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분
1. 개요
대명분(An t-Adhbhar Mòr)은 1290년 스코틀랜드 여왕 마가렛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자가 불분명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왕위 계승 중재를 요청받았고, 104명의 심사관을 통해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는 법정을 열었다. 존 발리올, 로버트 드 브루스 5세 등 13명의 후보가 경쟁했으며, 장자 상속, 혈통의 근접성, 왕국 분할 등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에드워드는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존 발리올을 왕으로 결정했으나, 이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
| 명칭 |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경쟁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 대의명분) |
|---|---|
| 로마자 표기 | Seukoteullandeu wangwi gye Seung gyeongjaeng (Seukoteullandeu wangwi gye Seung bunjaeng, daeui myeongbun) |
| 다른 이름 | 영어: Great Cause (위대한 대의) 스코틀랜드 게일어: An t-Adhbhar Mòr |
| 시기 | 1290년 ~ 1292년 |
| 위치 | 스코틀랜드 왕국 |
| 원인 | 알락산다르 3세 막 알락산다르의 후계자 부족 |
|---|---|
| 주요 경쟁자 | 존 발리올 로버트 드 브루스 |
| 관련 인물 | 에드워드 1세 롱섕크 마르그레트 (노르웨이의 메르그레트) |
| 주요 사건 | 알락산다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1286년) 마르그레트의 후계자 지명 및 사망 (1290년) 왕위 계승 후보자들의 등장 및 경쟁 에드워드 1세의 중재 및 개입 베르윅에서 열린 재판 (The Great Cause) |
|---|---|
| 에드워드 1세의 역할 |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자처, 왕위 계승 분쟁 중재를 명분으로 영향력 행사 |
| 주요 주장 | 존 발리올: 왕족으로서의 혈통 강조 로버트 드 브루스: 군사적 능력과 지지 기반 강조 |
| 최종 결정 | 존 발리올의 왕위 계승 (1292년) |
|---|---|
| 영향 |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발발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간섭 심화 발리올 가문과 브루스 가문의 갈등 심화 스코틀랜드 왕권 약화 및 정치적 불안정 심화 |
| 참고 문헌 | 웹 인용: Queen Margaret, Maid of Norw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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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서적 | ISBN: 0-19-821708-0 ISBN: 0-85224-6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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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논란 -
오시안
오시안은 제임스 맥퍼슨이 번역, 발표했다고 주장한 고대 스코틀랜드 영웅 오시안의 서사시로, 켈트 문학 부흥과 낭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진위성 논란이 있으며 맥퍼슨의 창작 부분이 상당한 것으로 평가받지만 유럽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스코틀랜드 왕위 요구자 -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찰스 2세의 사생아로 몬머스 공작 등의 작위를 받고 뛰어난 외모와 군사적 재능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몬머스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인물이다. -
스코틀랜드 왕위 요구자 -
이디 아민
우간다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이디 아민은 군 복무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폭정과 인권 유린, 아시아인 추방 등으로 악명 높아 "우간다의 도살자"라고도 불리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은 1296년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침공으로 시작되어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승인될 때까지 이어진 군사적 충돌과 정치적 투쟁으로, 앤드루 모레이, 윌리엄 월리스, 로버트 브루스 등의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쟁취했다. -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
스콘석
스콘석은 스코틀랜드 왕의 대관식에 사용되던 돌로, 잉글랜드로 옮겨져 영국 군주 대관식에도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에든버러 성에 보관되어 영국 왕실 대관식 때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2. 배경
알렉산더 3세 국왕이 1286년에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는 그의 유일한 생존 후손인 세 살 된 손녀 마가렛에게 넘어갔다. 1290년, 어린 여왕의 미성년 기간 동안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임명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들은 마가렛과 다섯 살 된 케르나본의 에드워드, 즉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간의 결혼 계약인 버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여러 조항 중, 이 결혼의 결과로 태어난 자녀가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위를 모두 상속하더라도, 후자의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분리되어 자유로워야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 목적은 스코틀랜드를 독립적인 존재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마가렛은 1290년 9월 26일 스코틀랜드로 가는 길에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하여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수호자들은 그녀의 약혼자의 아버지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소환하여, 104명의 심사관들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다양한 후보들 중에서 선택하는 법정을 열도록 요청했는데, 이 과정은 대사건 (An t-Adhbhar Mòr스코틀랜드 게일어)으로 알려져 있다. 강력한 후보 중 한 명인 존 발리올 (갤러웨이 영주)는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 1세의 대표였던 더럼의 주교 앤토니 베크와 동맹을 맺고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상속자'라고 칭하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후보인 앤넌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5세는 그의 친구인 마 백작 돔날 1세와 애솔 백작 데이비드 스트라보기 1세 또한 병력을 소집하고 있다는 소문 속에서, 마가렛의 추정 취임식 장소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스코틀랜드는 내전으로 향하는 듯했다.
