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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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에 태어난 독일의 천문학자, 수학자, 점성술사이다. 그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고, 행성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여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우주구조의 신비》, 《신천문학》,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세계의 조화》 등이 있으며, 광학 연구와 수학적 업적 또한 남겼다. 케플러는 30년 전쟁 중 1630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과학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과학 및 문화 전반에 걸쳐 널리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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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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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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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하네스 케플러 |
출생일 | 1571년 12월 27일 |
출생지 | 바일데어슈타트,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630년 11월 15일 |
사망지 | 레겐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
거주지 | 그라츠, 프라하, 린츠, 울름 |
국적 | 신성 로마 제국 |
분야 | 천문학, 수학, 자연철학, 점성술, 천체물리학, 광학 |
서명 | Unterschrift Kepler.svg |
교육 | |
모교 | 튀빙겐 대학교 |
박사 지도교수 | 미하엘 메스틀린 |
주요 업적 | |
주요 업적 |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케플러 추측 케플러 방정식 루돌프 표 케플러 초신성 관측 천체물리학 창시 굴절 망원경 개량 구분구적법 연구 자연 철학 대중화 시도 |
영향 | |
영향을 준 사람 | 신플라톤주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튀코 브라헤 |
영향을 받은 사람 |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 크리스토퍼 렌 토머스 홉스 |
소속 기관 | |
소속 기관 | 그라츠 대학교, 린츠 대학교, 프라하 황궁, 발렌슈타인 공작령 |
수상 |
2. 어린 시절과 교육 (1571년 ~ 1594년)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도시 바일 데어 슈타트(현재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 서쪽 약 30km)에서 태어났다.[137][138] 아버지 하인리히 케플러는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 굴덴만(카타리나 케플러)은 여관집 딸이자 치료사였다.[22][139] 케플러는 4살때 천연두에 걸려 시력이 나빠졌고 손도 불편해졌다.[140]
케플러는 여섯 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141] 아홉살때는 월식을 관찰했다.[23]
케플러 가족은 프로테스탄트였지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종교적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케플러는 라틴어학교, 마울브론 신학교를 거쳐, 1587년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비투스 뮐러(Vitus Müller)에게서 철학을, 야코프 헤어브란트(Jacob Heerbrand)에게서 신학을 배웠다.[25]
튀빙겐 대학교 교양 과정에서 마이클 마이스트린(1550~1631)의 천문학 강의를 접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 및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모두 배우고,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에 심취했다.[142] 케플러는 수학 성적이 우수했고, 학우들을 위해 점성술을 하는등 천문학 기술에도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다. 케플러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프로테스탄트 계열 그라츠(Graz)의 학교에서 수학 및 천문학 교사로 가르치는 일자리를 제안받고 수락했다. 1594년에 튀빙겐 대학교를 졸업했다.[29]
3. 그라츠 시절 (1594년 ~ 1600년)
1596년에 출판된 케플러의 첫 번째 주요 천문학 저서인 《우주구조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la)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옹호하는 최초의 출판물이었다.[144] 케플러는 1595년 7월 19일, 그라츠에서 강의를 하던 중 토성과 목성의 주기적인 합을 보여주면서, 정다각형이 내접원과 외접원을 특정 비율로 묶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이 우주의 기하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알려진 천문 관측치에 맞는 다각형의 고유한 배열을 찾지 못하자, 케플러는 3차원 다면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섯 개의 플라톤 입체 각각을 구면 천구에 내접시키고 외접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입체들을 각각 구 안에 겹쳐 넣으면 여섯 개의 층이 생기는데, 이는 알려진 여섯 개의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에 해당한다. 입체를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 순서로 배열함으로써,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을 공전한다고 가정할 때 구를 각 행성의 궤도의 상대적인 크기에 해당하는 간격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케플러는 또한 각 행성의 천구 크기와 궤도 주기 길이를 관련짓는 공식을 발견했다. 내행성에서 외행성으로 갈수록 궤도 주기 증가 비율은 천구 반지름 차이의 두 배이다.[59]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가 우주의 신의 기하학적 계획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열정을 쏟은 것은 물리적 현실과 영성 세계의 연결에 대한 그의 신학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우주 그 자체가 신의 형상이었는데, 태양은 성부, 항성권은 아들에게, 그 사이의 간격은 성령에게 해당한다. 그의 『우주구조의 신비』의 첫 번째 원고에는 천동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경 구절과 태양 중심설을 조정하는 광범위한 장이 포함되어 있었다.[59] 케플러는 그의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지원을 받아 튀빙겐 대학교 상원으로부터 성경 주해를 제거하고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과 케플러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하는 것을 조건으로 원고 출판 허가를 받았다. 『우주구조의 신비』는 1596년 말에 출판되었고, 케플러는 1597년 초에 자신의 사본을 저명한 천문학자와 후원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이 책은 널리 읽히지는 않았지만, 케플러의 뛰어난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유력한 후원자들뿐만 아니라 그라츠에서 그의 지위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보낸 열정적인 헌정은 후원 체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를 제공했다.[60]
1621년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확장된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이는 첫 번째 판보다 절반이나 더 길었으며, 발간 후 25년 동안 이룬 수정 및 개선 사항을 각주에 자세히 설명했다.[61] 케플러는 다섯 개의 입체 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1621년 『우주구조의 신비』의 두 번째 판을 출판하고 이 모델의 타당성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믿음을 확인했다.[63] 관측 데이터와 그의 모델의 예측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것이 이론의 타당성을 무효화할 만큼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595년 12월, 케플러는 23세의 미망인(두 번의 결혼 경험)이자 어린 딸 레기나 로렌츠를 둔 바바라 뮐러를 만나 구애를 시작했다. 뮐러는 고인이 된 남편들의 재산을 상속받은 상속녀이자 성공한 제분소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요브스트는 처음에 결혼에 반대했다. 케플러는 할아버지로부터 귀족 작위를 상속받았지만, 그의 가난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배우자였다. 케플러가 『우주구조의 신비』 작업을 완료한 후 요브스트는 마음을 바꿨지만, 케플러가 출판 세부 사항을 처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약혼은 거의 파기될 뻔했다. 그러나 결혼을 주선하는 데 도움을 준 개신교 관리들은 뮐러 가족에게 합의를 지키도록 압력을 가했다. 바바라와 요하네스는 1597년 4월 27일에 결혼했다.[32] 결혼 초 케플러 부부는 두 아이(하인리히와 수잔나)를 낳았지만 둘 다 유아기에 사망했다. 1602년에는 딸(수잔나), 1604년에는 아들(프리드리히), 1607년에는 또 다른 아들(루드비히)을 낳았다.[33]
《우주구조의 신비》 출판 후 그라츠 감찰관들의 허가를 받아 케플러는 자신의 연구를 확장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야심찬 계획을 시작했다. 그는 추가로 네 권의 책을 계획했는데, 하나는 우주의 정지된 측면(태양과 항성)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행성과 그 운동에 관한 것이며, 하나는 행성의 물리적 성질과 지리적 특징의 형성(특히 지구에 중점)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대기 광학, 기상학, 점성술을 포함하여 천체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34]
그는 또한 《우주구조의 신비》를 보낸 많은 천문학자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그중에는 루돌프 2세 황제의 수학자이자 튀코 브라헤의 숙적이었던 라이마루스 우르수스도 있었다. 우르수스는 직접 답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케플러가 보낸 아첨하는 편지를 재발표하여 (현재는) 튀코식 우주 체계를 둘러싼 튀코와의 우선권 분쟁을 계속 추진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에도 불구하고 튀코는 케플러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케플러의 체계에 대한 가혹하지만 정당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튀코는 많은 반대 의견 중에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가져온 부정확한 수치 데이터의 사용에 문제를 제기했다. 서신을 통해 튀코와 케플러는 달 현상과 코페르니쿠스 이론(특히 그 신학적 타당성)에 대해 논의하며 광범위한 천문학적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튀코의 천문대의 훨씬 더 정확한 데이터가 없이는 케플러는 이러한 문제들 중 많은 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35]
그 대신 그는 연대기와 "조화", 음악, 수학 및 물리적 세계 사이의 수비학적 관계, 그리고 그들의 점성술적 결과에 주의를 돌렸다. 그는 지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그는 나중에 태양이 행성의 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할 속성) 점성술적 양상과 천문 거리를 기상 및 기타 지구 현상과 연결하는 추측적인 체계를 확립했다. 그러나 1599년까지 그는 다시 사용 가능한 데이터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자신의 연구가 제한된다고 느꼈다. 마찬가지로 증가하는 종교적 긴장도 그라츠에서의 그의 지속적인 고용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튀코는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고, 1600년 1월 1일(초대장을 받기 전에) 케플러는 튀코의 후원이 그의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정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며 떠났다.[36]
3. 1. 《우주구조의 신비》
