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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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자와 기이치는 1919년 도쿄에서 태어나 2007년 사망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1953년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과 참의원을 거쳐 총 12선 의원을 지냈다. 1991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1993년까지 재임했으며, 1990년대 후반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평화유지군 파병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금융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 개혁 과정에서 불신임으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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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내각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와타나베 미치오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1991년 11월 6일부터 1993년 8월 8일까지 존속했던 자유민주당 중심의 일본 내각이며, 1992년 12월 12일 개각을 통해 일부 구성원이 변경되었다.
미야자와 기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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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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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 喜一) |
로마자 표기 | Miyazawa Kiichi |
출생일 | 1919년 10월 8일 |
출생지 | 후쿠야마시, 히로시마현, 일본 제국 |
사망일 | 2007년 6월 28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정당 | 자유민주당 |
배우자 | 요코 미야자와 |
자녀 | 2명 |
학력 | 도쿄 제국대학교 |
서명 | MiyazawaK kao.png |
정치 경력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91년 11월 5일 ~ 1993년 8월 9일 |
국왕 | 아키히토 |
이전 총리 | 가이후 도시키 |
다음 총리 | 호소카와 모리히로 |
직책 | 자유민주당 총재 |
부총재 | 가네마루 신 |
간사장 | 와타누키 다미스케 가지야마 세이로쿠 |
재임 기간 | 1991년 10월 31일 ~ 1993년 7월 29일 |
이전 총재 | 가이후 도시키 |
다음 총재 | 고노 요헤이 |
장관 직책 | |
직책 | 재무대신 |
총리 |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
재임 기간 | 1998년 7월 30일 ~ 2001년 4월 26일 |
이전 재무대신 | 마쓰나가 히카루 |
다음 재무대신 | 시오카와 마사주로 |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
재임 기간 | 1986년 7월 22일 ~ 1988년 12월 9일 |
이전 재무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
다음 재무대신 | 다케시타 노보루 (대리) |
직책 | 농림수산대신 |
총리 | 미야자와 기이치 |
재임 기간 | 1993년 8월 4일 ~ 1993년 8월 9일 |
이전 농림수산대신 | 다나부 마사미 |
다음 농림수산대신 | 畑英次郎 |
직책 | 우정대신 |
총리 | 미야자와 기이치 |
재임 기간 | 1993년 7월 20일 ~ 1993년 8월 9일 |
이전 우정대신 | 고이즈미 준이치로 |
다음 우정대신 | 간자키 다케노리 |
직책 | 내각관방장관 |
총리 | 스즈키 젠코 |
재임 기간 | 1980년 7월 17일 ~ 1982년 11월 27일 |
이전 내각관방장관 | 이토 마사요시 |
다음 내각관방장관 | 고토다 마사하루 |
직책 | 경제기획청 장관 |
총리 | 후쿠다 다케오 |
재임 기간 | 1977년 11월 27일 ~ 1978년 12월 7일 |
이전 경제기획청 장관 | 구라나리 다다시 |
다음 경제기획청 장관 | 小坂徳三郎 |
총리 | 사토 에이사쿠 |
재임 기간 | 1966년 12월 3일 ~ 1968년 11월 30일 |
이전 경제기획청 장관 | 사토 에이사쿠 (대리) |
다음 경제기획청 장관 | 간노 와타로 |
총리 | 이케다 하야토 |
재임 기간 | 1962년 7월 18일 ~ 1964년 7월 18일 |
이전 경제기획청 장관 | 이케다 하야토 (대리) |
다음 경제기획청 장관 | 다카하시 마모루 |
직책 | 외무대신 |
총리 | 미키 다케오 |
재임 기간 | 1974년 12월 9일 ~ 1976년 9월 15일 |
이전 외무대신 | 기무라 도시오 |
다음 외무대신 | 고사카 젠타로 |
직책 | 통상산업대신 |
총리 | 사토 에이사쿠 |
재임 기간 | 1970년 1월 14일 ~ 1971년 7월 5일 |
이전 통상산업대신 | 오히라 마사요시 |
다음 통상산업대신 | 다나카 가쿠에이 |
의원 경력 | |
직책 | 중의원 |
선거구 | 히로시마 3구 (1967-1996) 히로시마 7구 (1996-2000) 주고쿠 비례대표 (2000-2003) |
재임 기간 | 1967년 1월 29일 ~ 2003년 10월 10일 |
직책 | 참의원 |
선거구 | 히로시마 |
재임 기간 | 1953년 5월 3일 ~ 1965년 6월 1일 |
이전 참의원 | 야마시타 기신 |
다음 참의원 | 후지타 마사아키 |
기타 정보 | |
출신 학교 | 구제 무사시 고등학교 도쿄 제국대학교 법학부 정치학과 |
이전 직업 | 대장성 대신 비서관 |
소속 정당 | 자유당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법학사 (도쿄 제국대학교, 1941년) 히로시마현 명예현민 후쿠야마시 명예시민 |
가족 (정치인) | 할아버지: 오가와 헤이키치 아버지: 미야자와 유타카 숙부: 오가와 헤이지 의숙부: 사이토 타츠키 동생: 미야자와 히로시 사촌 동생: 오가와 겐 조카: 미야자와 요이치 손녀: 미야자와 에마 |
2. 생애
1919년 도쿄부에서 태어나 히로시마현에 본적을 두었다. 1941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대장성에 들어갔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의 수행원으로 참석했다.[76]
