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구치 요시노리
1. 개요
다구치 요시노리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 지도자, 정치인이다. 1989년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등에서 활약했다. 선수 시절 심판 폭행, 상대 선수 부상, 서포터 폭행 사건 등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 은퇴 후에는 우라와 레이너스 감독을 맡아 팀의 L1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나데시코 리그 실행 위원회 위원장 및 전무 이사로 활동하며 리그 발전에 기여했다. 정치인으로서 우라와시, 사이타마시 시의원과 사이타마현 의원을 역임했으며, 지방 분권과 교육 문제에 대한 정책을 펼쳤다.
| 이름 | 다구치 요시노리 |
|---|---|
| 본명 | 다구치 요시노리 |
| 로마자 표기 | Taguchi Yoshinori |
| 출생일 | 1965년 9월 14일 |
| 출생지 |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우라와구 (구 우라와시) |
| 키 | 184cm |
| 몸무게 | 79kg |
| 포지션 | 수비수 |
| 利き발 | 오른발 |
| 애칭 | 니뇨 |
| 19??-1977 | 다카사고 축구 소년단 |
|---|---|
| 1978-1980 | 우라와시립 기시 중학교 |
| 1981-1983 | 우라와 남고 |
| 1985-1988 | 쓰쿠바 대학 |
| 1989-1992 | 전일본공수/요코하마 플뤼겔스 |
|---|---|
| 출장 (1989-1992) | 43경기 2골 |
| 1993 | 산프레체 히로시마 |
| 출장 (1993) | 6경기 0골 |
| 1994-1998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
| 출장 (1994-1998) | 90경기 6골 |
| 통산 출장 | 139경기 8골 |
| 1984 | 일본 유스 축구 국가대표팀 |
|---|---|
| 출장 (1984) | 2경기 0골 |
| 1988 | 일본 B대표팀 |
| 출장 (1988) | ? |
| 1990-1991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출장 (1990-1991) | 0경기 0골 |
| 2001-2004 | 사이타마 레이나스 |
|---|
-
남자 축구 수비수 -
마루야마 요시아키
마루야마 요시아키는 일본의 은퇴한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J리그와 태국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에는 지도자와 J리그 아시아 앰배서더로 활동했다. -
남자 축구 수비수 -
미겔 앙헬 나달
미겔 앙헬 나달은 스페인 출신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FC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내 라리가 우승 등을 경험했으며, 스페인 국가대표팀으로 62경기에 출전했다. -
20세기 일본 사람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20세기 일본 사람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
1965년 출생 -
체링 톱게
체링 톱게는 2013년부터 2018년, 그리고 2024년부터 현재까지 부탄의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인민민주당 창당을 주도하며 정계에 입문하여 경제 발전, 투명성 강화, 그리고 탄소 중립 유지를 위한 환경 운동에 힘쓰고 있다. -
1965년 출생 -
교토쿠 고지
교토쿠 고지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2008년 부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시아 축구 연맹컵 준결승 진출, 2003년 시미즈 에스펄스 감독으로 J리그컵 준결승과 천황배 준결승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2. 선수 경력
사이타마시 출신으로, 사이타마 시립 우라와 미나미 고등학교와 쓰쿠바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89년 전일본공수 축구 클럽(훗날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부터 센터백으로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나, 1991년 심판 폭행 사건으로 7개월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1993년에는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이적했지만, 시즌 개막 전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4년 고향팀인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로 이적하여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5년 경기 후 서포터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다시 4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 등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차례 징계를 받았다.
1997년부터는 잦은 부상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크게 줄었고, 1998년 10월 3일 복귀전에서 퇴장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2.1. 클럽 경력
쓰쿠바 대학 졸업 후 1989년 전일본공수 축구 클럽 (훗날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부터 센터백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에는 일본 축구 리그 선발팀에 뽑혀 1월 22일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다이너스티컵과 아시안 게임, 1991년 기린컵 축구의 일본 대표팀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으나, 국제 A매치 출전 기록은 없고 국제 C매치 3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1991년 10월 16일 열린 코니카컵 경기에서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1년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징계는 이후 7개월로 줄어들었으며, 다구치는 전일본공수 축구 클럽의 후신인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다.
1993년 J리그 개막과 함께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이적했다. 하지만 개막 전 캠프에서 부상을 당해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같은 해 7월 7일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종료 직전 골문 앞에서 상대 골키퍼 혼나미 겐지와 충돌하며 혼나미의 복부를 가격했고, 이로 인해 혼나미는 신장이 파열되는 전치 6개월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1994년에는 고향팀인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로 이적하여 주전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이적 후에도 거친 플레이와 징계는 계속되었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의 리그 개막전에서는 라몬 디아스를 뒤에서 넘어뜨려 퇴장당했고,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와의 3라운드 경기에서는 조 쇼지에게 위험한 태클을 가하는 등 전반 32분 만에 경고 2회로 퇴장당해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시즌 중반에는 경고 누적으로 3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잦은 퇴장과 징계로 인해 팀과 팬들의 신뢰를 잃었다.