《우주구조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la)는 케플러의 첫 주요 천문학 연구이자, 코페르니쿠스 설을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다. 케플러는 그라츠에서 선생을 하고 있을 때인 1595년 7월 19일에 토성과 목성의 황도대에서의 주기적인 합을 증명해 냈다고 주장했다.[164] 그는 정다각형들이 서로 안에 갇혀 우주의 기하학적 기반이라고 생각한 확실한 비율로 원에 내접하고 외접한다고 생각했다. 천문 관측 결과와 들어맞는 다각형들의 배열을 찾는 데 실패하자, 케플러는 입체 다면체로 실험을 시작했다.[164] 케플러는 다섯 개의 플라톤의 다면체들이 구형의 천구에 각각 내접하고 외접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입체들은 각각 다른 입체의 안에 있는 구 안에 있음으로,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여섯 개의 행성들―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그리고 토성에 상응되는 6개의 포개진 겹을 형성하는데, 이 입방체들은 안에서 밖으로 순서대로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이다.[165] 케플러가 이렇게 정다면체와 행성을 연결해서 추측한 배경에는 정다면체의 종류도 유한하다는 사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63] 케플러는 행성이 여섯 개 뿐(적어도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인 까닭이 정다면체가 다섯 개 뿐이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고, 정다면체에서 행성의 구들을 유지하는 투명 구조물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166]
케플러는 자신이 우주에 대한 신의 기하학적인 계획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167]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케플러의 믿음의 대부분은 우주 자체가 신의 이미지이며 태양이 성부, 항성 천구가 성자, 그 사이의 우주 공간이 성령이라는, 케플러의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주구조의 신비》의 첫 번째 원고는 천동설에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의 구절들과 지동설을 조화시키는 데 광범위한 장(章)을 할애했다.[168]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성경 주해를 제거하고, 케플러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함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묘사를 추가한 원고 출판에 대한 튀빙겐 대학교 이사회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주구조의 신비》는 1596년에 출판되었고, 케플러는 1597년에 그 사본을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책이 널리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케플러는 고도로 숙련된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게 된다. 또한 후원을 받기 위해 그라츠에서 자신의 직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물론, 강력한 후원자들을 향해 감정이 넘쳐 흐르는 헌정사를 쓰기도 했다.[169]
이후 나중의 연구에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할 작정이었지만,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플라톤 다면체 우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초판 출간 이후 25년 동안 주석을 달아, 1621년에 확장된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첫 번째 판의 한배 반 정도의 길이였다.[170]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이 우주론의 모형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연구 제안서를 제출했다. 케플러는 은과 보석으로 모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여차하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안서는 값싸게 종이로 먼저 만들어 보라는 충고와 함께 퇴짜를 맞았다.[171]
3. 2. 바바라 뮐러와의 결혼
1595년 12월, 케플러는 23살의 딸 딸린 과부 바바라 뮐러를 소개받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뮐러는 전남편의 재산들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욥스트는 케플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결혼을 반대했다. 케플러는 할아버지의 신분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의 가난은 신분과 어울리지 않았다. 욥스트는 케플러가 《우주구조의 신비》작업을 마치고 나자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케플러가 책 출판의 세세한 일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약혼은 거의 파기 직전까지 갔다.[172] 그러나 약혼이 성사되도록 도왔던 교회 사람들이 뮐러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압력을 넣었고 뮐러와 케플러는 1597년 4월 27일 결혼했다.[172]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케플러는 두 아이(하인리히와 수잔나)를 얻었으나 둘 다 어렸을 때 죽고 말았다.[173]
3. 3. 《우주구조의 신비》의 발송과 논쟁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하고 그라츠 학교 장학사들의 찬성을 얻은 후, 연구를 확장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주의 정지된 측면(태양과 항성), 행성과 그 운동, 행성의 물리적 성질과 지리적 특징(특히 지구), 천체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대기 광학, 기상학, 점성술 포함)에 관한 네 권의 책을 추가로 쓸 계획이었다.[174][34]
또한 케플러는 여러 천문학자들에게 《우주구조의 신비》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이 중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있었는데, 그는 케플러에게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라는 답장을 보냈다.[175]
책을 받은 과학자들 중에는 루돌프 2세의 제국 수학자이자 튀코 브라헤의 숙적인 라이마루스 우르소도 있었다.[175]
1598년, 미하엘 매스틀린은 우르소의 책이 표절이라며 케플러를 꾸짖었다.[176] 우르소는 튀코 체계[177]를 누가 먼저 제창했느냐는 문제로 튀코와 논쟁 중이었는데, 케플러의 편지를 자신의 저서 《천문학적 가설에 대하여》에 재출판하여 튀코와의 논쟁에 이용했다.[178] 튀코는 우르소의 책을 불태웠고, 케플러의 언질을 이용해 우르소를 소송할 계획이었다.[179]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튀코는 케플러의 이론에 대해 비판하며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튀코는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부정확한 수치 자료를 사용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월면 현상, 코페르니쿠스설의 신학적 생존 가능성 등 광범위한 천문학적 문제들을 토론했지만, 튀코의 정확한 자료 없이는 케플러가 이 문제들을 다룰 방법이 없었다.[180][35]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과 음악, 수학, 물리학계의 수비학적 관계, 점성학적 중요성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지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고, 점성술적 에스펙트와 천문학적 거리를 날씨와 다른 지구 현상들에 결합하는 이론을 만들었다.[181] 그러나 1599년, 케플러는 자료의 부정확함 때문에 연구의 한계를 느꼈고, 코페르니쿠스의 관측값이 틀렸다고 결론내렸다. 케플러는 정확한 관측 자료를 가진 튀코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171]
당시 그라츠의 종교적 환경이 불안해진 것도 케플러의 직업을 위협했다. 대공은 개신교도들을 탄압했고, 개신교를 믿지 않으면 수입의 1할을 벌금으로 내거나 추방당해야 했다.[182] 12월, 튀코는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고, 케플러는 1600년 1월 1일 튀코의 후원을 희망하며 프라하로 출발했다.[181][36]
4. 프라하 시절 (1600년 ~ 1612년)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프라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 롱고몬타누스를 만났다.[185] 그곳은 티코의 새로운 천문대가 건설 중이던 곳이었다. 케플러는 두 달 이상 손님으로 머물면서 튀코의 화성 관측 일부를 분석했다.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하여 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게 하였다.[185] 케플러는 자신의 저서 《우주구조의 신비》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를 이용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자료 복사본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작업에 2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185]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튀코와 정규직 협상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언쟁 끝에 결렬되었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떠났다. 곧 케플러와 튀코는 화해하고 봉급과 주거 조건에 합의했으며, 6월에 케플러는 가족을 데리러 그라츠로 돌아갔다.[185]
케플러와 튀코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는, 가깝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관계였다.[187]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튀코의 주변에는 조수, 아첨꾼, 식객들이 북적거렸고, 이들은 시골 출신 학자 케플러를 놀려댔다.[187] 튀코는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자료 전체를 쉽게 넘겨주지 않고 조금씩만 보여주었다.[187][188] 튀코는 케플러가 우르소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189]
그라츠의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으로 케플러는 튀코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케플러는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대공의 수학자가 되려고 했다.[190] 케플러는 달의 운동에 대한 힘 기반 이론을 제안한 소론(《지구 안에 달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을 써서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했다.[191]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개신교도 추방에 앞장섰고, 케플러는 추방당했다.[192]
1600년 8월 2일, 케플러 가족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여 그라츠에서 추방당했다.[193] 몇 달 후, 케플러는 가족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왔다. 튀코의 연구진에는 변화가 생겼다. 롱고몬타누스는 덴마크로 돌아갔고, 요하네스 뮐러도 떠났으며, 텡나겔은 튀코의 딸과 결혼한 뒤 홀란트(네덜란드)로 떠났다. 결국 남은 연구원은 튀코와 케플러뿐이었다.[193]
1601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케플러는 튀코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다. 튀코는 케플러에게 행성 관측 분석과 경쟁자 우르소에 대한 비판 논문 작성을 맡겼다.[194] 케플러는 스승 매스틀린에게 “튀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유치하고 변덕스럽다”, “우르소를 반박하는 글을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며 불평했다.[195] 9월, 튀코는 에라스무스 라인홀드의 《프로이센 목록》을 대체할 새로운 프로젝트 《루돌프 표》의 공동 작업자로 케플러를 임명했다.[194][196]
1601년 10월 13일, 케플러는 달, 토성, 화성을 관측했다.[197] 같은 시각 튀코는 만찬에서 포도주를 과음하고 화장실에 가지 않고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198] 튀코는 병이 악화되어 곧 죽을 것을 알고 케플러에게 튀코 체계 연구에 전념해 달라고 유언했다. 튀코는 1601년 10월 24일 사망했다.[199]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제국 수학자에 임명되어 튀코의 미완성 작업을 완성하고, 유족들에게서 관측 자료를 받아내야 했다.[198]
