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헤이와다이 야구장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헤이와다이 야구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후쿠오카성 부지에 건설되어 1949년 개장한 일본의 야구장이다. 1950년 일본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 니시니폰 파이리츠, 니시테츠 클리퍼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며, 1951년부터 니시테츠 라이온스가 전용 구장으로 사용했다. 1950년대에는 야간 조명 시설이 없어 경기 중단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1950년대 후반 개조 공사를 통해 시설을 개선했다. 1978년 세이부 라이온스가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프로 야구 경기가 중단되었으나, 이후 다이에 호크스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92년 마지막 공식 경기를 치른 후, 1997년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유적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쿠오카시의 스포츠 시설 - 후쿠오카 돔
    후쿠오카 돔은 후쿠오카시에 위치한 다목적 돔구장으로, 개폐식 지붕과 티타늄 도금으로 건설되었으며 야구 경기, 콘서트,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고, 현재는 미즈호 PayPay 돔 후쿠오카로 불린다.
  • 후쿠오카시의 스포츠 시설 - 베스트 덴키 스타디움
    베스트 덴키 스타디움은 199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위해 건설된 후쿠오카시 최초의 축구·럭비 전용 경기장이며, 2019년 럭비 월드컵 경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일본의 없어진 야구 경기장 - 고라쿠엔 구장
    1937년 도쿄에 개장한 고라쿠엔 구장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야구장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의 홈구장으로 사용되며 왕정치 선수의 홈런 기록 등 명장면을 연출했고, 야구 외 다양한 스포츠 및 문화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1987년 폐장 후 그 기능은 도쿄 돔으로 계승되었다.
  • 일본의 없어진 야구 경기장 - 오사카 구장
    오사카 구장은 1950년 오사카 난바에 완공되어 난카이 호크스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었고, 1988년 이후에는 다목적 시설로 활용되다가 1998년 폐쇄 및 철거되어 현재는 복합 상업 시설이 들어서 있다.
  • 니시테쓰 라이온스 - 1957년 일본 시리즈
    1957년 일본 시리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대결로,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4승 1무의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오시타 히로시가 최우수 선수, 이나오 가즈히사가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 니시테쓰 라이온스 - 1956년 일본 시리즈
    1956년 일본 시리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맞붙어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4승 2패로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도요다 야스미쓰가 MVP와 수위 타자상을, 이나오 가즈히사가 최우수 투수상과 감투상을 수상했다.
헤이와다이 야구장 - [경기장/극장]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헤이와다이 야구장
원어 이름平和台野球場
로마자 표기Heiwadai Yakyūjō
이전 이름헤이와다이 야구장
별칭Heiwadai Baseball Stadium
1987년의 헤이와다이 야구장
1987년의 헤이와다이 야구장
위치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 조나이 1-2 후쿠오카시 마이즈루 공원 내
좌표33°35′13″N 130°23′09″E
대중교통알 수 없음
소유자후쿠오카시
운영자알 수 없음
유형알 수 없음
좌석 유형알 수 없음
스위트룸알 수 없음
수용 인원24,000명 (1950–1957년)
34,000명 (1958–1997년)
필드 모양알 수 없음
면적알 수 없음
표면천연 잔디 (1950–1979년)
인조 잔디 (1979–1997년)
점수판알 수 없음
스크린알 수 없음
제작알 수 없음
기공1949년 7월 1일
건설알 수 없음
개장1949년 12월 18일
리모델링1954년, 1957–1958년, 1987년
건축가닛켄 설계 코무 (1957–1958년 리모델링)
확장알 수 없음
폐장1997년 11월 24일
철거1998년
활동 기간알 수 없음
건설 비용¥ 3천만 엔
¥ 1억 5771만 엔 (1957–1958년 리모델링)
경기장 크기좌우익 - 92 m
좌우 중간 - 110 m
중앙 - 122 m
백 스톱 - 20 m [[File:Heiwadai Stadium Dimensions.svg|200px]]
헤이와다이 야구장
헤이와다이 야구장
사용 팀 및 대회
사용 팀니시니혼 파이레츠 (NPB) (1950년)
니시테쓰 클리퍼스/니시테쓰 라이온즈/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 (NPB) (1950–1978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NPB) (1989–1992년)
조명
조명탑6기
조도배터리 간: 1,900 럭스
내야: 1,500 럭스
외야: 1,000 럭스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후쿠오카성 부지는 일본 제국 육군 제12사단 제24보병 연대가 주둔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에 징발되었다. 그러나 국민체육대회 준비 위원회 위원장 오카베 헤이타는 SCAP와 협상하여 스포츠 경기장 건설을 허가받았다.[2] 1948년, 마이즈루 공원이 조성되었고, 제3회 국민체육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헤이와다이 육상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이때 '평화의 언덕'을 뜻하는 平和台|헤이와다이일본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3]

