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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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릉하 전투는 1631년, 후금의 홍타이지가 명나라의 요새 대릉하를 공격한 전투이다. 홍타이지는 1629년 명나라 침공 이후, 요동 지역에 대한 요새화 정책을 추진하는 명나라에 맞서 유럽식 대포를 활용하고 한인 부대를 조직하여 대릉하를 포위했다. 조대수가 이끄는 명군은 포위되어 소릉하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항복했다. 이 전투를 통해 만주군은 포병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한인 부대를 활용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명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민족 명칭을 만주로,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국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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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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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대릉하 전투 |
부분전 | 명청 전쟁 |
날짜 | 1631년 9월 – 11월 |
장소 | 대릉하 |
결과 | 후금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후금(後金) |
교전국 2 | 명나라(明) |
지휘관 및 지도자 | |
후금 지휘관 | 홍타이지 동양성 아지거 도도 다이샨 |
명나라 지휘관 | 손승종 조대수 오양 장춘 조대필 송위 하가강 |
병력 규모 | |
후금 병력 | 80,000명 |
명나라 병력 | 조대수: 13,800명 손승종: 40,000명 금주: 6,000명 송산: 2,000명 |
2. 배경
1629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군이 명나라를 침공했다. 이들은 누르하치가 3년 전 원숭환에게 패배했던 영원성을 우회하여, 후금에 우호적인 몽골을 통과한 뒤 희봉구를 거쳐 서쪽으로 진격해 북경을 노렸다. 이 침공을 기사의 변이라 한다. 영원성 지휘관 원숭환은 조대수에게 군사 2만을 이끌고 북경을 구원하도록 지시했다. 조대수는 산해관을 통과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으로 진격, 북경성 밖에서 후금군을 무찔렀다.
원숭환은 북변 방어 실패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누르하치를 상대로 거둔 승리로 얻은 명성을 이용하여 금주, 송산(松山), 대릉하를 요새화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2. 1. 명나라의 방어 체계
1629년, 원숭환은 기사의 변 당시 북경 방어를 위해 조대수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파견했다. 그러나 원숭환은 북변 방어 실패로 처형되었는데, 그 전 금주, 송산(松山), 대릉하를 요새화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는 만리장성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는 전방 방어 정책의 일환이었다.같은 해, 홍타이지는 난주, 천안, 준화, 영평을 함락시키며 홍이포와 대장군포 등 유럽식 대포를 획득했다. 이 대포들은 손원화가 명군에 도입하려던 것이었고, 손승종과 원숭환 등이 북변 방어에 활용했던 기술이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이 대포를 사용했었다. 홍타이지는 투항한 명나라 장교 동양성에게 한인 군사 3천 명과 대포 전문가 지휘를 맡겼고, 1631년까지 대포 40문을 생산하게 했다. 이들은 ‘구한병(舊漢兵)’의 핵심이 되었다.
1630년,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영평 수비를 맡겼으나, 조대수의 반격으로 난주를 빼앗겼다. 아민은 천안과 영평 주민을 학살하고 약탈했는데, 이는 한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던 홍타이지의 분노를 샀다.
2. 2. 후금의 성장과 한족 포병 부대
1629년 홍타이지는 난주, 천안, 준화, 영평 등 중국 동북지방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영평 함락으로 후금은 홍이포와 대장군포를 확보했는데, 대장군포는 당시 크리스천 산동순무(山東巡撫) 손원화가 명군에 도입하고자 유럽인이 설계한 것이었다. 1623년 손승종과 원숭환 등이 이끄는 북변에 유럽 대포 일부가 도입되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이 누르하치와 싸울 때 신형 대포가 투입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도 이 기술을 접하게 되었다. 명의 지휘관이었지만 후금에 투항한 동양성은 한인 군사 3천 명과 영평에서 생포한 대포 전문가 지휘 책임을 맡았다. 1631년 이들은 대포 40문을 생산했다. 이 군대는 ‘구한병(舊漢兵)’으로 알려진 군대의 핵심이었다.2. 3. 명-후금 간 갈등 심화
1629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군이 명나라를 침공했다. 이들은 누르하치가 3년 전 원숭환에게 패배했던 견고한 영원성을 우회하였다. 후금에 우호적인 몽골을 통과한 만주군은 희봉구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진격, 북경을 노렸다. 이 침공을 기사의 변이라 한다. 영원성 지휘관 원숭환은 조대수에게 군사 2만을 이끌고 북경을 구원하도록 지시하였다. 조대수는 산해관을 통과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으로 진격, 북경성 밖에서 후금군을 무찔렀다. 이 사건으로 원숭환의 북변 방어는 실패하였고, 원숭환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처형되기 전에 원숭환은 누르하치로부터 승리한 것으로부터 얻은 명성을 이용, 금주, 송산(松山), 대릉하를 견고한 요새를 통하여 방비하는 둔(屯)으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이는 만리장성 북변, 특히 원숭환의 기지로 역할한 영원성에 요새를 짓는 것이 필요로 했던 전방 방어 정책의 일환이었다.1629년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난주, 천안, 준화, 영평 등 중국 동북지방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영평의 함락으로 후금군은 홍이포와 대장군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장군포는 당시 크리스천 산동순무(山東巡撫) 손원화가 명군에 도입하고자 유럽인이 설계한 것이었다. 1623년, 유럽 대포 중 일부가 손승종과 원숭환 등이 이끄는 북변에 도입되었다. 1626년, 신형 대포는 원숭환이 누르하치와 벌인 영원성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제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도 같은 기술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한때 명의 지휘관이었지만 후금에 투항한 동양성은 한인 군사 3천 명을 부여받았고 영평에서 생포한 대포 전문가를 지휘하는 책임을 맡았다. 1631년, 이들은 대포 40문을 생산하였다. 이들 군대는 ‘구한병(舊漢兵)’으로 알려질 군대의 핵심이었다.