1953년 정계에 입문하여 경제기획청 장관,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대장대신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모두 12선을 지냈다.[76] 1991년 가이후 도시키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1993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다시 대장상(현 재무상)으로 기용되어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 등을 지휘했다.[76]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주장하고, 평화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등 자신의 반전(反戰) 소신을 지켰다.[76] 총리 재임 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사죄를 표명하기도 했다.
2007년 6월 28일 도쿄도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주요 경력'''
연도 | 사건 |
---|---|
1919년 | 도쿄부에서 출생 (본적지는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
1941년 | 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15] |
1942년 | 대장성 입성[15] |
1943년 | 이지치 요우코와 결혼 |
1951년 |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 전권 수행원으로 참석[15] |
1953년 | 참의원 의원 당선 (히로시마 지방구)[15] |
1962년 | 경제기획청 장관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내각)[15] |
1966년 | 경제기획청 장관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내각)[15] |
1967년 | 중의원 의원 당선[15] |
1970년 | 통상산업대신 (제3차 사토 내각)[15] |
1974년 | 외무대신 (미키 내각)[15] |
1977년 | 경제기획청 장관 (후쿠다 다케오 개조내각)[15] |
1980년 | 내각관방장관 (스즈키 내각)[15] |
1984년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15] |
1986년 | 대장대신 (제3차 나카소네 내각)[15] |
1987년 | 부총리 겸 대장대신 (다케시타 내각)[15] |
1991년 | 자유민주당 총재, 내각총리대신[15] |
1993년 | 내각총사퇴 |
1998년 | 대장대신 (오부치 내각)[15] |
2001년 | 초대 재무대신 (모리 내각) |
2003년 | 정계 은퇴 |
2007년 | 사망 |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19년 도쿄부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지는 히로시마현이다. 아버지는 미야자와 유타카(宮澤裕)이며,[1][2] 어머니는 법무대신과 철도원을 지낸 정치가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의 딸이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에는 히라츠카시에 있는 할아버지 오가와 헤이키치의 별장 가스이안(霞庵)에서 살았다.[3]쓰쿠바대학 부속소학교(筑波大学附属小学校)의 전신인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무사시 고등학교 중학교(武蔵高等学校中学校)와 무사시 대학(武蔵大学)의 전신인 구제 무사시 고등학교(旧制武蔵高等学校)를 거쳐, 1941년 12월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1] 재학 중이던 1939년에는 제6회 일미학생회의(日米学生会議)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갔으며, 이때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18]
미야자와는 학창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학창 시절은 아시는 바와 같이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별로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자주 노(能)를 보러 다녔다. 다만, 집안이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는데 노 티켓은 당시 1엔 정도로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것을 사는 것이 힘들었다. 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우타이(謡)를 했고, 나도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우타이를 배웠다. 어릴 때부터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노 외에는 당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자주 보고, 레코드(レコード)를 사서 들었다. 칸다 짐보초(神田の神保町)에 중고 레코드 가게가 있어서, 자주 사러 갔다…" [20]
2. 2. 관료 경력
1941년 12월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1월 대장성에 들어갔다.[1] 1942년 재무성에 들어간 미야자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징병을 피했다.[1] 재무성 재직 시절 그는 미래의 총리 이케다 하야토의 눈에 들었다.1949년에는 이케다 하야토 재무대신 비서관으로서 강화조약 준비협상에 참여했다.[21] 1951년 8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의 수행원으로 참석했으며,[76] 같은 해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는 전권 수행원으로서 참가했다.[21]
2. 3. 정치 경력
1953년 정계에 입문하여 1962년 경제기획청 장관을 시작으로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대장대신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쳐 모두 12선을 지냈다.[76] 1991년에 가이후 도시키의 뒤를 이어 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1993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다시 대장상(현 재무상)으로 기용돼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 등을 진두 지휘했다.[76]1952년 이케다 통산대신이 이른바 이케다 하야토의 "중소기업 발언"으로 불신임되자, 미야자와도 대장성을 사퇴했다. 이듬해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히로시마현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2]