1995년 홀거 오제크 감독 부임 후에는 플레이 스타일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강력한 피지컬을 유지하면서도 반칙 없이 공을 빼앗는 깨끗한 수비를 선보이며 팀의 상위권 도약에 기여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23일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와의 경기 후 서포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을 일으켜 4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징계 기간 동안 봉사 활동을 거친 후 복귀하여 오제크 감독 아래 다시 기회를 얻었고, 기도 부흐발트, 바질 볼리와 함께 견고한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그러나 1997년부터 부상이 잦아지면서 약 2년간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1998년 10월 3일 아비스파 후쿠오카와의 경기를 통해 복귀했지만, 후반 10분 교체 투입된 지 27분 만인 후반 37분에 경고 2회로 또다시 퇴장당했다. 이 경기가 그의 프로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가 되었고, 1998년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 일본 | 리그전 | 리그컵 | 천황배 | 통산 | ||||||||
|---|---|---|---|---|---|---|---|---|---|---|---|---|
| 1989-90 | 전일본공수 | 24 | JSL1 | 20 | 1 | 3 | 0 | 4 | 0 | 27 | 1 | |
| 1990-91 | 18 | 1 | 4 | 0 | 2 | 1 | 24 | 2 | ||||
| 1991-92 | 3 | 5 | 0 | 1 | 0 | 0 | 0 | 6 | 0 | |||
| 1992 | 요코하마 플뤼겔스 | - | J1 | - | 0 | 0 | 1 | 0 | 1 | 0 | ||
| 1993 | 히로시마 | 6 | 0 | 0 | 0 | 0 | 0 | 6 | 0 | |||
| 1994 |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 29 | 1 | 2 | 0 | 2 | 0 | 33 | 1 | |||
| 1995 | 36 | 4 | - | 0 | 0 | 36 | 4 | |||||
| 1996 | 24 | 1 | 13 | 1 | 4 | 1 | 41 | 3 | ||||
| 1997 | 3 | 0 | 0 | 0 | 0 | 0 | 0 | 0 | 0 | |||
| 1998 | 24 | 1 | 0 | 0 | 0 | 0 | 0 | 1 | 0 | |||
| 통산 | 리그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
| J1 | 96 | 6 | 15 | 1 | 7 | 1 | 118 | 8 | ||||
| JSL1 | 43 | 2 | 8 | 0 | 6 | 1 | 57 | 3 | ||||
| 총 통산 || 139 || 8 || 23 || 1 || 13 || 2 || 175 || 11 | ||||||||||||
기타 공식전
* 1990년
코니카컵 2경기 0득점
* 1991년
코니카컵 4경기 0득점
주요 기록
* J리그 첫 출전: 1993년 6월 12일 가시마 앤틀러스 전 (에히메현 종합 운동 공원 육상 경기장)
* J리그 첫 득점: 1994년 11월 19일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전 (도야마현 종합 운동 공원 육상 경기장)
* JSL(1부) 첫 출전: 1989년 10월 8일 후루카와 전공 전 (미쓰자와 구기장)
* JSL(1부) 첫 득점: 1989년 11월 23일 후지타 공업 전 (국립 경기장)
2.2. 국가대표 경력
쓰쿠바 대학 재학 중이던 1988년, 1988년 AFC 아시안컵 예선을 위한 일본 B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대학 1년 후배였던 이하라 마사미, 나카야마 마사시 등과 함께 이 대회에서 3경기에 출전했지만, 일본 축구 협회는 해당 대표팀이 A대표팀이 아닌 B대표팀이었다는 이유로 공식 A매치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990년에는 다이너스티컵과 베이징 아시안 게임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고, 1991년에는 기린컵 축구 대표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국제 A매치 출전 기록은 없으며, 1991년에 3번의 국제 C매치에 출전한 기록이 있다.
그 외 1984년에는 일본 유스 대표로 선발되어 AFC 유스 선수권 1984 1차 예선에 출전한 경험이 있다.
| 연도 | 대표팀 구분 | 주요 대회 및 경기 | 비고 |
|---|---|---|---|
| 1984 | 일본 유스 대표 | AFC 유스 선수권 1984 1차 예선 | |
| 1988 | 일본 B대표팀 | AFC 아시안컵 1988 예선 | B대표팀, 3경기 출전 |
| 1990 | 일본 대표 | 다이너스티컵, 베이징 아시안 게임 | 대표 선출 |
| 1991 | 일본 대표 | 기린컵 축구 | 기린컵 대표, C매치 3경기 출전 (0득점) |
3.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다구치는 축구 지도자와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우라와 레지나스의 감독을 맡아 L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1999년에는 우라와시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사이타마시 시의원과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3.1.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다구치는 2001년 L 리그 클럽인 우라와 레지나스(이후 사이타마 레지나스로 명칭 변경)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4년에는 팀을 L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황후배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2004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3.2. 스포츠 행정가 경력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 부재)
3.3. 정치 경력
1999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 우라와시 시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만 표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1위로 당선되었다. 2001년 5월 사이타마시가 발족하면서 사이타마시 시의원이 되었다. 2003년 4월에는 사이타마현 의회 의원 선거에 남11구(사이타마시 미도리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전 J리그 선수 출신 정치인으로서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서포터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으며 주목받았다.
