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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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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니스트리(Tanistry)는 고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왕위 계승 제도로, 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존재했다. 이 제도는 왕 또는 족장이 사망하거나 자격을 상실할 경우, 남성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차기 후계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타니스트리는 씨족의 전통을 유지하고 유대감을 돈독히 하기 위해 20세기에 부활하기도 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총리(Taoiseach)와 부총리(Tánaiste) 직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타니스트리 제도는 왕위 계승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왕위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왕의 생명을 위협하고 분쟁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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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스트리
지도 정보
개요
유형상속 제도
지역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섬
정의
설명족장의 계승자나 후계자를 정하는 켈트 상속 제도
어원고대 아일랜드어 'tánaise' (후계자)
스코틀랜드 게일어 'tànaiste'
맨섬어 'tanishtey'
특징혈통뿐 아니라 능력도 고려
선거 또는 지명 과정을 거침
역사적 배경
기원켈트족 사회에서 유래
초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회의 중요한 부분
발전중세 시대에 널리 사용
영향부족장 및 왕권 계승에 영향
가족 간의 권력 다툼 및 갈등 유발
상속 과정
후보자일반적으로 족장의 친척 중 남성
가문 내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를 로이드암나 (roydammna)라고 지칭
선택 과정선거, 지명 또는 조합을 통해 결정
능력, 리더십, 지혜 등의 자질 평가
장단점
장점유능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도움
능력과 자질을 중시
단점정치적 불안정 및 내부 분쟁 야기 가능성
계승 과정에서 갈등 및 권력 다툼 발생
영향 및 현대적 의미
사회적 영향과거 사회 구조 및 권력 관계에 영향
현대적 의미현대 사회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음
관련 용어타나이스트 (Tánaiste): 아일랜드어 및 스코틀랜드 게일어에서 후계자를 의미
탄니스트리 (Tanistry): 제도 자체를 지칭
지역별 변형
아일랜드주로 부족장과 왕의 계승에 사용
다양한 지역에서 변형된 형태로 발전
스코틀랜드클랜 사회에서 사용
계승자 선출에 중요한 역할
맨섬맨섬의 역사적 상속 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 (전문가 필요)

2. 기원과 역사

타니스트리(Tanistry)는 아일랜드의 영웅 코르막 막 아르트 시대(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일랜드에 문자가 생겨난 초기부터 이미 타니스트리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그 이전부터 유사한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로이다므나(Roydammna)라고 불리는 차기 왕위·족장 후계자 후보들 중에서, 왕국·부족의 남자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차기 후계자를 결정했다.

넓은 의미에서 "타니스트리"라는 용어는 "왕조 내 가장 뛰어난 남성 구성원이, 흔히 살인과 전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기능적 원리를 설명한다. 이는 특히 투르크-몽골계 및 기타 중앙아시아 초원 유목 민족의 상속 및 계승 원리와 관련이 깊다. 왕족 남성 구성원들은 모두 권력에 대한 동등한 주장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통치자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나머지 국가 형성체를 재복속시키는 방식으로 권력을 획득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통치자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관계로 결정되며, 이 충성은 통치자의 사망과 함께 해소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2. 1. 아일랜드

역사적으로 타니스트(tanist)는 로이담나(roydammna) 또는 리그담나(righdamhna) (직역하면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자들’)의 우두머리들 중에서, 또는 모든 남성 셉트(sept) 구성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전체 집회에서 선출이 이루어졌다. 자격은 몇 대 이내의 왕족 출신 여부에 근거했다. 일반적으로 왕의 남계 혈통이 기준이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왕의 여계 혈통도 인정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피크트족의 계승 규칙과 혼합된 결과일 것이다. 케네스 1세의 딸의 아들인 Eochaid ab Rhun영어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였다.

씨족의 구성과 통치는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혈통에 기반을 두었다. 이 직책은 아일랜드의 기록된 역사 초창기부터 확인되며, 아마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코르막 막 아르트에 관한 이야기에는 그의 장남이 타니스트로 언급되어 있다. 데이시의 일원에 의해 그가 살해당한 후, 또 다른 로이담나인 Eochaid Gonnat영어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일랜드에서는 타니스트 제도가 지배적인 왕조들뿐만 아니라 하급 영주와 족장들 사이에서도 16세기 중반/1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가 영국의 관습법에 의해 대체되었다. 1943년 아일랜드가 최초의 새로운 아일랜드 수석 헤럴드를 임명했을 때, 타니스트 제도는 재도입되지 않았다. 국가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족장으로부터의 장자 상속(primogeniture)에 근거하여 아일랜드 족장들에게 예우를 인정했다.