케플러는 루돌프 황제의 궁정 수학자로서 천궁도를 이용해 점을 쳤다.[201] 케플러는 당시 점성술사들의 정밀 예측 시도에 회의적이었지만, 튀빙겐 시절부터 동료, 가족, 후원자들에게 상세한 점을 쳐주곤 했다.[201] 황제는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 케플러의 점성술 자문을 구했는데, 케플러의 조언은 별보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었다.[201] 루돌프 2세는 케플러의 물리학, 천문학 연구를 지원했다.[201]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루터교 신앙은 황궁에서의 지위 덕분에 방해받지 않았다.[202] 황제는 케플러 가족에게 충분한 보수를 제공했지만, 황실 금고의 어려움으로 인해 케플러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202]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루돌프 황제에게 2만 플로린[203]의 하사금을 약속 받았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받지 못했으며, 연봉 500플로린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204] 케플러의 임금은 3명의 황제(루돌프,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를 거치면서 체불되어 페르디난트 2세 때는 밀린 봉급이 1만 2천 플로린에 달했다.[205]
재정적 문제와 바바라와의 잦은 싸움, 질병으로 인해 가정 생활은 유쾌하지 못했다.[202] 케플러는 “아내를 나무라기보다 내 손가락을 깨무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182] 하지만 황궁 생활 덕분에 요하네스 마태우스 바커 본 바켄펠스, 요스트 뷔르기,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 등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천문학 연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202]
케플러는 1600년에 펴낸 달에 대한 논문에서 광학 법칙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1603년 대부분의 시간을 광학 이론에 쏟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연구들을 잠시 멈추었다. 연구 결과 나온 원고는 1604년 1월 1일에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그 이름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Ad Vitellionem Paralipomena, Quibus Astronomiae Pars Optica Traditur''la)이다.[206][207]
이 책에서 케플러는 빛의 밝기를 좌우하는 역제곱 법칙, 평면 거울과 곡면 거울에서의 반사 현상,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그리고 시차나 육안상의 천체의 크기 같은 광학의 천문학적 의미를 설명했다.[208] 또한 케플러는 자신의 광학 연구를 인간의 눈에까지 연장했고, 망막 위의 수정체 때문에 이미지들이 상하좌우 반전되어 투영된다는 것을 인지한 최초의 신경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케플러는 이미지가 반전된다는 사실을 광학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딜레마의 해결책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영혼의 어떤 작용으로 인해 이미지가 뇌 속에 들어가서 바로잡혀진다고 생각했다.[206]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은 굴절의 법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현대 광학의 기초로 평가받고 있다.[208][96]
사영 기하학의 시작과 관련하여 케플러는 이 저서에서 수학적 실체의 연속적인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원뿔곡선의 초점이 초점을 잇는 선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면 기하학적 형태가 변형되거나 퇴화하여 서로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초점이 무한대로 이동하면 타원이 포물선이 되고, 타원의 두 초점이 하나로 합쳐지면 원이 형성된다. 쌍곡선의 두 초점이 합쳐지면 쌍곡선은 한 쌍의 직선이 된다. 그는 또한 직선이 무한대로 연장되면 무한대의 단일 무한대의 점에서 스스로 만나므로 큰 원의 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했다.[97]
1604년 10월,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났지만 케플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209][43] 케플러는 그 항성을 체계적으로 관측했는데, 그 초신성은 밤 하늘에서 가장 밝은 금성보다 약간 덜 밝았으며, 일 년 이상이나 관측되었다. 점성술적으로, 1603년은 수상궁의 시작 및 약 800년 주기의 대회합(목성과 토성의 합) 기간의 시작으로 지정된 해였다. 점성가들은 앞에서 말한 두 기간을 샤를마뉴의 등장(약 8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약 1600년 전)과 관련시켰고, 이로부터 새로운 황제가 등장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리라고 추측했다.[44] 케플러가 2년 뒤에 이 새로운 항성을 자기 저서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서 기술한 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수학자이자 점성술사로서 이러한 정황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케플러 본인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점성술적인 역사적 순환 해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대신 항성의 천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 논문에 항성의 밝기가 점차 어두워지는 것, 항성의 기원에 대한 추측, 시차를 잴 수 없었다는 점이 이 천체가 항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209], 더 나아가 하늘(천국)은 영원불변한다는(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천구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생각) 교리에 대한 의심 등을 기록했다. 새로운 항성의 탄생은 곧 하늘(천국)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210][45] 케플러는 또한 부록을 첨부하여 폴란드 역사가 라우렌티우스 수슬리가의 최근 연대기 작업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수슬리가 받아들여진 연대기가 4년 뒤쳐져 있다는 것이 맞다면, 현재의 새로운 별과 유사한 베들레헴의 별이 이전 800년 주기의 첫 번째 대결합과 일치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45]
1609년, 케플러는 《신천문학(Astronomia nova)》을 출판하여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을 발표했다.[216][72] 이 책에서 케플러는 이전의 행성 구(행성이 부착된 구형 껍질)라는 개념과는 달리 물리적 원인의 작용으로 인한 우주 공간에서 행성의 경로를 의미하는 혁명적인 행성 궤도 개념을 도입했다. 이로써 천문 현상은 물리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밝혀졌다.[64]
케플러는 화성 궤도가 타원임을 발견하고, 행성이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는 법칙(타원궤도의 법칙)을 제시했다.[216][72] 케플러는 40여 번의 실패 끝에 1605년 초에 이전에 너무 단순하다고 여겨졌던 타원에 대한 생각을 우연히 떠올렸다.[216][70]
또한,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이 일정하다는 법칙(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견했다.[215][69] 케플러는 원일점과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 측정에 바탕하여 행성의 운동 비율은 태양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알아냈다.[215][69]
케플러는 우주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태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며 태양계 기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212] 케플러는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적에 대한 이론과 광학에 유추하여 자신의 연구를 이끌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 가깝고 멀리 갈수록 운동이 빨라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힘이 태양에 의해 퍼져나가며, 멀어질수록 약화된다고 생각했다.[212][213][214]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에서는 “행성은 중심 별 주위를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고 생각되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제창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역시 당시의 “행성은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는 이론에 얽매여 있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찌그러진 원 또는 타원이라고 했다(케플러의 제1법칙).[149]
케플러의 법칙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에 의해 행성이 태양에 끌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케플러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자력과 같은 힘이 존재한다고 말했다.[149]
1610년 초,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이 새로 만든 강력한 망원경을 이용하여 목성 주위를 공전하는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다.[98] 갈릴레오는 자신의 관측 결과를 담은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를 출판하면서, 관측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케플러의 의견을 구했고, 케플러는 《별의 전령과의 대화(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라는 짧은 답변을 출판하여 열렬히 지지했다.[98] 그는 갈릴레오의 관측 결과를 옹호하고, 천문학과 광학뿐만 아니라 우주론과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발견과 망원경 방법의 의미와 함의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제시했다.[98] 같은 해 후반에 케플러는 갈릴레오를 더욱 지지하며 자신의 망원경 관측 결과를 담은 《목성 위성에 대한 이야기(Narratio de Jovis Satellitibus)》를 출판했다.[98] 그러나 케플러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갈릴레오는 《신천문학(Astronomia Nova)》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98]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케플러도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하여 광학 망원경에 대한 이론상·실험상의 연구를 시작했다.[227][99] 그 결과로서 1610년 9월에는《굴절광학》('' Dioptrice'')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1611년에 출판되었다.[228] 이 책에서 케플러는 양면 볼록 렌즈로 된 수렴 렌즈와 양면 오목 렌즈로 된 발산 렌즈에 대한 이론적 근거, 이 렌즈들이 갈릴레오식 망원경을 구성하는 원리, 실상과 허상의 개념, 정립상과 도립상, 확대 및 축소에 따른 초점 거리의 결과까지 설명했다.[228] 또한 케플러는 볼록 렌즈 두 장을 사용하여 갈릴레오의 볼록 렌즈 - 오목 렌즈 결합보다 높은 배율을 낼 수 있는 망원경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케플러식 망원경으로 오늘날의 굴절식 천체 망원경의 모태이다.[228][100]
1611년을 전후하여, 케플러는 《꿈(Somnium)》으로 (사후에) 출판될 원고를 배포하고 다녔다.[229]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와중에 사라져 버린 이 원고는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리고 있다.[229] 이 이야기는 일부는 우화였고 일부는 자전적이었으며 일부는 행성간 여행에 대한 논문이었다.[229]
1611년 새해 선물로 케플러는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Strena Seu de Nive Sexangula'')라는 제목의 짧은 소논문을 지었다.[235] 케플러는 이 소논문에서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그것을 원자론의 물리적 근거로 해석했으며 구를 가장 촘촘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술했다.[235] 마지막 것이 후에 케플러의 추측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함께 수백년 동안 수학적 난제로 남았다.[235] 케플러는 또한 구를 쌓을 때, 면심입방격자가 가장 조밀하게 채워진다고 예상했다.[101][102] 이 예상은 케플러 추측이라고 불리며, 규칙적으로 쌓는 경우에 대해서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일찍이 증명되었지만, 불규칙한 쌓는 방법에 대해서는 400년 동안 미해결 문제였다.