1949년 3월, 후쿠오카 시 의회는 헤이와다이에 야구장 건설을 승인했고, 7월 1일 착공하여 3000만을 들여 완공했다. 관람석은 흙더미 위에 나무 벤치를 놓은 단순한 형태였다.[4] 12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사카 타이거스 간의 시범 경기가 열렸다.[2]

1950년, 일본 야구 연맹이 센트럴 리그퍼시픽 리그로 나뉘면서 일본 프로 야구(NPB)가 탄생했다. 니시니폰 파이리츠는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니시테쓰 클리퍼스는 가스가바루 구장과 함께 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50년 3월 10일, 파이리츠와 히로시마 카프의 경기가 헤이와다이 야구장 최초의 공식 프로 야구 경기였다.

1951년, 니시니폰 파이리츠와 니시테쓰 클리퍼스가 합병하여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창단되었고,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았다. 1952년, 프랜차이즈 제도로 라이온스는 후쿠오카현 프로 야구 행사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전용 홈구장으로 확정했다.

1952년 7월 16일, 마이니치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우천과 경기 지연, 고의적인 시간 지연 등으로 인해 팬들이 폭동을 일으킨 헤이와다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유아사 요시오 감독이 해임되고, 1954년에는 야간 경기 시설이 설치되었다.[5]

1953년 다이에이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나카니시 후토시가 160m 이상의 장외 홈런을 기록했다. 1956년 일본 시리즈부터 1958년 일본 시리즈까지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58년에는 1.5771000000000002억을 들여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진행, 수용 인원을 34,000명으로 늘렸다.[2]

1960년대부터 검은 안개 사건으로 팀 성적이 부진해지자 관중 수가 감소했다. 1972년 말, 평균 관중 수는 경기당 4,900명으로 줄었다.[16] 이후 팀은 여러 차례 매각되었고, 1978년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로 이전했다.[2]

1979년, 후쿠오카시와 지역 기업들은 "헤이와다이 야구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2.6억을 투자하여 인조 잔디를 설치했다.[2] 이후 세이부 라이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여러 팀의 경기가 열렸다. 1987년 7월 8일에는 난카이 호크스 대 롯데 오리온스의 서스펜디드 게임 속행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1989년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며, 1990년에는 "호크스 비전"이 설치되었다.[2]

1987년, 고로칸 유적이 발견되면서 역사 공원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고, 1993년 후쿠오카 돔이 완공되면서 다이에 호크스는 이전했다. 1992년 10월 1일 다이에와 킨테츠 버팔로스의 경기가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공식 경기였다.[5] 1997년 철거가 시작되었고, 2005년 후쿠오카 지진으로 손상된 외야 관람석은 2008년에 철거되었다.[20]

2. 1. 건설 배경 (1948-194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후쿠오카성 터이자 일본 제국 육군 제12사단 제24보병연대가 주둔했던 곳은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에 징발되었다. 그러나 국민체육대회 준비 위원회 위원장 오카베 헤이타는 SCAP와 협상하여 이 부지에 스포츠 경기장 건설을 허가받았다.[2] 1948년, 마이즈루 공원이 조성되었고, 제3회 국민체육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헤이와다이 육상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이때 부지가 평화로운 장소로 변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평화의 언덕'''을 뜻하는 平和台|헤이와다이일본어라는 이름이 선택되었다.[3]

1949년 3월, 후쿠오카 시 의회는 헤이와다이에 야구장을 건설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 7월 1일에 경기장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건설 비용은 3000만이었다.[2] 관람석은 흙더미 위에 나무 벤치를 놓은 단순한 형태였다.[4] 12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사카 타이거스 간의 시범 경기로 개장하였다.[2]