1630년, 홍타이지는 사촌 아민을 영평에 남겨두어 지키게 하였다. 조대수는 반격을 가하여 난주를 탈환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민은 천안과 영평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한 다음에 명군에 넘겨주었다. 한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정복 도시들을 안정화하고 명 관료들의 귀순을 유도하려 했던 홍타이지는 아민의 학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다.
3. 전투의 전개
1631년(천총 5년) 9월, 홍타이지는 대릉하성을 포위하고, 주변 성들에 대한 공략과 항복 권유를 병행하며 장기전 태세에 돌입했다. 명나라는 조대수를 중심으로 대릉하성을 방어하며 여러 차례 출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송산과 금주에서 온 명나라 구원군도 아지거가 이끄는 후금군에게 격파되었다.
10월 초, 오삼계의 부친 오양과 손승종이 이끄는 4만 명군이 금주 인근에 도착했다. 홍타이지는 도도 등과 함께 소릉하(小凌河) 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켜 명군을 대파하고, 다이샨 등에게 돌아갔다. 10월 13일, 홍타이지는 조대수에게 다시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14일, 홍타이지는 조대수를 성 밖으로 유인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조대수는 성 안에서 농성하며 나오지 않았다.
10월 19일, 장춘이 이끄는 명군 주력 부대가 소릉하를 건너 공격해 왔다. 홍타이지는 동양성의 포병을 활용하여 명군 전열을 돌파하고, 장춘을 포함한 33명의 군관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11월 5일, 대릉하성 인근의 주요 성채인 우자장대가 후금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이후 다른 성채들도 항복하면서 후금군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대릉하성 내부는 식량 부족과 식인으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조대수는 양자 조가법을 보내 항복 협상을 진행했고, 11월 21일, 금주 공격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3. 1. 포위와 초기 공방전
대릉하는 요동에 있는 명나라 군사 주둔지 중 가장 전방에 배치된 곳이었다. 대릉하는 100개가 넘는 튼튼하고 서로 지원 가능한 성(臺)의 촘촘한 네트워크로 보호받았으며, 각 성은 명나라 장교가 지휘했다. 1631년, 조대수는 인근 금주 수비대의 사령관이었다. 양력 9월 1일, 조대수는 최근 요새화가 강화된 대릉하성을 시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던 중, 홍타이지가 여진족, 몽골족, 한족 군대를 이끌고 대릉하성을 공격하기 위해 도착했다. 후금 군대의 규모는 2만 명에서 8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대릉하에서 조대수는 약 14,000명의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이전에 여진족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조대수 군대의 존재는 홍타이지의 순찰대가 성 밖에서 한족 거주자를 생포했을 때 홍타이지에게 알려졌다. 후금군은 성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준비하여 성 주변에 해자를 건설하고, 동양성의 지휘 하에 새로 구성된 한족 포병 부대를 이용하여 도로를 경계했다.후금군은 대릉하 주변의 성을 점령하는 데 집중하여, 각 성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또한 조대수에게 반복적으로 항복을 요청했다. 동양성의 포병은 처음에는 항복을 거부한 성들을 폭격하여, 결국 여러 성이 항복하게 되었다. 명나라 수비대는 성에서 여러 차례 출격을 시도했지만, 일반적으로 후금군에게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성 밖에서 명나라 구원군 두 부대가 후금군에게 패배했다. 먼저 송산에서 온 2,000명의 병력이 패배했고, 그 다음에는 금주에서 온 6,000명의 병력이 패배했다. 한 사료에서는 후금의 승리를 홍타이지의 이복 형제인 아지거가 이끄는 여진족과 몽골 기병대에 기인한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서는 동양성의 포병을 칭찬한다.
