)으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외교 문서(묘호인 소장)와 함께 증정된 목록상의 갑옷이 확인되는 최초의 남만동 전래이다.[3] 히데요시가 남만동을 사용하거나 하사했다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1600년 리프데 호에 의한 것이 기록상 최초의 사용 예가 된다. 아케치 미츠하루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일본제 남만동 구족(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이 있지만, 이것 역시 실제로는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각국 선박은 적대국과의 항쟁과 항해지에서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여, 본래는 상선인 리프데 호와 같은 배에서도 무구를 싣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였고, 이는 스페인, 포르투갈로부터 일본으로 항해했던 선박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시기와 지역이 약간 다르지만, 지중해 무역에서는 이탈리아제 갑옷은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 항해한 배에서 남만동을 입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사료가 현존하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2. 2. 남만동의 제작과 발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당세구족의 일종으로, 서양에서 수입된 갑옷('남만구족')의 동(胴)에 풀섶, 소매 등을 부착하는 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앞뒤 2장의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의 하단이 뾰족하고, 전면 중앙부가 예각적으로 솟아 있어 조총의 공격에도 강했다.

이와 유사하게, 서양의 투구를 수입·개조·모방한 것을 '남만 투구'라고 불렀다.

동과 투구만 서양 갑옷의 양식을 도입하고, 그 외에는 일본 갑옷의 양식을 채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서양의 해병이 착용한 갑옷은 육전용 플레이트 아머에서 팔 부분, 다리 부분의 부품을 생략한 것으로, 그것이 그대로 일본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팔 부분, 다리 부분은 일본의 양식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서양 갑옷은 개인의 체격에 맞춰 주문 제작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착용하면 움직이는 것도 곤란했고, 풀 세트의 갑옷을 수입한 경우에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 산악 지형이 많고 성의 형식 차이로 인해, 일본 무사는 경사지나 돌담을 기어 올라 전투를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서양 갑옷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남만동구족은 희귀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무장에게 애용되었지만, 무게가 무겁고 고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남만동 구족을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와타나베 모리츠나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에게도 자신의 남만 투구를 주었는데[1], 이것은 일본에 표착한 리프데 호(윌리엄 애덤스가 탑승한 배)에서 회수한 갑옷을 재이용한 것이다. 이 남만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착용 및 하사되었다[2].

이후 순수 국산 일본식 남만동도 만들어졌다. 수입 개조품은 동 하단이 뾰족하고 V자형인 반면, 일본식 남만동은 뾰족하지 않고 역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는 점이 구별 방법이다. 이는 일본식 띠를 매는 착용 방식에서는 앞이 뾰족하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남만동은 그 견고함을 확인하고 강도를 과시하기 위해 총으로 시험 사격을 하는 것이 행해졌으며, 현존하는 유품에는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존재한다. 일본식 남만동에서도 이 시험 사격이 행해졌지만, 나중에는 탄흔과 같은 무늬를 조각한 겉치레용도 제작되었다. 실전에서의 탄흔이 남아 있는 유품도 있으며, 나루세 요시마사 소용 남만동이 그 좋은 예이다.

3. 특징

남만동구족은 희귀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유력 무장들이 애용했지만, 무겁고 가격이 비쌌다. 남만동의 견고함을 확인하고 강도를 과시하기 위해 총으로 시험 사격을 하기도 했으며, 현존하는 유물 중에는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있다. 일본식 남만동도 시험 사격을 했지만, 나중에는 탄흔과 같은 무늬를 새긴 겉치레용도 제작되었다. 나루세 요시마사가 사용한 남만동처럼 실전에서 생긴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유물도 있다.[1]

3. 1. 구조적 특징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당세구족의 일종으로, 서양에서 수입된 갑옷('''남만구족''')의 동(胴)에 풀섶, 소매 등을 부착하는 등의 개조를 가한 것이다. 앞뒤 2장의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의 하단이 뾰족하고, 전면 중앙부가 예각적으로 솟아 있어 조총의 공격에도 강했다.

이와 유사하게, 서양의 투구를 수입·개조·모방한 것을 '''남만 투구'''라고 부르며 사용되었다.

동과 투구만 서양 갑옷의 양식을 도입하고, 그 외에는 일본 갑옷의 양식을 채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서양의 해병이 착용한 갑옷은 육전용 플레이트 아머에서 팔 부분, 다리 부분의 부품을 생략한 것으로, 그것이 그대로 당시 일본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팔 부분, 다리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양식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서양 갑옷은 개인의 체격에 맞춰 주문 제작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착용하면 움직이는 것도 곤란했고, 풀 세트의 갑옷을 수입한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 산악 지형이 많고, 또한 성의 형식의 차이로 인해, 일본 무사는 경사지나 돌담을 기어 올라 전투를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서양 갑옷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 희귀함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무장에게도 애용되었지만, 무게가 무겁고 고가의 갑옷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남만동 구족을 자신이 애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와타나베 모리츠나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또한 구로다 나가마사에게도 자신의 남만 투구를 주었는데[1], 이것은 일본에 표착한 리프데 호(윌리엄 애덤스가 탑승한 배)에서 회수한 갑옷을 재이용한 것이다. 이 남만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착용 및 하사되었다[2].

