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미치오
1. 개요
와타나베 미치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55년 도치기현 의회 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중의원 의원을 11번 역임했다. 후생대신, 농림수산대신, 재무대신, 통산산업대신,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1988년과 1995년의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1995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와타나베 요시미와 손자 와타나베 미치타로 역시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름 | 와타나베 미치오 |
|---|---|
| 로마자 표기 | Watanabe Michio |
| 한자 표기 | 渡辺 美智雄 |
| 출생일 | 1923년 7월 28일 |
| 출생지 | 오타와라시, 도치기현, 일본 |
| 사망일 | 1995년 9월 15일 |
| 사망지 | 도쿄, 일본 |
| 사망 원인 | 심부전 |
| 배우자 | 스미코 와타나베 |
| 자녀 | 요시미 와타나베 미치아키 와타나베 |
| 학력 | 도쿄 상과대학 부속 상업 전문부 졸업 |
| 직업 | 정치인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
| 종교 | 미확인 |
| 부총리 | 재임 기간: 1991년 11월 5일 ~ 1993년 4월 7일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 전임자: 미야자와 기이치 후임자: 고토다 마사하루 |
|---|---|
| 외무대신 | 재임 기간: 1991년 11월 5일 ~ 1993년 4월 7일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 전임자: 나카야마 타로 후임자: 무토 카분 |
| 통상산업대신 | 재임 기간: 1985년 12월 28일 ~ 1987년 7월 22일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임자: 무라타 게이지로 후임자: 다무라 하지메 |
| 대장대신 | 재임 기간: 1980년 7월 17일 ~ 1982년 11월 17일 총리: 스즈키 젠코 전임자: 다케시타 노보루 후임자: 다케시타 노보루 |
| 농림수산대신 | 재임 기간: 1978년 12월 7일 ~ 1979년 11월 9일 총리: 오히라 마사요시 전임자: 나카가와 이치로 후임자: 무토 카분 |
| 후생대신 | 재임 기간: 1976년 12월 24일 ~ 1977년 11월 28일 총리: 후쿠다 다케오 전임자: 하야카와 다카시 후임자: 오자와 다쓰오 |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총재: 다케시타 노보루 재임 기간: 1987년 ~ 1989년 |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구 도치기 1구 당선 횟수: 11회 재임 기간: 1963년 11월 22일 ~ 1995년 9월 15일 |
| 작위 및 훈장 | 종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
|---|---|
| 친족 (정치인) | 손자: 와타나베 미치타로 (전 중의원 의원, 제4대 나스시오바라 시장) 딸: 와타나베 요시미의 여동생 (2017년 중의원 선거 출마) |
| 참의원 회의록 정보 | |
| 산케이 신문 기사 | |
| 마이니치 신문 기사 | |
| 현대 비즈니스 기사 | |
| 와타나베 요시미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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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 -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조선인 도공 후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만주, 스위스, 독일, 소련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소일 중립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무대신으로서 미일 관계 개선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전범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며, 종전 과정에서 포츠담 선언 수용을 주장하여 일본 항복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일본 외무성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일본의 농림수산대신 -
하타 쓰토무
하타 쓰토무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농림수산대신, 대장대신 등을 거쳐 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자민당을 탈당 후 신생당을 창당, 정치 개혁에 힘썼으나 짧은 수상 임기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
일본의 농림수산대신 -
가노 미치히코
가노 미치히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운수성 정무차관, 농림수산대신 등을 지냈고, 여러 정당을 거쳐 간 나오토 내각과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장관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농림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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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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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2. 생애
1942년 도쿄 상과대학(지금의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요미우리 신문 기자, 회계사로 활동하다 1955년 자유당 공천으로 도치기현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11선 의원을 지냈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대신(1976년~1977년),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농림수산대신(1978년~1979년), 스즈키 젠코 내각 및 개조 내각의 재무대신(1980년~1982년),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제2차 개조 내각의 통산산업대신(1985년~1986년)을 역임했다.
198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과 1995년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및 개조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1991년~1993년)을 지냈다.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간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하여,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의 방중을 성사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92년 담석으로 입원하였으나, 더욱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1993년 건강 문제로 사임하였다. 1995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일본의 사절단을 이끈 후, 그해 9월 15일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2.1. 초기 생애 및 정계 입문
1923년 7월 도치기현 오타와라시에서 태어났다. 1942년 도쿄 상과대학(지금의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한 후, 요미우리 신문 기자와 회계사로 활동하였다.
1955년 자유당 공천으로 도치기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현 의원직을 사퇴하고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11선을 기록하며 평생 의원직을 역임하였다.