3. 에드워드 1세의 개입
알렉산더 3세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손녀 마가렛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마가렛마저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랫동안 갈망해 온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잉글랜드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잉글랜드 왕들은 과거부터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왔으며, 특히 1174년 팔레즈 조약부터 1189년 캔터베리 포기(Quitclaim of Canterbury)까지 15년 동안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봉신 국가였던 적도 있었다. 알렉산더 3세는 에드워드 1세에게 신종을 바칠 때 "저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당신에게서 받은 토지에 대해 당신의 사람이 됩니다. 저는 여기에 신종을 바칩니다. '제 왕국을 제외하고'"라고 말하며,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종주권 주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1세는 중재자 역할을 하기 전에 스코틀랜드에 대한 봉건적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자신이 합법적인 종주국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왕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럴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들과 왕위 দাবি자들은 에드워드 1세의 도움이 필요했고, 에드워드 1세를 종주국으로 인정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주요 성들을 에드워드 1세가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데 동의했다.
4. 왕위 경쟁자들
마거릿이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이을 뚜렷한 후계자가 없었다.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13명의 경쟁자들이 나타났다. 이들 중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이름 | 주장 근거 | 비고 |
|---|---|---|
| 갈로웨이 영주 존 발리올 |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장녀 마가렛의 딸 데보르길라의 아들. 적통, 인지적 계통의 장자 상속 주장. | |
| 애넌데일의 로버트 드 브루스 5세 |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차녀 이사벨라의 아들. 타니스트리와 이전 군주와의 근친 정도 주장. | 알렉산더 3세의 미성년 시절 섭정 역임. |
| 존 헤이스팅스 1세 |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셋째 딸 아다의 아들 헨리 드 헤이스팅스의 아들. | |
| 홀란드의 플로리스 5세 | 헨리 백작의 딸 아다의 아들 홀란드의 빌럼 1세의 증손자.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가 스코틀랜드 왕위 상속 권리를 포기했다고 주장. | |
| 존 "검은" 코민, 바데노크 영주 | 도날드 3세의 딸 베토크의 딸 헥스틸다의 증손자 윌리엄 코민의 손자. | |
| 니콜라스 2세 드 소울 | 알렉산더 2세의 사생딸 마조리의 딸 에르멩가르데의 아들. | |
| 패트릭 갈리슬리 | 윌리엄 사자왕의 사생아 헨리 갈리슬리의 아들. | |
| 로스 남작 윌리엄 드 로스 1세 | 윌리엄 사자왕의 사생딸 이사벨라의 아들 햄레이크의 윌리엄 드 로스의 손자 로버트 드 로스의 아들. | |
| 윌리엄 드 베시, 베시 남작 | 윌리엄 사자왕의 사생딸 마가렛의 아들 윌리엄 드 베시의 아들. | |
| 던바 백작 패트릭 7세 | 윌리엄 사자왕의 사생딸 아다의 아들 던바 백작 패트릭 5세의 증손자. | |
| 로저 드 만데빌 | 윌리엄 사자왕의 사생딸로 추정되는 오푸리카의 증손녀. | |
| 로버트 드 핑크니 | 헌팅던 백작의 사생딸로 추정되는 마조리의 증손자. | |
| 노르웨이의 에릭 2세 | 마가렛 여왕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더 3세의 사위. |
*사생아를 통해 왕위를 주장한 사람들은 이탤릭체로 표시했다.
5. 왕위 계승 논쟁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두고 여러 인물들이 경쟁을 벌였다. 주요 인물은 존 헤이스팅스, 존 발리올, 로버트 드 브루스, 플로리스 5세였다.