2. 2. 니시니폰 파이리츠와 니시테쓰 클리퍼스 시대 (1950-1951)

1950년 일본 야구 연맹이 센트럴 리그퍼시픽 리그로 재편되면서 일본 프로 야구(NPB)가 창설되었다. 센트럴 리그의 니시니폰 파이리츠는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쓰 클리퍼스는 가스가바루 구장과 함께 준 홈구장으로 사용했다.[27] 1950년 3월 10일, 파이리츠와 히로시마 카프 간의 경기가 헤이와다이 야구장 최초의 공식 프로 야구 경기로 기록되었다.

당시 혼슈에서 규슈로 이동하는 수단은 철도 급행열차로도 1박 2일이 걸렸고, 지방 도시 원정 경기가 빈번하게 열렸다. 이러한 영향으로 니시니폰은 당초 헤이와다이 야구장과 모모조노 야구장을 합쳐 50-60경기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4경기(모모조노 2경기, 이즈카 1경기 포함 총 7경기)만 개최되었다. 니시테쓰 또한 가스가시의 가스가바루 구장을 주 경기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는 7경기(다른 구장 포함 총 27경기)만 개최되었다.[27]

2. 3. 니시테쓰 라이온스 시대 (1951-1978)

1951년, 니시니폰 파이리츠와 니시테쓰 클리퍼스가 합병하여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창단되었고,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52년, 프랜차이즈 시스템 도입으로 라이온스는 후쿠오카현 프로 야구 행사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아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전용 홈구장으로 확정했다.

2. 3. 1. 헤이와다이 사건과 야간 경기 (1952-1954)

1952년 7월 16일, 마이니치 오리온스는 오후 3시에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니시테츠 라이온스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침부터 후쿠오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미 팬들이 경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경기를 취소하는 대신 연기하기로 결정했다.[3]

1954년 6월 2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열린 첫 야간 경기.


경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거의 2시간 늦은 오후 4시 55분에 시작되었다. 일몰 시간이 오후 7시 29분으로 불과 2시간 반 정도 남았기 때문에, 정규 경기를 완료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는 계속되었다. 15분간의 1회 중단 후 3회 이후 1시간 지연으로 인해 경기는 더욱 지연되었다. 심판은 오리온스가 해가 지기 전에 5이닝을 소화하려는 시도로 마지못해 경기를 재개하도록 설득했고, 경기장에서는 해가 질 때 경기가 중단될 수 있다는 발표가 나왔다. 오후 6시 46분, 라이온스가 4회 말에 5-4로 앞선 상황에서, 마이니치는 "노 게임"을 강요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3] 오리온스 선수들은 반복적으로 타임 아웃을 요청하고 벤치로 가서 물을 마셨다.[5] 라이온스는 4회에 4점을 더 얻었고, 오리온스가 4-9로 뒤진 채 5회 초를 앞두고 마이니치 감독 유아사 요시오는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3]

심판이 동의하고 4회 후에 경기를 종료하자, 팬들은 경기장으로 난입하여 심판과 오리온스를 공격했다.[5] 노구치 마사아키와 오시타 히로시와 같은 니시테츠 선수들은 벳토 가오루와 다른 오리온스 선수들이 폭행당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3] 유아사는 PA 시스템을 통해 사과하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5] 결국, 팀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3][5] 경찰 외에도 후쿠오카 주둔 미군도 동원되었고, 혼란은 자정까지 진정되지 않았다.[3] 이 사건은 일본 전역의 언론에 보도되었고,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했다.[6] 그 결과, 유아사는 7월 27일에 감독에서 해임되었다. 이 사건을 헤이와다이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 대응하여,[5] 니시테츠는 1954년에 조명 시설 설치에 대한 후쿠오카의 승인을 신청하여 받았다. 헤이와다이 야구장의 첫 야간 경기는 1954년 6월 2일에 라이온스가 난카이 호크스를 상대로 치렀다.[2]

2. 3. 2. 일본 시리즈와 구장 개조 (1953-1958)

