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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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그는 성리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인 실학을 집대성했으며, 법, 정치, 경제,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자세를 강조한 《목민심서》, 형벌과 옥사에 대한 주의를 담은 《흠흠신서》, 국가 경영에 관한 제도와 법규를 논한 《경세유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꼽힌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생활 중에도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지속했으며, 201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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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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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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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정약용 |
한자 이름 | 丁若鏞 |
로마자 표기 | Jeong Yak-yong |
다른 이름 | 미용 송보 |
호 | 다산(茶山) |
자 | 문도 |
출생일 | 1762년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 |
사망일 | 1836년 (74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부 마재 사저 |
본관 | 나주 |
종교 | 유교(성리학) 천주교(세례명: 요한) 유교(실학) |
배우자 | 풍산 홍씨 부인 |
자녀 | 슬하 6남 3녀 (아들 정학연, 아들 정학유) |
부모 | 정재원(부) 해남 윤씨 부인 윤소온(모) 의령 남씨 부인(전모) 김씨 측실(서모) |
형제 | 첫째 형 정약현,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
친인척 | 조부 정지해, 숙부 정재운 · 정재진, 사돈 심오, 매부 이승훈, 처남 이복형 이벽, 외사촌 윤지충, 손자 정대림 · 정대무 · 정유역 |
학력 | |
학력 사항 |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 갑과(甲科) 아원(亞元) 급제 |
직업 및 분야 | |
직업 | 문관, 실학자, 저술가 |
분야 | 성리학, 실학 |
2. 어린 시절
다산 정약용은 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에게 예리한 관찰력을 인정받았고, 아홉 살에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4] 1776년, 풍산 홍씨인 홍화보와 결혼하고, 정조 즉위 후 아버지가 호조(戶曹)에 임명되면서 서울로 이사했다. 15세에 이가환과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저술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평생 이와 같은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했다.[4] 17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4]
2. 1. 출생과 성장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34]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다.[35]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5대손녀였다.[50][34]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었다. 정약용의 가계는 세조 때부터 8대에 걸쳐 관직을 이어왔으나, 정약용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34]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출세에 욕심이 없어 응시하지 않았다.[38] 뒤늦게 생활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 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39][40]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사건(5월)이 발생했고, 아버지 정재원은 이에 충격을 받아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했다.[36][2]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에게 아버지는 '귀농(歸農)'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는데,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였다.[36] 정약용은 관직에서 물러난 아버지에게서 집중적인 지적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2]
2. 2. 가문의 내력
정약용의 본관은 압해(押海)였다. 압해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 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41] 정약용의 조상들은 고려 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 개국 후 서울로 이주했다. 11대 조부 정자급(丁子伋)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44]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판서를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병조참의를 지낸 정시윤 등이 그들이다.[44]8대 조상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데,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린 중요 부서로 학문이 높은 학자 관료만 들어갈 수 있었다.[41] 조선의 역대 문과 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홍문관에서 근무한 자들은 따로 표시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 시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곳을 거쳐갔다.[42] 정약용은 평소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하며 학문 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41]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남인이 몰락하자, 5대조 정시윤은 당쟁을 피해 경기도 광주 마현(馬峴)으로 옮겨 살았다.[43] 고조부 정도태(丁道泰), 증조부 정항신(丁恒愼)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44][45] 고조 정도태, 증조 정항신은 진사시에 입격했고, 조부 정지해(丁志諧)는 통덕랑에 올랐다.
2. 3. 학문 수련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 없이[46]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다니며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형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에게 배웠으나 정약용은 아버지의 가르침 외에 독학하였다.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고 책을 통해 스스로 익혔다.[47]네 살에 천자문을 배웠고,[48]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었다. 열 살 이전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49]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 천연두를 앓고 난 후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열 살 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하여 지은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49]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았으나, 왕족 출신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아났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여,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수많은 조선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또한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여섯 살 때 이미 아버지에게 예리한 관찰력을 인정받았고, 아홉 살에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1776년, 풍산 홍씨인 홍화보와 결혼하고, 정조 즉위 후 아버지가 호조(戶曹)에 임명되면서 서울로 이사했다. 15세에 이가환과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저술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평생 이와 같은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17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2. 4. 성호학파 입문
1776년 정약용은 결혼 후 처가를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123] 같은 해 아버지가 호조 좌랑이 되면서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다.[44]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는데,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자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정약용은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50]1777년,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 화순현 북쪽에 있는 동림사에서 형 정약전과 함께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44] 1783년에는 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3. 관직 생활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년)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한강 배다리 건설에 참여하였다.[52][53] 1791년 신해박해 때 모함을 받아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사망했다.
