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무라토요
1. 개요
다테 무라토요는 1682년에 태어나 1735년에 사망한 요시다 번의 3대 번주이다. 그는 1693년 사촌 다테 무네야스의 양자가 되어 요시다 번주가 되었고, 1701년 겐로쿠 아코 사건 당시 아사노 나가노리를 체포하는 데 관여했다. 이후 영지로 부임하여 교호 대기근 당시 백성을 구휼했으며, 1725년 이름을 무네하루에서 무라토요로 개명했다. 그는 존황파 영주로 평가받았으며, 칙사 접대에 헌신하여 칭찬을 받았다.
| 씨족 | 우와지마 다테 씨, 요시다 다테 씨 |
|---|---|
| 이름 | 다테 무라토요 |
| 이명 | 기네노스케 (幼名) 무네하루 (初名) |
| 묘호 | 사와오 신류 다이엔인 |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의 도젠지 |
| 출생 | 덴나 2년 11월 8일 (1682년12월 6일) |
|---|---|
| 사망 | 겐분 2년 6월 30일 (1737년7월 27일) |
| 관위 | 종5위하좌경량, 이즈미노카미, 와카사노카미 |
|---|---|
| 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이에노부 이에쓰구 요시무네 |
| 번 | 이요 요시다 번 번주 |
| 막부 | 에도 막부 |
| 부모 | 아버지: 다테 무네모토 어머니: 사토미 씨 양아버지: 다테 무네야스 |
|---|---|
| 형제 | 무라토요 다테 무네즈미 양녀 등 |
| 배우자 | 정실: 아오야마 다다시게 딸 본주인 다키 씨 |
| 자녀 | 무라스미 무라노부 우에스기 요시에다 나리후사 노리유키 히사토쿠 시게토모 쓰네카와 히사사다 나리토요 오기노 도모치카 실 도자와 마사노부 약혼자 |
| 주요 활동 | 이요 요시다 번 번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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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번주 (이요국) -
다테 무네즈미
다테 무네즈미는 1636년에 태어나 이요 요시다 번을 건립하고, 야마다 소동을 겪었으며, 1708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
우와지마 다테가 -
다테 무네나리
다테 무네나리는 에도 시대 우와지마 번의 번주로서 공무합체를 지지하며 막말 정치 활동을 펼쳤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활동하며 외교에 참여했으며, 번주 시절에는 식산흥업을 중심으로 번정 개혁을 추진하는 등 우와지마 번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
우와지마 다테가 -
다테 히데무네
다테 마사무네의 서자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다테 히데무네는 오사카 전투 공으로 이요 우와지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번정 개혁을 통해 우와지마 번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으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1682년 출생 -
도쿠가와 무네나오
도쿠가와 무네나오는 에도 시대 인물로 기슈 도쿠가와 가문의 6대 당주이며, 종형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면서 기슈 번주 자리를 계승하여 와카야마 번의 재정 재건에 힘썼고, 슬하의 자녀들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며 텔레비전 시대극 《주먹대장》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
1682년 출생 -
로저 코츠
영국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로저 코츠는 뉴턴의 《프린키피아》 개정판 작업에 참여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첫 플루미안 천문학 및 실험 철학 교수를 지냈으며 적분법, 로그, 수치 해석 분야에 기여했으나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2. 생애
덴나 2년(1682년) 11월 8일, 이요 우와지마번사 다테 무네모토의 차남으로 우와지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토미 씨이며, 유아명은 킨노스케이다. 처음 이름은 무네하루였다.
겐로쿠 6년(1693년), 우와지마 번의 지번인 요시다 번의 번주이자 사촌인 다테 무네야스에게 자식이 없어 그의 양자가 되었고, 12월 7일에 12세의 나이로 3대 번주가 되었다. 12월 15일,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오메미에하고, 아버지의 유품인 비젠 모토미쓰의 칼을 헌상했다. 겐로쿠 10년(1697년) 12월 18일에 서임되었다.
1701년(겐로쿠 14년) 2월, 레이겐 상황의 원사로서 에도로 내려가는 세이칸지 히로사다의 향응역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하리마국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칙사 야나기하라 스케카타와 고노 야스하루의 향응역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 사람의 지도는 고케 간닌 키라 요시히사가 맡았다. 3월 14일, 아사노 나가노리가 키라 요시히사를 칼로 벤 사건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고, 카지카와 요리테루 등과 함께 아사노를 체포하는 데 가담했다. 아사노의 흉사 이후에도 무네하루는 무사히 역할을 완수하여 칭찬을 받았다.
호에이 원년(1704년) 5월 28일, 처음으로 영지인 이요 요시다에 들어갔으며, 이후 격년으로 산킨코타이를 하게 되었다. 이듬해(1705년) 6월 1일, 아오야마 타다시게의 딸과 결혼했다.
쇼토쿠 3년(1713년) 8월 15일, 관위를 이즈미노카미로 고쳤으며, 교호 10년(1725년) 12월 2일에는 와카사노카미가 되었다. 이 무렵 휘를 무네하루에서 무라토요로 바꾸었다.