1973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일중 국교 정상화와 금권 정치에 반대하는 친대파 보수계 젊은 의원들에 의해 결성된 청람회에 참가하여 대표 간사가 되었다.
1974년 세무사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대장 소위원회에서 이이즈카 사건에 대해 질문하여 국세청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다. 이 국회 질문을 계기로 국세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건이 종결되었다.
2.2. 주요 정치 경력
1955년 자유당 공천으로 도치기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처음 당선된 후, 11선 의원을 지냈다.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대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농림수산대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스즈키 젠코 내각 및 개조 내각의 재무대신,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제2차 개조 내각의 통산산업대신을 역임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및 개조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으나, 1993년 건강 문제로 사임하였다.
와타나베는 여러 차례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8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으로, 1995년에는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2.2.1. 농정 전문가이자 재정 전문가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입후보해 처음으로 당선된 후, 11선 의원을 지냈다.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대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농림수산대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스즈키 젠코 내각 및 개조 내각의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2.2.2. 나카소네 파벌의 핵심 인물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대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농림수산대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스즈키 젠코 내각 및 개조 내각의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는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제2차 개조 내각의 통산산업대신을 지내는 등, 나카소네 파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2.2.3. 외교 활동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및 개조 내각에서 일본의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다. 와타나베는 중화인민공화국에 관념적으로 반대하고 중화민국에 호의를 가졌지만, 부총리로서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간의 외교를 촉진하는 데 성과를 냈다. 일본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와의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1992년 첸치천 외교부장과 만나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다. 이 방문 기간에 이뤄진 대화는 그해 후반 아키히토 천황의 방중을 가능하게 하였다.
198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과 1995년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1992년 1월 14일, 뉴욕 타임스에 "일본군이 여성에게 군인과의 성관계를 강제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연행을 연결짓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2.3. 말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및 개조 내각에서 일본의 부총리 및 외무대신을 지냈다. 와타나베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반대하고 중화민국에 호의를 가졌지만, 부총리로서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간의 외교를 촉진하는 데 성과를 만들어 일본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1992년 첸치천 외교부장과 만나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으며, 이 방문 기간에 대화를 통해 그해 후반 아키히토 천황의 방중이 가능하게 되었다.
같은 해 와타나베는 담석으로 입원하였으나, 곧 더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1993년 건강 상태를 이유로 사임하였다. 1995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일본의 사절단을 이끈 후, 그해 9월 15일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맏아들 와타나베 요시미는 국회의 의석을 물려받아 민나노당의 당수로 지내고 있다. 손자 와타나베 미치타로(둘째 아들 와타나베 미치아키의 맏아들)는 참의원 의원이다.
3. 논란 및 비판
와타나베 미치오는 거침없는 말투로 유명했으며, 그의 언행은 "미치節(세쓰)"라 불리며 도치기 사투리가 섞인 화법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당시 야당의 고복지·저부담 정책을 털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 "중국은 정치가 나쁘기 때문에 땅을 파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발언했다. (이는 요동(窰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198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을 하였다.
* 1995년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을 하였다.
3.2. 한일병합 관련 망언
1988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과 1995년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4. 평가
와타나베 미치오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후 11선 의원을 지내며 후생대신, 농림수산대신, 재무대신, 통산산업대신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및 개조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맡아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2년에는 첸치천 외교부장과 만나 아키히토 천황의 방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미치오는 여러 차례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88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는 발언을, 1995년에는 "한일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발언을 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발언들은 그의 정치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5. 가족 관계
* 아들: 와타나베 요시미 - 국회의원, 민나노당 당수 역임.
* 손자: 와타나베 미치타로 (둘째 아들 와타나베 미치아키의 맏아들) - 참의원 의원.
6. 저서
国際協力ハンドブック일본어 (개정 제2판, 국제협력연구회, 1983년 3월)
7. 역대 선거 기록
| 선거명 | 시행일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 지방선거 | 1955년 | 도치기현의회 의원 | 당선 | 중선거구제 | ||||
| 지방선거 | 1959년 | 도치기현의회 의원 | 당선 | 중선거구제 | ||||
| 총선거 | 1960년 | 중의원 의원 | 무소속 | 35,837 | 9.4 | 7위 | 낙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63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60,196 | 16.3 | 5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67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66,818 | 17 | 3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69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72,541 | 17.4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72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76,951 | 17.81 | 2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76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95,602 | 20.85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79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16,100 | 27.77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80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33,372 | 27.43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83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43,623 | 35.86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86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33,035 | 27.42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90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00,881 | 18.52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
| 총선거 | 1993년 | 중의원 의원 | 자민당 | 132,796 | 25.09 | 1위 | 당선 | 도치기현 제1구, 중선거구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