1794년 암행어사로 경기도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경기도의 밀사로 부정부패 조사를 맡았다.[52] 1795년 을묘박해 사건으로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52] 이후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 동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 요구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의 모습을 보였다.[54]
3. 1. 초기 관직 활동
1789년(정조 13년),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52][53]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사망했다.3. 2. 수원 화성 건설 참여
정약용은 토목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1792년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舟橋)에 감명을 받은 왕은 정약용에게 아버지의 새 능을 조성한 후 왕이 거처할 궁궐을 둘러싼 화성(현재의 수원) 성곽의 설계와 건설 감독을 맡겼다. 정약용은 유럽, 중국,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획기적인 새로운 기술과 구조물을 고안해냈다.
3. 3. 암행어사 활동
1794년 음력 10월에 정약용은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같은 해, 여러 차례 승진한 후 왕은 정약용을 경기도의 밀사로 임명하여 부정부패 보고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52]3. 4. 지방관 근무
1795년 을묘박해 사건 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52]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54]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4. 천주교와의 관계
정약용은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했다. 1784년 이벽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으나,[52]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김범우가 투옥되고 이벽이 사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정약용은 일시적으로 배교했다가 천주교인들과 교제를 재개하기도 했다.
1787년에는 이승훈 등과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반회사건으로 곤란을 겪었으나, 아버지 정재원의 명으로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유지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외척 윤지충이 처형당하고 매부 이승훈이 삭탈관직 당하자,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의 관계로 인해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정약전도 배교했으나, 정약종은 계속 신앙을 지켰다.
1795년 주문모 신부 밀입국 사건으로 이승훈, 이가환과 함께 연루 의혹을 받아 황해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으나, 이존창을 체포하는 등 천주교 확산을 막는 노력을 했다.
1800년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용은 천주교와 결별했음을 주장하고 적극적으로 변론했으나, 친족 관계로 인해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유배되었다.
4. 1. 천주교 입문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을 통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했다. 1777년과 1779년에는 권철신이 주도한 경기도 양주의 주어사와 천진암 서학교리 강습회에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했다.[55][56] 1784년 4월,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매료되어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심취했다.[44][57] 그러나 이 인연은 훗날 그에게 많은 고초를 안겨주었다.[58]4. 2. 명례방 사건과 반회사건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52] 이승훈이 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명례방공동체'라는 신앙모임을 운영하였는데,[59] 정약용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러던 중 1785년 초에 이 비밀모임이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벌어진다.[60][61] 다행히 중인 신분인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 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 끝에 식음전폐하다 사망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 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 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52]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62] 이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어 있었다.[62] 1788년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63][64]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65]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66]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놓지 못했다.
4. 3. 신해박해와 을묘박해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지하여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66] 조상제사 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 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67]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68][69]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70]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71][72] 그러나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 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73] 집안 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 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 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74]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 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74]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 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75][76][77] 조용히 지나가는 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78][79]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80][81]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82] 지방 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조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 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83]
4. 4. 신유박해와 유배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아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남인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89][90] 정순왕후는 정조와 원수지간이었기에, 정조 때 성장한 남인을 박멸하려 했다.[94] 노론 벽파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을 제거하려 했고,[96]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정약용은 1791년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주장하며,[100][101][102] 1797년 《자명소》, 1799년 《책사방략》을 저술하고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 배교를 분명히 했다.[103][104][105] 국문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변론하며 황사영 등을 고발하고,[106] 천주교 신도 색출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106]
그러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107] 정약종은 셋째 형,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에 궁지에 몰렸다.[108] 여러 신자들의 증언으로 정약용의 배교가 명백해져,[109]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19] 1801년 음력 11월 23일(양력 12월 28일)에 강진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동문 밖 과부의 여관 뒷방(사의재)에 거처했다.[7] 1805년 김씨 왕대비가 죽고 어린 국왕이 성년이 되자 천주교도에 대한 폭력이 종식되었다. 정약용은 강진 지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같은 해 봄 백련사의 혜장과 만나 교류했다. 1808년 봄,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 가을까지 유배 생활을 했다.[7]
5. 유배 생활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후, 정순왕후의 주도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면서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로, 이승훈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유배가 더욱 강화되었다.
