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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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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唐)씨는 한국의 성씨로, 2015년 인구 조사에서 1,146명이 확인되었다. 밀양을 본관으로 하며, 조선 시대에 임금에게 사성받아 밀양 당씨 단본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시조 당성(唐誠)은 고려 말 정동행성 연리 등을 거쳐 조선 개국 후 외교 문서를 담당했으며, 조선 태종 때 밀양을 사성받았다. 당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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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성씨)

2. 기원

밀양 당씨(密陽 唐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 결과 1,146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본관은 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사적(賜籍)받은 밀양 당씨 단본이다.

경상남도 밀양시(密陽市)를 본관으로 하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고유의 양반 성씨이다. 신라 진골 혈통에서 고려 문벌귀족 혈통으로, 근대 이전에는 조선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18품계 중 제5등급의 품계. 정3품 상계부터 당상관이라 하고, 하계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함, 조선의 관직 가운데 최고의 관직으로서 임금과 함께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정치적 책임을 갖는 정3품 이상의 자리)급 양반 혈통으로 이어지는 순혈의 뿌리 깊은 가문이다.

고려 말 예부상서(禮部尙書)(고려 말 예부의 으뜸 벼슬로서 품계는 정3품, 현대의 외교부장관 겸 교육부장관)를 지낸 박정수(朴廷秀)의 후손이자 밀양시(密陽市) 산외면 다죽리(茶竹里, 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의 토착민이 ‘다원리’의 발음과 ‘당(唐)’의 발음이 유사한 점에 주목해서 한자를 빌려와 성으로 삼아 쓰기 시작했다.

2. 1. 시조 당성(唐誠) 관련 설

시조(始祖) 당성(唐誠)은 고려 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박정수(朴廷秀)의 후손으로, 혼외자(婚外子)라는 신분을 감추고 박정수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다죽리(茶竹里, 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 마을의 발음과 유사한 '당(唐)'이라는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1] 이 외에도 '다죽리' 마을의 총명한 평민(平民)이 박정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출신을 감추기 위해 '당(唐)'이라는 성을 썼다는 설,[1] 고려 왕족(王族)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당(唐)'이라는 성을 썼다는 설,[1] 외국에서 망명(亡命)해 왔다는 설[1] 등이 있지만 모두 확실하지 않다.[1]

특히 외국 망명설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信憑性)이 낮고,[1] 고려 왕족설 역시 당성(唐誠)의 묘(墓)가 개성(開城) 왕씨 묘와 같은 곳에 있다는 주장 외에는 특별한 근거(根據)가 없다.[1]

결론적으로, 당성(唐誠)은 예부상서 박정수(朴廷秀)의 후손이자 그의 고향인 다죽리(茶竹里, 본래 이름은 다원리(茶阮里)) 마을의 토착민(土着民) 중 특출난 인재(人材)였던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일반적인 사성(賜姓) 관행과 달리 임금에게 청(請)하여 밀양(密陽)을 본관(本貫)으로 하사(下賜)받아 유지(維持)한 것으로 추정된다.[1]

3. 시조 당성(唐誠)의 조선왕조실록 기록

'''당성'''(唐誠)은 원나라 말기 강절 명주(明州) 출신으로, 병란을 피해 조선으로 왔다.[1] 처음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연리(掾吏)였다가, 행성이 혁파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사평 순위부(司平巡衛府) 평사(評事)가 되었다.[1] 율령(律令)에 밝아 일을 용감하게 처리하였다.[1]

성석린최영에게 무고를 당해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이자, 당성은 율문을 들어 강하게 항변하였다.[1] "도통(都統)이 율문보다 먼저 났습니까? 아니면 율문이 도통보다 먼저 났습니까? 도통이 어찌하여 자기 한 사람의 견해로써 율문을 버리십니까?"라며 최영을 꾸짖었다.[1] 태조도 성석린을 구하려 하여, 결국 성석린은 사형을 면했다.[1]

