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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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죽미"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자민당 내에서 차기 총리 후보로 주목받았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다나카 가쿠에이 등 5인의 유력 정치인에 대항하는 뉴 리더로 부상했으며, '안죽소'로 불리던 고사카 도쿠사부로가 정치적 영향력 저하로 제외되고 미야자와가 합류하면서 '안죽미'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안죽미'는 각 파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며,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총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치러진 총재 선거에서 주요 후보로 거론되었다. 이들은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타격을 입었으며, 아베는 질병으로, 다케시타는 록히드 사건의 영향으로, 미야자와는 정치 개혁 지연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2014년에는 이들의 후손들이 내각에 참여하며 '안죽미'의 계승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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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리더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뉴리더 |
| 로마자 표기 | Nyu-rideo |
| 인물 정보 | |
| 이름 | 안타케미야 |
| 로마자 표기 | Antakemiya |
| 개요 | |
| 설명 | 뉴리더란, 1980년대 초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 하에서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던 정치인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
| 주요 인물 |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
| 특징 | 이들은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 약화와 함께 부상했으며, 종종 "네오 뉴리더"로 불리기도 했다. |
| 추가 설명 | 1990년대에는 오자와 이치로, 하타 쓰토무, 가와무라 다케오, 가지야마 세이로쿠 등이 "네오·네오 뉴리더"로 불리기도 했으나, "뉴리더"라는 용어 자체가 낡은 표현이 되어 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
2. 안죽미의 등장 배경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나카, 오히라, 후쿠다, 나카소네의 5인(삼각대복중)에 대항하여 뉴 리더로서 활약했고, 장래의 총재 후보로 주목받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고사카 도쿠사부로 3명이 해학적으로 "안죽소"라고 불렸다.[1] 그러나 "안죽소"의 고사카는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스즈키 젠코 내각의 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 기이치가 뉴 리더로 더해지면서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이후 안죽미는 모두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타격을 입었다.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가 먼저 사임했고, 다케시타 내각도 퇴진했다. 아베 역시 총재 선거 출마 기회를 잃었다. 와타나베 미치오 또한 연루되어 총재 선거 출마를 보류했다. 가와모토 도시오는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네오 뉴 리더 세대인 가이후 도시키에게 총재 후보로서의 길을 양보했다.
아베는 1991년, 다케시타는 2000년, 미야자와는 2007년에 각각 사망하여 전원 별세하였다.
2. 1. 뉴 리더의 부상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후쿠다, 나카소네 5인(삼각대복중)에 대항하는 뉴 리더로 활약하며, 장래의 총재 후보로 주목받던 아베, 다케시타, 고사카 3명을 ""라고 불렀다.[1] 그러나 고사카는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스즈키 젠코 내각의 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가 뉴 리더로 더해지면서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안죽미"는 각각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파벌을 계승했다.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총재 임기 만료에 따른 총재 선거 및 나카소네 재정에서는 "안죽미" 3명만이 입후보를 표명했고, 후계 총재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이들을 "금붕어"라고 폄하하거나, 고토다 마사하루는 "총리 100점 · 총재 0점의 미야자와, 총재 100점 · 총리 0점의 다케시타, 총리 50점 · 총재 50점의 아베"라고 평하기도 했다.
"안죽미" 중 아베는 가장 먼저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아 "총재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가쿠후쿠 전쟁의 악영향과 외무 대신 시절의 격무 등으로 인해 병으로 쓰러져 총리 총재가 되지 못했다. 다케시타는 다나카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뒤 복귀를 노리는 다나카 가쿠에이에 의해 억눌렸다. 1987년 경세회를 설립하여 당내 최대 파벌의 영수가 되었고,[2]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자유민주당 총재이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미야자와는 70년대부터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미야자와를 싫어하는 정치인도 많아 취임이 늦어졌다. 다나카 로쿠스케 사망 후 1986년에 굉지회를 계승했고, 다케시타 퇴진·아베 서거 후 가이후 도시키의 후임으로 총리 총재가 되었다.
나카소네파를 계승하게 될 와타나베 미치오를 더해 '안죽미와', 가와모토 도시오를 더하여 '안죽미와하'라고 불리기도 했다.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아베의 아들인 신조가 내각총리대신, 다케시타의 동생인 와타루가 부흥대신, 미야자와의 조카인 요이치가 경제산업대신이 되어 세습된 차세대에서 "안죽미"가 모두 모였다.