황사영은 베이징 주교에게 서양 열강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발각되면서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보내졌다.
5. 1. 유배 기간의 저술 활동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6]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1801년 11월 23일(음력), 양력으로는 12월 28일에 그는 전라남도 강진에 도착했다. 돈도 친구도 거의 없이 강진읍 동문 밖 과부가 운영하는 허름한 여관 뒤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1805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방을 "사의재"(사려 깊은 생각, 진지한 태도, 조용한 말씨, 성실한 행동의 네 가지 의무의 방)라고 불렀다.
1805년 봄, 백련사의 승려 혜장과 만났다. 혜장은 정약용보다 약 10살 어렸으며, 주역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들은 곧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같은 해 후반, 혜장은 다산이 여관을 나올 수 있도록 도왔고, 그는 혜장이 관리하는 인근 고성사의 작은 암자 보은산방에서 거의 1년 동안 살았다.
1808년 봄, 그는 강진과 그 만을 내려다보는 언덕 비탈에 있는 어머니의 먼 친척 소유의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초가지붕의 단출한 집이었지만, 그는 1818년 가을까지 유배 생활의 남은 10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곳은 현재 "다산초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집 근처에 머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밀접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의 서재에는 1,000권이 넘는 책이 모여 있었다.[7]
유배 생활 중 그는 500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유배 생활 중 그는 먼저 ''주역''에 집중하여 1805년 ''추역사전''을 저술했다. 1809년에는 ''시경''에 대한 성찰이 뒤따랐다. 그는 정치, 윤리, 경제, 자연 과학, 의학, 음악에 관해 저술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다산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출판했다. 법률학에 관한 ''흠흠신서|欽欽新書한국어''(1819), 언어학에 관한 ''어언각비''(1819), 외교에 관한 ''사덱고려산보''(1820), 통치술에 관한 ''목민심서''와 행정에 관한 ''경세유표''(1822) 등이다.[8]


다산 정약용은 생애 동안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그의 경세사상은 “일표이서”라고 불리는 세 권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20]
그 외에도 지리에 관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대동수경』(大東水經), 의학에 관한 『마과회통』(麻科會通), 행정 개혁에 관한 『전론』(田論)·『탕론』(湯論), 『다산집』(茶山集) 등의 저서가 있다.
5. 2. 유배지에서의 교류
정약용은 1805년 봄, 백련사의 승려 혜장을 만나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혜장은 정약용보다 10살 정도 어렸으며, 주역을 배우고 싶어 했다.[7] 정약용은 이미 차의 효능과 제조 방법을 알고 있었고, 혜장을 비롯한 지역 승려들에게 압축차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9]1809년에는 대흥사의 승려 초의가 강진의 정약용을 방문하여 함께 공부했다. 초의는 정약용에게서 차와 압축차 제조법을 배웠고, 1830년 서울 방문 중 여러 학자들에게 차를 나누어 주었다. 특히, 박영보는 「남차병서」(南茶幷序)라는 시를 지어 차를 기념했다.[11]
초의는 김정희와도 가까워졌는데, 김정희는 1740년대 제주도 유배 생활 중 초의를 여러 번 방문하여 차를 선물 받았다. 정약용이 1830년에 제자 이시헌(1803~1860)에게 보낸 편지에는 압축차 만드는 방법이 남아있다. "따서 딴 잎을 세 번 쪄서 세 번 말린 후 아주 잘 갈아야 한다. 다음으로 바위 샘물과 완전히 섞어 진흙처럼 두드려 밀도 높은 반죽을 만들어 작은 떡 모양으로 만든다. 그래야만 마실 수 있다."[12]
6. 말년과 사후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11세에 불과한 순조가 즉위했다. 실권은 정순왕후에게 돌아갔는데, 그녀의 가문은 남인 세력과 대립하는 당파에 속해 있었다.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이승훈과 함께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밝혀져 포항 장기현으로 유배를 떠났으나,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유배 생활이 더욱 길어졌다.[6]
황사영은 정약용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박해는 더욱 심화되었고, 정약용과 그의 동생 정약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분명하지 않았다면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함께 유배되었고, 나주에서 갈라져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향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유배는 1801년 음력 11월 23일(양력 12월 28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돈도 친구도 거의 없이 강진읍 동문 밖 과부가 운영하는 허름한 여관 뒷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1805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방을 "사의재"(사려 깊은 생각, 진지한 태도, 조용한 말씨, 성실한 행동의 네 가지 의무의 방)라고 불렀다.