이후 당성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거쳐 이원필을 대신해 사대 이문(事大吏文)을 맡았다.[1] 태조 즉위 후에는 호조, 예조, 형조, 공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했다.[1] 노비 문제로 변정 도감(辨定都監)에 소송했다가 패소하자, "이 도감은 변정(辨定)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不定)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여 면관(免官)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하여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겸 문서 응봉사(文書應奉司) 제조(提調)가 되었다.[1]

신사년, 태종이 고명(誥命)을 받게 되자, 당성은 국왕(國王) 칭호가 이전의 권서 국사(權署國事)보다 명분과 간결함에서 낫다고 칭찬하며, 자신의 직함에서도 검교(檢校)를 빼달라고 청했다.[1]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로 임명했다.[1] 이후 공안부 윤(恭安府尹)을 지내다 기축년에 치사(致仕)하였다.[1]

당성은 부지런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70세가 넘어서도 정력이 쇠하지 않았다.[1] 사대 문자(事大文字)를 꼼꼼히 처리하여 태종의 신임을 얻었고, 밀양을 본향(本鄕)으로 받았다.[1] 1413년 77세로 사망하자, 태종은 애도하며 후한 장례를 지원했고, 중궁도 제사를 지냈다.[1] 성석린은 시(詩)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1]

4. 관향

밀양 당씨(密陽 唐氏)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 결과 1,146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본관은 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사적(賜籍) 받은 밀양 단본이다.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고유의 양반 성씨이다. 신라 진골 혈통에서 고려 문벌귀족 혈통으로, 조선시대에는 정3품 이상의 당상관급 양반 혈통으로 이어지는 순혈 가문이다.

고려 말 예부상서를 지낸 박정수(朴廷秀)의 후손이자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茶竹里, 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의 토착민이 ‘다원리(茶阮里)’의 발음과 ‘당(唐)’의 발음이 유사한 점에 주목해서 한자를 빌려와 성으로 삼아 쓰기 시작했다.[1]

4. 1. 다죽리의 역사

다죽리(茶竹里)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다원리(茶阮里)였는데, '다원'의 발음이 '당(唐)'과 비슷하여 이 지역 토착민들이 한자를 빌려 성씨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죽리는 꾀꼬리봉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는 평전산, 서쪽에는 다원동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다원들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다.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원들 가운데 있던 지석묘군과 평전산 기슭의 고분군 등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 있는 모당천(毛唐泉)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조선 초에 이미 당(唐)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죽동리와 죽서리로 나뉘었고, 현재는 산외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동쪽은 죽동, 서쪽은 죽서로 구분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동, 죽서, 죽남, 율전을 합쳐 다죽리(茶竹里)가 되었다. 이후 죽남과 율전이 분리되었고, 1965년 행정리 조정으로 다원 1구, 2구, 죽남, 율전 등으로 나뉘었다.

자연 마을은 다원 1리, 2리, 죽남동, 율전동 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지로는 다죽리 지석묘군, 고분군, 모당천, 혜산서원, 죽원재사 등이 있다.

다죽리는 꾀꼬리봉 아래쪽에 위치하며, 차나무가 많아 다원(茶阮)이라고 불렸다.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엄광사 주변에 재배한 것이 마을까지 번식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죽원(竹阮)이었으나 다원(茶阮)이라고도 불렸다. 마을 앞에는 밤밭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마을이 생겨 율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면소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혜산서원에는 600년 된 차나무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이 지역 문벌귀족이었던 예부상서 박정수(朴廷秀)의 후손들은 격변기를 거치면서 흩어졌다.