4. 1. 튀코 브라헤와의 연구와 갈등
튀코 브라헤는 우르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183]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프라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과 롱고몬타누스를 만났다.[185] 케플러는 두 달 이상 손님으로 머물렀고 튀코의 화성 관측 일부를 분석했다.[185]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을 받아 곧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185] 케플러는 자기 저서 《우주구조의 신비》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집에서 작업하기 위한 자료 복사본을 가져가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는 이후 2년의 시간이 걸린다.[185]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정규직을 얻기 위해 튀코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격한 싸움 끝에 깨지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버렸다.[185] 케플러와 튀코는 곧 화해하고 마침내 봉급과 주거 생활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185]케플러와 튀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187]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튀코의 주변에는 늘 조수, 아첨꾼, 식객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은 시골에서 온 촌뜨기 학자인 케플러를 놀려댔다.[187] 튀코 역시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조금씩 볼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쉽게 자료 전체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187][188] 오히려 튀코는 케플러가 우르소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189]
케플러는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대공의 수학자로 임용되고자 하였다.[190] 이를 위해 케플러는 달의 운동에 대한, 힘에 바탕한 이론을 제안한 소론(《지구 안에 달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In Terra inest virtus, quae Lunam ciet'')을 써서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했다.[191] 그러나 뜻밖에도 페르디난트 본인이 개신교도들의 추방에 앞장섰고, 케플러는 추방당했다.[192]
1600년 8월 2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뒤 케플러 가족은 그라츠에서 추방당했다.[193] 몇달 뒤 돌아온 케플러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떠났다.[193] 한편 튀코의 연구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튀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롱고몬타누스는 덴마크로 돌아갔고 요하네스 뮐러도 떠났으며 텡나겔은 튀코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뒤 홀란트(네덜란드)로 가버렸다. 결국 남은 연구원은 튀코와 케플러뿐이었다.[193]
1601년의 대부분 동안 케플러는 튀코의 직접 도움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튀코는 케플러에게 행성의 관측 결과를 분석하고 (이제는 고인이 된) 경쟁자 우르소에게 불리한 내용의 논문을 쓰는 일을 시켰다.[194] 케플러는 스승 매스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튀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유치하고 변덕스럽다”, “우르소를 반박하는 글을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195] 9월 튀코는 에라스무스 라인홀드의 《프로이센 목록》을 대체하기 위해 황제에게 제출한 새로운 프로젝트 《루돌프 표》의 공동 작업자로 케플러를 임명했다.[194][196]
1601년 10월 13일 케플러는 달과 토성, 화성을 관측하고 있었다.[197] 같은 시각 튀코는 로젠버그 남작이 베푼 만찬에 놀러 가 포도주를 과음했는데 예의를 차리느라 화장실에 가지 않고 오랫동안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198] 하지만 음식과 음주를 자제하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 병이 악화되었고,[198] 이내 정신을 잃고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다. 튀코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는 케플러를 불러 튀코 체계의 연구에 전념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혼수상태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날 살려 줘, 날 살려 주게.”[199] “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하는 독백을 되풀이하더니 결국 튀코는 1601년 10월 24일에 어이없게 사망하고 말았다.[199]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가 완성하지 못한 작업을 완성하는 책임을 지고 튀코의 후임으로 제국 수학자에 임명되었고 튀코의 관측 자료가 없다고 완강하게 발뺌하는 튀코의 유족들에게 관측자료를 받아내는 일을 해야 했다.[198]
4. 2. 신성 로마 제국의 루돌프 2세와의 관계
케플러는 루돌프 황제의 궁정 수학자로서 천궁도를 이용해 점을 쳐주는 일을 하였다.[201] 케플러는 당시 점성술사들의 정밀한 예측 시도에 회의적이었지만, 튀빙겐 시절부터 동료, 가족, 후원자들에게 상세한 점을 쳐주곤 했다.[201] 황제는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 케플러의 점성술 자문을 구했는데, 케플러의 조언은 별보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었다.[201] 루돌프 2세는 케플러의 물리학, 천문학 연구를 지원했다.[201]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루터교 신앙은 황궁에서의 지위 덕분에 방해받지 않았다.[202] 황제는 케플러 가족에게 충분한 보수를 제공했지만, 황실 금고의 어려움으로 인해 케플러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202]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루돌프 황제에게 2만 플로린[203]의 하사금을 약속 받았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받지 못했으며 연봉 500플로린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204] 케플러의 임금은 3명의 황제(루돌프,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를 거치면서 체불되어 페르디난트 2세 때는 밀린 봉급이 1만 2천 플로린에 달했다.[205]
재정적 문제와 바바라와의 잦은 싸움, 질병으로 인해 가정 생활은 유쾌하지 못했다.[202] 케플러는 “아내를 나무라기보다 내 손가락을 깨무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182] 하지만 황궁 생활 덕분에 요하네스 마태우스 바커 본 바켄펠스, 요스트 뷔르기,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 등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천문학 연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202]
4. 3.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케플러는 1600년에 펴낸 달에 대한 논문에서 광학 법칙 연구 결과를 소개하였다. 1603년 대부분의 시간을 광학적 이론에 쏟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연구들을 잠시 멈추었다. 연구 결과 나온 원고는 1604년 1월 1일에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그 이름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Ad Vitellionem Paralipomena, Quibus Astronomiae Pars Optica Traditur''la)이다.[206][207]이 책에서 케플러는 빛의 밝기를 좌우하는 역제곱 법칙, 평면 거울과 곡면 거울에서의 반사 현상,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그리고 시차나 육안상의 천체의 크기 같은 광학의 천문학적 의미를 설명했다.[208] 또한 케플러는 자신의 광학 연구를 인간의 눈에까지 연장했고, 망막 위의 수정체 때문에 이미지들이 상하좌우 반전되어 투영된다는 것을 인지한 최초의 신경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케플러는 이미지가 반전된다는 사실을 광학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딜레마의 해결책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영혼의 어떤 작용으로 인해 이미지가 뇌 속에 들어가서 바로잡혀진다고 생각했다.[206] 사영 기하학의 시작과 관련하여 케플러는 이 저서에서 수학적 실체의 연속적인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원뿔곡선의 초점이 초점을 잇는 선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면 기하학적 형태가 변형되거나 퇴화하여 서로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초점이 무한대로 이동하면 타원이 포물선이 되고, 타원의 두 초점이 하나로 합쳐지면 원이 형성된다. 쌍곡선의 두 초점이 합쳐지면 쌍곡선은 한 쌍의 직선이 된다. 그는 또한 직선이 무한대로 연장되면 무한대의 단일 무한대의 점에서 스스로 만나므로 큰 원의 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했다.[97]
본래 케플러는 이것을 몇주동안 써서 간단한 논문으로 내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45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이 되고 말았다.[207]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은 굴절의 법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현대 광학의 기초로 평가받고 있다.[208][96]
4. 4. 1604년 초신성
1604년 10월,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났지만 케플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209][43] 케플러는 그 항성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는데, 그 초신성은 밤 하늘에서 가장 밝은 금성보다 약간 덜 밝았으며, 일 년 이상이나 관측되었다. 점성술적으로, 1603년은 수상궁의 시작 및 약 800년 주기의 대회합(목성과 토성의 합) 기간의 시작으로 지정된 해였다. 점성가들은 앞에서 말한 두 기간을 샤를마뉴의 등장(약 8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약 1600년 전)과 관련시켰고, 이로부터 새로운 황제가 등장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리라고 추측했다.[44] 케플러가 2년 뒤에 이 새로운 항성을 자기 저서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서 기술한 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수학자이자 점성술사로서 이러한 정황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케플러 본인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점성술적인 역사적 순환 해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대신 항성의 천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 논문에 항성의 밝기가 점차 어두워지는 것, 항성의 기원에 대한 추측, 시차를 잴 수 없었다는 점이 이 천체가 항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209], 더 나아가 하늘(천국)은 영원불변한다는(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천구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생각) 교리에 대한 의심 등을 기록했다. 새로운 항성의 탄생은 곧 하늘(천국)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210][45] 케플러는 또한 부록을 첨부하여 폴란드 역사가 라우렌티우스 수슬리가의 최근 연대기 작업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수슬리가 받아들여진 연대기가 4년 뒤쳐져 있다는 것이 맞다면, 현재의 새로운 별과 유사한 베들레헴의 별이 이전 800년 주기의 첫 번째 대결합과 일치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45]4. 5. 《신천문학》과 타원궤도의 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
1609년, 케플러는 《신천문학(Astronomia nova)》을 출판하여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을 발표했다.[216][72] 이 책에서 케플러는 이전의 행성 구(행성이 부착된 구형 껍질)라는 개념과는 달리 물리적 원인의 작용으로 인한 우주 공간에서 행성의 경로를 의미하는 혁명적인 행성 궤도 개념을 도입했다. 이로써 천문 현상은 물리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밝혀졌다.[64]
케플러는 화성 궤도가 타원임을 발견하고, 행성이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는 법칙(타원궤도의 법칙)을 제시했다.[216][72] 케플러는 40여 번의 실패 끝에 1605년 초에 이전에 너무 단순하다고 여겨졌던 타원에 대한 생각을 우연히 떠올렸다.[216][70]
또한,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이 일정하다는 법칙(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견했다.[215][69] 케플러는 원일점과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 측정에 바탕하여 행성의 운동 비율은 태양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알아냈다.[215][69]
케플러는 우주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태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며 태양계 기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212] 케플러는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적에 대한 이론과 광학에 유추하여 자신의 연구를 이끌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 가깝고 멀리 갈수록 운동이 빨라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힘이 태양에 의해 퍼져나가며, 멀어질수록 약화된다고 생각했다.[212][213][214]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에서는 “행성은 중심 별 주위를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고 생각되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제창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역시 당시의 “행성은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는 이론에 얽매여 있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찌그러진 원 또는 타원이라고 했다(케플러의 제1법칙).[149] 이 법칙을 바탕으로 케플러가 작성한 『루돌프 항성목록』은 『프러시아 항성목록』의 30배의 정확도를 가졌다.