참의원 의원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1962년 제2차 이케다 개조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첫 입각하여 이케다 총리의 브레인 중 한 명으로서 소득배증정책을 담당했다. 텔레비전 정치 토론회 등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며 자유민주당의 뉴 라이트(신보수)를 대표하는 젊은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중의원으로의 입후보를 요청받아 참의원 임기 만료 후 잠시 비의원의 입장이 되었지만,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내각에서 비의원 신분으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1967년 중의원에 입후보하여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었다. 이후 통산상, 외무상,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당내에서는 이케다파(宏池会)에 소속되어 1973년에는 파벌을 초월한 그룹인 "히라카와카이"(平河会)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일찍부터 자유민주당 총재 후보로 여겨졌으며, 다나카 가쿠에이(1974년)의 뒤를 이을 총재로 추대하려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나왔다. 또한, 소니(ソニー) 회장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등의 주선으로 정재계 단체인 "자유사회연구회"(自由社会研究会)(1977년)가 결성되었는데, 이것이 미야자와를 총재로 추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22] 1979년 40일 항쟁 수습책의 하나로 미야자와 총재 추대가 거론되기도 했다.[23] 오히라 마사요시의 급사(1980년) 이후 후계자로 유력 후보였으나, 당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와의 관계 악화가 걸림돌이 되어 실현되지 못했고, 같은 宏池会 소속으로 다나카 가쿠에이와 가까웠던 스즈키 젠코가 총재에 취임했다. 스즈키 젠코 내각(및 개조내각)에서는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다. 다음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시대까지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안타쿠미야"(安竹宮)라고 불리며, 이 3인은 "뉴 리더"라고 불린 정치인의 대표주자였다. 관방장관으로서 스즈키 젠코 총리의 여러 차례의 실언 수습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미야자와의 실무 능력이 정계 안팎에 다시 한번 각인되었다. 사퇴를 표명한 스즈키 젠코에게 반주류파의 핵심 인물인 후쿠다 다케오가 미야자와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스즈키 젠코는 거절했다.[24]
파벌 내에서는 미야자와에 대한 경쟁 의식을 불태우던 다나카 로쿠스케와 "일육전쟁"(一六戦争)이라고 불리는 후계자 싸움을 벌였고, 그 과열이 우려를 불러일으켜 히라카와카이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다나카 로쿠스케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한 1986년 宏池会 회장이 되어 파벌을 계승, 명실상부한 총재 후보가 되었다. 총무회장 시절인 1986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제창한 중참 동시선거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최종적으로 수용했다. 플라자 합의와 그 이후의 급격한 엔고(円高)를 둘러싸고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경제 운영을 강하게 비판했던 미야자와는 나카소네 야스히로로부터 재무대신 취임을 요청받아 스스로 엔고 시정에 매달리게 되었다. 대규모 개입과 제임스 베이커(미국 국무장관)와의 빈번한 협의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엔고는 가속화되었다.
1987년 가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후계자 자리를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다투었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나카소네 재정에 의해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재에 취임했다. 총무회장 아베 신타로 밑에서 총무회장 대리를 지낸 모리 요시로는 "미야자와 씨는 처음부터 '나는 곁에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되든 주요 각료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25] 미야자와는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에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 입각하여 소비세 도입에 힘썼으나, 1988년 리쿠르트 사건이 발각되자 미공개 주식 양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적받아 장관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다시 정계 전면에 복귀하여, 오부치 게이조와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1998년 미야자와는 마쓰나가 히카루의 뒤를 이어 재무대신에 취임했다.[8][9]
상원과 하원에서 총 14번의 임기를 역임한 후 200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1][13] 은퇴 이유는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 정치인 후보의 연령 제한을 73세로 설정했기 때문이었다.[10]
3. 주요 정책 및 업적
미야자와 기이치는 1991년 총리 취임 후, 1992년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는 일본군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일본 지도자로서의 행보였다.[1]
그의 정부는 일본이 해외에서 평화유지군 파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미국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6] 1990년대 일본 경제의 심각한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금융 개혁을 도입했으나, 1993년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하여 사임하면서 38년간 이어져 온 자유민주당 정권에 종지부를 찍었다.[6]
총리 퇴임 이후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대장상(현 재무상)으로 기용되어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 등을 진두 지휘했다.