4. 2. 다죽리의 자연환경 및 유적

다죽리(茶竹里, 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는 뒤로는 중산의 줄기에서 내려온 꾀꼬리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전산(平田山)이, 서쪽으로는 다원동산(茶院東山)이 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남쪽으로는 넓은 다원들(茶院野)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북천(北川)이 흘렀으나 지금은 다원들(茶院野) 건너편으로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꾀꼬리봉 아래쪽에 다원(茶阮) 1리, 다원(茶阮) 2리가 위치하고 있고, 평전산(平田山) 기슭에 죽남동이 있다. 다원들(茶院野) 가운데에는 율전동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원들(茶院野) 가운데 있었던 지석묘(支石墓)군(群)과 평전산(平田山) 기슭에 있는 고분(古墳)군(群) 등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마을에 있는 모당천(毛唐泉)의 사적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미 당씨(唐氏)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는 죽동리와 죽서리로 방리가 나누어졌다. 현재는 산외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동쪽은 죽동, 서쪽은 죽서로 나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죽동, 죽서, 죽남, 율전을 병합해 다죽리(茶竹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일제 말기에 죽남과 율전이 죽동에서 분동(分洞)되었다. 1965년에 행정리를 조정하면서 다원 1구, 2구, 죽남, 율전 등으로 나누어졌다. 자연 마을은 다원 1리, 2리, 죽남동, 율전동 등 4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유적지로는 다죽리 지석묘(支石墓)군(群)과 고분(古墳)군(群), 모당천(毛唐泉, 죽동의 죽원재사 밑에 있는 고정(古井)이다), 혜산서원, 죽원재사 등이 있다.

다죽리는 꾀꼬리봉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 이름은 다원(茶阮)이라고 한다. 다원(茶阮)이라고 한 것은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엄광사(嚴光寺) 주변에 재배했는데 이 마을까지 번식(繁殖)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죽원(竹阮)이었는데 다원(茶阮)이라고도 했다. 마을 앞에 관율숲이 있었는데 밤밭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겨 밤밭, 즉 율전이라 부르게 됐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춘 마을로 면소재지가 위치하고 있다. 예부터 茶(차)나무가 유명하여 다원(茶阮)이라 불렀고,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재배했는데 현재 600년 된 차나무가 혜산서원(惠山書院)에 있다.

5. 가문

밀양 당씨의 시조(始祖) 당성은 고려 말 정동행성연사(征東行省椽史)를 지냈고, 조선 개국 초 공조전서(工曹典書)로서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녹권(錄券)과 상전(賞田) 15ha을 하사받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러 밀양(密陽)을 사적받았다. 조선 개국 당시 외교문서를 담당했던 일과 정3품 지위를 받은 것은 고려 말 예부상서(禮部尙書, 정3품, 현대의 외교부장관 겸 교육부장관)이자 친부(親父) 박정수(朴廷秀)의 영향이 컸다고 보여진다.

당성(1337년 ∼ 1413년)은 1398년 호조전서(戶曹典書) 재직 중 노비 소송에 패해 노비변정도감을 비방하다 파직되었으나, 곧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에 제수(除授)되어 문서응봉사제조(文書應奉司提調)를 겸했다. 1401년(조선 태종 1) 태종에게 실직(實職)에 보임해 줄 것을 청해 개성부부유후(開城府副留後)에 제수되었고, 1409년 공안부윤(恭安府尹)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근실하고 율문(律文)·사대문서(事大文書)에 능해 고려 말과 조선 초 형정(刑政)과 외교(外交)에 공헌했다. 조선 태종 때 밀양(密陽)을 사적받았다.[1]

5. 1. 분파

밀양 당씨의 시조(始祖) 당성(唐誠)은 고려 말 정동행성연사(征東行省椽史)를 지냈고, 조선 개국 초 공조전서(工曹典書)로서 외교문서를 전담(專擔)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1] 당성은 중랑장겸사평순위부평사(中郞將兼司平巡衛府評事)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을 역임(歷任)했다. 1392년(조선 태조 1)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예조·형조·공조의 전서(典書)를 역임(歷任)했다.[1]

당씨의 본관은 밀양 외에도 경주, 청주, 남원, 영광 등 다섯 본까지 기록하는 문헌이 있으나, 모두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오늘날에는 밀양 당씨 단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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