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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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신기오로 아민은 만주 후금의 장수로, 1608년 울라 정벌을 시작으로 사르후 전투, 여허 정벌 등에서 활약했다. 1616년 호쇼이 버일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 1630년 북경 공격 실패 후 실각하여 유폐되었고, 1640년 유폐지에서 사망했다.

아이신기오로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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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아민은 누르하치의 조카이자 추연의 동생으로, 후금 건국 초기에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608년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616년 사대 버일러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1626년에는 칼카바린부를 정벌했다.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기도 했으나, 1630년 영평 등 네 성을 버리고 퇴각한 죄로 유폐되어 1640년 사망했다.

2.1. 초기 활동과 군사적 공적

만력(萬曆) 36년(1608), 아민은 숙부 추연(褚英)과 함께 울라(烏喇)를 정벌하여 의한산성(宜罕山城)을 함락하며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천명 원년(1616), 다이샨(代善), 망굴타이(莽古爾泰), 홍타이지(皇太極)와 함께 호쇼이 버일러(和碩貝勒)에 임명되어 사대 버일러 중 이 버일러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천명 4년(1619), 사르후 전투에서 군대를 격파하고, 유정(劉綎)을 전사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조선 장수 강홍립(姜弘立)을 항복시켰다. 사르후 전투 이후, 여허(葉赫)를 멸망시키고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함락하는 데 기여했다. 천명 11년(1626), 칼카바린부(喀爾喀巴林部)를 공격하여 소속 둔채를 모두 점령했다.

2.2. 정묘호란과 조선에서의 행적

천총 원년(1627),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요토 등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도록 지시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모문룡 부대를 몰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아민은 군대를 나누어 철산을 공격하였고 모문룡은 패주하였다. 다시 정주를 함락한 후 가산강을 건넌 아민은 안주평양을 함락시키고 중화로 진격하였다.

인조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안하였으나, 아민과 버일러들은 인조에게 답서를 보내 일곱 가지 죄를 나열하며 화친을 거절하였다. 이후 황주를 공격하자 인조는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아민은 여전히 화친을 거절하고 한양을 직접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버일러들과 총병 이영방은 조선 사신이 당도한 후 화친을 맺고 맹세하기를 건의하며 반대하였다. 이영방은 '우리는 대한(大汗, amba han)의 명을 받들어 진격하는 것이며 이전에도 쌍방이 맹세를 한 후에 철군하라고 말하였는데, 악행을 자초하는 것은 불의한 행위이다'라고 말하며 아민을 설득하려 하였다.

후금 군대가 평산을 공격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원창군 이각을 보내 화친을 요구했다. 두두지르갈랑도 만류하여, 결국 버일러들은 인조와 형제의 맹세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민은 병사를 풀어 약탈하게 한 뒤 3일 후에 귀환하였다.

2.3. 몰락과 죽음

천총 4년(1630), 홍타이지는 몽골을 우회하여 북경을 직접 공격했고, 영평, 난주, 천안, 준화 네 성을 함락했다. 아민은 쇼토와 함께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평에 주둔하며 다른 장수들에게 세 성을 수비하게 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난주가 함락되자, 병력 부족을 이유로 성을 버리고 퇴각했다.

홍타이지는 아민이 네 성을 버린 것, 모반의 뜻을 품은 것, 조선에서 자립을 꾀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크게 분노하여 아민의 죄를 논의했다. 논의 결과 아민은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홍타이지는 유폐하는 것으로 감형했다. 아민의 재산 중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몰수되어 지르갈랑에게 주어졌다. 숭덕 5년(1640), 아민은 유폐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3. 가족 관계

아민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중에는 호이파나라씨(輝發納喇氏), 나라씨(納喇氏), 보르지기트씨(博爾濟吉特氏) 등이 있었다. 아들로는 홍코타이(宏科泰), 아일리(愛爾禮), 굴마훈(固爾瑪渾), 공가(恭阿), 고가이(果蓋), 골라이(果賴)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