1805년 정순왕후가 사망하면서 천주교 박해가 종식되었다. 정약용은 강진 지역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백련사의 승려 혜장과 교류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1808년에는 어머니의 먼 친척 소유의 집(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유배 기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썼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약 14,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그는 주로 유교적 이상에 따른 국가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힘썼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다산은 법률학에 관한 ''흠흠신서|흠흠신서한국어''(1819년), 언어학에 관한 ''어언각비''(1819년), 외교에 관한 ''사덱고려산보''(1820년), 통치술에 관한 ''목민심서''와 행정에 관한 ''경세유표''(1822년) 등을 출판했다.[7]
그는 자신의 서재에 1,000권이 넘는 책을 모아 두었다.[7]
정약용은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강 근처의 집을 '여유당'이라 이름 짓고, 1836년 회혼일(결혼 60주년)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전기는 자신이 직접 쓴 ''자찬묘지명''과 증손자 정규영이 편찬한 ''사암선생연보''에 기록되어 있다.[8]
6. 1. 유배 해제와 죽음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8] 1836년 회혼일(결혼 60주년) 아침,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8] 정약용은 죽기 전 자녀들에게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라고 신신당부했다.[8]다산은 1818년 서울 근처의 가족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당파 싸움으로 인해 관직에 복귀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8]
6. 2. 사후 평가와 추증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도)'가 내려졌다.[110] 정약용은 장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이는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121]6. 3. 후손과 가계
정약용은 유배 생활 동안 폐족(廢族)으로 과거 시험 응시나 관직 진출이 불가능했으나, 손자 대에 이르러 직계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직에 나아가면서 폐족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진사에 합격하고 단양군수를 역임한 손자 정대림(丁大林), 참봉을 거쳐 삼척부사를 지낸 손자 정대무(丁大懋), 문과에 급제하고 비서원승을 지낸 증손자 정문섭(丁文燮) 등이 있다.[123]정약용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및 기타 정보 |
---|---|
조부 | 정지해(丁志諧, 1712년 ~ 1756년), 자는 우경(虞卿) |
조모 | 풍산 홍씨(1712년 ~ 1753년), 홍길보(洪吉輔)의 딸 |
아버지 | 정재원(丁載遠, 1730년 ~ 1792년), 자는 기백(器伯), 생원, 진주목사 역임 |
전모(前母) | 의령 남씨(1729년 ~ 1752년), 남하덕(南夏德)의 딸 |
이복형 | 정약현(丁若鉉, 1751년 ~ 1821년), 자는 태현(太玄), 이벽의 누이와 혼인, 3남 6녀를 둠. 맏딸 정난주는 황사영과 결혼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을 둠. 진사 |
생모 | 해남 윤씨 윤소온(尹小溫, 1728년 ~ 1770년), 윤덕렬(尹德烈)의 딸, 윤두서의 손녀, 윤선도의 오대손녀 |
큰형 | 정약전(丁若銓, 1758년 ~ 1816년), 자는 천전(天全), 자산어보 저술. |
작은형 | 정약종(丁若鍾, 1760년 ~ 1801년), 자는 양중(養重), 신유박해 때 순교. 장남 정철상(丁哲祥)도 순교. 후처 유소사(1761년 ~ 1839년), 후처소생 정하상(1795년 ~ 1839년)과 정정혜(1796년 ~ 1839년)는 기해박해로 순교. |
부인 | 풍산 홍씨(1761년 ~ 1839년), 홍화보의 딸.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 혼인.[123]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 2녀는 요절. |
장녀 | 정씨(1781년 7월 ~ 1781년 7월), 4일만에 사망 |
장남 | 정학연(丁學淵, 1783년 9월 12일 ~ 1859년), 아명 무장(武䍧) · 무아(武兒), 초명 후상(厚祥), 자는 치수(穉修) |
손자 | 정대림(丁大林, 1807년 5월 28일 ~ 1895년), 진사, 단양군수. 자는 사형(士衡) |
증손자 | 정문섭(丁文燮, 1855년 1월 20일 ~ 1908년 8월 15일), 문과 급제, 비서원승, 생부 정대무(丁大懋) |
손녀 | 정씨, 청풍 김씨 김형묵(金亨默)에게 출가 |
차남 | 정학유(丁學游, 1786년 7월 29일 ~ 1855년 2월 1일), 아명 문장(文䍧) · 문아(文兒), 초명 학상(學祥), 자는 치구(穉求) |
며느리 | 청송 심씨, 심오(沈澳)의 딸, 심각의 증손녀 |
손자 | 정대무(丁大懋, 1824년 5월 18일 ~ ?), 참봉, 삼척부사. 자는 자원(子園) |
손자며느리 | 청송 심씨, 심동량(沈東亮)의 딸, 심각의 현손녀 |
손자 | 정대번(丁大樊, 1833년 ~ ?), 통리군국사무아문 병무주사 |
손자 | 정대초(丁大楚, 1835년 ~ 1904년) |
손녀 | 풍천 임씨, 임우상(任祐常)에게 출가 |
손녀 | 해남 강씨, 강은주(姜恩周)에게 출가 |
삼남 | 천연두로 사망(1789년 12월 25일 ~ 1791년 4월 2일), 아명 구장(懼䍧) ·구악(懼岳) |