케플러의 법칙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에 의해 행성이 태양에 끌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케플러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자력과 같은 힘이 존재한다고 말했다.[149]
4. 6. 《굴절광학》, 《꿈》 원고와 케플러의 추측
1610년 초,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이 새로 만든 강력한 망원경을 이용하여 목성 주위를 공전하는 네 개의 위성을 발견했다.[98] 갈릴레오는 자신의 관측 결과를 담은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를 출판하면서, 관측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케플러의 의견을 구했고, 케플러는 《별의 전령과의 대화(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라는 짧은 답변을 출판하여 열렬히 지지했다.[98] 그는 갈릴레오의 관측 결과를 옹호하고, 천문학과 광학뿐만 아니라 우주론과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발견과 망원경 방법의 의미와 함의에 대한 다양한 추측을 제시했다.[98] 같은 해 후반에 케플러는 갈릴레오를 더욱 지지하며 자신의 망원경 관측 결과를 담은 《목성 위성에 대한 이야기(Narratio de Jovis Satellitibus)》를 출판했다.[98] 그러나 케플러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갈릴레오는 《신천문학(Astronomia Nova)》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98] 당시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위성들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다.[223]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보증으로 자신을 겨냥한 이런 비판들을 모두 꺾어 버릴 수 있었지만 케플러는 고맙다는 인사말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224]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케플러도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하여 광학 망원경에 대한 이론상·실험상의 연구를 시작했다.[227][99] 그 결과로서 1610년 9월에는 《굴절광학》('' Dioptrice'')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1611년에 출판되었다.[228] 이 책에서 케플러는 양면 볼록 렌즈로 된 수렴 렌즈와 양면 오목 렌즈로 된 발산 렌즈에 대한 이론적 근거, 이 렌즈들이 갈릴레오식 망원경을 구성하는 원리, 실상과 허상의 개념, 정립상과 도립상, 확대 및 축소에 따른 초점 거리의 결과까지 설명했다.[228] 또한 케플러는 볼록 렌즈 두 장을 사용하여 갈릴레오의 볼록 렌즈 - 오목 렌즈 결합보다 높은 배율을 낼 수 있는 망원경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케플러식 망원경으로 오늘날의 굴절식 천체 망원경의 모태이다.[228][100]
1611년을 전후하여, 케플러는 《꿈(Somnium)》으로 (사후에) 출판될 원고를 배포하고 다녔다.[229]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와중에 사라져 버린 이 원고는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리고 있다.[229] 이 이야기는 일부는 우화였고 일부는 자전적이었으며 일부는 행성간 여행에 대한 논문이었다.[229]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229]
1611년 새해 선물로 케플러는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Strena Seu de Nive Sexangula'')라는 제목의 짧은 소논문을 지었다.[235] 케플러는 이 소논문에서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그것을 원자론의 물리적 근거로 해석했으며 구를 가장 촘촘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술했다.[235] 마지막 것이 후에 케플러의 추측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함께 수백년 동안 수학적 난제로 남았다.[235]
케플러는 또한 구를 쌓을 때, 면심입방격자가 가장 조밀하게 채워진다고 예상했다.[101][102] 이 예상은 케플러 추측이라고 불리며, 규칙적으로 쌓는 경우에 대해서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일찍이 증명되었지만, 불규칙한 쌓는 방법에 대해서는 400년 동안 미해결 문제였다. 케플러 추측은 1998년에 토마스 C. 헤일스에 의해, 컴퓨터를 이용하여 해결되었다.
5. 린츠 시절 (1612년 ~ 1626년)
1612년, 케플러는 루돌프 2세가 사망한 후 프라하를 떠나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하여 지역 학교 교사이자 수학자로 활동했다.[49] 린츠에서 케플러의 주요 업무는 (『루돌프 표』 완성 이외에) 지방 학교에서의 교수직과 점성술 및 천문학 서비스 제공이었다.[50]
== 루터교와의 결별 ==
린츠에서의 초기 몇 년 동안 케플러는 프라하에서의 생활에 비해 경제적 안정과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50] 그러나 신학적 견해 차이로 루터교 교회에서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했다.[50] 케플러는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두루 기독교적인 믿음을 형성해 주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이끌어 냈다. 다른 루터교도들은 이것을 근거로 케플러를 이단자로 지목하여 고소했다. 케플러는 “진리는 하나인데 세 종파로 찢겨 서로 비참하게 싸우는 게 가슴 아플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기독교인들끼리 교단의 차이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상은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반성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이 시작된 현대에서야 그의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너무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결국 케플러는 자신의 신학적인 신념으로 인해 루터교와 완전히 결별했다.[244]
== 재혼 ==
1613년 10월 30일, 케플러는 수잔나 로이팅거와 결혼했다.[51] 케플러는 첫 번째 아내 바바라가 사망한 후 2년 동안 11명의 다른 여성과 결혼을 고려했는데, 결국 다섯 번째 후보였던 로이팅거에게 청혼했다.[51] 그는 "사랑, 겸손한 충성심, 가계의 절약, 근면성, 그리고 의붓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사로잡았다"고 썼다.[52] 이 결혼에서 태어난 첫 세 자녀(마가레타 레기나, 카타리나, 제발트)는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세 자녀(코르둘라(1621년생), 프리드마르(1623년생), 힐데베르트(1625년생))는 성인이 되었다. 케플러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이 결혼은 그의 첫 번째 결혼보다 훨씬 행복했다.[53]
== 《포도주통의 신계량법》과 구분구적법 ==
1613년, 케플러는 포도주 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수학 논문 《포도주통의 신계량법》을 썼으나 이 논문은 161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245] 케플러는 와인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것에 관한 수학 논문 ''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을 저술했는데, 이 논문은 미적분학 발전에 중요한 단계였다.[103][106] 심슨 공식은 적분에서 사용되는 근사법으로, 독일어로는 ''Keplersche Fassregel''(케플러의 통 공식)로 알려져 있다.[107]
==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
1618년부터 1621년까지,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출판하여, 행성 운동 법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물리학적 설명을 시도했다.[74] 이 책은 행성 운동의 처음 두 가지 법칙을 (《우주론》에서 화성에 적용된) 모든 행성뿐만 아니라 달과 목성의 갈릴레이 위성에도 명시적으로 확장했다.[74] 관측 데이터에서 타원 궤도를 어떻게 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77]
== 어머니의 마녀 재판 ==
1615년,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가 마녀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자, 케플러는 어머니를 변호하기 위해 노력했다.[50] 1620년 7월, 라인볼트 일가는 사건을 형사 사건화했고, 종교 평의회는 카타리나의 체포, 심문, 고문을 명령했다.[258] 카타리나는 14개월 동안 투옥되었으나, 고발자들은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로 달려와 주민들의 질병에 대한 과학적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고, 튀빙겐 대학교 법학부의 동창 베솔트도 케플러를 도왔다.[260] 카타리나는 구두(口頭) 고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고문의 위협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한 증언이 참고되어 1621년 10월 3일 혐의가 기각되고 석방되었으나,[262] 6개월 후 사망하였다.[260][263]
== 《세계의 조화》와 조화의 법칙 ==
1619년, 케플러는 《세계의 조화》를 출판하여, 행성 운동의 조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고 케플러 법칙의 세 번째 법칙을 발표했다.[255][89] 케플러는 "기하학적인 것들이 창조주에게 온 세상을 장식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했다"고 확신했다.[89]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원인을 자기력과 비슷한 힘으로 보았으며, 이는 만유인력 개념의 예견이었다.[270]
== 30년 전쟁의 발발과 영향 ==
1618년, 체코 프라하에서 개신교도 대의원들이 프라하 황궁을 덮쳐 가톨릭 교도 집정관 두 명을 황궁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했다.[271] 1619년에는 마티아스 황제가 서거하고 근본주의 성향의 가톨릭 교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이어받았으며, 그 결과 1621년 6월 27일,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오랜 벗 예세니우스를 포함한 27명의 개신교도들이 페르디난트 2세황제에 의해 사형당했다.[272] 이것이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던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케플러가 살던 린츠도 30년 전쟁의 광신에 휩쓸렸다. 케플러를 루터교회에서 쫓아냈던 다니엘 히츨러도 감옥에 끌려갔다.[272] 하지만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케플러는 루터교와 결별한 후 개신교도들에게 거부당하는 입장이었고 제국 수학자라는 신분 덕분에 다른 개신교도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했다. 오히려 1621년 12월 30일에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자신을 제국 수학자로 공식 임명하자 케플러는 깜짝 놀랐다.[273]
5. 1. 루터교와의 결별