2. 2.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은 켈트족 전통에 따라 1005년 말콤 2세가 즉위할 때까지 알핀 가문(House of Alpin)의 남성 후손들 중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말콤 2세는 왕위를 둘러싼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세습 군주제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초기 픽트족 왕국에서는 여계 혈통을 통한 왕위 계승을 허용했고, 중세 스코틀랜드에서는 픽트족과 게일족의 계승 규칙이 혼합되었다. 말콤 2세에게는 딸만 있었기 때문에, 왕위는 그의 장녀를 통해 손자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의 후손에게 계승되었다. 반면 아일랜드의 군주제는 어떤 단계에서도 여계 혈통을 통한 계승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왕의 여계 혈통도 타니스트의 자격으로 인정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픽트족의 계승 규칙과 혼합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예시로 케네스 1세의 딸의 아들로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한 에오카이드가 있다.

2. 3. 타니스트리 제도의 소멸과 부활

역사적으로 타니스트(tanist)는 로이담나(roydammna) 또는 리그담나(righdamhna) (직역하면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자들’)의 우두머리들 중에서, 또는 모든 남성 셉트(sept) 구성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전체 집회에서 선출이 이루어졌다. 자격은 몇 대 이내의 왕족 출신 여부에 근거했다. 일반적으로 왕의 남계 혈통이 기준이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왕의 여계 혈통도 인정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피크트족의 계승 규칙과 혼합된 결과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케네스 1세(Kenneth MacAlpin)의 딸의 아들로서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한 에오카이드(Eochaid ab Rhun)가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타니스트 제도가 지배적인 왕조들뿐만 아니라 하급 영주와 족장들 사이에서도 16세기 중반/1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가 영국의 관습법에 의해 대체되었다. 1943년 아일랜드가 최초의 새로운 아일랜드 수석 헤럴드(Chief Herald of Ireland)를 임명했을 때, 타니스트 제도는 재도입되지 않았다. 국가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족장으로부터의 장자 상속(primogeniture)에 근거하여 아일랜드 족장들에게 예우를 인정했다.

켈트족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은 1005년 말콤 2세(Malcolm II of Scotland)가 즉위할 때까지 알핀 가문(House of Alpin)의 남성 후손들의 선거를 통해 제한되었다. 이 군주는 스코틀랜드에 세습 군주제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 간의 분쟁을 없애기 위해 이렇게 했다. 초기 피크트족 왕국(Pictish kingdoms)에서는 여계 혈통을 통한 왕위 계승을 허용했고, 중세 스코틀랜드에서는 피크트족과 게일족의 계승 규칙이 혼합되었다. 말콤에게는 딸만 있었기 때문에, 왕위는 그의 장녀를 통해 손자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의 후손에게 계승되었다. 아일랜드의 군주제는 어떤 단계에서도 여계 혈통을 통한 계승을 허용하지 않았다.

17세기 초, 제임스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타니스트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아일랜드에서도 잉글랜드의 지배 강화, 특히 청교도 혁명과 그에 따른 혁명 전쟁 및 그 이후의 식민화로 인해 기존의 법과 관습은 사라져 갔다.

타니스트리 제도가 변형된 형태로 부활한 것은 아일랜드가 자치를 되찾은 이후의 일이다. 아일랜드 자유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는 총리 직책을 타오이세흐(Taoiseach), 부총리를 타나이스터(Tánaiste)라고 한다.