1732년(교호 대기근) 당시 요시다 번은 충해로 2만 5,000석, 풍수해로 2,000석의 큰 피해를 입어 막부로부터 3,000냥을 1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빌려야 했다. 같은 해 연공을 평년의 4분의 1로 감면하고 잡곡(보리, 피)과 뿌리채소 등을 방출했으며, 비축미도 있어 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같은 이요의 마쓰야마 번에서는 전국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여 마쓰다이라 사다히데가 로주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2.1. 탄생부터 가독 상속까지
덴나 2년(1682년) 11월 8일, 이요 우와지마번사 다테 무네모토의 차남으로 우와지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토미 씨이며, 유아명은 킨노스케이다. 처음 이름은 무네하루였다.
겐로쿠 6년(1693년), 우와지마 번의 지번인 요시다 번의 번주이자 사촌인 다테 무네야스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그의 양자가 되어, 12월 7일에 12세의 나이로 3대 번주가 되었다. 12월 15일,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오메미에하고, 아버지의 유품인 비젠 모토미쓰의 칼을 헌상했다. 겐로쿠 10년(1697년) 12월 18일, 서임되었다.
2.2. 겐로쿠 아코 사건
1701년(겐로쿠 14년) 2월, 레이겐 상황의 원사로서 에도로 내려가는 세이칸지 히로사다의 향응역으로 임명되었으며, 한편 하리마국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칙사 야나기하라 스케카타와 고노 야스하루의 향응역으로 임명되었다. 두 사람의 지도는 고케 간닌 키라 요시히사였다. 3월 14일, 아사노 나가노리가 키라 요시히사를 칼로 벤 사건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고, 카지카와 요리테루 등과 함께 아사노를 체포하는 데 가담했다. 아사노의 흉사 이후에도 무네하루 쪽은 무사히 역할을 완수하여 칭찬을 받았다.
2.3. 영지 부임과 개명
호에이 원년(1704년) 5월 28일, 처음으로 영지인 이요 요시다에 들어갔다. 이후 격년으로 산킨코타이를 하게 되었다. 이듬해(1705년) 6월 1일, 아오야마 타다시게의 딸과 결혼했다.
쇼토쿠 3년(1713년) 8월 15일, 관위를 이즈미노카미로 고쳤으며, 교호 10년(1725년) 12월 2일에는 와카사노카미가 되었다. 휘를 무네하루에서 무라토요로 바꾼 것도 이 무렵으로 여겨진다.
2.4. 치세와 기근 대책
1732년(교호 대기근) 당시 요시다 번은 충해로 2만 5,000석, 풍수해로 2,000석의 큰 피해를 입어 막부로부터 3,000냥을 1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빌려야 했다. 같은 해 연공을 평년의 4분의 1로 감면하고 잡곡(보리, 피)과 뿌리채소 등을 방출했으며, 비축미도 있어 아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같은 이요의 마쓰야마 번에서는 전국의 3분의 1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여 마쓰다이라 사다히데가 로주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3. 계보
| 구분 | 내용 |
|---|---|
| 아버지 | 다테 무네모치 |
| 어머니 | 사토미 씨 |
| 양아버지 | 다테 무네야스 |
| 정실 | 아오야마 타다시게의 딸 |
| 측실 | 스마 (혼쥬인, 사이토 씨) |
| * 차남: 다테 무라노부 | |
| 측실 | 타키 씨 |
| * 삼남: 우에스기 요시이에 (우에스기 토모요시의 양자) | |
| 생모 불명 | * 장남: 다테 무라즈미 |
| * 사남: 다테 시게후사 | |
| * 오남: 다테 도쿠유키 | |
| * 육남: 큐토쿠 나리아사 | |
| * 칠남: 츠네카와 히사사다 | |
| * 팔남: 다테 시게요 | |
| * 딸: 오기노 토모치카의 아내 | |
| * 딸: 토자와 마사노부의 약혼자 (결혼 전에 병사) |
4. 평가
지역에서는 "존황파의 영주", "겐로쿠 아코 사건(충신장)의 영주"로 유명하다. 요시다 번에서는 칙사 접대 비용으로 엄청난 5000냥을 계상했고 (대기근 때의 차입금이 3000냥이었으므로 파격적인 금액이다), 칙사는 물론 수행한 공가(公家) 무사에게도 겸손하게 마음을 다해 접대했다."아사노 나가노리는 구두쇠"라는 전승 구전도 요시다 및 우와지마에 남아 있다 (다만, 무라토요와 나가노리는 선조가 절연 관계여서 교류가 없었다. 나가노리의 할복 장소였던 타무라(다테 마사무네의 증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무라토요 한 사람의 재능뿐만 아니라 "가로 오기노 시치로베 등 에도 주재 가신의 활약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5. 유품
서왕모와 모란도" 삼폭 대 산수화(친필 수묵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