차녀 | 천연두로 사망(1792년 2월 27일 ~ 1794년 1월 1일), 아명 효순(孝順) · 호동(好童) |
삼녀 | 정씨 (丁氏 1793년 ~ ?), 윤서유(尹書有, 1764년 ~ 1821년)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년 ~ 1856년)와 1812년 혼인 |
사남 | 천연두로 사망(1796년 11월 5일 ~ 1798년 9월 4일), 아명 삼동(三童) |
오남 | 천연두로 사망(1798년 ~ 1798년) |
육남 | 천연두로 사망(1799년 12월 2일 ~ 1802년 11월 30일), 아명 농장(農䍧) · 농아(農兒) |
첩 | 남당네, 유배 생활을 함께 한 첩, 《남당사》 저자로 추정 |
서녀 | 홍임 |
누이 | 이승훈에게 출가 |
서모 | 김씨 (金氏, 1754년 ~ 1813년) |
이복 동생 | 정약횡(丁若鐄, 1785년 ~ 1829년), 자는 규황(奎黃) |
이복 누이 | 채홍근(蔡弘謹)에게 출가 |
이복 누이 |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 |
숙부 | 정재운(丁載運), 정지열(丁志說)의 양자로 출계 |
숙부 | 정재진(丁載進) |
배우 정해인은 정약용의 직계 6대손이다.[31]
7. 정약용의 사상
정약용은 조선 중기 성리학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법, 정치 이론, 한국 유교 경전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 그는 한국 유교 학문을 공자의 원래 사상과 직접 연결시키려 했으며, 이를 "수사(洙泗)" 학문이라 불렀는데, 이는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두 강을 가리킨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포함한 다양한 책을 출판했다.[13] 그는 유교도로서 정부가 빈곤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지방 수령들이 청렴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4]
정약용은 당대 철학자들이 무의미한 어원 연구에 몰두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철학 이론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학문이 음악, 의례, 법률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적인 주장이자 정치적 주장이었는데, 왕실에 봉사할 자격을 얻는 과거 시험이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저술은 ‘예(禮)’ 사상을 많이 다루는데, 그의 대표작이자 국가 경영 청사진을 제시한 『경세유표』의 원제가 『방례초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자신의 사상이 추구하는 바를 ‘예’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 개념을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 개념에 집중시켰으며, 이후 이를 고전 학문과 자연 과학 연구로 확장하고 분화시켰다.[15]
정약용은 한국식 제례 이론을 통해 덕치와 정치를 추구하는 사회정치적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의 본분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격려하고, ‘예(禮,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한 조선 후기의 전통 사회를 효과적으로 재활성화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인지 공식에 따라 문인들의 과도한 의례적 실천을 규제하고 민간의 음사(淫祀)를 제한하려 했다. 그의 관점에서 유교의 의례 개념은 부적절하거나 비실용적이었고, 민간의 음사는 불경하고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16]
7. 1. 실학 사상의 집대성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론과 예론 등의 논쟁에만 몰두하던 당시 학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보다 실질적이고 가치 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추구하기 위해 공자와 맹자의 유학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였다.이이, 유형원, 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실학 사상을 집대성하였고, 당시 중국에 전래되던 서양의 종교와 과학 기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로운 학문의 목적을 고증, 경세, 목민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천(天)을 유형천, 주재천, 역리천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였다.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 윤리적으로는 정명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주자의 천리설과 이기설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인성론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은 기호라는 성기호설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과 금수지성의 양성이 있음을 밝혀 이들 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인물성동이논변에서는 한원진의 인물성론을 지지하면서도 기질의 성은 같지만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을 부정하였다. 주자의 이기론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와 맹자의 양기설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 사상과 연결시켰다.