3. 1. 경제 정책
미야자와 기이치는 오부치 게이조 내각과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재무대신을 역임했다.[8][9] 1998년, 마쓰나가 히카루의 뒤를 이어 재무대신에 취임했으며,[8][9] 총리 경험자가 재무대신에 취임한 것은 다카하시 고레이 이후 이례적인 일로, "헤이세이의 다카하시 고레이"라고 불렸다.당시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금융재생 관련법·금융건전화법을 성립시켰고, 아시아 금융 위기에는 "신 미야자와 구상"에 기초하여 300억 달러(30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 지원을 실시했다. 2001년 중앙성청 재편으로 대장성이 재무성이 되면서, 미야자와는 초대 재무대신이 되었다.
오부치·모리 내각 양 기간 동안 대규모 감세를 실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대량의 적자국채를 발행하여 재정 적자가 막대해졌다. 이러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은 다카하시 고레이에 비유되기도 했다. 금융위기를 극복한 후 경제는 대체로 호조였지만, 2000년에 들어 IT 버블 붕괴와 함께 부실 채권 문제가 다시 나타났다. 모리 내각의 퇴진과 함께 미야자와도 퇴임했다.
3. 2. 외교 및 안보 정책
미야자와 기이치는 1991년 총리 취임 후, 1992년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일본군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최초의 일본 지도자가 되었다.[1]그의 정부는 일본이 해외에서 평화유지군 파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미국과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6] PKO 협력법에 따라 자위대 캄보디아 파병을 실시했지만, 그 과정에서 파병된 민간 경찰관과 UN 자원봉사자가 살해되었을 때 철수론이 지배적인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자위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PKO 요원 살해는 어쩔 수 없다.”라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
1989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생한 중국공산당 정부의 천안문 사건에서의 민중 학살에 대해 서방 선진국이 실시하고 있던 다양한 경제 제재를 뒤집기 위해 장쩌민은 미야자와에게 천황의 방중을 요청했고, 가네마루 신 등의 지원도 있어 실현되었다. 미야자와의 전임인 해부 내각 때 원자금 차관 재개로 일본의 제재는 가장 먼저 해제되었지만, 천황의 방중은 일본에 이은 유럽과 미국의 제재 해제에 크게 기여했다고 여겨진다.[29]
1992년 6월에는 정부 개발 원조(ODA)에 관한 기본 이념과 중점 사항 등을 집대성하여 ODA 대강을 각의 결정했다.
미야자와는 냉전의 종식을 “2, 3백 년에 한 번 있는 역사적 변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27]
3. 3. 정치 개혁
미야자와 기이치는 1991년 11월 5일 자신의 파벌의 지지로 총리대신이 되었다.[7] 같은 해 해부 준키 총리의 사퇴에 따른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72세의 나이로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참의원 의원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이며, 현재로서는 관료 출신 마지막 총리이기도 하다. 해부 내각이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채 사퇴한 것도 있어 미야자와 정권의 출발도 순조로웠으며, 발족 당시에는 다나카 내각에 이은 수준의 지지율을 얻었다.[26]그러나 해부 내각으로부터 이어받은 PKO 협력 법안 심의에 어려움을 겪었고, 미야자와 파 사무총장 아베 후미오가 체포되는 등의 사건으로 이듬해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다케시타 파의 지원으로 당 간부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PKO 협력법을 성립시켰고, 이 법이 쟁점이 된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하는 등 일단 정권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리쿠르트 사건 등을 둘러싸고 정치 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가운데, 미야자와는 정치 개혁 관련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했지만, 소선거구제 도입을 비롯한 정치 개혁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다케시타 파에서 분열된 오자와·하타 그룹(개혁 포럼 21)은 미야자와의 이러한 태도에 반발하여, 1993년(헤이세이 5년) 6월에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자 찬성으로 돌아섰고, 이 안은 가결되었다. 자민당은 많은 탈당자를 낸 채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선거에서 자민당은 결과적으로 거의 의석을 유지했지만,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 자민당에서 이탈한 의석을 회복할 수 없어 과반수를 크게 밑돌았다. 일본 신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 세력이 결집하여 호소카와 내각이 탄생하면서, 미야자와는 자민당 장기 집권 38년 및 55년 체제의 마지막 수상이 되었다.