2. 2. 안죽소에서 안죽미로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5인[1]에 대항하여 뉴 리더로서 활약했고, 자민당 내에서 장래의 총재 후보로 주목받았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고사카 도쿠사부로 3명이 해학적으로 불렸다.[1] 그러나 이 "안죽소" 중 고사카는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에 속하면서도 무파벌에서 가담한 외인이었고, 운수대신 시대에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재계 출신이면서도 도코 미노루 등 핵심 재계의 적극적인 지원을 잃었고, 게다가 국철 개혁을 밀어붙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저하시켰다. 그 결과 고사카 도쿠사부로를 대신하여 스즈키 젠코 내각의 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 기이치가 뉴 리더로 더해지게 되었고, "안죽소"는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3. 안죽미의 정치 역정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5인(삼각대복중)에 대항하여 뉴 리더로서 활약했고, 장래의 총재 후보로 주목받았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고사카 도쿠사부로 3명을 유머적으로 "안치쿠쇼(안죽소)"라고 불렀다.[1] 그러나 "안죽소" 중 고사카 도쿠사부로는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스즈키 젠코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 기이치가 뉴 리더로 더해지면서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안죽미"는 각각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파벌을 계승했다. 1987년 10월 3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총재 임기 만료에 따른 총재 선거 및 나카소네 재정에서는 "안죽미" 3명만이 입후보를 표명했고, 후계 총재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삼각대복중과 비교하면 인물이 작고, 세 사람 사이에 뚜렷한 차이도 보이지 않아, 이토 마사요시는 안죽미를 "금붕어"라고 말했고, 고토다 마사하루는 "총리 100점 · 총재 0점의 미야자와, 총재 100점 · 총리 0점의 다케시타, 총리 50점 · 총재 50점의 아베"라고 평했다.
리크루트 사건에서는 안죽미 3명 모두 연루되어 타격을 입었다.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먼저 사임했고, 다케시타 내각도 퇴진했다. 아베 신타로 역시 총재 선거 출마 기회를 잃었다.
와타나베 미치오를 더해 '''안죽미와''', 가와모토 도시오를 더하여 '''안죽미와하'''라고 불리기도 했다. 와타나베 또한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재 선거 출마를 보류했다. 가와모토는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네오 뉴 리더 세대인 가이후 도시키에게 총재 후보로서의 길을 양보했다.
아베는 1991년, 다케시타는 2000년, 미야자와는 2007년에 각각 사망하여 전원 사망했다.
2014년의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아베의 아들인 아베 신조가 내각총리대신, 다케시타의 동생인 다케시타 와타루가 부흥대신, 미야자와의 조카인 미야자와 요이치가 경제산업대신이 되어 세습된 차세대에서 "안죽미"가 모두 모였다. 하지만, 와타루는 2021년에, 신조는 2022년에 각각 사망하여, 현재는 요이치만 생존해 있다.
3. 1. 아베 신타로
아베 신타로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5인의 기성 실력자(삼각대복중)에 대항하는 뉴리더 중 한 명으로, 자유민주당 내에서 장래 총재 후보로 주목받았다.[1] "안죽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아 "총재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평가받았다.1986년, 아베는 후쿠다파(세이와회)를 계승하여 파벌 영수가 되었고, 외무대신을 4번 연속 맡아 "외교의 아베"로 불렸다.[1] 그러나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리 총재가 될 기회는 나카소네 재정 하의 총재 선거 한 번뿐이었다. 결국 지병으로 쓰러져 총리 총재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가이후 도시키 내각 2년 차인 1991년 5월 15일에 사망했다.
3. 2. 다케시타 노보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5인에 대항하여 뉴 리더로서 활약했고, 장래의 총재 후보로 주목받았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유머적으로 "안치쿠쇼(안죽소)"라고 불렸다.[1] 그러나 "안죽소" 중 고사카 도쿠사부로는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스즈키 젠코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 기이치가 뉴 리더로 더해지면서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다케시타는 다나카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획득한 뒤 복귀를 노리는 다나카 가쿠에이에 의해 억눌렸다. 총재 선거 출마는 다나카 입원 이후를 기다려야 했다. 1987년 7월 4일 스스로 다케시타파(경세회)를 설립하여 당내 최대 파벌의 파벌 영수가 되었고,[2] 같은 해 10월 20일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가장 먼저 자유민주당 총재이자 내각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리크루트 사건에서는 안죽미 3명 모두 관여로 인해 타격을 입었고,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가 먼저 대신 사임으로 내몰렸고, 이후 다케시타 내각도 퇴진했다.
