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1. 개요
단병호는 포항 출신으로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짓다 1980년 상경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민주공화당 청년 당원이었으나 광주항쟁 이후 생각을 바꿨으며, 동아건설 파업 참여를 계기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보안사 사찰 대상이었으며,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민주노총 부위원장,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냈으며,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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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자 표기 | Dan Byeong-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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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표기 | 段炳浩 |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읍 |
|---|---|
| 정당 | 무소속 |
| 학력 | 동지상업고등학교 중퇴 |
| 경력 |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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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초등학교 (경북) 동문 -
박화요비
화요비는 2000년 데뷔하여 "Lie", "어떤가요" 등의 히트곡으로 'R&B 퀸'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R&B 가수로, 독특한 음색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정받으며 꾸준한 음악 활동과 방송 출연을 이어왔다. -
동지상업고등학교 동문 -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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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상업고등학교 동문 -
이상득
이상득은 1935년에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중퇴 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코오롱그룹 사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불법 정치자금 수수 및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24년에 사망했다. -
불교인권상 수상자 -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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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권상 수상자 -
윤석양
윤석양은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에서 민간인 사찰 자료를 폭로하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기무사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수배 생활과 군무이탈 혐의 기소 후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영화 '모비딕'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2. 생애
단병호는 포항 출신으로,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80년 상경하여 1982년 동아건설에 입사했다. 초기에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민주공화당 청년 당원이자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였으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접하고 점차 변화했다.
1986년 상여금 문제로 파업에 참여하며 노동 운동에 투신, 1987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988년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 의장,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을 거쳐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의 사찰 대상이 되었고, 1990년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이 사실이 드러났다.
1995년 민주노총 부위원장, 1996년과 1998년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8년 1997년 민주노총 총파업 주도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고, 같은 해 8월 29일 민주노총 제3기 위원장에 당선되어 2001년까지 활동했다. 2001년 다시 수감되어 2002년 징역 5년형을 구형받았으며, 황교안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2부 부장검사가 구속을 담당했다. 이후 2002년 불법 집회 및 파업 주도로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황교안에 의해 다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2003년 만기 출소 후 사면·복권되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2008년 당내 종북주의 논란 이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정치계를 떠났다. 이후 노회찬, 심상정과는 달리 진보신당에 입당하지 않고 노동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22년 대선 전에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2.1. 초기 생애와 노동 운동 투신
포항에서 태어나 성장한 단병호는 스스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짓다가 1980년 상경했다.
젊은 시절 단병호는 민주공화당 청년 당원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는 "광주 사람들 다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친구로부터 진상을 전해 듣고 생각이 점차 바뀌었다고 한다.
1982년 동아건설에 입사, 1986년 연말 상여금 문제로 처음 파업에 참여했다. 당시 공장 주임이었던 그는 파업을 동조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의 퇴사 요구를 받았다. 1987년 7월에는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88년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 의장을 거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이 되어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전노협 결성 당시 한 번, 위원장직 수행 당시 2번 구속되기도 했다.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노태우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 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보안사의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와 컴퓨터 디스켓을 공개했다.
2.2. 민주노조 운동과 전노협, 민주노총 활동
1988년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 의장을 거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이 되어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전노협 결성 당시 한 번, 위원장직 수행 당시 2번 구속되기도 하였다.
1990년 10월 4일 외국어대 재학생이자 민학투련 출신 탈영병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을 통해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었음을 폭로하였다. 윤석양 이병은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 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와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켓을 공개했다.
1995년 전노협 위원장을 역임하던 중, 아직 불법 상태였던 민주노총의 부위원장을 지냈다. 1996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 1998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8년에는 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어 출소했다. 같은 해 8월 29일 (1999년 2월 합법화된) 민주노총 제3기 위원장에 당선되어 2001년까지 활동하였다. 2001년 8월에 다시 수감되어 2002년 2월 징역 5년형이 구형되었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그를 구속한 인물이 황교안 당시 공안2부 부장검사였다. 2002년 불법 집회와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황교안에 의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후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이듬해 2003년 4월 만기 출소, 같은 달 30일 사면·복권 조치로 공민권을 회복했다.
2.3. 정치 활동과 민주노동당 탈당
1998년 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가 1999년 광복절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어 출소했다. 같은 해 8월 29일 (1999년 2월 합법화된) 민주노총 제3기 위원장에 당선되어 2001년까지 활동했다. 2001년 8월 다시 수감되어 2002년 2월 징역 5년형이 구형되었는데,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그를 구속한 인물이 황교안 당시 공안2부 부장검사였다. 2002년 불법 집회와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당시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 부장이었던 황교안에 의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기소되었고,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2003년 4월 만기 출소, 같은 달 30일 사면·복권 조치로 공민권을 회복했다.
이후 민주노총 활동 및 민주노동당 지지 활동을 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종북주의 파동 이후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 세력화에 실패했다고 발언하면서, 2008년 3월 20일 탈당하고 정치계를 떠났다.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내분이 격화되자, 단병호는 탈당과 예정되었던 제18대 총선 불출마를 표명했지만, 정치 활동의 지속과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 추진 세력과의 연대를 시사했다. 비슷한 시기에 탈당한 노회찬, 심상정과 달리 진보신당에는 입당하지 않고, 노동자 대안 교육 센터 설립을 준비하는 등 정치와는 선을 긋고 거리를 두며 활동하고 있다. 2022년 대선 전에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