4. 평가
미야자와 기이치는 이케다 하야토의 측근으로서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1951년) 등 전후 일본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회담에 참여하여 "전후 정치의 산 증인"[36]으로 불렸다.[37]
평화 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하는 등 반전(反戰) 소신을 지켰다.[76]
기시다 후미오는 미야자와 가문에 관료가 많은 것은 환경적 요인이라고 설명한다.[72] 작가 신이치로는 미야자와 가문이 소농 출신이지만, 규벌을 통해 천황가와 연결되는 "대명문 규벌"을 구축했다고 평가한다.[73][74]
4. 1. 긍정적 평가
미야자와 기이치는 이케다 하야토의 측근으로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1951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1953년), 이케다-케네디 회담(1961년) 등 전후 일본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회담에 참여하여 "전후 정치의 산 증인"[36]으로 불린다.[37] 1950년 방미 당시에는 워싱턴의 하룻밤 7달러짜리 저렴한 호텔에 묵으면서도 점령군의 도지 라인 재정 정책을 비판할 기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38]헌법 9조를 지지하여 자위대의 해외 무력행사는 자위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했다.[39] 그러나 친미파이자 일미동맹론자였으며, 1996년에는 집단적 자위권의 제한적 행사는 합헌이며 위헌론은 "학자 바보"의 논쟁이라고 비판했다.[40]
보수 본류의 유력 정치인으로 경제기획청 장관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풍부한 정부 경험을 쌓았으나, 당무에는 소극적이었고 파벌 내 장악에도 적극적이지 않아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뒤처졌다.[42]
총리 퇴임 직전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회담하여 정권 교체에 따른 혼란을 피하고자 노력했다.[43][44][45] 다나카 히데유키는 미야자와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46]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헌법 개정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적 논의가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일본은 무력 협력보다 경제적 협력이 특기라고 지적하는 등, 당시 자유민주당 주류와는 다른 현실주의적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4. 2. 부정적 평가
미야자와 기이치는 온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지기 싫어하고 독설을 잘 하는 면모를 보였다. 다른 사람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취해 따르는 사람이 적었다는 평가도 있다.[30]이케다 하야토와의 논쟁에서 감정적으로 격해져 차에서 내리라는 고함을 들었음에도 굽히지 않았고,[47] 안드레이 그로미코와의 북방영토 협상에서는 그를 위협하여 자리에 앉혔다는 일화도 있다.[47] 64세 때는 자신을 칼로 위협하는 남성과 30분간 몸싸움을 벌여 제압하기도 했다.
부락 해방 운동가 고모리 다쓰쿠니는 미야자와의 아버지가 차별받는 계급 출신이라고 발언했고, 이에 대해 미야자와는 격분했다. 『게이비 진권 신보』에는 미야자와가 자신의 출신을 숨기려 한다는 뉘앙스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4. 3. 기타 평가
미야자와 기이치는 술을 좋아하여 주당 또는 주폭으로서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사후 장녀인 케이코는 "아버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폭이었습니다"라고 언급했다.[36]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시절, 술에 취해 "오히라 씨가 총리·총재라니 우스꽝스럽다"라고 말해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케다 하야토의 비서관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지만, 미야자와는 오히라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36]
우미베 슈니키 총리에게는 "고등학교 야구 투수"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분노를 사기도 했다.[48]
다무라 겐은 "술을 마셨을 때의 미야자와라면 10년 전에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0]
출신 대학 관련 막말도 많았다. 가네마루 신에게는 "농대를 나오셨군요. 잘하셨군요"라고 비꼬았고,[50] 다케시타 노보루에게는 "와세다대학은 무시험이었다"라고 말해 분노를 샀다.[49][51] 이는 미야자와 가문이 빈농 출신이었던 것에 대한 열등감의 반영으로 보인다.