다케시타는 2000년에 사망하였다.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다케시타의 동생인 다케시타 와타루가 부흥대신이 되어 "안죽미"가 모두 모였다. 하지만, 와타루는 2021년에 사망하였다.
3. 3. 미야자와 기이치
미야자와 기이치는 스즈키 젠코 내각의 관방장관을 맡으며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안죽미'라 불리는 뉴 리더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1] 1970년대부터 총재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으나, 다나카 가쿠에이 등 그를 싫어하는 정치인들이 많아 총재 취임이 늦어졌다.[1] 다나카 로쿠스케 사망 후 1986년에 굉지회를 계승했고, 다케시타 내각이 퇴진하고 아베가 사망한 뒤 가이후 도시키의 후임으로 총리 겸 총재가 되었다. 하지만 미야자와 개조 내각은 경세회의 내분과 정치 개혁 지연 등으로 인해 자민당이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리크루트 사건 당시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장 먼저 대신직에서 사임해야 했다.[1] 2007년에 사망했다.4. 리크루트 사건과 안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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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는 1980년대 일본 자유민주당 내에서 유력한 총재 후보로 꼽히던 세 명의 정치인이다. 이들은 "안죽미"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세 사람의 성(姓)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안죽미는 모두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리크루트 사건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뒤흔든 대규모 정치 스캔들로, 리크루트라는 회사가 정계와 관계에 뇌물을 제공한 사건이다.
- 아베 신타로: 세이와회(후쿠다파)를 계승하여 파벌 영수가 되었고, 외무대신을 4번이나 역임하며 "외교의 아베"로 불렸지만,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리 총재가 될 기회를 잃었다.[1] 1991년 가이후 내각 시절에 사망했다.
- 다케시타 노보루: 경세회(다케시타파)를 설립하여 당내 최대 파벌의 영수가 되었고,[2]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자유민주당 총재 및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올랐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내각이 퇴진하게 되었다.
- 미야자와 기이치: 다케시타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했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가장 먼저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총리 총재가 되었지만, 미야자와 개조 내각은 경세회의 내분과 정치 개혁 지연 등으로 인해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사망하였으나,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의 동생 다케시타 와타루가 부흥대신, 미야자와 기이치의 조카 미야자와 요이치가 경제산업대신으로 입각하여, 2세들 사이에서 다시 "안죽미"가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와타루는 2021년에, 신조는 2022년에 각각 사망하여, 현재는 요이치만 생존해 있다.
5. 안죽미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후쿠다, 나카소네의 5인, 이른바 '삼각대복중'에 대항하는 뉴 리더로 주목받던 아베, 다케시타, 고사카 3인을 안치쿠쇼일본어라고 불렀다.[1] 그러나 고사카는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스즈키 젠코 내각의 관방장관이었던 미야자와가 뉴 리더로 합류하면서 "안죽미"로 불리게 되었다.
"안죽미"는 모두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았고 실제로 파벌을 계승했다. 1987년 총재 선거에서는 "안죽미" 3명만이 후보로 나섰다.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이들을 '삼각대복중'에 비해 인물이 작고 뚜렷한 차이가 없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토 마사요시는 "금붕어", 고토다 마사하루는 "총리 100점 · 총재 0점의 미야자와, 총재 100점 · 총리 0점의 다케시타, 총리 50점 · 총재 50점의 아베"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베는 가장 먼저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아 "총재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평가받았지만, 가쿠후쿠 전쟁의 악영향과 외무 대신 시절의 격무로 병을 얻어 총리 총재가 되지 못했다. 1986년 후쿠다파(세이와회)를 계승하고 외무 대신을 4번 역임하며 "외교의 아베"로 불렸으나,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나카소네 재정 총재 선거가 사실상 유일한 기회였다. 1991년 5월 15일 가이후 내각 2년 차에 사망했다.