1953년 8월 29일 다이에이 스타즈와의 경기에서 라이온스의 내야수 나카니시 후토시는 외야 스탠드를 넘어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홈런을 쳤다. 이 홈런은 160m 이상으로 추정되며 일본 선수 중 가장 멀리 날아간 것으로 여겨진다.[7] 나중에 공 모양의 기념 표지판이 설치되어 공이 경기장을 나간 위치를 표시했다. 나카니시는 다음 시즌에 라이온스가 첫 퍼시픽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으며, 헤이와다이 야구장은 1953년 일본 시리즈 동안 첫 일본 시리즈를 개최했다.[2] 니시테쓰는 "황금 시대" 동안 1956년 일본 시리즈부터 1958년 일본 시리즈까지 3번 연속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8]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56년 일본 시리즈를 위해 임시 스탠드가 건설되었고 내야 좌석이 추가되어 경기장의 수용 능력을 늘리고 팬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다.[9] 2번 연속 우승을 차지한 후, 니시테쓰는 경기장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현대화하기로 결정했다.[10] 개조 설계는 건축 회사 닛켄 세케이가 담당했다.[11] 헤이와다이는 후쿠오카 시에서 관리했기 때문에,[10] 니시테쓰는 1957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이 끝난 후 개조를 진행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하고 획득했다. 주요 변경 사항으로는 나무 스탠드를 철근 콘크리트로 교체하고,[12] 이전에 흙으로 되어 있던 외야 좌석 구역에 좌석을 설치했으며,[6] 경기장의 수용 능력을 24,000명에서 34,000명으로 늘리고,[5][2] 중앙 펜스 전광판을 교체하고 실내 불펜,[13] 라커룸 및 선수 화장실을 건설했다.[6] 현대화 프로젝트는 1.5771000000000002억의 비용이 들었고, 니시테츠가 지불하여 후쿠오카에 기증했으며 1958년 4월 26일에 완료되었다.[2] 라이온스는 시즌 시작 전에 건설이 완료되지 않아 1958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을 새로 건설된 고쿠라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렀다.[14] 그해 7월 27일, 헤이와다이는 7번의 일본 프로 야구 올스타 시리즈 중 첫 번째 경기를 개최했다.[15]

1957년 시즌 이후의 개조로 경기장, 특히 내야와 외야 좌석이 크게 변경되었다.

2. 3. 3. 관중 감소와 라이온스 연고 이전 (1960년대-1978)

1969년, 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승부 조작 및 도박 스캔들이 발생하여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핵심 선수들이 출전 정지 또는 퇴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6] 이로 인해 팀은 약화되었고, 1970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부터 1972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까지 3시즌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1972년 말, 헤이와다이 야구장의 평균 관중 수는 경기당 4,900명, 연간 32만 명으로 감소했다.[16]

결국 니시테쓰는 팀을 전 롯데 오리온스 구단주였던 나카무라 나가요시에게 매각했고, 팀 이름은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변경되었다.[17] 새 구단은 관중을 늘리기 위해 롯데 오리온스와 라이벌 관계를 조성하려 했으나, 팬들의 난동 등으로 이어지며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5] 1977년, 팀은 다시 크라운 라이터 회사에 매각되었다.[5] 1978년 일본 프로 야구 시즌 후, 팀은 세이부 그룹에 인수되어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로 연고를 이전했다.[2]

2. 4. 세이부 라이온스 철수 이후와 호크스 유치 (1979-1988)

1978년 12월, 본거지 구단이 없어진 후쿠오카시와 지역 기업들은 제3섹터 방식의 흥행 회사인 "헤이와다이 야구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979년, 2.6억을 투자하여 경기장 그라운드를 서일본 최초로 전면 인조 잔디로 교체했다.[2] 이러한 노력으로 1979년부터는 세이부 라이온스 (1979년에는 주최 10경기를 포함해 17경기 개최. 특히 5월에는 홈 경기로 킨테츠전 7경기, 8월에는 원정 경기로 킨테츠전과 닛폰햄전, 그리고 홈 경기로 한큐전이 각 3경기씩, 총 9경기가 각각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를 중심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최의 돈타쿠 시리즈(5월 상순 3연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기간 중 한신 고시엔 구장을 사용할 수 없는 한신 타이거스의 주최 경기 등, 프로 야구 각 팀의 공식전이 매년 20~30경기 정도 개최되었다.[2]

