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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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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담약수는 명나라 시대의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광둥성 증성 출신으로, 진헌장에게 학문을 배우고 난징 국자감에 들어갔다. 40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를 거쳐 예부, 이부, 병부 상서를 역임했으며, 난징 국자감의 총재를 지냈다. 담약수는 영남학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심학으로 유명했다. 평생 40개 이상의 서원을 설립하거나 재건하여 교육에 기여했고, 왕양명과 학문적 교류를 했으나 격물 해석의 차이로 논쟁을 벌였다. 담약수의 사상은 조선 중기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사후에는 영향력이 약화되어 현대에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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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약수
기본 정보
이름담약수
민택(民澤)
감천(甘泉)
시호문강(文康)
출생1466년
사망1560년
국적중국
민족한족
학문
학파양명학
영향왕수인
주요 사상
사상존성(尊性), 수성(隨性), 활인지도(活人之道), 체용일원론(體用一元論), 심즉리(心卽理)
주요 저서
저서감천어록(甘泉語錄), 감천문집(甘泉文集)
경력
관직한림원 검토(翰林院檢討), 남경 국자감 사예(南京國子監司業), 남경 예부 상서(南京禮部尙書), 태자소보(太子少保)

2. 생애

담약수는 광둥 증성 출신이다. 젊은 시절 진헌장(陳獻章)에게서 배우며 정좌침잠(靜座沈潛)의 수련을 쌓았다. 본래 사관(仕官)이 될 뜻은 적었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남경국자감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40세 되던 해인 홍치 18년(1505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한림원 편수(編修)를 시작으로[2] 예부, 吏部|이부zho, 兵部|병부zho상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70세가 넘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사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학문적으로는 스승 진헌장의 뒤를 이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끌었으며, 심학 분야에서 중요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교육에도 힘써 형산(衡山)에 감천정사(甘泉精舍, 후의 감천서원)를 세워 강학하고, 평생 40여 개의 서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동시대의 철학자이자 장군이었던 왕양명과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육상산의 심학, 도교, 불교에 대해 공통된 이해를 나누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학문적 길은 달라지게 되었다.[1]

2. 1. 관직 생활

진헌장에게 배웠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남경국자감에 들어갔다. 40세 때인 홍치 18년(1505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이후 서길사(庶吉士)에 뽑혀 한림원 편수(編修)가 되었다.[2] 1524년에는 난징 국자감의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예부, 이부吏部zho, 병부兵部zho상서를 역임하였다. 70세가 넘어 사직하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2. 교육 활동

진헌장의 뒤를 이어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자로서 심학으로 유명했으며, 동시에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다.

남악(南岳) 형산(衡山) 자운봉(紫雲峰) 아래에 위치했던 옛 형악사(衡嶽寺) 터에 건물을 세워 감천정사(甘泉精舍)라 이름 짓고 직접 강학에 나섰다. 사람들은 이곳을 감천서원(甘泉書院)이라 불렀으며, 이 서원은 후일 많은 학자를 배출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다.

1524년에는 난징 국자감(南京國子監)의 총재로 임명되어 명나라의 중요 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또한 평생에 걸쳐 전국 각지에 40개 이상의 서원(書院, 유교 학당)을 새로 설립하거나 공동으로 설립하는 등 유학 교육의 확산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3. 사상

담약수는 스승 진헌장의 학풍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심학(心學) 체계를 발전시켰다.[2] 그의 사상은 ‘체인천리, 전소습심’(體認天理, 煎銷習心)으로 요약되는데,[3] 이는 천리(天理)를 몸으로 체득하고 익숙해진 마음(心)의 폐단을 씻어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왕양명이 주장한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3]

담약수는 왕양명과 육상산의 이상주의(심학), 도교, 불교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기도 했으나,[1] 격물(格物) 해석 등[4] 일부 학문적 견해에서는 왕양명과 차이를 보이며 논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학자들은 왕양명과 담약수의 학파로 나뉘기도 했다.[2]

심학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담약수는 평생 40개 이상의 서원(書院)을 세우거나 공동 설립하는 등 유학 교육에도 힘썼다.[1] 그는 방문하는 곳마다 서원을 세워 스승 진헌장을 기렸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문하생들이 여러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2]

주요 저술로는 《심성도설》(心性圖說), 《격물통》(格物通), 《준도록》(遵道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감천집》이 전해진다.

3. 1. 왕양명과의 관계

담약수는 철학자이자 장군, 행정가였던 왕양명의 평생 친구였다.[1] 담약수가 한림원편수로 재직할 당시, 이부(吏部)에 있던 왕양명과 함께 유학을 연구하며 교류를 시작했다.[2] 왕양명이 강학할 때 담약수가 가장 먼저 동참하기도 했으며,[3] 두 사람은 육상산의 이상주의(심학), 도교, 불교에 대한 이해를 공유했다.[1]

담약수의 사상은 ‘체인천리, 전소습심’(體認天理, 煎銷習心)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는 왕양명의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과 유사한 면이 있다.[3] 그러나 스승 진헌장에게 배운 담약수는 왕양명이 내세운 치양지설(致良知說)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당시 학자들은 왕양명과 담약수의 두 학파로 나뉘기도 했다.[2] 그들 사이의 주된 학문적 불일치는 격물(格物, 사물의 탐구)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있었다.[4]

이러한 학문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담약수는 왕양명보다 6살이 많았으며,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묘지명을 직접 썼다.[3] 비록 지적인 경로는 결국 갈라졌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1]

3. 2. 격물(格物) 해석의 차이

담약수는 한림원편수 시절 왕양명과 함께 유학을 연구했다.[2] 그는 왕양명보다 6살 많았으며, 나중에 왕양명의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왕양명이 강학을 시작했을 때 담약수가 가장 먼저 참여할 정도로 학문적 교류가 깊었다.[3]

담약수 사상의 핵심은 ‘체인천리, 전소습심’(體認天理, 煎銷習心)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왕양명의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3]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중요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바로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탐구함)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4] 특히 담약수는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장한 왕양명과 이 격물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당시 학자들은 왕양명파와 담약수파로 나뉘기도 했다.[2]

4. 평가

담약수는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의 사상은 사후 점차 약화되어 청나라 시대에는 그 영향력이 매우 미미해졌다. 담약수의 문집이 《사고전서》에 포함되지 못했을 정도였다. 현대에도 그의 스승인 진헌장이나 친구인 왕양명의 문집은 문장 부호를 사용하여 읽기 쉽게 만든 표점본이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지만, 담약수의 문집은 아직 표점본으로 간행된 적이 없다. 근대에 이루어진 담약수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며, 주로 왕양명이나 양명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담약수의 사상을 양명학 발전 과정의 한 단계로 보는 시각을 반영한다.[5]

참조

[1]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2] 웹인용 담감천 https://www.doopedia[...] 두산 2017-11-09
[3] 서적 송명철학 형설출판사 2017-11-10
[4] 서적 신유학사상의 전개(Ⅱ) 형설출판사 2017-11-10
[5] 간행물 리(理)의 재정위(再定位)와 심(心)의 재정의(再定義) - 담약수(湛若水)의 철학 http://www.dbpia.co.[...]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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