역리의 성립 과정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 64괘 등을 미신적인 교리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성인을 신격화하는 것에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자의 충서, 효제 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 가지는 의무와 사명으로 삼았다. 성정중화론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 사상을 강조하였다.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와 타락을 성리, 훈고, 문장, 과거, 술수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 한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7. 2. 주요 사상
-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예론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 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 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 역리(易理)의 성립 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무엇보다도 조선 중기의 성리학 사상을 종합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법, 정치 이론, 한국 유교 경전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저술하였다. 그는 한국 유교 학문을 공자의 원래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경전으로의 복귀를 "수사(洙泗)" 학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두 강을 가리킨다.
정약용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인 『목민심서』를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유교도로서 정부가 빈곤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지방 수령들이 청렴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정약용은 당대 철학자들이 무의미한 어원 연구에 몰두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철학 이론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학문은 음악, 의례, 법률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지적인 주장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주장이기도 했다. 그는 왕실에 봉사할 자격을 얻는 과거 시험이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의 저술 상당 부분은 ‘예(禮)’ 사상을 다룬다. 그의 대표작이자 국가 경영 청사진을 제시한 『경세유표』의 원제가 『방례초본』이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자신의 사상이 추구하는 바를 ‘예’라는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제시한다. 그는 이 개념을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 개념에 집중시켰으며, 이후 이를 고전 학문과 자연 과학 연구로 확장하고 분화시켰다.[15]
다산의 한국식 제례 이론은 덕치와 정치를 추구하는 그의 사회정치적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의 본분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격려하고, ‘예(禮,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한 조선 후기의 전통 사회를 효과적으로 재활성화하려 했다.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제례를 중심으로 의례적 실천의 인식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인식 과정에서 의례 대상에 대한 인식은 마음/심장의 의도적인 움직임을 의례 대상으로 향하게 한다.
# 마음과 심장의 의도성은 의례 과정에서 숭엄과 정화를 수반한다. 의례적 실천은 성(誠)과 경(敬)을 통해 중요해진다. 종교 인지 과학의 관점에서 다산의 이론은 인지 과정에서 인지와 의도적인 경건함을 연결하고, 의례적 실천에서 의도적인 경건함과 숭엄/정화를 결합한다. 다산은 자신의 인지 공식에 따라 문인들의 과도한 의례적 실천을 규제하고 민간의 음사(淫祀)를 제한하려 했다. 그의 관점에서 유교의 의례 개념은 부적절하거나 비실용적이었고, 민간의 음사는 불경하고 지나치게 열정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지씨(Zhi Hsi)의 경(敬) 개념을 수렴된 경건함의 주의 깊은 집중으로 재정의하여 의도적인 경건주의로서의 신중한 숭엄 개념으로 만들었습니다. 지씨의 경(敬) 개념은 중재를 통한 선불교적 정(靜)과 같은 부정신비주의를 포함하지만, 다산의 숭엄 개념은 관조를 통한 긍정적 실천주의에 기울어져 있다.[16]
7. 3. 사회 개혁 사상
정약용은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사회주의적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제시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113]- 여전론(閭田論): '여(閭)'는 마을을 의미하며, 농민들이 공동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며, 수확물을 함께 나누는 사회주의적 토지 정책이다.