3. 2. 소릉하 전투
10월 초, 조대수의 매부 오양(오삼계 부친)이 지휘하고 손승종이 감독하는 4만 명군이 금주 인근에 도착하였다. 홍타이지는 군대를 동원하고 퉁양싱의 포병을 구원군으로 대동하여 전진하였다. 도도와 함께 바야라(bayara)라고 하는 200명의 경호원을 이끌고 홍타이지는 소릉하(小凌河) 강둑 근처에 7천 명의 구원군을 매복시켰다. 명군은 공포에 질렸고 소규모 후금군에 맥없이 당하였다. 이후 두 부대는 야전에 돌입하였고 홍타이지는 다시 승리하여 대릉하에 주둔한 다이샨과 기타 버일러(貝勒, beile)에게 돌아갔다. 10월 13일, 홍타이지는 조대수에게 다시 항복의 서신을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14일, 대릉하성 밖 요새 하나를 탈환하고자 홍타이지는 조대수의 군대를 유인하였다. 조대수의 공격이 실패하였고 성벽 안으로 군대를 철군, 포위가 지속되는 동안 조대수는 다시는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10월 19일, 손승종이 이끄는 4만 병사 가운데 주력군이 장춘(張春)의 지휘 하에 정비 중에 있었다. 명군은 소릉하를 건넜고 각 방향을 엄호하는 대포와 조총을 이용하여 방어하고 부대를 정렬하였다. 일부는 뚜렷한 의견을 내지 못한 채 정면으로 맞서 반대하였지만, 홍타이지는 기병의 큰 희생을 치른 끝에 퉁양싱의 포병을 이용하여 명의 전선을 돌파하였다. 명군은 건초를 불태워 퉁양싱의 포병을 불사르려 했지만 풍향이 바뀌면서 오히려 명군 쪽으로 불이 붙었다. 장춘은 33명의 군관과 함께 생포되었고 결국 후금에 투항하였다.
3. 3. 대릉하성의 함락
11월 5일, 대릉하성 인근 최대 규모의 성채인 우자장대(于子章臺)는 동양성의 홍이포와 대장군포의 수일간 공격 끝에 항복하였다. 이후 나머지 성채도 하나둘씩 항복하였다. 11월 중순, 후금 군의 군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였지만 우자장대 등의 항복으로 충분한 군량을 확보했다. 대릉하성 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사람들은 식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항복 가능성을 두고 대릉하성과 후금 사이에 사신이 오갔다. 조대수의 양자 조가법은 후금 진영에 파견되었다. 명군의 무의미한 방어가 지속되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조가법은 아민의 대학살이 있었던 영평 사건을 명 관료 모두가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사신 왕래 후, 조대수는 홍타이지가 즉시 금주 공격을 위한 부대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금주에는 조대수를 비롯한 명 군관의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조건으로 군인들은 친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부대가 더 공격할 기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대수의 금주 복귀 계획에 동의하였다. 조대수는 금주 지휘관이었으므로 대릉하를 탈출하는 척하고 금주에 입성한 후 성을 홍타이지에게 넘기려 하였다. 11월 21일, 계획대로 조대수는 항복하였다. 성내 3만여 인구 중 12,000명도 안되는 인구만이 살아남았다.
