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요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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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치바나 요시이에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선수 시절에는 외야수로 활약하며, 1977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1980년 팀 최고 타율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1982년부터 세이부 라이온즈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3년 대만 프로 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후, 코치로 전향하여 여러 팀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하며, 하세가와 유야, 나카무라 아키라, 야나기타 유키 등 스타 선수들을 육성했다. 2023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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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요시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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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다치바나 요시이에 |
원어 이름 | Tachibana Yoshiie |
출생일 | 1958년 10월 27일 |
출생지 |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
신장 | 180cm |
체중 | 85kg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투구 | 좌투 |
타석 | 좌타 |
프로 입단 | 1977년 |
드래프트 순위 | 1976년 드래프트 1위 |
첫 출장 (NPB) | 1978년 4월 1일 |
마지막 출장 (NPB) | 1992년 10월 10일 |
첫 출장 (CPBL) | 1993년 3월 12일 |
마지막 출장 (CPBL) | 1993년 10월 10일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 (1977년~1991년) 한신 타이거스 (1992년) 줜궈 베어스 (1993년) |
코치 경력 | |
소속 구단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군 타격코치 (1998년~2001년) 오릭스 버펄로스 타격코치 (2002년~2003년) 세이부 라이온스 타격코치 (2004년~2007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타격코치 (2009년~2012년, 2017년~2021년) 지바 롯데 마린스 타격코치 (2013년~2016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타격코치 (2022년)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23년) 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 (2023년)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야수코치 (2024년) 세이부 라이온스 (2025년~) |
타격 성적 (NPB) | |
연도 | 1992년 |
타율 | 0.262 |
안타 | 801 |
홈런 | 51 |
타점 | 318 |
도루 | 33 |
기타 정보 | |
등번호 | 83 |
利き腕 | 左 |
打席 | 左 |
2. 선수 시절
"요시이에"라는 이름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이름을 따서 할아버지가 지었다.
오무타 시립 가쓰타치 중학교 2학년 때는 투수였고, 4번 타자 겸 에이스로 팀을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2].야나가와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 투수로 입부했지만, 동기인 쿠보 야스오를 주전 투수로 기용하게 되면서, 외야수나 1루수로 출전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2학년 때인 1975년, 봄의 선발 대회에 중견수로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호리코시 고교에 패했다[3]。그해 여름에도 현 예선 결승에 진출했지만, 고쿠라 미나미 고교에 패했다. 1년 선배 팀 동료로는 카쿠라 카즈마가 있었다. 3학년 때인 1976년에는 여름의 고시엔에서 동기 에이스인 쿠보 야스오를 앞세워 1번, 1루수로 출전했다. 미에고를 꺾고 3회전에 진출했지만, PL 학원의 나카무라 세이지(와세다대 - 닛산 자동차)에게 막혀 0-1로 아쉽게 패했다[4]。
"왼쪽의 하라 타츠노리"라고 불리며, 1976년 11월 19일에 열린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1위로 지명되었다. 당시 희망 구단은 이 전년(1975년)에 첫 우승을 달성한 히로시마였고, 히로시마의 스카우트에게서 1위 또는 2위로 지명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명 순위 11번째인 히로시마보다 먼저 7번째인 크라운에 지명되었다. 히로시마 이외의 구단에 지명되면 마츠시타 전기 야구부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주위에서 "고교생 야수로 1위 지명은 드문 일이니까"라고 등 떠밀려 크라운 입단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7년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후 주로 외야수로 기용되었고, 2년 차인 1978년에는 시마바라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마츠키 겐지로에게 "하리모토 이사오의 재림"이라는 평을 받으며, 네모토 리쿠오 감독이 레귤러로 발탁했다. 개막전에서 3번 타자를 맡아 "'''19세의 3번 타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해 규정 타석 (27위, 타율 .250)에도 도달했다. 크라운라이터로서 마지막 경기였던 헤이와다이에서 열린 미일 야구 "크라운 + 요미우리 연합군" 대 신시내티 레즈전에서는 4번 오 사다하루 다음인 5번 타자를 맡았다. 토코로자와로 이전한 후에도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1979년에는 세이부 구장 공식전 첫 홈런을 쳤고, 이것이 프로 입단 후 첫 홈런이 되었다.
1980년에는 팀 최고 타율 .301 (리그 13위)을 기록했고, 18개의 홈런을 쳤다. 타부치 코이치, 도이 마사히로, 야마자키 히로유키, 오타 타쿠지, 스티브 온티베로스 등 강타자들이 호조를 보여 타순이 올라가지 않아 "'''공포의 7번 타자'''"라고 불렸다. 1980년과 1981년에 각각 월간 2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침체기를 지탱했다.
1982년부터 세이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7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4차전에서 8회초에 가토 하지메를 상대로 역전 2점 홈런을 치는 등, 27타수 6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다소 부진했고, 1985년에는 타오 야스시의 이적 입단, 카나모리 나가토키의 부상으로 외야 주전 자리를 잃었다. 대타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대타로도 승부 근성이 강한 타격을 선보이며 팀의 황금 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다.
1년 차 이후 처음으로 1군 공식전에 출전하지 못한 1991년 오프에 한신 타이거스로 금전 트레이드되었고,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2위 도약에 기여했지만, 1년 만에 퇴단했다.