다케시타는 다나카파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억눌려 있다가, 다나카 입원 후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파(경세회)를 창립하여 당내 최대 파벌 영수가 되었고,[2] 같은 해 10월 20일 나카소네 재정으로 자유민주당 총재 및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미야자와는 1970년대부터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미야자와를 싫어하는 정치인들이 많아 취임이 늦어졌다. 1986년 굉지회를 계승했고, 다케시타 퇴진·아베 사망 후 가이후의 후임으로 총리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미야자와 개조 내각은 경세회 내분과 정치 개혁 지연으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카소네파를 계승한 와타나베 미치오를 더해 '안죽미와', 가와모토 도시오를 더해 '안죽미와하'라고 불리기도 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안죽미 3명 모두 타격을 입었다.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가 먼저 사임했고, 다케시타 내각도 퇴진했다. 아베도 총재 선거 출마 기회를 잃었다. 와타나베 역시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재 선거 출마를 보류했다. 가와모토는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네오 뉴 리더 세대인 가이후 도시키에게 총재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아베는 1991년, 다케시타는 2000년, 미야자와는 2007년에 각각 사망하여 모두 고인이 되었다.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아베의 아들 신조가 내각총리대신, 다케시타의 동생 와타루가 부흥대신, 미야자와의 조카 요이치가 경제산업대신이 되어 세습된 차세대 "안죽미"가 모두 모였다. 그러나 와타루는 2021년, 신조는 2022년에 사망하여 현재는 요이치만 생존해 있다.
6. 안죽미에 대한 평가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기성 실력자 5인에 대항하여 뉴 리더로서 활약했던 아베 신타로(아베), 다케시타 노보루(다케시타), 고사카 도쿠사부로(고사카) 3명을 해학적으로 "안치쿠쇼(안죽소)"라고 불렀다.[1] 그러나 고사카는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에 속하면서도 무파벌 출신이었고, 운수대신 시절 국철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다. 그 결과 스즈키 젠코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을 맡은 미야자와 기이치(미야자와)가 뉴 리더로 추가되면서 "안죽소"는 "안죽미"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안죽미"는 각각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으며, 실제로 파벌을 계승했다. 1987년 총재 선거 및 나카소네 재정에서는 "안죽미" 3명만이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이들을 삼각대복중에 비해 인물이 작고, 세 사람 간 뚜렷한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토 마사요시는 "금붕어", 고토다 마사하루는 "총리 100점·총재 0점의 미야자와, 총재 100점·총리 0점의 다케시타, 총리 50점·총재 50점의 아베"라고 평했다.
아베는 가장 먼저 파벌 후계자로 주목받아 "총재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평가받았지만, 가쿠후쿠 전쟁의 악영향과 외무 대신 시절의 격무로 인해 병으로 쓰러져 총리 총재가 되지 못했다. 1986년 후쿠다파(세이와회)를 계승하고 외무 대신을 4번 역임하여 "외교의 아베"로 불렸지만,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총재 선거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1991년 5월 15일 사망했다.
다케시타는 다나카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록히드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억눌려 총재 선거 출마가 늦어졌다. 1987년 7월 4일 다케시타파(경세회)를 설립하여 당내 최대 파벌 영수가 되었고,[2] 같은 해 10월 20일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자유민주당 총재 및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미야자와는 1970년대부터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다나카파 등 그를 싫어하는 정치인이 많아 취임이 늦어졌다. 굉지회 내 경쟁자였던 다나카 로쿠스케 사망 후 1986년 굉지회를 계승했다. 다케시타 퇴진·아베 사망 후 가이후 도시키의 후임으로 총리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미야자와 개조 내각은 경세회 내분과 정치 개혁 지연으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카소네파를 계승한 와타나베 미치오를 더해 '안죽미와', 가와모토 도시오를 더해 '안죽미와하'라고 불리기도 했다.
리크루트 사건에서 안죽미 3명 모두 연루되어 타격을 입었다. 다케시타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미야자와가 먼저 사임했고, 다케시타 내각도 퇴진했다. 아베도 총재 선거 출마 기회를 잃었다. 와타나베도 연루되어 총재 선거 출마를 보류했다. 가와모토는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네오 뉴 리더 세대인 가이후 도시키에게 총재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아베는 1991년, 다케시타는 2000년, 미야자와는 2007년에 사망하여 전원 사망했다.
2014년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는 아베의 아들 신조가 내각총리대신, 다케시타의 동생 와타루가 부흥대신, 미야자와의 조카 요이치가 경제산업대신이 되어 세습된 차세대 "안죽미"가 모두 모였다. 하지만 와타루는 2021년, 신조는 2022년에 사망하여 현재는 요이치만 생존해 있다.
참조
[1]
서적
昭和の宰相第7巻 田中角栄と政権構想
講談社
[2]
뉴스
田中角栄に反旗、竹下派旗揚げ 「政界のドン」金丸信(5)
https://www.nikkei.c[...]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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