케플러는 린츠에 도착한 즉시 튀빙겐 신학교 동창이었던 주목사 다니엘 히츨러에게 종교모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며칠간 모임을 가진 뒤, 케플러는 루터교의 엄격한 신앙고백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히츨러는 케플러를 쫓아내 버렸다.[243] 케플러는 슈투트가르트의 종교의회에 이 사건을 청원했지만, 종교의회는 히츨러를 두둔하는 모욕스러운 편지와 함께 케플러의 청원을 기각했다. 케플러는 기분이 나빴지만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이 일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244]케플러는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두루 기독교적인 믿음을 형성해 주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이끌어 냈다. 다른 루터교도들은 이것을 근거로 케플러를 이단자로 지목하여 고소했다. 케플러는 “진리는 하나인데 세 종파로 찢겨 서로 비참하게 싸우는 게 가슴 아플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신념은 의심, 비난, 협박으로 돌아왔다. 기독교인들끼리 교단의 차이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상은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반성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이 시작된 현대에서야 그의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너무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1617년, 케플러는 튀빙겐의 신학 교수 마티아스 하펜레퍼를 방문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펜레퍼는 케플러와 교환한 편지를 신학교수회와 종교의회에 제출했다. 1619년 7월 31일에 “오류투성이 허상을 버리고 겸손한 믿음으로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여라”는 공식 평결이 나왔다. 결국 케플러는 자신의 신학적인 신념으로 인해 루터교와 완전히 결별했다.[244]
케플러는 신이 질서정연하게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었기에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 특히 천문학 분야에서의 법칙을 규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55][56] "나는 단지 신의 생각을 그 뒤를 따라 생각할 뿐이다"라는 말이 그에게 돌려졌지만, 이는 아마도 그의 글에서 발췌한 축약된 버전일 것이다. 케플러가 "자연의 법칙들은 인간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습니다. 신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를 원했습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57]
케플러는 기독교 여러 교파 간의 관용을 옹호했으며,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와 루터교도가 함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루터교도도, 칼뱅교도도, 가톨릭교도도 아니셨고, 지금도 아니십니다"라고 썼다.[58]
5. 2. 재혼
1613년 10월 30일, 43살의 케플러는 25살의 수잔나 로이팅어와 재혼하였는데, 청혼 과정이 상당히 독특했다. 연애에 서툴러 구혼 상대를 쉽게 찾지 못하던 케플러는 신부가 될만한 여성을 이름이 아닌 자신이 정한 후보 번호로 평가하였다. 후보는 1번에서 11번까지였으며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케플러의 서툰 구혼 솜씨는 당시 린츠 시민들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케플러는 용기를 내어 가장 마음에 들어한 5번 후보, 로이팅어에게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하였다. 케플러는 로이팅어를 “겸허한 성실, 살림 솜씨, 근면함, 의붓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이겨낸 여자”라고 표현하였다.재혼 초에 얻은 세 아이들(마르가레타 레기나, 카탈리나, 세발트)은 모두 어렸을 때 죽고 말았지만 이후에 낳은 세 아이는(1621년생 초르둘라, 1623년생 프리드마르, 1625년생 힐데베르트)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부인 수잔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케플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5. 3. 《포도주통의 신계량법》과 구분구적법
마티아스 황제의 부름을 받아 도나우강을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가던 중, 케플러는 강둑에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포도주통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부피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249][250] 케플러는 통의 표면이 직선이 아니므로 얇은 판을 무한히 겹쳐 놓은 것과 같다고 생각했고,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모든 물체의 부피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250]연구 결과로 나온 책의 원제는 〈포도주통을 이용한 구적법과 부피 측정법〉이었다.[250] 1615년, 케플러는 이 책을 린츠에서 직접 출판했다.[249][250] 케플러는 원추 곡선이 만들어 내는 원, 타원, 포물선 등의 도형에 이 방법을 일반화하려 했다.[250] 이 책은 정밀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17세기 적분학의 기초가 되었다.[250] 케플러는 와인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것에 관한 수학 논문 ''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을 저술했는데, 이 논문은 미적분학 발전에 중요한 단계였다.[103][106] 심슨 공식은 적분에서 사용되는 근사법으로, 독일어로는 ''Keplersche Fassregel''(케플러의 통 공식)로 알려져 있다.[107]
5. 4.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신천문학》 완성 이후, 케플러는 천문학 책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251] 1615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처음 세 권을 완성했고, 1620년에 4권을, 1621년에 5 ~ 7권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타원궤도의 법칙의 결정판으로, 행성운동의 세 법칙 모두를 포함하고 천체 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어 케플러의 저작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되었다.[252] 지동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케플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이었다.[252] 그러나 이 책에서 케플러는 (앞의 두 행성운동법칙을 노골적으로 달과 목성의 주요 위성들에까지 확대 해석하긴 했지만) 어떻게 관측 자료로부터 타원형 궤도를 결론지었는지에 설명하지는 않았다.[253]케플러는 자신의 《개론》을 스승인 마이클 마에스트린의 저술을 본떠 만들고자 했다.[78] 마에스트린은 비전문가에게 천동설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저명한 책을 출판했었다.[78] 케플러는 마에스트린의 질문과 답변 형식과 같은 형식으로 1615년에 제1권(제1~3장)을 완성하여 1617년에 출판했다.[79]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코페르니쿠스 책 금지와 30년 전쟁의 시작으로 인해 다음 두 권의 출판이 지연되었다.[78] 케플러는 금지령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개론》의 독자층을 초보자에서 전문 천문학자와 수학자로 바꾸었고, 주장은 점점 더 정교해졌으며 이해하기 위해 고급 수학이 필요하게 되었다.[78] 제4장으로 구성된 제2권은 1620년에, 제5~7장으로 구성된 제3권은 1621년에 출판되었다.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에서는 “행성은 중심 별 주위를 완벽한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고 생각되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제창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역시 당시의 “행성은 원궤도를 그리며 운행한다”는 이론에 얽매여 있었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찌그러진 원 또는 타원이라고 했다(케플러의 제1법칙). 티코 브라헤가 화성 관측의 정확한 데이터를 남겼는데, 실제 지구의 궤도는 완벽한 원에 매우 가깝지만 화성의 궤도는 타원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1법칙 발견으로 이어지는 데이터로서 유용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에 의해 행성이 태양에 끌리고 있다”고 시사한다. 케플러는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자력과 같은 힘이 존재한다”고 말했다.[149]
5. 5. 어머니의 마녀 재판
1615년, 케플러의 동생 크리스토프와 금전적 분쟁을 겪던 우르술라 라인볼트는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사악한 술수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주장했다.[255] 카타리나는 린츠의 아들 집으로 피신했고, 케플러는 직접 재판에 개입했다.[257]라인볼트는 임신한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가 탈이 났는데, 3년 반 전에 카타리나가 지어준 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8월, 카타리나는 작은아들 크리스토프와 마을 목사인 사위 게오르크의 도움으로 라인볼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256]
이때 케플러의 《꿈》이 알려졌는데, 소설 속 주인공의 어머니가 악령을 부리는 노파라는 설정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카타리나가 한 소녀의 옷을 털어 주었는데, 소녀는 팔에 통증을 호소하며 마녀의 손자국이라고 주장했다. 레온베르크 법원 집행관은 이 사건을 슈투트가르트 고등 종교 평의회로 넘겼다.[257]
1620년 7월, 라인볼트 일가는 사건을 형사 사건화했고, 종교 평의회는 카타리나의 체포, 심문, 고문을 명령했다.[258] 카타리나는 14개월 동안 투옥되었으나, 고발자들은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로 달려와 주민들의 질병에 대한 과학적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고, 튀빙겐 대학교 법학부의 동창 베솔트도 케플러를 도왔다.[260]
카타리나는 구두(口頭) 고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고문의 위협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한 증언이 참고되어 1621년 10월 3일 혐의가 기각되고 석방되었으나,[262] 6개월 후 사망하였다.[260][263]
5. 6. 《세계의 조화》와 조화의 법칙
1619년, 케플러는 《세계의 조화》를 출판하여, 행성 운동의 조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고 케플러 법칙의 세 번째 법칙을 발표했다.[255][89] 케플러는 빈센조 갈릴레이의 《고대와 현대 음악과의 대화》를 읽고, 피타고라스의 조화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264][265] 그는 ‘조화’라는 세계의 수학적 규칙을 찾으려 했으며, 기하학에서 영감을 받아 “기하학적 물체가 전 우주의 모형을 떠오르게 하였다”고 말했다.[266]《세계의 조화》에서 케플러는 천체의 음악과 같은 자연계의 조화를 음악적 관점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그는 정다각형와 정다면체, 케플러의 다면체를 탐구하며 조화 분석을 음악, 기상학, 점성술에까지 확장했다. 그는 천체의 영혼이 조화를 만들어내며, 점성술에서는 이 조화가 인간의 영혼과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했다.[267][90][91]