이 기간 동안 주니치 드래곤즈는 유일하게 본 구장에서 공식전과 오픈전 모두 주최·주관 경기를 개최하지 않았다. 이는 주니치 신문 (호쿠리쿠 주니치 신문, 닛칸 겐민 후쿠이 포함)의 판매 구역에서 주최 경기를 개최한다는 구단 방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구단 주최 경기의 원정팀으로 참가하는 경우는 있었다.[2]

히로시마 도요 카프도 공식전 주최 경기는 열지 않았지만, 1981년 3월 28일 오픈전(대 킨테츠전)을 개최했고[30], 1984년 미일 야구에서 홈 경기를 개최했다 (단, 주최는 요미우리 신문사).[2]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최 경기는 요미우리 신문사, 호치 신문사(스포츠 호치), 니혼 TV 주최, 후쿠오카 방송 후원으로 개최되었으며, 후쿠오카 돔 건립 이후에도 2007년까지 매년 지속되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2011년 4월 13일 기타큐슈 시민 구장 경기를 마지막으로 후쿠오카현 내 공식전 주최 경기 개최 실적이 없다.[2]

1987년 7월 8일, 난카이 호크스 대 롯데 오리온스의 서스펜디드 게임 속행 경기가 열렸다. 이는 같은 해 5월 23일 가시와자키시 사토이케 야구장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경기가 우천 등으로 일몰 서스펜디드된 것을, 지방 구장의 경우 후일 다른 구장에서 개최가 가능하다는 규정에 따라 조치한 것이다(원래 7월 7일 예정이었으나 우천 순연). 이는 서스펜디드 속행 경기가 지방 구장에서 열린 유일한 사례였다 (단, 전용 구장 이외라는 관점에서 보면, 1954년 킨테츠 펄스 대 도에이 플라이어즈전이 중단 전후 모두 주니치 구장(현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예가 있다).[2]

1984년, 이나오 가즈히사가 롯데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 장래적으로 본거지를 가와사키 구장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헤이와다이 구장으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감독 요청을 수락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2]

2. 5.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대 (1989-1992)

1989년 시즌부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헤이와다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1] 1990년, 백스크린 왼쪽에 대형 영상 장치 "호크스 비전"을 설치했다.[2]

2. 6. 고로칸 유적 발견과 철거 (1987-1997)

1987년 12월, 개조 공사 중 관중석 아래에서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고대 숙박 시설인 고로칸의 유적이 발견되자, 시 당국은 유적을 발굴하고 부지를 역사 공원으로 재개발할 계획을 세웠다.[19] 이에 따라 다이에는 일본에서 두 번째 돔 구장이자 최초로 개폐식 지붕을 갖춘 후쿠오카 돔을 약 1.5km 떨어진 곳에 건설하기 시작했고, 1993년에 이전했다.[19]

1992 시즌을 마지막으로,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는 더 이상 프로 야구 공식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 공식 경기는 1992년 10월 1일 다이에와 킨테츠 버팔로스의 경기였다.[5] 헤이와다이 야구장 운영 기간 동안 42시즌 연속으로 1,904번의 공식 NPB 경기가 열렸다.[1]

1997년 11월 24일, 헤이와다이는 노후화 및 역사 공원 정비로 인해 영구적으로 폐쇄되었다. 이듬해 공원과 내야 관람석은 철거되었다. 외야 관람석은 인근 ''고로칸''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 진행되면서 그대로 남겨졌으나,[2] 2005년 후쿠오카 지진으로 인해 손상되어 붕괴 위험에 처하자 2008년에 철거되었다.[20]

3. 경기장 특징

후쿠오카성 유적지에 세워진 헤이와다이 야구장은 관람객들이 나무와 성벽 위에 올라 경기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6]

경기장은 전통적인 일본식으로 곡선형에 대칭이었다.[25] 홈 플레이트에서 외야 벽까지의 거리는 파울 폴까지 92m, 좌중간 및 우중간은 110m, 중견수 벽은 122m였다.[26] 1979년까지 천연 잔디였으나, 이후 인조 잔디로 변경되었다.[2]

야구장에서 판매되던 우동 국물은 매우 인기가 높았다.[5]

4. 유산

헤이와다이 야구장은 철거되었지만,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니시테츠 라이온스의 황금기를 함께 했으며, '헤이와다이 사건' 등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세이부 라이온스가 떠난 이후에도, 1979년부터는 인조 잔디로 개조되어 여러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팀들이 매년 평균 28경기를 개최했다.[2] 1989년부터는 다이에 호크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19]

2002년 경기장 입구에 기념 명판이 세워졌다.