- 정전론(井田論):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8구역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1구역은 공동 경작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이다. 이는 1819년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구상한 것으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이었다.[113]
당시 조선 사회는 사대부가 농토의 100%를 독점하고, 평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 심각한 토지 불평등 상황이었다. 정약용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토지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은 경제 개혁에 있어서도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 公廉)를 통해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손부익빈(損富益貧)을 통해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다.[114] 또한,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는 환자, 재난 피해자 등으로 분류하고, 사회와 국가가 애민(愛民) 사상을 바탕으로 이들을 배려하여 조선이 복지 국가가 되기를 희망했다.[114]
수원 화성 건축 당시 정약용은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 비용을 절감하는 데 기여했다.[25][26]
8. 저서
다산 정약용은 생애 동안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20] 그의 경세사상은 "일표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지리에 관한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의학에 관한 『마과회통』, 행정 개혁에 관한 『전론』, 『탕론』, 『다산집』 등이 있다.
정약용은 일본에 대해 기록한 "일본고"(日本考)를 저술했으며, 일본 고학의 영향을 받아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기 소라이(荻生徂徠),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등의 견해를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 인용하였다.[30]
8. 1. 1표 2서
다산 정약용은 생애 동안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경세사상은 “1표 2서”라고 불리는 세 권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20]
- 경세유표(經世遺表): 국가 경영에 관한 제도와 법규를 논한 책으로, 관제, 군현제, 전제(田制), 부역, 공시(貢市), 창저(倉儲), 군제, 과거제, 해세(海稅), 상세(商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한다.
- 목민심서(牧民心書): 지방관(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태도, 구체적인 지침 등을 담은 책이다.
- 흠흠신서(欽欽新書): 형벌과 재판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제시한 책으로, 곡산부사 재직 시절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판결, 형벌, 치옥(治獄)에 대한 유의점을 담았다.
8. 2. 기타 저서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정약용이 회갑을 맞던 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이다.[8]
- 《맹자요의》
- 《춘추고징》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주역사전》
- 《역학서언》
- 《대학공의》
- 《대학강의》
- 《중용자잠》
- 《중용강의》
- 《아언각비․이담속찬》
- 《문헌비고간오》
- 《소학주관》
- 《소학기언》
- 《심경밀험》
- 《상례사전》
- 《상례외편》
- 《상의절요》
- 《제례고정》
- 《의례문답》
- 《상례작의》
- 《악서고존》
- 《시경강의》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 《대동수경》
- 《풍수집의》
- 《마과회통》
- 《삼미자집(三眉子集)》: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 《아학편(兒學編)》
- 《일본고》(日本考): 일본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이토 진사이(伊藤仁斎)·오기 소라이(荻生徂徠)·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등의 견해를 저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 인용하였다.[30]
9. 평가
정약용은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유형원, 성호 이익을 통해 내려온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의 사상이 급변하던 조선 사회에 완전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조선 학계의 진보적인 신학풍을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로 인정받는다.[115][116] 정인보는 정약용 연구가 조선 근세사와 조선 심혼(心魂) 연구라고까지 평가했다.
정약용은 한글을 외면하고,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였다는 비판도 있다.[117]
도쿄 니쇼가쿠샤대학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治久) 교수는 다산(茶山)에 대해 "평등주의적 사상 외에도, 정약용(丁若鏞) 다산은 당시 상실되었던 귀중한 무언가를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그의 요소들을 배우고 되살려야 합니다."라고 평가했다.