《세계의 조화》 제5권에서 케플러는 행성운동, 특히 궤도 진입 최저 속도와 태양에서의 궤도 거리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는 다른 천문학자들이 사용했던 관계를 튀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와 자신의 천문학 이론을 통해 더 정밀하게 다듬고 물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268][91]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이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행성운동의 제3법칙)을 발견했다.[92] 그는 이 법칙이 아이작 뉴턴 등의 과학자들이 태양과 행성 간의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았다.[93][269]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원인을 자기력과 비슷한 힘으로 보았으며, 이는 만유인력 개념의 예견이었다.[270][149] 그는 자신의 발견을 “신의 환희”라고 표현했다.[270]
5. 7. 30년 전쟁의 발발과 영향
1618년, 체코 프라하에서 개신교도 대의원들이 프라하 황궁을 덮쳐 가톨릭 교도 집정관 두 명을 황궁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했다.[271] 1619년에는 마티아스 황제가 서거하고 근본주의 성향의 가톨릭 교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이어받았으며, 그 결과 1621년 6월 27일,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오랜 벗 예세니우스를 포함한 27명의 개신교도들이 페르디난트 2세황제에 의해 사형당했다.[272] 예세니우스는 혀를 잘린 다음 사지가 찢겨 죽었다. 사형수들의 목은 경고의 의미로 썩어질 때까지 10년간 전시되었다.[272] 이것이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던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케플러가 살던 린츠도 30년 전쟁의 광신에 휩쓸렸다. 케플러를 루터교회에서 쫓아냈던 다니엘 히츨러도 감옥에 끌려갔다.[272] 하지만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케플러는 루터교와 결별한 후 개신교도들에게 거부당하는 입장이었고 제국 수학자라는 신분 덕분에 다른 개신교도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했다. 오히려 1621년 12월 30일에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자신을 제국 수학자로 공식 임명하자 케플러는 깜짝 놀랐다.[273]
6. 말년 (1626년 ~ 1630년)
1623년, 케플러는 마침내 《루돌프 표》를 완성했으며, 이는 당대에 그의 주요 업적으로 여겨졌다.[81] 이 표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의 운동을 예측한 천문표였다. 그러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합의 문제로 인해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81]
발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황제 군대가 승리한 1628년,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의 땅으로 갔다.
1630년 10월 8일, 케플러는 이전에 했던 일에 대한 이자를 받기 위해 레겐스부르크로 향했다.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케플러는 병에 걸렸고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도착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1630년 11월 15일, 그는 사망했다. 그는 레겐스부르크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묘지에 묻혔는데, 이 묘지는 삼십년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다.[54]
6. 1. 《루돌프 표》

1623년, 케플러는 마침내 《루돌프 표》를 완성했으며, 이는 당대에 그의 주요 업적으로 여겨졌다.[81] 이 표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의 운동을 예측한 천문표였다. 그러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합의 문제로 인해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81][274]
《루돌프 표》를 완성한 후, 케플러는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제가 자신을 정중하게 맞이하며, 25년간의 연구에 대한 대가로 4천 플로린을 하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275][276]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지급 명령서는 부도 수표나 다름없었고,[277] 밀린 봉급은 1만 2천 플로린에 달했다.[205]
6. 2. 발렌슈타인과의 인연
발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황제 군대가 승리한 1628년,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의 땅으로 갔다. 발렌슈타인은 어떤 종파든 기독교이기만 하면 모두 용인했고,[205] 케플러는 종교 문제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케플러를 휘하에 두어 자신이 학문과 과학을 아끼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전하려고 했다.[278]
20년 전 프라하에서 별점을 봐 주었던 케플러를 다시 만난 발렌슈타인은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점을 봐 달라고 요구했는데, 새로 본 별점에서 1634년에 ‘무시무시한 흉조’가 들어 있었다.[218][279] 발렌슈타인은 케플러의 점성술 자문을 듣고자 했지만, 케플러는 권력자의 점성술 자문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발렌슈타인과 모종의 타협을 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위치 정보만 제공하고, 그 해석은 발렌슈타인의 개인 점성술사 기안바티스타 제노가 담당했다.[278] 한편, 페르디난트 황제는 체불된 케플러의 봉급 1만 1817 플로린 문제를 발렌슈타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맡겨 버렸다.[277]
6. 3. 죽음
말년에 케플러는 돈 문제로 프라하, 린츠, 울름, 사간(Sagan) 등지를 전전했다.[280] 1630년 10월 8일, 케플러는 린츠에서 돈을 독촉하고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재고 도서를 처리하며,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7선제후 회의에 참석하고자 여행길에 올랐다.[283] 린츠,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를 거쳐 11월 2일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으나, 여행 중 얻은 병이 악화되어 섬망 상태에 빠졌다.[284][285] 1630년 11월 15일 사망하여 레겐스부르크 성벽 밖 성 베드로 개신교 묘지에 묻혔고, 그날 저녁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286][287] 장례식에는 선제후 회의에 참석한 신성 로마 제국의 명망가들이 참석했다.[286] 케플러의 비문은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였다.[288] 그러나 30년 전쟁 와중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 군대에 의해 묘지가 훼손되어 무덤은 사라졌다.[288][289][290] 케플러의 한 친구가 남긴 케플러의 묘비석 스케치가 케플러의 무덤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다.7. 케플러 이론에 대한 평가와 영향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은 발표 직후에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91][292][293]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르네 데카르트 같은 저명한 학자들조차 케플러의 《신천문학》을 완전히 무시했다.[108] 케플러의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을 포함한 많은 천문학자들은 케플러가 천문학에 물리학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했다.[293]
하지만, 여러 천문학자들이 케플러의 이론과 그 응용을 천체 관측을 통해 검증하기 시작했다.[294] 1631년 11월 7일 피에르 가상디는 케플러가 예측한 수성 일면통과를 관측하는 데 성공하여, 케플러 이론의 정확성을 입증했다.[294] 이는 최초의 수성 일면통과 관측이었다.[295] 그러나, 약 한 달 뒤에 있었던 금성 일면통과 관측은 실패했는데, 이는 《루돌프 표》의 부정확성 때문이었다.[295] 가상디는 당시 금성 일면통과가 파리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112] 1639년 금성 일면통과를 관측한 제러마이아 호록스는 자신의 관측 결과를 사용하여 케플러 모델의 변수를 조정하고, 일면통과 관측 장비를 제작하여 케플러 이론을 옹호했다.[296][297][298]
케플러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1630년에서 1650년 사이에 천문학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타원 궤도 기반 천문학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냈다.[302] 과학사가 제임스 R. 뵐켈은 케플러의 업적이 갈릴레오의 업적보다 천문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224]
케플러는 천체 운동에서 신비주의를 배제하고,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이 천체에도 적용됨을 간파하여, 천문학을 근대 과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270] 17세기 후반, 조반니 알폰소 보렐리와 로버트 훅 등은 케플러의 연구를 바탕으로 인력과 관성 개념을 통합한 물리 천문학 이론을 발전시켰다.[116] 이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에서 만유인력을 통해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유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17]
케플러는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그는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하고, 천문학 서적을 출판했으며, SF 소설(꿈)을 쓰는 등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229] 세이건은 튀코에서 케플러에 이르는 한 세대 사이에 과학자들이 대중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229]
케플러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도 보여주었는데, 그는 미래에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우주 공간이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예측했다.[290] 막스 크루제는 이를 우주 여행에 대한 통찰로 해석했다.[303]
케플러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서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은 케플러를 귀납적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아펠트(Ernst Friedrich Apelt)는 케플러를 "과학혁명"의 핵심 인물로 규정했다.[119]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é)는 케플러의 이론화를 고대 세계관에서 현대 세계관으로의 지적 변혁의 중심으로 보았다.[120]
찰스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 노우드 러셀 한슨(Norwood Russell Hanson),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 칼 포퍼(Karl Popper)와 같은 과학철학자들은 케플러의 작품에서 비교 불가능성, 유추 추론, 반증 등 많은 철학적 개념의 예를 발견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케플러와 로버트 플러드의 우선권 논쟁을 이용하여 과학 연구에 대한 분석 심리학의 함의를 탐구하기도 했다.[121]
케플러는 자연철학에서 피타고라스적 전통을 옹호하며, 수가 우주의 질서의 중심이라고 보았다.[148] 그러나 그는 원운동 기반의 천체론에서 벗어나 타원 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천체론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철학을 쇄신했다.