2002년 3월, 니시테츠 라이온스 동문회는 경기장 입구에 기념 명판을 세웠다.[2][21] 철거 이후, 라이온스와 호크스는 예전 홈구장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2008년 첫 번째 라이온스 클래식 행사에서, 헤이와다이를 주제로 한 호크스와의 경기 시리즈 동안 경기장의 외야 벽에서 가져온 돌이 세이부 돔 외부에 전시되었다.[22] 2014년 후쿠오카 클래식 동안 호크스는 야후오쿠! 돔의 전광판을 팀이 헤이와다이에 있었을 당시의 헤이와다이 야구장 전광판과 유사하게 수정했다.[23]

1997년 11월 24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은 영구적으로 폐쇄되었고, 그 다음 해에 공원과 내야 관람석이 철거되었다. 외야 관람석은 인근 고로칸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되면서 그대로 남겨졌다.[2] 그러나 2005년 후쿠오카 지진으로 인해 손상되어 붕괴 위험에 처하자 2008년에 철거되었다.[20] 2013년에 부지 발굴이 완료되었고, 경기장의 이전 부지는 결국 ''고로칸'' 광장이라는 이름의 잔디 광장으로 개발되어 2016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1] 오늘날 경기장의 일부인 외야 외벽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20]

5. 기타


  • 만화 아스트로 구단(토자키 시로 원작·나카지마 노리히로 그림)에서 아스트로 구단 결성 후 첫 경기인 블랙 구단(복수 구단)전의 무대가 되고 있다.
  • 만화 미라클 자이언츠 동무 군(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쓰하라 요시아키 그림)에서 자이언츠가 규슈 시리즈의 무대로 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 세이부 주최 경기에서의 세이부 돔에서의 이벤트 라이온즈 클래식에서, 2008년의 소프트뱅크전에서 "제5장·전설이 된 헤이와다이"라는 부제가 부여되었다.
  • 2014년 8월 19일과 다음날 20일에 후쿠오카 돔에서 개최된 소프트뱅크 대 세이부전에서, 동 돔의 호크스 비전에 본 구장의 다이에 시대의 스코어보드를 모방한 디자인이 재현되었다. 또한, 이 2경기는 후쿠오카 클래식으로 개최되었다.