존 헤이스팅스는 스코틀랜드가 진정한 왕국이 아니므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코틀랜드 왕들이 대관식이나 성유식을 받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주장을 즉시 거부했다.
존 발리올은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갤러웨이의 데보르길라가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장손녀였기 때문에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고, 스코틀랜드 왕국은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실체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드 브루스는 혈통의 근접성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알렉산더 3세가 자신을 상속자로 지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남성 선호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반박될 수 있었다. 결국 에드워드 1세는 장자 상속 원칙을 우선시하여 발리올의 손을 들어주었다.
플로리스 5세는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는 문서를 찾기 위해 법정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주장이 기각되었다.
5.1. 장자 상속 논쟁
발리올과 브루스 간의 주요 쟁점은 장자 상속 원칙의 적용 여부였다. 존 발리올은 장자 상속의 전통에 따라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어머니 갤러웨이의 데보르길라는 헌팅던의 마가렛의 장녀였고, 마가렛은 헌팅던 백작 데이비드의 장녀였다. 이러한 전통은 지난 2세기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에서 관습 상속법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아난데일의 영주 로버트 드 브루스는 혈통의 근접성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대부분의 계승 사례에서 적용되었고, 일종의 '자연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알렉산더 3세가 자식이 없을 때 브루스를 상속자로 지명했다는 제안을 법정에 제출했다.
그러나 브루스가 상속자로 지명된 이유는 데보르길라에게 당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브루스 또한 남성 선호 장자 상속에 의해 상속 자격을 얻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결국 1292년 11월, 에드워드 1세는 혈통의 근접성보다는 관습법과 장자 상속을 사용하여 정당한 상속자를 결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5.2. 왕국 분할 논쟁
존 헤이스팅스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의 공동 상속인들의 직계 후손들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이나 성유식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스코틀랜드가 진정한 왕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귀족들로 구성된 법정은 이러한 주장을 즉시 거부했다.
로버트 드 브루스는 왕국이 분할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마지막 날에는 입장을 바꾸어 관습법이 적용된다면 왕국이 분할될 수 있다는 헤이스팅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즉시 거부되었다.
6. 존 발리올의 선출
에드워드 1세는 1292년 11월 17일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판결을 존 발리올에게 유리하게 내렸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이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이 결정은 다수의 스코틀랜드 귀족과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존 커민 2세의 지지가 중요했다. 그는 발리올의 여동생 엘레노어와 결혼한 사이였으며, 이후 커민 가문은 발리올의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했다.
6.1. 선출 배경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잉글랜드 왕위에 대해 봉건적 종속 관계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잉글랜드 왕들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으며, 1174년 팔레즈 조약부터 1189년 캔터베리 포기(Quitclaim of Canterbury)까지 15년 동안 스코틀랜드가 봉신 국가였던 적도 있었다.
에드워드 1세는 1291년 5월, 중재자 역할을 하기 전에 스코틀랜드에 대한 봉건적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스코틀랜드는 왕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답변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여러 조건을 내걸고 압박하여 경쟁자들과 수호자 대다수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주요 왕실 성들을 임시로 관리하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이러한 양보를 바탕으로 에드워드 1세는 청구인들 중 누가 왕위를 상속받을지 결정하는 법정을 구성했다. 이 법정은 104명의 감정인과 에드워드 1세가 의장으로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24명의 감정인을 선택했고, 유력한 청구인인 브루스와 발리올은 각각 40명을 임명했다.
1292년 11월 17일,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이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이 결정은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과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존 커민 2세는 또 다른 경쟁자이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의 수장으로, 발리올의 여동생 엘레노어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이후 커민 가문은 발리올의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했다.
6.2. 선출에 대한 반발
에드워드 1세는 1292년 11월 17일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판결을 존 발리올에게 유리하게 내렸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이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이 결정은 다수의 스코틀랜드 귀족과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브루스가 감사관으로 임명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가 지지했다. 특히 존 커민 2세의 지지가 주목할 만했는데, 그는 또 다른 경쟁자이자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의 수장이었으며 발리올의 여동생 엘레노어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커민 가문은 발리올의 왕위 계승 주장을 굳건히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