3. 후보와 선출

타니스트리에서 후보와 선출은 중요한 부분이다. 재위 중인 왕이 성년이 되면 타니스트(Tánaiste, 왕위 계승자) 선정이 이루어졌다. 재위 중에 성년에 이르렀다면 즉위 직후 타니스트 선정 회의가 열렸다. 타니스트는 자격이 있는 자(루이덤나, Ríodamna) 중에서 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결점·오점이 없는 자가 신하들의 투표와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다.[2] 또한 그 회의에서는 타니스트 다음인, 소위 2위 왕위 계승권자도 선정되었다. 대개 왕의 첫째 아들이 타니스트로 선출되었지만, 이는 장자상속제와 유사할 뿐, 원칙과 합의·협의에 기반하여 신하들이 차기 왕을 결정하는 선거 군주제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루이덤나(Ríodamna) 자격은 재위 중인 왕으로부터 8촌수 이내, 공통된 증조부 또는 고조부를 가진 자로 여겨졌으며, 남계 계승이 일반적이었다.[3] 이 전통은 아일랜드 오닐(Ó Néill) 가문과 함께 스코틀랜드, 맨 섬 등으로 퍼져 많은 씨족·부족의 문장에 아일랜드 왕가의 흔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레드 핸드인데, 손가락 개수는 왕가로부터 몇 세대 내려왔는지를 나타낸다. 이 문장은 왕과 너무 먼 촌수의 자를 루이덤나에서 제외하고 신하로 삼는 기능도 했다. 루이덤나가 너무 많으면 타니스트 선정 시 합의를 얻기 어렵고, 음모나 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2세기, 상왕 타라흐 오코널[4]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전이 발생했다.

3. 1. 후보 자격

국왕이나 족장은 종신직이었으며,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되고 모든 능력을 갖추었으며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현저한 결함이 없어야 했다. 왕위 계승자인 타니스트(tanist)는 왕이 사망하거나 자격을 상실하면 즉시 왕이 되었다. 타니스트는 장자 상속 제도와는 다르게, 족장의 지위가 최근 통치자의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가치 있는 방계 친족에게 계승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선출되었다.

후보 자격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규칙 중 하나는 후보자가 이전 족장의 "''derbfhine''"(공통 증조부로부터 남성 계보를 통해 내려온 모든 자손) 구성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종 족장의 ''gelfhine'', 즉 하나의 공통된 (부계) 조부로부터 내려온 ''fine''으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는 왕위가 왕조 내에 유지되도록 하였고, 더 넓은 씨족의 많은 사람들은 귀족이나 농민의 신분으로 강등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타니스트 제도를 방계 계승 방식이자 임명에 의한 계승으로 만들었으며, 선거 군주제의 일종이었다. 타니스트 제도는 세습 군주제와는 다르게 계승의 결과가 예측 가능하지 않았다.

자격 있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 각 세대의 ''roydammna'' 증가로 인해 내분적인 왕조 내전이 발생할 수 있었다. 타이르델바흐 우아 콘호바이르(1088~1156) 국왕 겸 고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의 왕조인 우이 브리운은 적어도 5세기 중반부터 코노트의 왕으로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타이르델바흐의 많은 아들들 사이의 경쟁은 부식적인 전쟁을 일으켰고, 노르만인의 침입과 결합되어 오 콘호바르 통치를 분열시켰다.

''Derbfhine'' 또는 ''Roydammna'' 증식의 또 다른 예는 ''코노트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1316년 8월 아테네리 제2차 전투에서 우이 메인의 타드크 오 켈라이그 국왕 외에도 "그와 함께 ... 우이 메인의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28명의 사람들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2. 선출 방식

국왕이나 족장은 종신직이었으며,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되고 모든 능력을 갖추었으며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현저한 결함이 없어야 했다. 왕위 계승자인 타니스트(tanist)는 왕이 사망하거나 자격을 상실하면 즉시 왕이 되었다. 타니스트는 일반적으로 전임 국왕의 아들이었지만, 장자 상속 제도와는 달랐다. 족장의 지위는 최근 통치자의 가장 장로이자 가장 가치 있는 방계 친족에게 계승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roydammna''로서의 자격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규칙은 후보자가 이전 족장의 "''derbfhine''"(공통 증조부로부터 남성 계보를 통해 내려온 모든 자손을 포함하는 친족) 구성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종 족장의 ''gelfhine'', 즉 하나의 공통된 (부계) 조부로부터 내려온 ''fine''으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는 왕위가 왕조 내에 유지되도록 하는 선거 군주제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계승의 결과가 계승자 및 다음 계승자의 신원까지 예측 가능하다는 세습 군주제의 기본 요건과는 차이가 있었다.

자격 있는 사람들의 수가 많은 단점은 각 세대의 ''roydammna'' 증가가 내분적인 왕조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타이르델바흐 우아 콘호바이르(1088~1156) 국왕 겸 고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 그의 왕조인 우이 브리운은 적어도 5세기 중반부터 코노트의 왕으로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미드와 더블린 왕국의 합병을 통한 그들의 증가하는 통합과 이웃 국가 및 영주들의 가신화는 타이르델바흐가 그의 왕조에서 최초로 고왕이 되도록 이끌었다.