1993년에는 대만 프로 야구의 준국 베어스에서 뛰었고 (당시 동료는 노나카 테츠히로가 있었다), 팀의 4번 타자를 맡았다. 같은 해에 은퇴했다.
2. 1. 일본 프로야구 시절
1977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초기에는 주로 우익수로 활약했으며, 1978년 4월 1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전기 1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에 3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19세의 3번 타자"로 주목받으며 규정 타석을 채웠다. 같은 해 4월 2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전기 2차전(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첫 타점을 기록했다. 1979년 4월 14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전기 1차전(세이부 돔)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의 공식전 첫 홈런을 기록했다. 1980년에는 팀 최고 타율인 .301을 기록하며 "공포의 7번 타자"로 불렸다. 1982년부터 세이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9년 4월 25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4차전(도쿄 돔)에서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991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1년간 활약했다.2. 2. 대만 프로야구 시절
1993년에 줜궈 베어스에 입단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며 그 해 은퇴했다.[24]3. 야구선수 은퇴 후
다치바나 요시이에는 1998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릭스 버펄로스, 세이부 라이온스, 지바 롯데 마린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 여러 팀에서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25] 세이부와 소프트뱅크에서는 감독들의 신임을 받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하세가와 유야, 나카무라 아키라, 야나기타 유키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육성했다.[19]
세이부 시대 동료 이토 츠토무에게서 세이부, 롯데 감독 시절 1군 타격 코치로 초빙되었고, 이토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9] 니시닛폰 신문에 따르면 코치로서는 선수에게 다가가는 정중하고 열성적인 지도 스타일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성실하고 꾸밈없는 인품도 있어, 선수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10]
이시게 히로노리 감독의 초빙으로 오릭스의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11] 팀 타율 .235, 팀 총 득점 438점으로 모두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고,[12] 빈약한 타선이 요인이 되어 39년 만에 오릭스로서 첫 최하위에 머물렀다.[13] 2003년에는 팀 득점이 리그 5위에 머물러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세이부 1군 타격 코치 시절 에는 26년 만에 B클래스로 끝나, 10월 7일에 구단 측으로부터 다음 해에는 계약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14] 소프트뱅크 코치 시절에는 쿠도 키미야스 감독 밑에서 2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에는 돌발성 난청 의심 등으로 일시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했다.[15] 에는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던 팀 득점이 리그 5위로 저조했고,[16] 같은 해에 퇴단했다. 에는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득점은 리그 4위로 저조했고, 득점력 부족에 시달렸다.[17][18] 쿠리하라 료야와, 타력을 과제로 삼았던 주토 요시유키 등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
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20] 같은 해 10월 14일,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퇴임한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21]
부터는 타바타 카즈야, 나이토 시게토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가 된다.[22]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타격 코치로 활동했고, 2023년 6월 9일에 박한이와 자리를 맞바꿔 1군에 올라왔다.
1월 1일자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타격 코치로 취임한다. 18년 만의 친정팀 복귀가 된다. 등번호는 '''83'''[23]。
3. 1. 코치 경력
다치바나 요시이에는 1998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릭스 버펄로스, 세이부 라이온스, 지바 롯데 마린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 여러 팀에서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25] 세이부와 소프트뱅크에서는 감독들의 신임을 받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하세가와 유야, 나카무라 아키라, 야나기타 유키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육성했다.[19]세이부 시대 동료 이토 츠토무에게서 세이부, 롯데 감독 시절 1군 타격 코치로 초빙되었고, 이토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9]。니시닛폰 신문에 따르면 코치로서는 선수에게 다가가는 정중하고 열성적인 지도 스타일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성실하고 꾸밈없는 인품도 있어, 선수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10]。
이시게 히로노리 감독의 초빙으로 오릭스의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11] 팀 타율 .235, 팀 총 득점 438점으로 모두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고,[12] 빈약한 타선이 요인이 되어 39년 만에 오릭스로서 첫 최하위에 머물렀다.[13] 2003년에는 팀 득점이 리그 5위에 머물러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세이부 1군 타격 코치 시절 에는 26년 만에 B클래스로 끝나, 10월 7일에 구단 측으로부터 다음 해에는 계약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14] 소프트뱅크 코치 시절에는 쿠도 키미야스 감독 밑에서 2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에는 돌발성 난청 의심 등으로 일시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했다.[15] 에는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던 팀 득점이 리그 5위로 저조했고,[16] 같은 해에 퇴단했다. 에는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득점은 리그 4위로 저조했고, 득점력 부족에 시달렸다.[17][18] 쿠리하라 료야와, 타력을 과제로 삼았던 주토 요시유키 등의 성장에도 크게 기여。
2022년에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20] 같은 해 10월 14일, 같은 해를 마지막으로 퇴임한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21]。
2023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타격 코치로 활동했고, 2023년 6월 9일에 박한이와 자리를 맞바꿔 1군에 올라왔다.
2025년 1월 1일자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타격 코치로 취임한다. 18년 만의 친정팀 복귀가 된다. 등번호는 '''83'''[23]。
3. 2. 지도 스타일
4. 상세 정보
4. 1. 연도별 타격 성적
도
단
기
석
수
점
타
루
타
루
타
런
타
타
점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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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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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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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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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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