담당 기자에게도 출신 대학을 묻고,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이 아니면 비꼬는 말을 했다. 이 때문에 언론사들은 미야자와 담당 기자를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배치하는 경향을 보였다.
미야자와 정권 시절, 학력 관련 발언이 비판받아 대장성 신규 채용자 중 도쿄 대학 출신 상한을 절반 정도로 제한하기도 했다.
기시다 후미오에 따르면, 미야자와 가문에는 관료가 많으며, 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이라고 한다.[72]
작가 신이치로는 미야자와 가문이 원래 명문가가 아니었으며, 소농 출신이었다고 언급했다.[73] 그러나 미야자와 가문은 규벌을 통해 총리 5명, 국회의원 20명을 배출하고, 아소 다로 가문을 통해 천황가와도 연결되는 "대명문 규벌"을 구축했다.[74]
5. 어록
중학교 시절 축구 경험이 있으며, 축구를 좋아해서 국내의 큰 경기에는 자주 참석했다. 영어에 능통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야자와 자신은 동양적인 사상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자주 한시를 인용했다. 미야자와는 "저는 영어에 능통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릴 적에 한학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동양적인 사상을 좋아합니다. 그 한학에 왕도와 패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총리대신이라는 일국의 재상이 되는 것은 스스로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맡는 천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밀치고까지 하는 것은 제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56]
총리직 사퇴 당시 심경에 대해 왕창령의 "한 조각 얼음 마음 옥병에 있네(一片の氷心玉壷にあり)"를 언급하기도 했다.
서예로 유명한 미야자와가 "정계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은 기시(노부스케) 씨일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정치부 기자가 "다나카(가쿠에이) 씨나 후쿠다(다케오) 씨, 오히라(마사요시) 씨의 글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미야자와는 고개를 갸웃하며 "당신은, 그것을 글씨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59]
6. 가족 관계
미야자와 기이치는 미국 유학 중 결혼했으며, 부인 요코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건축가 미야자와 히로(Hiro)이며, 장녀 미야자와 케이코(Keiko)는 외교관 크리스토퍼 J. 라플뢰르(Christopher J. LaFleur)와 결혼했다.[11][1]
- 아버지: '''미야자와 유키오''' - 야마시타 기선(현 쇼센 미쓰이) 직원, 정치가
- : 1884년(메이지 17년) 1월 출생 ~ 1963년(쇼와 38년) 5월 사망. 히로시마현 누마쿠마군 가네에촌(현 후쿠야마시 가네에정)의 작은 농가 출신.[64]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나가노현청 근무를 거쳐 야마시타 기선에 입사했다. 오가와 헤이키치의 사위가 되었으며,[65] 1928년(쇼와 3년) 히로시마 3구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6번 연속 당선되었다.[66]
- 어머니: '''고토''' - 나가노현 출신, 변호사·정치가 오가와 헤이키치의 차녀, 오가와 킨조의 손녀
- : 1897년(메이지 30년) 1월 출생 ~ 사망
- 남동생: '''미야자와 히로시''' - 내무·자치 관료, 정치가·히로시마현 지사, 참의원 의원, 법무대신
- : 1921년(다이쇼 10년) 9월 출생 ~ 2012년(헤이세이 24년) 5월 사망
- *: 배우자: '''레이코''' - 히로시마현 출신, 실업가·정치가 기시다 마사키의 장녀, 기시다 후미오의 고모
- ** 장남: '''미야자와 요이치''' - 대장 관료, 정치가
배우자: 실업가 야나기다 세이지로(전 일본항공 사장)의 손녀[68]
아들 2명[69]
딸 2명 (대장성 관료 가토 히데키의 아내, 통산 관료 '''나카자와 사이치'''의 아내)
- 남동생: '''미야자와 야스시''' - 외교관, 서독 대사
- : 1923년(다이쇼 12년) 8월 출생 ~ 2010년(헤이세이 22년) 9월 사망
- *: 배우자: 미술사학자 고지마 기쿠오(도쿄대 명예교수)의 딸
- ** 장녀: 대장성 관료 요시쿠니 지로 장남의 아내
- 아내: '''미야자와 요코''' - 영어학자·이지치 준세이(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의 차녀
- 장녀: 미야자와 케이코 - 외교관 크리스토퍼 라플루아와 결혼.