타이르델바흐의 많은 아들들 사이의 경쟁은 적어도 네 개의 경쟁하는 주요 계보와 더불어 주요 기회를 위해 노력하는 동맹 영주와 왕국들 사이에서 부식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1169년부터 시작된 노르만인의 침입과 결합되어 이것은 오 콘호바르 통치를 분열시켰다. 13세기 중반까지 그들은 이전의 상속 재산의 일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Derbfhine'' 또는 ''Roydammna'' 증식의 또 다른 예는 ''코노트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1316년 8월 아테네리 제2차 전투에서 우이 메인의 타드크 오 켈라이그 국왕 외에도 "그와 함께 ... 우이 메인의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28명의 사람들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3. 예외적인 제도

국왕이나 족장은 종신직이었으며, 관습에 따라 성인이 되고 모든 능력을 갖추었으며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현저한 결함이 없어야 했다. 왕위 계승자인 타니스트(tanist)는 왕이 사망하거나 자격을 상실하면 즉시 왕이 되었다. 타니스트는 장자 상속 제도와는 다르게, 최근 통치자의 가장 장로이자 가장 가치 있는 방계 친족에게 계승되었다.

''roydammna''(왕위 계승 자격)를 위한 가장 일반적인 규칙은 후보자가 이전 족장의 "derbfhine"(공통 증조부로부터 남성 계보를 통해 내려온 모든 자손) 구성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종 족장의 ''gelfhine''(하나의 공통된 (부계) 조부로부터 내려온 ''fine'')으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는 왕위가 왕조 내에 유지되도록 하는 매우 배타적인 방식이었다. 타니스트 제도는 선거 군주제였기 때문에 세습 군주제와는 달리 족보에 의해 계승자와 다음 계승자의 신원이 예측 가능하다는 기본 요건을 회피한다.

자격 있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 각 세대의 ''roydammna'' 증가로 인해 내분적인 왕조 내전이 발생할 수 있었다. 타이르델바흐 우아 콘호바이르(1088~1156) 국왕 겸 고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 그의 왕조인 우이 브리운은 적어도 5세기 중반부터 코노트의 왕으로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노르만인의 침입과 왕조 내 경쟁으로 인해 오 콘호바르 통치는 분열되었고, 13세기 중반까지 그들은 이전 상속 재산의 일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Derbfhine'' 또는 ''Roydammna'' 증식의 또 다른 예는 ''코노트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1316년 8월 아테네리 제2차 전투에서 우이 메인의 타드크 오 켈라이그 국왕 외에도 "그와 함께 ... 우이 메인의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28명의 사람들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타니스트리 제도의 효과와 문제점

타니스트리 제도는 중세 시대에 씨족이나 통치 가문의 유력한 분파들 사이에서 권력이 순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가문 간의 균형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가족 내부와 씨족 간의 분쟁을 빈번하게 일으켰다. 일반적인 패턴은 족장(왕, 영주)이 사망하면, 이전에 선출되었고 현직 족장과 다른 가문 출신인 타니스트가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가문에서 새로운 타니스트를 선출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만약 족장이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를 다른 가문 대표자보다 우선하여 선택하려 하면, 선거인들은 한 가문에 예속될 것을 우려하여 반발했다.

1296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서 브루스 가문은 장자 상속이 아닌 전통적인 타니스트리 제도를 내세워 왕위를 주장했다. 순환과 균형의 개념, 그리고 후보의 나이와 경험이 그를 경쟁력 있는 후보로 만들었다. 피크트족의 관점에서 밸리올 가문과 브루스 가문 모두 여성 계보를 통해 왕족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후보 자격을 제출할 수 있었다. 결국 영국 왕이 주도한 재판에서는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밸리올 가문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이후 로버트 더 브루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씨족 전통"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알핀 가문의 스코틀랜드 국왕들과 그 후계자들은 적어도 1034년까지 타니스트리 규칙을 따랐다. 1090년대의 특정 왕위 계승에서도 타니스트리가 사용되었고, 1290년대 후반까지 왕위 계승 소송에서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웨일스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웨일스 법에 따라 왕의 아들이나 형제 중 누구든지 왕국의 ''에들링''(상속인)으로 선택될 수 있었다.