이것을 모방하여, 순수 국산의 일본식 남만동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구별 방법으로는, 수입 개조품의 남만동은 동 하단이 뾰족하고 V자형인 반면, 일본식 남만동은 뾰족하지 않고 역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식 띠를 매는 착용 방식에서는, 앞이 뾰족하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만동은 그 견고함을 확인하고 강도를 과시하기 위해, 총으로 시험 사격을 하는 것이 행해졌으며, 현존하는 유품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존재한다. 일본식 남만동에서도 이 시험 사격이 행해졌지만, 나중에는 탄흔과 같은 무늬를 조각한, 겉치레용도 제작되었다. 실전에서의 탄흔이 남아 있는 유품도 있으며, 나루세 요시마사 소용 남만동이 그 좋은 예이다.

3. 2. 남만 투구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당세구족 중 하나로, 서양 투구를 수입, 개조, 또는 모방한 것을 '''남만 투구'''라고 부른다.

동(胴)과 투구만 서양 갑옷 양식을 도입하고, 나머지는 일본 갑옷 양식을 채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당시 서양 해병의 갑옷은 육전용 플레이트 아머에서 팔, 다리 부분을 생략한 것이었고, 일본은 이를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에 팔, 다리 부분은 일본식으로 보충해야 했다.

# 당시 서양 갑옷은 개인 맞춤 제작이었고, 다른 사람이 착용하면 움직이기 어려웠다. 풀 세트 갑옷을 수입해도 그대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 일본 무사는 산악 지형과 성의 형식 때문에 경사지나 돌담을 기어 올라 싸우는 경우가 많아, 서양 갑옷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무장들이 희귀함 때문에 남만 투구를 애용했지만, 무겁고 비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리프데 호(윌리엄 애덤스 탑승)에서 회수한 갑옷을 재이용하여 자신의 남만 투구를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주었다[1]. 이 남만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착용 및 하사되었다[2].

3. 3. 일본식 남만동과의 차이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당세구족 중 하나인 남만동구족은 서양 갑옷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일본식 갑옷의 특징을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식 남만동은 수입된 남만동을 모방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일본식 남만동과 수입 남만동의 주요 차이점
구분형태총탄 흔적
수입 및 개조 남만동동(胴) 하단이 뾰족하고 V자형총탄 시험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음
일본식 남만동동(胴) 하단이 뾰족하지 않고 역 사다리꼴실제 총탄 흔적 외에 장식용으로 새겨 넣은 경우도 있음



이는 일본식 띠를 매는 방식에서는 앞이 뾰족하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남만동은 견고함을 과시하기 위해 총으로 시험 사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현존하는 유물 중에는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나루세 요시마사가 사용했던 남만동에는 실전에서 생긴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1]

4. 현대 매체에서의 묘사

현대 오락 매체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남만동을 애용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사료상으로는 1588년에 포르투갈령 인도고아 인도 부왕(총독)으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외교 문서(묘호인 소장)와 함께 증정된 갑옷이 최초의 남만동 전래로 확인된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만동을 사용하거나 하사했다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1600년 리프데 호에 의한 것이 기록상 최초의 사용 예이다. 아케치 미츠하루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일본제 남만동 구족(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역시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5. 갤러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소유 남만동구족 (투구 부분만 수입품, 중요문화재,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전해지는 아케치 미츠하루 소유 (일본 제작) 남만동구족,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16 - 17세기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6. 남만동을 다룬 작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카게무샤』(1980년)와 카도카와 하루키의 영화 『천지인』(1990년)에서 남만동이 등장한 이후, 영상 작품, 만화, 게임 등에서 남만동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NHK의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 시리즈 『세키가하라 전투 이에야스 수수께끼의 대돌격 ~유럽제 갑옷의 위력~』 편에서도 남만동을 다루었다.[1]

6. 1. 영화

최근 영화 작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년)에서의 오다 노부나가의 이미지는 강한 영향을 미쳐, 이후의 영상 작품, 만화, 게임 등에서 남만동과 망토를 걸친 노부나가 상이 고정화되었다. 또한, 카도카와 하루키의 『천지인』(1990년) 상영 이후, 우에스기 겐신과 남만동을 연결시키는 이미지도 일부에 유포되었다.

6. 2. 다큐멘터리

NHK에서 제작한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 시리즈 중 『세키가하라 전투 이에야스 수수께끼의 대돌격 ~유럽제 갑옷의 위력~』 편이 있다.[1]

참조

[1] 문서 これらは何れも現存している。
[2] 문서 徳川家の後の伝承では、関ヶ原の戦いでは伊予札黒糸威胴丸具足(歯朶具足)、大坂の陣では南蛮胴を着用したというが、当時の史料上は逆になる。また家康の南蛮兜の中には歯朶の前立を付けたもの伝来している。
[3] 문서 この外交文書と贈答品はヴァリニャーノ神父に託され、 天正遣欧少年使節団も共に帰国した。日本(長崎市)への到着が1590年7月、秀吉への謁見が1591年3月であ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