정치 활동 기간 동안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았다. 구 우라와시 및 사이타마시 시의원 시절에는 특정 회파에도 속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지자체를 초월한 사이타마현 지방 의원 조직인 '지방 주권을 목표로 하는 사이타마 지자체 의원 그룹'에 참여했다. 사이타마현 의회에서는 민주당의 보수 성향 의원들과 무소속 의원들이 결성한 회파 '지방 주권의 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2005년 12월, 민주당 사이타마현 연합이 '지방 주권의 회'와 민주당 내 구 사회당 계열 의원들의 회파인 '민주당 의원단'을 통합하려는 방침을 세우자, '민주계 의원'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아 '지방 주권의 회'를 탈퇴하고 다시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2007년 2월, 차기 통일 지방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은퇴 결정과 관련하여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과 거의 같은 권한을 가진 정령 지정 도시에서 선출된 현 의원의 존재 의의가 옅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선거구나 의원 정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향후 정치 활동 경험을 살려 교육 문제 관련 활동과 야외 교육 거점 마련에 힘쓸 것이라고 언급했다.
2009년 3월에는 사이타마 시장 선거에 무소속 출마를 검토했으나, 같은 해 4월 "(현 시점에서는) 스포츠를 통한 지역 공헌이 나의 본분"이라며 출마를 포기했다.
3.3.1. 정책
* 시의원 시절부터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한 거리 조성"을 내걸었다.
* 교육 문제를 제기하고, 스포츠 진흥 및 스포츠를 핵심으로 한 교육 충실을 제안했다.
*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삭감과 사이타마 스타디움 외의 현의 비수익 사업 철수를 주장했다.
* 중앙 정부의 일극 집중을 반대하며 지방 분권 추진을 강조했다.
* 아이카와 소이치 사이타마 시장(구 우라와 시장)과 우에다 기요시 사이타마현 지사의 정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4. 논란 및 사건 사고
다구치는 선수 시절 여러 차례 논란과 사건 사고에 연루되었다. 전일본공수 소속이던 1991년 10월,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1년간 공식 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이적한 1993년 7월에는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 중 상대 골키퍼 혼나미 겐지에게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히는 충돌이 있었다. 우라와 레즈 소속이던 1995년 9월에는 경기 후 서포터를 폭행하여 4개월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러한 사건들과 잦은 부상으로 인해 선수 경력 후반에는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1998년 10월 3일 복귀전에서 퇴장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4.1. 1991년 심판 폭행 사건
1991년 10월 16일, 니시가오카 축구장에서 열린 코니카 컵 예선 리그 A조 4차전 요미우리 클럽과의 경기에서, 요미우리의 도츠카 테츠야의 득점이 오프사이드였다고 주장하며 주심인 시오야 소노이치와 선심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심판을 밀치는 폭력 행위가 문제가 되어, 같은 해 10월 17일부터 다음 1992년 10월 16일까지 1년간 공식 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4.2. 1993년 혼나미 겐지 부상 사건
1993년 7월 7일, J리그 산토리 시리즈 7차전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 골문 앞에서 상대 팀 골키퍼 혼나미 겐지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 충돌 과정에서 혼나미의 복부를 걷어차 신장이 파열되는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혔다.
4.3. 1995년 서포터 폭행 사건
1995년 9월 23일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경기 종료 후 오후 9시경, 우라와 시 내의 한 음식점에서 다구치는 서포터 남성 1명을 폭행하여 전치 수일의 부상을 입혔다. 폭행의 동기는 해당 남성을 포함한 서포터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비판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라와 구단의 대응은 늦었다. 9월 27일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원정 경기에도 다구치를 징계 없이 동행시켰다. 그러나 같은 날 저녁, 언론 보도가 임박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J리그 상무 키노모토 코조와 우라와 GM 요코야마 겐조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다구치에게 1995 시즌 잔여 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3일, 다구치가 피해 남성에게 사과하고 양측 간 화해가 성립되어 형사 사건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우라와 구단은 1997년 1월까지였던 다구치와의 계약을 해지하며 실질적으로 4개월의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고, 이는 J리그 심판 위원회에서도 추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