4. 1. 긍정적 효과

타니스트리는 왕위 계승에 있어 신하들이 의견을 제시할 자리를 보장했다. 합의가 만장일치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일단 선택되면 다음 왕으로 인정받았다.[1] 타니스트가 된 자는 자동적으로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갖게 되어, 공석 후 계승자 쟁탈이라는 불안정한 상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1] 더욱이 회의를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민심"이 반영되어, 유력자들은 왕위 계승에 동의했다.[1]

4. 2. 부정적 효과 (문제점)

타니스트 제도는 왕위 계승자를 미리 정해두어 왕위가 비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고, 유력자들의 동의를 얻는 "민심" 반영의 효과도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3] 그러나 왕이 살아있는 동안 후계자가 결정되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춘 사람(roydammna)이 많아지면서 왕족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타이르델바흐 우아 콘호바이르 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벌어진 왕위 쟁탈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왕조인 우이 브리운은 코노트를 오랫동안 통치했지만, 왕자들 간의 경쟁과 노르만인의 침입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졌다.
  • ''코노트 연대기''에 따르면, 1316년 아테네리 제2차 전투에서 우이 메인의 왕과 함께 왕위 계승 자격을 갖춘 28명이 전사했다. 이는 왕위 계승 후보자가 많아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 타니스트 제도는 왕위가 유력한 가문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가문 간의 균형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가족 내부와 씨족 간의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서 브루스 가문은 타니스트리 제도를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했지만,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밸리올 가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로버트 더 브루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 타니스트리는 야심가들에게 왕이 될 기회를 제공했고,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제도였지만, 결국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후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1세) 때 폐지되고 잉글랜드 토지법으로 대체되었다.
  • 알핀 가문의 스코틀랜드 국왕들은 타니스트리 규칙을 따랐으며, 웨일스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운영되었다.
  • 차기 왕이 현직 왕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왕이 빨리 죽기를 바랐고, 실제로 왕의 목숨을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왕실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여 어린아이가 왕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왕은 반대파를 자극하거나 신하들에게 미움을 사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왕권은 유력자들의 동의에 의해 제한되기도 했다.[3]

5. 현대의 타니스트리

게일어의 'Táinste'는 "제2의 왕"을 의미하며, 선정에 의해 후계자가 된 자를 타니스트(Tanist)라고 부른다. 후계자 선정은 왕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는 왕의 암살 등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타니스트리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섬 등에서 세속 권력 계승의 관습이 되었으며, 현재는 아일랜드 총리와 부총리에게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제임스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타니스트리 제도는 폐지되었다. 아일랜드에서도 잉글랜드의 지배 강화, 특히 청교도 혁명과 그에 따른 혁명 전쟁 및 그 이후의 식민화로 인해 기존의 법과 관습은 사라져 갔다.

타니스트리 제도가 변형된 형태로 부활한 것은 아일랜드가 자치를 되찾은 이후의 일이다. 아일랜드 자유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는 총리 직책을 타오이세흐(Taoiseach), 부총리를 타나이스터(Tánaiste)라고 한다.

6. 다른 지역

넓은 의미에서 "타니스트리(tanistry)"라는 용어는 "왕조 내 가장 뛰어난 남성 구성원이, 흔히 살인과 전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한다.

이 용어는 특히 투르크-몽골계 및 기타 중앙아시아 초원 유목 민족의 상속 및 계승 원리의 결과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왕족 남성 구성원들은 모두 권력에 대한 동등한 주장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통치자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나머지 국가를 복속시키는 개인이다. 이 구조는 통치자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으로 결정될 수 있으며, 이러한 충성은 통치자의 사망과 함께 해소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게일어의 Táinste는 “제2의 왕”을 의미하며, 선정에 의해 후계자가 된 자를 타니스트(Tanist)라고 부른다. 후계자 선정은 왕이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것이 왕의 암살 등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타니스트리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섬 등에서 세속 권력 계승의 관습이 되었으며, 현재는 아일랜드의 총리・부총리에게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참조

[1] 문서 게일어 표기: Táinste, 스코틀랜드 게일어 표기: Tànaisteachd, 맨섬어 표기: Tanishtagh, 영어 표기: Tanistry
[2] 문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원칙으로 (1) 왕과 같은 혈통을 이어야 하며, (2) 최고령이어야 하며, (3) 가장 현명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3] 문서 스코틀랜드에서는 모계 계승이 주류였다.
[4] 문서 원어로는 Tairrdelbach mac Ruaidri Ua Conchobair, 영어로는 Turlough O' Connor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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