- *: 자녀: 미야자와 에마(탤런트), Sarah Miyazawa LaFleur|미야자와 사라영어(실업가)
- 장남: 미야자와 히로 - 건축가
- *: 배우자: 실업가 고 토시히로(미쓰이 액화가스 고문)의 딸, 이시바시 마사지로(전 브리지스톤 회장)의 손녀
[[File:Ogawa family.JPG|thumb||300px||right||오가와 가문 사람들
(앞줄 왼쪽부터 삼평(さんぺい), 세키(せき)(헤이키치 부인), 헤이키치(へいきち), 에쓰코(えつこ), 헤이 고(へいご)]). 뒷줄 왼쪽부터 세이(せい), 미야자와 어머니, 테이(てい), 가쓰(かつ), 小川平二, 헤이시로(へいしろう), 이치헤이(いちへい)]))* 외조부: 오가와 헤이키치 - 법무대신(法務大臣)/사법대신(司法大臣), 철도성(鉄道省)/철도대신(鉄道大臣) 등을 역임
- 외삼촌/고모부:
- : '''오가와 이치헤이'''(실업가, 정치가)
- : '''오가와 헤이지'''(정치가)
- : '''오가와 헤이시로'''(외교관)
- : '''쓰쓰미 헤이고'''(실업가) 등
- 사촌:
- : '''오가와 겐'''(정치가)
- : '''사이토 마사히코'''(수학자, 동대 명예교수)
- : '''사이토 구니히코'''(외무심무차관) 등
이지치 준세이━━━━━요우코
┃ ┏━미야자와 히로오
┣━━┫
┃ ┗━━━━케이코
┏━미야자와 기이치 ┣━━━━━━━━━┳━━━라플루아 미야자와 에마
미야자와 카키치━━━━미야자와 유 ┃(전 총리) 크리스토퍼 라플루아 ┗━━미야자와 사라
┃ ┃
┣━━╋━미야자와 히로시
┃ ┃ ┃
┃ ┃ ┣━━━━━━━━━━┳━━미야자와 요이치━━━━┳━━코이치
오가와 헤이키치━━━━━こと ┃ ┃ ┣━━아야코 ┣━━지로
┃┏레이코 ┗━━나오코 ┗━━켄조
┃┗━키시다 붐부━━━━키시다 후미오━━━키시다 쇼타로
┗━미야자와 야스시
┃ ┏━━━━소노
┣━━┫
┃ ┗━━━━유리
고지마 키쿠오━━━━━와코
7. 저서
- 東京-ワシントンの密談|도쿄-워싱턴의 밀담|일본어 (실업지일본사(実業之日本社), 1956년/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중공문고(中公文庫), 1999년)
- ''Secret Talks between Tokyo and Washington: the Memoirs of Miyazawa Kiichi, 1949-1954'', translated and annotated by Robert D. Eldridge. (Lexington Books, 2007).[12]
- 戦後政治の証言|전후 정치의 증언|일본어 (요미우리신문사(読売新聞社), 1991년) 월간지 「This is 요미우리」 연재를 정리한 것
- 新・護憲宣言 21世紀の日本と世界|신・호헌 선언 21세기의 일본과 세계|일본어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1995년)
- ハト派の伝言 宮沢喜一元首相が語る|비둘기파의 전언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가 말하다|일본어 (중국신문사(中国新聞社), 2005년) 중국신문(中国新聞) 연재 회상
- (나카야마 이치로(中山伊知郎)) 将来経済の構想|장래 경제의 구상|일본어 (츠쿠모쇼보(筑摩書房), 1969년)
- (타카사카 마사타카(高坂正堯)) 美しい日本への挑戦|아름다운 일본에의 도전|일본어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84년, 신판 1991년)
-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大論 憲法・護憲|대론 헌법・호헌|일본어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1997년/「헌법 대론쟁 개헌 vs. 호헌」아사히문고(朝日文庫), 2000년)
- 聞き書き 宮澤喜一回顧録|듣기 기록 미야자와 키이치 회고록|일본어 (듣는 사람 미야베 타카시(御厨貴)·나카무라 타카히데(中村隆英),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2005년)
- 宮澤喜一 保守本流の軌跡 90年代の証言|미야자와 키이치 보수 본류의 궤적 90년대의 증언|일본어 (이오타가시라 마코토(五百旗頭真)·이토 모토시게(伊藤元重)·야쿠시지 카츠유키(薬師寺克行) 편, 아사히신문출판(朝日新聞出版),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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