6. 관련 서적

『안녕 평화대: 꿈을 추억을 고마워』일본어 (니시니혼 신문사 편집·발행, 1997년 11월 발행, 도서 코드: ISBN 4816704558)[1]는 헤이와다이 야구장의 폐쇄를 기념하여 발행된 서적이다. 이 책은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의 니시테츠 라이온즈 본거지 시절부터 폐쇄까지 있었던 일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당시 니시니혼 신문과 니시니혼 스포츠 기자들을 비롯하여 라이온즈 OB인 가와무라 히데후미, 모토미쓰 오토코, 그리고 구단 대표였던 사카이 야스유키도 기고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平和台 (閉鎖) https://npb.jp/stadi[...]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2020-11-30
[2] 간행물 懐かしの「平和台野球場」展 https://toshokan.cit[...] Fukuoka City Public Library 2020-11-30
[3] 뉴스 「平和の台場」だからこそ? 博多っ子が激怒した"平和台事件"/プロ野球20世紀・不屈の物語【1949~52年】 https://news.yahoo.c[...] Yahoo! Japan 2020-11-30
[4] 뉴스 【10月1日】1992年(平4) さらば平和台…フィナーレを飾ったのはルーキーと記録男 https://www.sponichi[...] 2020-12-06
[5] 뉴스 平和台球場 西鉄の本拠地、ファン暴発 選手は装甲バスで脱出 https://www.nishinip[...] 2020-11-30
[6] 웹사이트 西鉄ライオンズ・思い出の球場 http://www.nishitets[...] Nishitetsu Web Museum 2020-12-01
[7] 뉴스 日本人最長160メートル弾/中西太1 https://www.nikkansp[...] 2020-12-01
[8] 뉴스 Japanese baseball Hall of Famer Toyoda dies https://www.japantim[...] 2020-12-01
[9] 웹사이트 日本選手権に向けて平和台球場仮設スタンド工事(1956年) http://www.nishitets[...] 2020-12-02
[10] 뉴스 【追憶のスタジアム(7)】平和台球場 天国と地獄の歴史あり https://www.sanspo.c[...] 2020-12-02
[11] 뉴스 平和台球場、全面改装時の原図39点 #この一枚 https://www.nishinip[...] 2021-08-03
[12] 웹사이트 埼玉西武ライオンズ・本拠地球場ヒストリー https://column.sp.ba[...] 2020-12-01
[13] 웹사이트 西鉄ライオンズ名場面1958 http://www.nishitets[...] Nishitetsu Web Museum 2020-12-01
[14] 웹사이트 北九州市民球場の歴史 https://www.kcbs.jp/[...] Kitakyushu Citizens Baseball Stadium 2020-12-03
[15] 웹사이트 昭和33年・平和台球場初のオールスター戦(1958年) http://www.nishitets[...] Nishitetsu Web Museum 2020-12-02
[16] 뉴스 【追憶のスタジアム(7)】平和台球場 天国と地獄の歴史あり https://www.sanspo.c[...] 2020-12-03
[17] 뉴스 【九州の礎を築いた群像 西鉄編(10)】ライオンズ 復興支えた栄光の「野武士集団」 創設の裏に白洲次郎、GHQ… (5/8ページ) https://www.sankeibi[...] Sankei Shimbun 2020-12-03
[18] 서적 Architects of Affluence: The Tsutsumi Family and the Seibu-Saison Enterprises in Twentieth-Century Japan Brill 2020
[19] 뉴스 【追憶のスタジアム(7)】平和台球場 天国と地獄の歴史あり https://www.sanspo.c[...] 2020-12-06
[20] 뉴스 【球跡巡り・第6回】西鉄黄金時代の「野武士軍団」が躍動した舞台 平和台野球場 https://npb.jp/news/[...] Nippon Professional Baseball 2020-12-06
[21] 뉴스 「野武士軍団」が躍動した平和台野球場、跡地は公園に https://www.nikkei.c[...] 2021-06-02
[22] 웹사이트 平和台球場の「石」を球場前展示!! https://www.seibulio[...] Saitama Seibu Lions 2021-06-11
[23] 뉴스 ソフトB本拠地が"平和台仕様"に https://www.nikkansp[...] 2021-06-11
[24] 뉴스 遅ればせながらの「球春」を前にして、城と野球場との深い関係を語る https://news.yahoo.c[...] Yahoo! Japan 2021-09-13
[25] 뉴스 球団と市民、ファンが一緒になって作り上げたボールパーク:楽天生命パーク宮城 https://news.yahoo.c[...] Yahoo! Japan 2021-06-12
[26] 뉴스 ヤフオクドームで本塁打激増、球場がまた狭くなる? https://www.nikkei.c[...] 2020-11-30
[27] 웹사이트 【記録員コラム】29都道府県、52球場を駆け巡った西日本パイレーツ https://npb.jp/news/[...] 日本野球機構
[28] 문서 小倉では小倉豊楽園球場時代から準本拠地として年20試合前後行われたが、1965年は主催試合の半数にあたる35試合ずつ(年140試合中ホームは70試合)を平和台と小倉で分け合って開催した。
[29] 문서 当時は本球場内に事務所があったが、福岡市から使用許可が出ていないという理由でクレームがつき、事務所は本球場のまま法人の登記上の本社を当時球団社長だった坂井保之の自宅(当時は福岡市にあった)に移したとされる。
[30] 문서 解説:河村英文(当時九州朝日放送野球解説者)。
[31] 문서 この試合の後、阪神ナインは翌日の後楽園球場での試合に臨むため日本航空の福岡 - 羽田線で移動したが、その際に搭乗した機体が日本航空123便墜落事故の事故機(ボーイング747SR-100、JA8119)だった。
[32] 웹사이트 http://2689web.com/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