4. 전투의 결과
대릉하 전투는 만주 군대가 명나라 북쪽 국경의 요새를 상대할 수 있는 포병 전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포르투갈 대포와 같은 외국 기술 도입을 꺼렸지만, 만주군은 공성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했다. 1629년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요동의 명나라 요새를 우회하지 않고 직접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후금은 한족 군대를 새로 편성하여 전투에 투입하는 데 성공했다. 대릉하 전투와 송금 전투 이후 명나라에서 귀순한 병사들의 수가 늘면서, 퉁양싱 휘하의 한족 포병 부대는 한군팔기(漢軍八旗)로 확대되어 만주팔기, 몽골팔기와 함께 활약했다. 이 전투에서 항복한 명나라 장교들은 이후 후금과 청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명나라 정예병이었던 요동 출신 병사들의 귀순은 명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35년, 홍타이지는 민족 명칭을 여진에서 만주로 바꾸고, 1636년에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변경했다. 결국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4. 1. 조대수의 변절과 재항복
11월 5일, 대릉하성 인근 최대 규모 성채인 우자장대(于子章臺)는 동양성의 홍이포와 대장군포의 수일간 공격 끝에 항복하였다. 이후 나머지 성채도 하나둘씩 항복하였다. 11월 중순, 후금 진영의 군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였지만 우자장대 등의 항복으로 충분한 군량을 지급받았다. 대릉하성벽 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식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항복의 가능성을 두고 대릉하성과 후금 진영 사이에 사신이 오갔다. 조대수의 양자 조가법(祖可法)은 후금 진영에 파견되었다. 명군의 무의미한 방어가 지속되는 이유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조가법은 아민의 대학살이 있었던 영평의 사건을 명 관료 모두가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사신 왕래 후, 조대수는 홍타이지가 즉시 금주 공격을 위한 부대 파견을 조건으로 항복 의사를 밝혔다. 금주에는 조대수를 비롯한 명 군관의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군인들은 친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부대가 더 공격할 기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대수가 금주로 돌아간다는 계획에 동의하였다. 조대수는 금주 지휘관이었고 대릉하를 탈출한다는 것을 가장하고, 입성 후에는 성을 홍타이지에게 넘기려 하였다. 계획이 결정되자 11월 21일 조대수는 항복하였다. 성내 3만여 인구 중 12,000명도 안되는 인구만이 살아남았다.
주다수는 홍타이지에게 진저우를 점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그곳의 옛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명나라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그 후 10년 동안 진저우 수비대 사령관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홍타이지는 1641년 진저우와 송산을 포위했고, 1642년에 주다수는 두 번째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4. 2. 오삼계의 투항과 산해관 전투
이자성이 1644년 북경을 함락시키면서, 오삼계는 청군이 북경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 장애물인 산해관의 지휘관이었다. 조대수의 조카이기도 했던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이 이자성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청에 투항하였고, 이는 산해관 전투를 촉발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청군은 화북(華北)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4. 3. 청나라의 성장과 명나라의 쇠퇴
대릉하 전투를 통해 만주 군대는 명나라의 북쪽 변경을 따라 배치된 요새들을 상대할 포병을 가용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명군은 처음엔 포르투갈 대포라는 외국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만주군은 포위전에서 상대적인 약세를 극복하고자 대포를 꾸준히 이용하였다. 1629년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요동의 명나라 요새들을 피하지 않고 직접 싸울 수 있었다. 게다가 후금 휘하에 한족 군대를 새로 조직하여 전투에 활용하는데 성공하였다. 대릉하 전투와 송금 전투 이후 명나라에서 귀순한 사람들의 계급이 오르면서, 만주팔기, 몽고팔기와 함께 퉁양싱 휘하 한족 군대는 한군팔기(漢軍八旗) 조직으로 이뤄졌다. 이 원정에서 항복한 명나라 군관들은 후금/청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북변의 요민(遼民)들은 명나라 군대의 최정예 군대였으며 이들이 후금으로 귀순한 것은 명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1635년, 홍타이지는 여진이라는 민족 명칭을 만주 (滿洲)로 공식적으로 고쳤고, 1636년에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 (淸)으로 고쳤다. 청은 명을 무찌르고 중국을 정복했다.5. 전투의 영향
대릉하 전투에서 패배한 구원군의 지휘관 오양은 1644년 이자성에게 북경에서 살해되었다. 오양의 아들이자 조대수의 조카인 오삼계는 산해관의 지휘관으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청에 투항하여 산해관 전투를 촉발시켰다. 이 전투로 청군은 화북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5. 1.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
대릉하 전투를 통해 만주 군대는 명의 북쪽 변경을 따라 배치된 요새들을 상대할 포병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명군은 처음에는 포르투갈 대포와 같은 외국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지만, 만주군은 포위전에서 상대적인 약점을 극복하고자 대포를 꾸준히 이용하였다. 1629년 원정에서 홍타이지는 요동의 명 요새들을 피하지 않고 직접 싸울 수 있었다. 게다가 후금 휘하에 한인 군대를 새로 조직하여 전투에 활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릉하 전투와 송금 전투 이후 명에서 귀순한 사람들의 계급이 오르면서, 만주팔기, 몽고팔기와 함께 동양성 휘하 한인 군대는 한군팔기(漢軍八旗)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이 원정에서 항복한 명 군관들은 후금과 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북변의 요민(遼民)들은 명군의 최정예 군대였으며, 이들이 후금으로 귀순한 것은 명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635년, 홍타이지는 여진(女眞)이라는 민족 명칭을 만주(滿洲)로 공식적으로 고쳤고, 1636년에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었다. 청은 명을 무찌르고 중국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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