베이징 칭화대학의 펑린(彭林) 교수는 "다산은 의례 연구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저는 다산의 의례 연구가 매우 독창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아시아센터의 돈 베이커(Don Baker) 교수는 "21세기에도 우리는 다산의 정신, 제가 도덕적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10. 기타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에 대해 20세기 초반까지도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며 그를 혐오하였다. 1890년대 한국에 서점 개념이 도입된 이후에도 정약용의 저술들은 외면받았다.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이 정약용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122]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는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 홍씨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홍화보의 아버지 홍만기는 40세가 다 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보았는데,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국영의 고조부 홍중해, 혜경궁 홍씨의 증조부 홍중기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다.[1]
노론 벽파의 일원이었던 심환지는 정약용을 미워하면서도 특별대우했다. 정약용을 추국하면서 "혼우(婚友)라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중얼거린 것을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기록했다.[1]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는 1800년 초, 심욱(沈澳)의 딸과 결혼했는데, 심욱의 10대조 할아버지 심달원(沈達源)이 심환지의 10대조 할아버지 심연원(沈連源)의 친동생이었다. 심연원의 손자 심의겸과 그 후손들은 서인이 되었지만, 이황의 제자 기대승에게서 배운 심달원의 후손들은 동인, 남인 당원이 되었다.[1]
정약용이 등장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방송/개봉 연도 | 방송사/제작사 | 배역 |
---|---|---|---|
다산 정약용 | 1983년 | MBC | 정욱 |
파문 | 1989년 | MBC | 전국환 |
소설 목민심서 | 2000년 | KBS2 | 이진우 |
이산 | 2008년 | MBC | 송창의 |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 2009년 | OCN | 박재정 |
성균관 스캔들 | 2010년 | KBS2 | 안내상 |
구르미 그린 달빛 | 2016년 | KBS2 | 안내상 |
정조대왕 | 2007년 | 이훈 | |
영원한 제국 | 1994년 | 김명곤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2012년 | 천보근, 송중기 | |
자산어보 | 2021년 | 류승룡 | |
목민심서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 | 2000년 | KBS | 김학순 |
이산 | 2007년-2008년 | MBC | 송창의 |
정약용~이씨조선왕조의 사건簿~ | 2009년-2010년 | OCN | 박재정 |
10. 1.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2012년 장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는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년부터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가 일치하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 명사의 기념일을 유네스코 연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121]10. 2. 노론의 적개심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에 대해 20세기 초반까지도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며 그를 혐오하였다. 1890년대 한국에 서점 개념이 도입된 이후, 책을 자유롭게 구매하여 읽을 수 있었음에도 정약용의 저술들은 외면받았다.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이 정약용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122]10. 3. 홍국영, 심환지와의 관계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는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 홍씨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홍화보의 아버지 홍만기는 40세가 다 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보았는데,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국영의 고조부 홍중해, 혜경궁 홍씨의 증조부 홍중기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다.[1]노론 벽파의 일원이었던 심환지는 정약용을 미워하면서도 특별대우했다. 정약용을 추국하면서 "혼우(婚友)라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중얼거린 것을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기록했다.[1]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는 1800년 초, 심욱(沈澳)의 딸과 결혼했는데, 심욱의 10대조 할아버지 심달원(沈達源)이 심환지의 10대조 할아버지 심연원(沈連源)의 친동생이었다. 심연원의 손자 심의겸과 그 후손들은 서인이 되었지만, 이황의 제자 기대승에게서 배운 심달원의 후손들은 동인, 남인 당원이 되었다.[1]
10. 4. 정약용이 등장한 작품
- 다음은 정약용이 등장한 작품들이다.
작품명 | 방송/개봉 연도 | 방송사/제작사 | 배역 |
---|---|---|---|
다산 정약용 | 1983년 | MBC | 정욱 |
파문 | 1989년 | MBC | 전국환 |
소설 목민심서 | 2000년 | KBS2 | 이진우 |
이산 | 2008년 | MBC | 송창의 |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 2009년 | OCN | 박재정 |
성균관 스캔들 | 2010년 | KBS2 | 안내상 |
구르미 그린 달빛 | 2016년 | KBS2 | 안내상 |
정조대왕 | 2007년 | 이훈 | |
영원한 제국 | 1994년 | 김명곤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2012년 | 천보근, 송중기 | |
자산어보 | 2021년 | 류승룡 | |
목민심서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 | 2000년 | KBS | 김학순 |
이산(2007년-2008년, MBC) | 2007년-2008년 | MBC | 송창의 |
정약용~이씨조선왕조의 사건簿~ | 2009년-2010년 | OCN | 박재정 |
丁若鏞중국어 표기는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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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추구할 최상은?
AI가 가사 붙인 궁중음악, 100명이 무대에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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