8. 저작
요하네스 케플러는 천문학, 수학, 점성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우주구조의 신비》, 《신천문학》,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세계의 조화》, 《루돌프 표》 등이 있다.
- 《우주구조의 신비》 (''Mysterium cosmographicum'', 1596년)
-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Ad Vitellionem Paralipomena, Quibus Astronomiae Pars Optica Traditur'', 1604년)
-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 (''De Stella nova in pede Serpentarii'', 1604년)
- 《신천문학》 (''Astronomia nova'', 1609년)
- 《제3자의 개입》 (''Tertius Interveniens'', 1610년)
-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 (''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 1610년)
- 《굴절광학》 (''Dioptrice'', 1611년)
-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 (''De nive sexangula'', 1611년)
-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신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 (''De vero Anno, quo aeternus Dei Filius humanam naturam in Utero benedictae Virginis Mariae assumpsit'', 1613년)[135]
- 《전원시의 역사》 (''Eclogae Chronicae'', 1615년)
- 《포도주통의 신계량법》 (''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 1615년)
-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Epitome astronomiae Copernicanae'', 1618년 ~ 1621년)
''Epitome astronomiae copernicanae'', 1618 - 《세계의 조화》 (''Harmonice Mundi'', 1619년)
- 《우주구조의 신비 제2판》 (''Mysterium cosmographicum'', 1621년)
- 《루돌프 표》 (''Tabulae Rudolphinae'', 1627년)
- 《꿈》 (''Somnium'', 1634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케플러의 여러 저서들이 현대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의 전집 출판은 1937년에 시작되어 21세기 초에 거의 완료 단계에 이르렀다. 크리스티안 프리슈(Christian Frisch)는 케플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8권으로 구성된 케플러 전집 ''Kepleri Opera omnia''를 1858년부터 1871년까지 편찬하였다. 1914년부터 발터 폰 다이크(Walther von Dyck)에 의해 새로운 판본이 기획되었고, 다이크는 케플러의 미출판 원고 사본을 수집, 레닌그라드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를 사진 촬영을 위해 소련 당국으로부터 빌려오도록 설득하였다. 막스 카스파(Max Caspar)는 1923년에 케플러의 ''우주구조의 신비''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다이크와 카스파 모두 알렉산더 폰 브릴(Alexander von Brill)의 영향을 받아 케플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케플러 위원회는 볼커 비알라스(Volker Bialas), 울리히 그리굴(Ulrich Grigull), 롤란트 뷜리슈(Roland Bulirsch)가 의장을 역임하였다.[122]
9. 역사적·문화적 영향
케플러는 천문학과 자연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과 과학의 사학사에서 매우 중대한 인물이다.[304] 그의 운동 법칙은 장 몽투클라의 《수학의 역사》(1758년)와 장밥티스트조지프 들랑브르의 《근대 천문학의 역사》(1821년) 같은 초기 천문학 사학의 중심이었다.[304] 계몽주의 사고방식으로 쓰인 사서들은 무신론·불신자들과 케플러 사이에 펼쳐진 철학적, 종교적 논쟁을 다루었지만 이후의 낭만적 자연철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케플러의 성공에 중심을 두고 생각했다.[304] 윌리엄 휴얼은 《귀납적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37년)에서 케플러를 귀납적인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휴얼은 이후 《귀납적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40년)에서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과학적 방법을 구현한 화신으로 케플러를 치켜세웠다.[304] 예카테리나 대제가 구입한 케플러의 원고들을 최초로 광범위하게 연구한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아펠트는 케플러를 '과학 혁명의 열쇠'라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케플러의 수학 연구와 그의 심미적 감수성, 통합된 사고 시스템의 일부로서의 신학과 물리학적 아이디어를 보고 케플러의 인생과 연구를 최초로 확장해 분석하였다.[304]
현대로 접어든 19세기 후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케플러 저작들이 번역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케플러 전집의 조직적인 출판은 1937년에 시작되어 최근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며 막스 카스파의 케플러 일대기는 1948년에 출판되었다.[305] 한편,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케플러를 다룬 저작은 아펠트의 뒤에, 케플러의 우주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주요한 이정표가 되었다.[306]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쿠아레를 비롯하여 많은 과학사 분야의 제1세대 전문가들은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사의 중심 사건으로, 케플러는 그 혁명의 중심 인물로 묘사하였다.[306]
과학 혁명에서 케플러의 위치에 대한 논쟁으로, 철학적이고 대중적인 평가는 매우 다양해졌다. 가장 영향력 있는 관련 서적 중 하나인 아서 쾨슬러의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 1959년)에서 케플러는 의심할 나위 없는 과학 혁명의 영웅(지성적인 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신학적으로도)으로 그려진다.[307] 찰스 샌더스 퍼스, 노우드 러셀 핸슨, 스티븐 툴민, 칼 포퍼 같은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는 재삼재사 케플러를 연구한다.[308] 통약불가능성, 유추적 추론, 반증 가능성, 그 외 많은 철학적 개념을 케플러의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308]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분석심리학과 과학 수사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에 케플러와 로버트 플러드 사이에 있던 선취권 분쟁을 이용했다.[308]
존 반빌의 가공의 역사 소설 《케플러》(''Kepler'', 1981년)는 쾨슬러의 논픽션 내러티브의 자세한 기술과 과학철학의 테마를 다수 답사했는데[309] 이것보다 더욱 가공적인 것은 최근에 쓰인 논픽션 《하늘의 음모》(''Heavenly Intrigue'', 2004년)로 케플러가 튀코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 튀코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310]
오스트리아에서 많은 역사적 유산을 남긴 케플러는 가장 유명한 은제 기념주화 중 하나인 10유로 요하네스 케플러 은화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이 기념주화는 2002년 9월 10일에 주조되었다. 케플러는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에겐베르크 성의 축조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화 앞면에는 이 에겐베르크 성이 있고 은화의 뒷면에는 케플러의 초상화가 있다. 뒷면의 케플러 초상화 앞에는 《우주구조의 신비》에 나오는 구와 다면체가 겹쳐진 모형이 있다.
2009년, 미국 항공우주국은 케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케플러 계획이다.[311] 뉴질랜드의 피오르랜드 국립 공원에는 케플러의 이름이 붙은 산맥이 있는데 케플러 산맥이라고 불리며 산맥을 관통하는 산책로 이름 역시 케플러 트랙이다.
이렇듯 이제 케플러는 과학의 현대화와 그 이전의 인물들의 아이콘이자 대중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290]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312]”라고 평가했다.
그의 이름을 딴 주요 대상은 다음과 같다.
- 케플러 입방체: 기하학적 모양들의 한 집합. 이 중 2개는 케플러가 만들어냄.
- 케플러 초신성: 1604년 초신성. 케플러가 발견하고 묘사.
- 케플러: 달 표면의 크레이터
- 케플러: 화성 표면의 크레이터
- 1134 케플러: 소행성
- 린츠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교: 린츠 사회경제대학에서 1975년 개명.
- 케플러 대학교: 워싱턴 시애틀 소재.
- 케플러 계획: 외계 행성을 찾는 NASA 계획.
- 자동화물운반선(ATV)(欧州補給機) 2호기
- 우주망원경
- 켄터너 와인 상인이 함부로 양을 재는 것에 화가 나서 정한 단위. 엄밀하게 "슈타트넬 표준기"라고 불리는 용기를 만들어, 여기에 가득 채운 도나우 강물의 2/7을 1켄터너로 했다.[151]
케플러는 파울 힌데미트의 오페라 《세계의 조화》(''Die Harmonie der Welt'')의 중심 인물이며, 알베르트 귀노바르트는 《세계의 조화》에 바탕한 현악 4중주곡 《케플러》(''Kepler'')를 작곡했다. 존 반빌의 1981년 소설 《소설 케플러》, 프랑크 보겔 감독의 1974년 도이칠란트 영화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칼 세이건의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제 3부에서 케플러의 업적과 삶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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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Tertius Interveniens, das ist Warnung an etliche Theologos, Medicos vnd Philosophos, sonderlich D. Philippum Feselium, dass sie bey billicher Verwerffung der Sternguckerischen Aberglauben nict das Kindt mit dem Badt aussschütten vnd hiermit jhrer Profession vnwissendt zuwider handlen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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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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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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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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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lliau, Mercator, and Horrock's ''Venus in sole visa'': Three Unpublished Let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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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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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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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
영림카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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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의 시간여행 3권
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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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아레의 케플러/케플러의 쿠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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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의 케플러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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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아레의 케플러/케플러의 쿠아레, 과학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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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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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fluence of Archetypical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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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케플러, Dancing the grave dance: Science, art and religion in John Banville's Kep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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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pler in the D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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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Kepler Mission Sets Out to Find Planets Using CCD Cameras
http://www.dailytech[...]
DailyTech
2009-07-03
[312]
서적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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